‘큰 정부 작은 시장’의 지속이다 이영조 경희대 교수가 22일 자유경제원 주최 <사적 영역, 정치의 위협에서 어떻게 지킬까> 정책세미나에서 주제발표를 통해 세계적으로 ‘신자유주의에 대한 “국가의 역습”’ 현상이 일어나고 있으며, 한국의 경우도 1997년 외환위기 이후 국가의 시장 개입과 재정 지출이 지속적으로 증가하는 ‘자유주의 개혁의 역설’이 나타나고 있다고 주장하고 있다. 예를 들어 정부 부문에서는 정부재정 규모가 증가하고 규제 건수와 규제의 강도가 증가하고 있으며, 입법 부문에서도 의원 입법이 증가하고 이러한 의원 입법은 기존의 규제를 강화하거나 신설하는 비율이 높음을 강조하고 있다. 나아가 국회는 ‘대기업 길들이기’의 뚜렷한 징후가 있음도 밝히고 있다. 종합하면 대한민국에서 국가의 정치적 결정 범위가 무분별하게 확대되고 있어 개인의 자율과 자유가 침해되는 현실이 나타나며, 이에 대하여 ‘작은 정부, 큰 시장’이 정답이고 ‘균형 예산, 국가부채 총량 규제, 법안 제출 시 재원 조달 방법의 명시’ 등이 대책임을 주장하고 있다. 이러한 대책의 실현을 위해서는 기존의 정치인과 관료에 기대하기보다는 '새로운 인식 공동체'(epistemic community)가 '새로운 정당'(party)을 만들어 '새로운 정치인'(politician)을 양성할 필요성을 강조하고 있다. 필자는 이영조교수의 정부와 정치의 역할 확대가 사적 영역을 침해하고 있다는 현실 진단과 대책에 모두 동의한다. 새로운 정치 세력의 등장 필요성 지적도 시기적절하다고 본다. 특히 이교수가 “김영삼 정부 하에서 잠시 작은 정부, 큰 시장을 지향하는 개혁들이 시도되었지만”이라고 강조했듯이 한국에서 ‘큰 시장’, 즉 신자유주의 정책이 제대로 실시된 적은 없다고 본다. 구체적으로 보면 한국 현대사에서 신자유주의 개혁으로 정부 역할을 최소화하고, 시장 기능을 최대한 확장하고, 시장의 자율을 보장하는 정책을 실시한 적이 없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큰 시장 작은 정부’ 정책이라고 할 수 있는 자유무역, 시장개방, 규제완화, 민영화, 복지축소 정책이 한국경제에서 제대로 실현된 적은 없었다. 다시 말해 대한민국 건국 이후 현재까지 권위주의 정부이든 민주정부이든 ‘큰 정부 작은 시장’ 내지는 관치경제의 틀을 완전히 벗어난 시장의 자율을 허용한 적은 한 번도 없다. 권위주의 정부가 추진한 산업화는 관치경제의 틀에서 추진되었고 정부는 크고 강력했다. 1987년 민주화 이후에도 경제 관료는 굳건히 살아남아 시장을 규제했다. 단지 1997년 외환금융위기 당시 정부(경제 관료)는 책임론에 휩싸였지만 곧 재벌 과잉 투자 책임론으로 대응하여 위기를 전가하여 극복하였다. 그리고 나서 기업의 재산권을 강하게 침해하는 ‘빅딜’을 추진하는 등 도리어 외환위기 극복의 주체로 자리 잡았다. | | | ▲ 자유경제원이 21일 정치실패 연속토론회 <사적 영역, 정치의 위협에서 어떻게 지킬까>라는 주제로 정책세미나를 갖고 있다. 김인영 한림대교수(오른쪽에서 두번째)가 패널로 참석해 발표하고 있다. |
