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 황수연 경성대 교수 |
이익에는 사익, 자기 이익과 공익, 일반 이익의 구분이 있다. 사익, 자기 이익이 무엇을 의미하는지에 관해서는 별다른 이의가 없으나 무엇이 공익인지, 일반 이익인지 규정하기는 힘들다. 사익 외에 공익을 이야기하는 것은 특정 사람들의 사익 추구 행위가 남에게 피해를 끼치는 경우 두 개념을 구별하기 위해서일 것이다. 사익을 추구하는 것이 남에게 피해를 끼치지 않는다면 굳이 공익을 이야기할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경우에 따라서는 자기들이 추구하는 행동을 포장하기 위해 공익을 거론하기도 한다. 자기들이 추구하는 행동이 사익을 추구한다고 하면 다른 사람들이 수용할 가능성이 없으므로 그들은 사익이 아니라 공익을 위해서 그런 행동을 취한다고 역설한다. 사람들이 사익을 추구한다고 주장하건 공익을 추구한다고 주장하건 모든 인간은 사익을 추구한다. 그것이 본성이다. 그리고 사익 추구가 나쁜 것도 아니다. 나쁜 것은 그러한 사익 추구가 남에게 피해를 초래하는 제도이다. 제도가 잘 갖추어져 있으면 개인의 사익 추구가 공익 실현에 이바지할 것이고 제도가 잘 갖추어져 있지 않으면 똑같은 개인의 사익 추구가 공익을 저해할 것이다. 결과에 차이를 가져오는 것은 의사 결정에서의 제약이고 제도이지 사람들이 사익을 추구하느냐 공익을 추구하느냐가 아니다. 사람들은 항상 사익을 추구하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시장 거래에서 사익을 추구하지만 정치, 정부 부문에서도 사익을 추구한다. 시장의 참여자들, 곧 소비자, 생산자, 근로자, 자본가 등이 사익을 추구한다는 것을 사람들은 기꺼이 인정하고 이의를 제기하지 않는다. 시장 경제 이론은 이것에 토대를 두고서 사람들의 시장 행동을 잘 설명하고 예측한다. 그래서 시장 참여자들이 사익을 추구한다는 점은 굳이 옹호할 필요가 없다. 그렇지만, 정치, 정부 부문의 종사자들이 사익을 추구하는지에 관해서는 다소 논의할 필요가 있겠다. 유권자, 정치가, 관료, 이익 집단이 자신의 사익을 버리고 국민들의 이익을 증진하기 위해 노력하는가? 공익을 추구하는가? 전통적으로 정치학, 행정학, 경제학 등 사회과학에서는 정치와 정부 부문 종사자들이 공익을 추구한다고 생각했다. 적어도 그렇게 가정하고 해당 학문을 전개했다. 그러나 그렇게 하다 보니 설명이 잘 안 되거나 맞지 않는 부분이 많이 나왔다. 공공 부문에 종사하는 사람들의 인간 행동에 대한 가정이 옳지 않았기 때문에 그런 현상이 나타났던 것이다. 이 문제는 인간 행태 가정을 바꿈으로써 해결되었다. 공공선택론은 유권자, 정치가와 관료, 이익 집단이 공익이 아니라 사익에 따라 움직인다고 본다. 사익, 자기 이익을 강조한다. 공공선택 운동을 주도한 두 학자 제임스 뷰캐넌(James M. Buchanan)과 고든 털럭(Gordon Tullock) 중 특히 고든 털럭이 사익을 강조한다. | | | ▲ 황수연 경성대 행정학과 교수 |
이렇게 공공선택론은 시장에서건 정치에서건 모든 사람들이 사익을 추구한다고 가정하고 분석한다. 정부 종사자들은 자비로운 독재자가 아니다. 이렇게 정부 종사자들이 사익을 추구하지만, 결과적으로 공익에 이바지하느냐 여부는 정부 종사자들이 처해 있는 여건, 환경에 달려 있다. 시장의 기업가가 똑같이 이윤 극대화라는 사익을 추구하지만 경쟁 시장에서는 낮은 가격에 높은 품질의 재화와 서비스를 제공하고 독점 시장에서는 가격을 높이고 공급량을 줄이며 품질을 떨어뜨린다고 이야기된다. 그 이유는 기업가의 본성이 경쟁 시장과 독점 시장에서 바뀌어서가 아니라 그가 처해 있는 여건이 다르기 때문이다. 똑같이 사익을 추구하지만 제도적 여건이 달라서 다른 결과가 나타난 것이다. 마찬가지로 정치, 정부 부문에서도 의원들이 과반수 규칙을 사용할 때는 다수파가 소수파에 피해를 입힐 수 있지만 만장일치 규칙을 사용할 때는 그렇게 할 수 없다. 똑같은 사익 추구라도 다른 결과가 나타나는 것은 제도적 차이 때문이다. 그렇다면 시장 거래에서건 정부에서건 남에게 피해를 끼치지 않는, 공익에 이바지하는 결과를 가져오기 위해서는 사람들이 사익을 추구한다는 것을 받아들이고 그 사익이 공익 실현에 이바지하도록 제도를 잘 설계하는 문제에 관심을 기울여야 할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무엇이 공익을 실현하는 길인가에 대해서 어려움이 생긴다. 공익에 관해 후생 경제학자들을 비롯한 다양한 학자들이 다양하게 규정하지만, 문제가 많다. 사회의 이익이 극대화되는 것이 공익에 이바지하는 길이라고 해보자. 사회의 이익을 개인들의 이익들의 함수라고 할 때, 개인들의 이익을 단순히 합하면 사회의 이익이 되는가, 아니면 개인들의 이익들에 상이한 가중치를 부여해야 하는가, 가중치가 상이하다면 어떤 식으로 상이해야 하는가? 사회의 최소 수혜 계층을 제외한 나머지 사람들의 이익들에 대해 가중치를 영으로 두는 것도 괜찮은가? 혹은 사회의 이익은 개인들의 이익들의 합이 아니라 곱으로 이루어져 있는가? 이러한 모든 사회적 후생 함수 규정 방식의 문제점은 개인들의 이익을 측정할 수 있고 비교할 수 있다는 가정이다. 그러나 개인들의 이익은 측정할 수도 없고 비교할 수도 없다. 그러므로 이러한 사회 후생 함수 접근법은 이론적 유희로는 가치가 있을지언정, 현실에 적용하는 데는 무용지물이다. 이러한 복잡한 사회 후생 함수를 구성하는 대신에 사회 구성원들의 과반수가 찬성하는 것이 공익이라고 보면 어떤가? 그러나 개인의 자유와 인권의 보호에 존립 기반을 가지고 있는 자유민주주의 체제에서 반수에 이를 수 있는 소수파의 이익이 침해되는데 그것을 공익이라 할 수 있을까? 사회의 최소 수혜 계층의 이익을 최대한 보장하는 것을 공익이라고 규정하더라도 그러한 과정에서 다른 계층의 이익이 침해될 수 있는데 개인의 자유와 인권을 보호하는 자유민주주의 체제에서 그것을 공익이라 할 수 있을까? 그리고 어느 정도 어려운 사람이라야 최소 수혜 계층이고 누가 그러한 기준을 정할 수 있는가? 공익의 규정에는 이와 같은 온갖 문제가 일어난다. 이렇게 공익을 규정하는 것은 의견이 다르고 어렵다. 그렇지만 관련 당사자들, 혹은 집단의 구성원들이 합의를 보는 것, 만장일치로 동의하는 것을 공익, 일반 이익이라고 부르는 것은 어떨까? 이것에 추가하여 공익 개념을 더 확장할 수도 있겠지만, 이것이 공익이라고 하는 데는 이의가 없을 것이다. 이것보다 더 확장하게 되면 거의 항상 이의에 봉착한다. 이렇게 볼 때, 사람들 사이에 최대한의 의견 일치를 볼 수 있는 공익, 일반 이익 개념은 공익, 일반 이익을 모든 구성원들이 만장일치로 동의하는 것이라고 규정하는 것일 것이다. 구성원 모두가 만장일치로 동의한다면 그러한 것이 공익이 아니라고 할 수 없을 것이다. 이러이러한 것이 공익이라고 적극적으로 규정하기는 어렵다. 그러나 만장일치 동의를 얻는 것이 공익이 아니라고 말하기는 어려운데, 본 필자도 이런 의미로 공익, 일반 이익을 말하려고 한다. 다음 과제는 어떻게 사익을 공익으로, 자기 이익을 일반 이익으로 바꿀 것인가 하는 것이다. 이러한 사익 추구가 어떤 제도 아래에서 공익을 실현하는 결과가 될까? 시장 거래와 정부 부문에서 사익 추구는 남에게 피해 끼치는 정도가 다르다. 사익 추구가 공익 실현에 이바지하는 가장 확실한 길은 시장 거래다. 정부 부문에서는 개별 행위자들의 사익 추구가 공익 실현으로 잘 연결되지 않는다. 먼저 시장 거래부터 살펴보기로 하자. 