2008년 이명박 정부가 출범하면서 보여준 출자총액 제한완화, 금산분리 완화 등 ‘비즈니스 프랜들리’(business friendly) 정책과 공기업 민영화 정책 등으로 일부 진보좌파 학자들로부터 ‘신자유주의의 전면화’라고 비난 받았지만, 민영화 논의는 ‘광우병 촛불시위’와 함께 사라져 버리고 제대로 준비되지도 실시되지 않았다. 2008년 후반 발생한 ‘서브프라임 모기지’ 금융경제 위기를 대처하는 과정에서 이명박 정부는 전면에 나서 시장을 통제하기 시작하였고 잠시 빛을 보았던 규제 완화는 다시 자취를 감추었다. 이어서 이명박 정부는 ‘친서민 정책’으로 선회하면서 물가 통제가 다시 등장하였고 ‘비즈니스 프랜들리’ 용어 역시 사라져 버렸다. 결론적으로 한국에서 ‘큰 시장 작은 정부’는 실현된 적이 없다. 시장을 포함하는 사적 영역이 정부와 정치권의 영향을 벗어나 충분한 자유와 자율을 만끽한 적은 없었다는 의미도 된다. ‘큰 정부 작은 시장’의 결과는 정치실패이고 선진국 진입 정체의 위기이다 ‘큰 정부 작은 시장’이 지속된 대한민국은 어디에 와 있는가? 2007년 1인당 국민총소득(GNI) 2만 달러를 돌파한 뒤 7년째 아직도 2만 달러에서 맴돌고 있다. 앞으로의 전망도 그리 밝지만은 않아 보인다. 글로벌 경기의 위축으로 기업들은 투자를 줄였고, 저축률은 제자리 걸음이다. 경기는 활력이 떨어지고 투자는 줄고 있어 전문가들은 대한민국이 과연 중진국에서 선진국으로 올라 갈 수 있을지 의문시 하고 있다. 문제는 1987년 민주화 이후 과거 1960년대와 70년대 고도 성장기의 절반에도 미치지 못하는 저성장에도 경고음이 울리지 않고, 저성장 경제의 지속을 문제시 하지 않는 사회 전반의 분위기, 더 나아가 복지확대와 복지재정의 확충, 사회적 불평등 해소에 정치권과 정부가 더욱 적극적으로 나서야 한다는 일부 지식인의 의견이 횡횡하고 언론은 이에 동조하는 사회적 담론 분위기이다. 이에 편승하여 정치권은 표(票)를 얻기 위한 복지 팽창과 ‘대기업 때리기’와 대기업 규제에 몰두하고 있다. 정치권을 보면 복지에서만은 여야의 정책이 다르지 않다. 단지 복지 확대의 시기와 복지재원 마련을 위해 어떻게 증세할 것이냐 정도가 차이가 난다. 더 큰 문제는 성장을 위한 정부의 구조개혁이 시도되기는 하지만 경제 정책이 시장경제 원칙으로 초지일관 하지 않고 선거 등 정치적 요인에 따라 우왕좌왕 하고, 국회는 적절한 시기에 필요한 입법을 해주지 않다가 도리어 규제관련 입법만 양산하고 있다. 결국 ‘정치실패’가 ‘정부실패’를 가져오고, 결국 ‘국가실패’로 귀착 되는 구조가 견고하게 자리 잡은 모습을 보이고 있다. 민주화 시대 민주주의 정치의 실패를 책임질 주체가 없다 국가실패와 관련하여 대런 애쓰모글루(Daron Acemoglu)와 제임스 로빈슨(James A. Robinson)은 『국가는 왜 실패하는가(Why Nations Fail)』(2012)에서 번영으로 이끄는 국가의 특징을 ‘포용적 정치·경제 제도’의 존재에서 찾았다. 사유 재산권을 보장하고, 공정한 경쟁의 장을 마련하며, 신기술과 기능에 대한 투자를 장려하는 ‘포용적 경제제도’(inclusive economic institutions)가 존재하는 경우 번영했음을 역사적 사례들을 들어 설명하고 있다. 반면 실패한 국가는 소수가 다수로부터 자원을 착취하기 위해 고안되고, 사유 재산권을 보장해 주지 못하거나 경제활동에 대한 인센티브를 제공하지 못하는 ‘착취적 경제제도’(extractive economic institutions)를 가졌음을 지적하였다. 대한민국은 국가(정치와 정부) 부문의 확대로 개인의 자율은 위축되고 시장의 자유는 축소되고 있다. 세계화, 정보화, 민주화 시대에 무색하게 국가는 다시 ‘백’(state back)하고 있다. 그런데 문제는 민주화 시대에 민주주의 정치가 실패할 경우 책임을 누가 지느냐이다. 민주주의 정치제도란 주권이 국민에게 있는 제도이다. 