시장 거래와 합의 시장 거래는 양 거래 당사자에게 이익이 된다. 그래서 양 당사자는 만장일치 합의를 본다. 사익이 공익으로 전환된다. 이토록 시장 거래는 좋은 일을 한다. 특히 오스트리아학파는 공익, 사회 후생을 증대시킬 수 있는 유일한 길이 시장 거래라고 본다. 양 당사자의 합의, 양 당사자의 만장일치가 공익이 됨은 의문의 여지가 없고, 시장 거래 외의 어떤 제도적 장치도 서로 다른 사익들을 공익으로 시장 거래만큼 잘 전환시킬 수 없다. 특히 선호들의 차이가 클수록 시장 거래를 통해서 양 당사자가 얻는 이익이 더 크다. 선호들이 비슷하다면 시장 거래가 별로 일어날 가능성이 없고 시장 거래로부터 얻는 이익도 별로 크지 않다. 그러나 재화와 서비스에 대한 사람들의 선호가 아주 다를 때 시장 거래를 통해 얻는 이익은 아주 크다. 시장 거래는 될 수 있는 한 최대한으로 많이 이루어지는 것이 공익에 도움이 된다. 얼핏 보기에 시장 거래를 금지하는 것이 당사자들의 이익이 되는 것 같은 경우에도 면밀히 고찰하면 시장 거래를 허용하는 것이 당사자들에게 이익이 되고 나아가서 공익 달성에 이바지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재난 지역에서 가격 바가지 씌우기(price gouging)를 많은 나라들에서 법으로 금지하는데, 이를 허용하는 것이 물품을 파는 사람이나 사는 사람 모두에게 이익이다. 재난 지역에 합판이 부족하여 합판 가격이 엄청나게 치솟는다고 해 보자. 재난을 겪은 사람은 비싼 가격을 주고도 합판을 살 용의가 있다. 가격이 오르면 합판의 공급자는 불편과 위험을 무릅쓰고라도 먼 지역으로부터 합판을 공급할 용의가 있다. 시장 가격이 높아졌지만 자유롭게 시장 거래가 이루어지면 양 당사자의 이익이 모두 만족된다. 그러나 만약 정부가 가격 바가지 씌우기 금지법으로써 지정된 가격 이상으로 합판을 거래하는 것을 막으면 구매자는 합판을 살 수 없고 판매자는 합판을 팔 수 없어서 판매자와 구매자 모두에게 손해가 된다. 마약 매매와 장기 매매도 마찬가지다. 시장 거래는 양 당사자 모두의 이익을 증가시킨다. 그러나 제3자의 이익이 희생되는 경우가 있다. 소위 외부성, 외부 효과가 그것이다. 이때 외부성이라는 것은 “시장 밖”에서의 의미로 해석된다. 시장 밖의 제3자가 시장 거래 당사자들의 시장 거래로 인해 이익이 침해된다면, 모든 구성원들의 이익, 곧 공익이 증진되었다고 할 수 없다. 침해된 제3자의 이익도 고려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들의 이익을 어떻게 고려할 것인가? 흔히 정부 개입을 주장한다. 환경 규제, 지역제, 안전 규제, 보건, 교육, 작업장 안전 규제 등 온갖 종류의 정부 개입이 외부성 문제의 해결을 위해 동원된다. 그러나 외부성을 정부 개입을 위한 근거로 사용할 때의 문제점은 외부성인 것 같이 보이는 상호 작용들 모두가 반드시 외부성이 아니라는 점과 정부 방식에 의해서는 외부성의 크기를 알 수 있는 길이 없다는 점이다. 부정적 외부성으로 말미암아 비용이 편익을 초과한다는 사실은 양 당사자에게 이익을 낳을 수 있는 거래의 여지를 제공한다. 외부성인 것 같은 것이 발생하면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시장 거래가 이루어지고 이러한 외부성을 해결함으로써 이윤을 볼 수 있는 시장 제도들이 생긴다. 원리상, 비효율이 존재한다는 것은 비용을 초과하는 편익을 발생시키는 재배분의 가능성이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 결과, 비효율은 그 문제를 해결할 방법을 고안해 내고 그 비효율을 해결하며 순편익의 약간을 취할 수 있는 사람들에게 이윤 기회를 제공한다. 다른 말로 하면 외부성은 기업가적 행동(entrepreneurial action)을 부른다. 예를 들어, 주거 지역 안에서 약간의 토지 사용들이 다른 사람들에게 이익이나 손해를 끼친다고 해보자. 건물의 외관에 대한 투자가 인근 건물의 소유자들에 대해 외부 비용을 야기할지 모른다. 이러한 관계에 대해 정부가 전형적으로 건축 기준이나 지역제의 형태로 대응하는 것이 흔하지만, 시장 대안도 있다는 점을 명심해야 한다. 큰 필지의 토지의 개발업자가 모든 그러한 상호 작용들을 내부화할 것이다. 그는 상호 유리한 토지 사용들을 모으고, 서로 피해를 끼치는 토지 사용들을 분리시키며, 어떠한 잔존 부정적 외부성도 적절히 완화하고, 어떠한 잠재적 긍정적 외부성도 효율적으로 이용할 유인을 가질 것이다. 기업가적 행동이 일어나지 않는 경우는 어떻게 해야 할까? 정부가 해결하는 것이 바람직하며 정부가 해결할 수 있을까? 외부성으로 인한 제3자들의 이익 침해를 고려하기 위해서는 그들의 이익 침해의 크기를 알고 그것이 거래를 통해 해결되어야 하는데, 문제는 이것이 시장 거래 밖에서 일어나는 현상이기 때문에 그들의 이익 침해의 크기를 알리고 보상받게 할 수 있는 시장 거래가 없다는 점이다. 그렇다고 정부에 의존할 수도 없다. 외부성을 해결한다고 정부가 개입하는 경우에도 정부 개입의 방식에서는 시장 거래가 없기 때문에 정부 개입의 방식을 통해서는 외부성의 크기를 알 수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주안점을 두어야 할 제도적, 정책적 방향은 정부가 제3자도 시장 거래를 할 수 있게 혹은 시장 거래에 들어오게 만드는 것이다. 다른 말로 시장 거래가 가능하게 재산권을 확립하는 방안을 어떻게든 강구하는 것이 중요하다. 시장 거래가 가능하게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재산권 확립이 중요한데, 이것은 정부의 역할이다. 재산권이 확립되면 외부성이 발생할 가능성도 줄어들고, 재산권의 확립되지 않아 외부성이 발생하는 경우에도 재산권의 확립을 통해 외부성을 해결할 수 있다. 외부성은 재산권이 제대로 설정되지 않아 발생한다. 또 외부성이 발생하는 경우에도 재산권을 부여하면 외부성 문제가 해결된다. 아프리카에서 한 국가에서는 코끼리를 국유로 하였더니 코끼리 수가 멸종에 가까울 정도로 줄어들었고 다른 국가에서는 사유로 하였더니 코끼리 수가 크게 증가하였다. 코끼리의 감소와 같은 외부성이 발생한 원인은 재산권이 설정되지 않았기 때문이고, 따라서 자원 보존과 같은 외부성 문제를 해결하는 길도 재산권의 확립이다. 외부성은 어느 쪽이 야기하는가? 알기 어렵다. 소음을 내는 과자 공장 옆에 치과 의사가 개업하였다. 치과 의사는 진료에 지장이 있다. 누가 누구에게 외부성을 야기했는가? 소음을 내는 과자 공장이 외부성을 야기했는가 아니면 늦게 들어온 치과 의사가 외부성을 야기했는가? 알기 어렵고, 따라서 어느 쪽에도 재산권을 부여할 근거가 있다. 하여간 재산권 설정으로 거래가 이루어지면, 소득 분배의 문제는 여전히 남아 있지만, 양 당사자 모두에게 이익이 되는 방안이 모색될 수 있고, 그래서 공익이 실현된다. 공장의 매연으로 인한 피해를 줄이기 위해서 보통 세 가지 방법을 쓴다. 배출 기준, 배출 요금, 오염권의 세 가지다. 정부가 가장 많이 쓰는 배출 기준은 비효율적이다. 배출 요금은 어느 정도 시장 거래를 허용하는 방식이다. 재산권을 설정하고 권리를 시장 거래할 수 있게 하는 오염권 방식이 현재로서는 최상이다. 물론 오염권 방식도 최초 정부가 어느 정도의 전체 오염량을 정하기로 결정할 것이냐 하는 어려운 문제가 있다. 그러나 적어도 재산권 설정의 효과는 누린다. 따라서 공해 방지 정책, 환경오염 방지 정책은 정부의 규제에 의해서가 아니라 재산권을 설정하고 시장 거래를 허용하는 것을 통해서 해결해야 한다. 