따라서 민주주의 정치제도가 가진 모순은 유권자들의 동의에 기반을 두고 만들어진 민주정부가 실패할 경우 결국 국민이 대표자 선출에 실패한 것이기 때문에 실패의 책임을 물을 방법이 없다는 점이다. 그래서 에이먼 버틀러(Eamonn Butler)는 (민주)정부 실패 옆에 ‘민주주의 실패’(democratic failure)를 놓아야 한다고 했던 것이다. 민주적으로 탄생한 정권이 인기에 치중하여 장기적인 안목을 포기하는 경우, 즉 복지 포퓰리즘이나 재정 확대에 의한 복지비용 충당의 경우 ‘자멸의 길’이지만 이를 막을 수 있는 제도적 방법은 없다. 선거를 통해 새로운 정권을 탄생시킨다 할지라도 과거의 실패는 그대로 남아 있고 새로운 정부는 이를 극복해야 한다. 정치 실패, 정부 실패, 국가 실패 극복을 위한 방안 그렇다면 민주주의 정치체제 하의 정치인과 정부 실패에 대한 해결책은 무엇인가? 첫째, 주권자인 국민 개개인이 정부와 정치인보다 ‘현명하게’ 되는 수밖에 없다. 국민이 득표만을 위한 정책인지, 아니면 국가의 미래를 위한 정책인지를 구별할 수 있는 ‘인지 능력’을 갖추고 이기적이고 썩은 정부와 정치인을 골라내는 능력을 키우는 것이 유력한 방법이 될 것이다. 하지만 공공선택론은 유권자의 ‘합리적 무지’(rational ignorance)로 합리적 유권자의 논리적 문제를 명백히 증명하고 있다. ‘합리적 무지’가 맞기는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의식 있는 유권자들은 존재할 것이며, 일반인들도 지속적인 투표의 경험을 통해 투표행위의 중대함을 인식하게 되고 합리적 판단을 할 것임을 기대하는 것이 합리적이지 않을까 생각한다. 둘째, 인간은 과거에서 배운다. 즉, 역사의 교훈에서 배워야 한다는 것이다. 지식인에게는 이러한 역사적 교훈을 국민 대중과 이야기하고 설득해야 하는 책무가 있다. 이것이 이영조 교수가 발제문에서 주장한 ‘인식공동체’의 또 다른 중요성이다. 그러한 인식공동체는 정치실패로 인한 국가실패를 결과한 사례들을 정확히 설명하고 알려야 하는 의무를 가지고 있다. 셋째, 국민이 가진 ‘작은 정부, 큰 시장’에 대한 편견을 없애고 윤리적으로도 우월한 것임을 납득시키고 받아들이게 하는 것이다. ‘작은 정부, 큰 시장’의 타당성을 세 가지 측면에서 납득시킬 수 있다. 1.정부와 시장이 실패할 경우 어느 쪽이 영향을 적게 미치느냐이다. 정부가 실패하면 국민 전체에 영향을 주지만, 시장은 실패하더라도 거래에 관계한 주체만 한정적으로 영향을 미치게 된다. 국민 전체에 영향을 미치는 정부와 거래 당사자들에게만 영향을 미치는 시장을 고려할 때 당연히 시장의 역할이 커져야 한다는 것이다. 2. 일반적으로 정부는 시장보다 생산성이 낮다. 정부가 시장보다 생산성이 낮은 이유는 소위 ‘공공성’을 고려하기 때문이라는 반론도 있듯이 낮은 생산성을 문제 삼지 않고 정부의 생존도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 하지만 시장의 경우 낮은 생산성의 행위자는 사라지고 더 높은 생산성을 가진 행위자가 대체하여 효율성을 높이게 된다. 문제는 생산성이 낮은 정부의 팽창은 국가 전체의 생산성을 저해하게 되고 결국 사회의 경제적 후퇴를 가져오게 된다. 즉, 큰 정부는 사회의 경제적 후퇴를 가져오고, 큰 시장은 사회의 경제적 성장을 가져온다면 선택은 당연히 ‘큰 시장, 작은 정부’로 가야 한다. 3. ‘작은 정부, 큰 시장’은 규제가 아닌 자율의 확대를 가져오고 인간 본성에 부합하며 개인의 창의성을 발휘하게 하여 사회의 진보를 가져온다. ‘큰 정부’, 즉 정부의 역할이 커진 사회가 무수한 규제로 인간을 옥죄고 자유를 침해해 왔음은 나치즘, 파시즘, 군국주의 등 전체주의 사회가 잘 증명하고 있다. ‘작은 정부, 큰 시장’은 인간 본성에 더 적합한 맞는 체제를 만들어 왔다. 