자연 자원의 훼손을 막기 위해서도 같은 말을 할 수 있다. 재산권을 설정하고 시장 거래가 이루어질 수 있게 하는 것이 자연 자원을 보존하는 길이다. 요컨대, 외부성 문제를 해결하는 데도 시장 거래를 이용할 수 있으면 이용해야 한다. 시장이 실패해서 외부성 문제가 발생하는 것이 아니라 재산권이 설정되어 있지 않기 때문에 외부성 문제가 발생한다. 따라서 해결책은 재산권을 설정하고 시장 거래를 할 수 있는 방안을 강구하는 것이다. 그러면 시장에서의 사익 추구가 공익 실현으로 연결된다. 재산권을 설정할 수 없어서 외부성 문제를 시장 거래로 해결할 수 없으면 어떻게 할 것인가? 모든 것에 시장 거래가 가능한 것이 아니지 않은가? 도로와 항만과 같은 공공사업도 마찬가지로 개인이 하기에는 부담이 너무 커서 하지 않으면? 흔히 나오는 답이 정부더러 집합적 행동으로 처리하라는 것이다. 외부성과 공공재(외부성의 제거) 같은 문제를 집합적 행동에 의존해서 처리하면 모두의 사익, 곧 공익이 증대하는가? 규칙의 선택과 만장일치 합의 이제 외부성이나 공공재의 문제를 정치적으로, 집합적으로 해결하려고 할 때 나타나는 문제들을 고찰해 보자. 정치적으로 처리할 때 보통 사용되는 방식은 과반수결이라는 민주주의 방식인데, 이것은 공익과는 거리가 멀다. 국민들의 이익들은 다양하다. 민간 시장에 외부성이 발생할 때 이것을 과반수결이라는 의사 결정 규칙으로 처리할 때는 모두가 동의하는 대안, 공익에 일치하는 대안은 찾기 힘들다. 다수파는 찬성하지만 소수파는 반대할 것이기 때문이다. 무상 급식의 쟁점에 관해 사람들의 의견이 첨예하게 대립되는 것에서 그 예를 볼 수 있다. 이런 경우 투표자들의 사익 추구가 공익 달성으로 연결되지 않는다. 그러나 쟁점들 중에는 대부분의 사람들의 합의를 볼 수 있는 것들도 있다. 재산권을 보장하자든가 치안을 유지하자는 것과 같은 쟁점들에 대해서는 합의를 보기 쉽다. 곧 일반성, 공익성을 지니고 있는 문제들이다. 이런 것들만 골라서 민주주의로 처리한다면 쉽게 합의를 볼 수 있을 것이고 그 결과 투표자들의 사익 추구가 공익 실현으로 이어질 것이다. 그러나 주의할 점도 있다. 설사 정부의 결정들이 아주 일반성을 띠어 공익에 이바지하는 것 같아도 차별적 영향을 끼친다는 점을 언급할 필요가 있다. 그것들은 어떤 사람들에게 다른 사람들보다 더 큰 영향을 끼친다. 조세법을 변경하자는 제안은 어떤 국민들에게 다른 국민들보다 더 큰 영향을 미친다. 조세 결정뿐만 아니라 거의 모든 지출 결정들도 어떤 국민들에게 다른 국민들보다 더 많은 영향을 끼친다. 심지어 형법에서의 간단한 변경도 보통 차별적 효과를 가지고 있다. 공공사업 예산, 군사비 지출, 보건 프로그램은 만약 우리가 한꺼번에 전 프로그램을 생각한다면 일반 이익, 공익에 이바지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렇지만 공공사업 예산에 관해 실제로 이루어지는 결정은 분리 고속도로를 어디로 확장할 것인지와 같은 세부적인 결정이다. 이것은 주택의 가치에 미치는 영향 때문에 차별적 영향을 가진다. 군사비 지출도 마찬가지로 육군이 어느 무기 체계를 구입할 것인지와 같은 식으로 결정이 세부적으로 이루어진다. 보건 프로그램에 대해서도 어디다가 새로운 병원을 지을 것인지와 같은 세부적인 결정들이 이루어져야 한다. 이런 세부적인 결정들은 공공성, 공익과는 거리가 멀다. 전통적으로 이러한 자원 배분에 대한 정책 평가의 기준으로 파레토 최적을 사용한다. 이것은 필자가 공익 실현의 기준으로 삼고 있는 만장일치 기준과 같다. 모두에게 이익이 되거나 적어도 손해 보는 사람이 없으면 파레토 최적 기준을 충족시킨다고 본다. 그런데 거의 어떤 정책이건 피해 보는 사람이 있다. 그런 경우에도 피해 보는 사람에게 보상을 하면 파레토 최적 기준이 충족될 수 있다. 그러나 보상이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경우가 많다. 그래서 잠재적 파레토 기준을 제시한다. 여기서는 이익을 얻는 사람들이 손해를 보는 사람들에게 보상을 하고도 남는 이익이 있다면 잠재적 파레토 최적 기준이 충족되고 이때 굳이 보상할 필요가 없다고 한다. 그러나 보상을 하지 않을 때 파레토 최적 기준이 충족되었다고 말하는 것은 언어의 비약이다. 따라서 정책 평가의 기준으로 파레토 최적 기준, 만장일치 동의의 기준은 문제점을 안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이 기준은 무용지물인가? 아니다. 이러한 문제점을 가지고 있는 파레토 기준을 고든 털럭은 시각의 전환을 통하여 해결했다. 그는 넓은 의미에서의 파레토 기준을 제시한다. 특정 지역에 집중적으로 편익이 돌아가면서, 비용은 모든 지역들에 대해 부과하는 일반세로 조달하는 사업을 생각해 보자. 만약 편익이 비용보다 크다면, 분배의 문제를 제외하면, 이것은 효율적이다. 그러나 합의를 볼 수 없다. 한 지역만 찬성하고 다른 지역들은 반대할 것이기 때문이다. 파레토 최적 기준에 위배된다. 그러나 시간적 연속선상에 유사한 사업들이 많이 존재하며, 그것들이 어떤 때는 이 지역에 어떤 때는 다른 지역에 유사한 편익-비용 관계를 보인다고 해 보자. 이 경우 지역들의 대표자들은 로그롤링(logrolling) 곧 투표 거래를 하여 사업들을 통과시킬 것이다. 그러면 이것은 전체적으로 볼 때 파레토 최적 기준을 충족시킨다. 이때의 파레토 기준은 넓은 의미의 파레토 최적이다. 하나의 특정 사업이 아니라 같은 성격을 가진 전 계열의 사업들, 이러한 사업들을 낳는 “규칙”의 면에서 본 파레토 최적이다. 이러한 규칙에 대해서는 만장일치 합의를 얻을 가능성이 있다. 만약 그렇다면 공익이 실현된다. 공익은 의사 결정의 결과 면에서가 아니라, 의사 결정 규칙의 면에서 실현할 수 있다. 문제는 의사 결정 규칙이다. 민주주의가 과반수 규칙이라고 생각하는 한 의사 결정 규칙으로도 공익이 실현될 수 없다. 따라서 문제의 성격에 따라 다양한 의사 결정 규칙이 사용되어야 한다. 어떤 문제에 어떤 의사 결정 규칙을 사용할 것인가(예를 들어, 과반수 규칙)에 관해서 규칙을 정하는 사람들의 만장일치 합의를 얻을 수 있을까? 있다. 물론 이렇게 되기 위해서는 특정 규칙들이 적용되었을 때의 사익이 드러나지 않아야 한다. 투표자들이 미래의 자기의 경제 사회적 위치나 선호를 모를 때 그것이 가능하다. 그들은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부자와 가난뱅이가 될 것인지, 진보적이고 보수적이 될 것인지 등에 관해서는 알고 있으나 자기 자신을 포함해서 누가 무엇이 될지에 대해서는 알지 못한다. 케인스 이론과 오스트리아학파 이론의 내용이 어떤 것인지 알지만, 내가 케인스주의자인지 오스트리아학파인지는 모른다. 이런 상태에서는 투표자들이 사익에 따라 규칙을 선택하겠지만 그 사익이 다른 사람들의 사익과 대립되지 않는다. 여기서는 만장일치에 도달하는 것이 가능해진다. 곧 규칙의 선택에 만장일치 합의를 볼 수 있고 공익이 실현된다. 여기서 운영적 결정과 헌법적 결정의 차이를 볼 수 있다. 운영적 결정은 자원 배분에 관한 결정이고 헌법적 결정은 규칙에 관한 결정이다. 투표 규칙을 결정하는 것은 헌법적 규칙이고 투표 규칙 아래에서 투표를 하는 것은 운영적 결정이다. 투표를 통해 자원 배분이 결정된다. 자원 배분에 관해 결정할 때는 이해가 대립되고 사익이 첨예하게 드러난다. 그러나 투표 규칙에 관해 결정할 때는 대립되는 사익이 덜 드러난다. 