넷째, 정치인과 국민들의 의식에 박혀 있는 ‘큰 정부’를 통한 ‘다 같이 잘 사는’ 이상국가 실현이 실현될 수 없는 정치적 레토릭(rhetoric)임을 알리는 일이다. 『정의란 무엇인가』의 마이클 샌델(Michael J. Sandel)과 『21세기 자본론』의 토마 피케티(Thomas Piketty)'가 우리 사회에 열풍을 가져오는 이유는 부자에게 빼앗아 빈자에게 나누어준다는 과거 활빈당(活貧黨)식 정책을 국민 대중이 믿기 때문이다. 역사적으로 재분배정책과 보편적 복지의 극단적 결과는 구소련 사회주의 국가들의 하향 평준화 경제와 빈곤, 생산성 하락으로 인한 국가 몰락, 국가 실패였음을 지적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큰 정부’를 통한 ‘다 같이 잘 살자’는 개인의 자율성을 침해하는 윤리적으로 나쁜 슬로건임을 강조해야 할 것이다. 지식인의 역할과 사명이 크다. ‘큰 시장 작은 정부’ 편견을 극복해야 - 교육이 해답이다 마지막으로 중요한 것은 시장이 정부보다 개인의 자유를 보장하고 더 잘 불평등을 해소함을 알리는 ‘시장 우월성’ 교육이다. 하지만 이미 교육 영역도 역시 정부의 개입으로 자유를 상실한 영역이 되어 버렸다. 간단히 살펴보자. 정부가 대학 입시에 관여하여 대학이 자신의 건학 이념에 맞는 학생들을 선발할 수 있는 자유를 박탈했다. 전 세계에서 북한이나 중국 같은 전체주의 국가를 제외하고 정부가 대학 입시를 좌우하면서 대학의 학생 선발권을 박탈하는 나라는 없다. 정부가 일괄적으로 실시하는 대입 시험의 결과에 의해 학교 등급과 학과의 등급이 매긴 것은 오래 되었다. 정부가 교육에 깊이 관여하여 학생들의 미리 학습 또는 선행 학습을 억제하고 금지하는 국가는 없다. (본인이 과문하여 모르는 것이라면 알려주기 바란다.) 그렇다면 우리 사회에 월반(越班)은 금지이고 천재(天才)는 없게 된다. 선생님이 가르쳐주는 내용만 따라 배우고 그렇고 그런 보통 학생만 존재해야 함을 전제하고 있다. 내신이라는 제도를 강제하여 학생들이 학교 내부의 친구들과의 경쟁만을 고려하게 하는 우물 안 개구리를 만들고 있다. 세계는 이미 세계화로 하나의 시장이 되었는데 세계 각국의 유수한 학생과 경쟁하는 것도 모르고 좁게는 학교 밖의 학생들과 경쟁하는 것도 모르는 좁은 시야의 학생들을 찍어 내고 있다. 특히 학교 간의 여러 콘테스트를 대학입시에 반영하는 것을 금지시켜 전국적인 학생들의 교류조차 막고 있다. 이것이 정부와 정치가 교육에 개입하여 만들어낸 결과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육은 과거부터 대중의 무지를 깨우치게 하는 숭고한 행위였다. ‘인식공동체’를 만들고, 새로운 정당을 만들고, 새로운 정치인을 만들기 위해 필요한 기반은 새로운 세대에 대한 교육에서 찾아야 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김인영 한림대학교 정치행정학과 교수 (이 글은 자유경제원(원장 현진권)이 22일 자유경제원회의실에서 정치실패 쟁점 연속토론회 <사적 영역, 정치의 위협에서 어떻게 지킬까>라는 정책세미나에서 김인영 한림대 교수가 패널로 참석해 발표한 것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