개인은 앞으로 나타날 개별적 쟁점들에 규칙이 적용되었을 때 자기가 때로는 이익을 얻기도 하고 때로는 손해를 보기도 할 것이라고 예상할 것이다. 그러나 그는 언제 자기가 이익을 볼지 손해를 볼지 모른다. 다만 종합적으로 볼 때 순이익이 있을 것임을 알 뿐이다. 개인은 특정 규칙의 실행에서 자신이 손해를 볼 수도 있음을 예상하지만 올바르게 설정된 규칙이라면 전반적으로 자기에게 순이익이 될 것이라는 것을 알기 때문에 그 규칙을 채택하는 데 동의할 것이다. 모든 개인들이 이렇게 생각한다. 그래서 모든 개인들이 특정 규칙, 예를 들면 과반수 규칙의 채택에 만장일치 합의를 한다. 만장일치 합의를 했다는 의미에서 공익이 실현된다. 반복하자면, 공익은 결과적인 자원 배분에서는 실현될 수 없고 과정적인 의사 결정 규칙, 조직 규칙의 면에서만 실현될 수 있다. 이때 중요한 것은 규칙이 어떤 결과를 가져올 것인지 미리 알고서 개인이 자기 이익에 따라 규칙을 정하면 공익을 달성하는 바람직한 규칙이 되지 않는다는 점이다. 투표자는 자신의 미래의 지위를 모르고 자신의 선호를 모르는 상태에서 규칙 제정에 임해야 규칙이 “공정한” 규칙이 될 수 있다. 그런 의미에서 입법 예고제와 같은 방안을 통해 규칙의 적용 시점을 미루는 것과 같은 것은 좋은 생각이다. 위에서 언급한 두 수준의 선택이 다른 성격을 가지고 있다는 점을 더욱 쉽게 이해하기 위해 축구 경기를 예로 들어보자. 축구 경기에 참가하는 사람들은 오프사이드 규칙, 핸들링 규칙, 프리킥 규칙, 페널티 규칙 등을 정한다. 그 다음 그 규칙들에 따라, 그리고 그 규칙들 안에서, 여러 가지 전략들을 선택해 경기에 이기려고 한다. 여기서는 두 가지 상이한 차원의 선택이 있음을 알 수 있다. 하나는 규칙을 선택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기존 규칙 안에서 전략을 선택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 두 선택은 성격이 서로 다르다. 경기자들은 경기하기 전에 축구 규칙들에 대해 합의를 하고 축구 경기에 참가하는데, 이러한 규칙들을 선택하는 것은 헌법적 선택이다. 여기서는 흥미를 유발하고 “공정한” 규칙들을 선택하는 데 경기 참가자들의 이해가 일치한다. 대립되는 이익들이 나타나지 않는다. 다른 한 편, 경기자들은 주어진 규칙들 아래서 경기의 승리를 위해 다양한 전략들을 선택한다. 예를 들면, 오프사이드 규칙을 최대한 이용해서 더 많은 득점을 해 승리하려 한다. 이것은 헌법 후 선택, 운영적 선택이다. 이러한 전략들의 선택에는 서로 이해가 대립된다. 무엇을 시장 대신 집합적 행동의 대상으로 삼을 것이냐, 그 때 어느 정도의 찬성을 통해 집합적 행동을 할 것이냐 하는 것은 넓은 의미에서 의사 결정 규칙의 문제고 헌법의 문제다. 시장의 외부 비용을 해결하기 위한 정부 결정에는 외부 비용과 의사 결정 비용이 발생한다. 즉 시장에서 이익 침해(외부 비용)가 있듯이 정부에서도 이익 침해가 있다. 정부에서의 이익 침해는 어느 의사 결정 규칙을 사용했을 때 특정 법안의 통과로 말미암은 이익 침해(외부 비용)와 그 규칙을 사용했을 때 바람직할지도 모르는 법안이 통과되지 않음으로 말미암아 발생하는 이익 침해(의사 결정 비용)가 있다. 곧 정부에는 외부 비용과 의사 결정 비용이 있다. 따라서 시장의 외부 비용과 정부의 비용(외부 비용과 의사 결정 비용)을 비교하여 시장에 맡길지 정부에 맡길지 결정하는 수밖에 없다. 시장과 정부 중 비용이 덜 드는 쪽, 이익 침해가 적은 쪽을 택하는 수밖에 없는데, 불확실성 아래에서 헌법적 결정이 이루어질 때는 좁은 의미의 사익, 자기 이익이라는 것이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다. 반면, 사후적으로 시장에서 소득을 많이 얻지 못하는 사람들의 입장에서 보면 정부가 적극 개입하여 소득 재분배 정책을 실시하는 것이 자기에게 이익이 될 것이다. 사후적으로는 시장에 의한 자원 배분과 정부에 의한 자원 배분에 관해 개인들의 이익들은 달라지고 대립된다. 어느 정도의 찬성을 통해 집합적 행동을 할 것이냐에 관한 규칙을 선택할 때도, 장래 자기가 무엇이 될지 무엇을 좋아할지 모르는 상태에서 의사 결정 규칙을 정할 때는, 좁은 의미의 사익, 자기 이익이라는 것이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다. 규칙 결정이 객관적이고 “공정하게” 이루어진다. 이때 의사 결정자들은 사익에 따라 결정하지만 공익에 일치하는 사익에 따라 결정한다. “대표적 개인”에 의해 의사 결정 규칙이 결정된다. 그는 자기가 다수파에 속할지 소수파에 속할지 모르지만 소수파에 속할 경우 입게 될 이익 침해(외부 비용)와 지나치게 많은 다수에게 찬성하도록 요구함으로써 바람직한 사업을 실현할 기회를 잃게 될 이익 침해(의사 결정 비용) 양쪽 다를 고려하여 바람직한 의사 결정 규칙을 정한다. 훗날 그러한 의사 결정 규칙이 실제 적용되어 특정 자원 배분이 발생했을 때는 소수파에 속한다든가 지나친 의사 결정 비용으로 사업이 실현되지 않아 자기의 이익이 침해될 수도 있다. 그렇지만 규칙을 정할 때는 그는 그러한 결과를 미리 알 수 없다. 그는 평균적으로 보았을 때, 전 계열에 걸친 쟁점들을 종합적으로 고려했을 때, 이러한 규칙을 채택하고 따르는 것이 이익이 된다. 대표적 개인은, 나아가서 구성원들 전체는, 모두 이익을 얻는다. 공익이 실현된다. 오늘날 극도로 사익이 중요해졌다. 정부가 국민 소득의 반 가까이 쓰고 있고, 특수 이익 집단의 영향력이 증대하고 있으며, 차별적 입법이 이루어지고 있다. 그 결과 입법으로 남에게 피해 끼치는 사익을 실현할 가능성이 더 높아졌다. 특히 경제 민주화와 분배 정치가 기성을 부리는 오늘날, 사익 추구가 공익 실현을 저해할 가능성이 더욱 높아졌다. 과거에는 그렇지 않았다. 전에는 이익 갈등이 적고 합의가 쉽게 이루어지는 문제 중심으로 집합적 결정이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일반 규칙은 사익, 공익 구분이 없다. 집합적 행동에서의 합의 증대 방안들 집합적 행동에서 사익을 추구하는 것이 어떻게 공익을 실현하는 결과가 되도록 할 수 있을까? 진정으로 개명된 사익, 즉 공익이 표현될 수 있는 것은 자원 배분의 결정을 통해서가 아니라 의사 결정 규칙들, 조직 규칙들 자체의 변경을 통해서다. 과반수결이건, 2/3결이건 의사 결정 규칙이 적정하면 그 의사 결정 규칙에 만장일치 합의를 볼 수 있다. 그 경우 그것이 공익이 아닐까? 그렇다면 적정한 의사 결정 규칙은 무엇인가? 오늘날 대부분의 문제들을 과반수로 처리하고 그 결과 다수파가 소수파의 이익을 침해한다. 대부분의 문제들에 대해 적정 의사 결정 규칙이 과반수결이기 때문일까? 아니다. 타성적으로 민주주의는 과반수결이라고 생각하고 적정 의사 결정 규칙이 무엇일지에 관한 진지한 고민이 없었기 때문에 빚어지는 현상일 것이다. 물론 외부 비용으로 인한 사익 침해를 막기 위해서는 만장일치가 이상적이다. 그러나 만장일치는 바람직한 사업의 실현을 방해하는 피해(의사 결정 비용)를 끼친다. 따라서 만장일치에서 벗어나는 것이 불가피하겠지만, 많은 사업들의 경우 의사 결정 비용은 그리 크지 않으므로 조금만 벗어날 필요가 있다. 공익 실현, 정확하게는 더 넓은 사익의 실현을 위해 보강된 다수결이 더 많이 사용되어야 한다. 그러나 의원들은 2/3결, 3/4결과 같은 보강된 다수결에 어색함을 느낀다. 과반수라는 숫자가 더 이해하기 쉽다. 이렇게 느낀다면 공익 실현에 같은 효과를 가진 것으로서 양원제의 사용과 대통령의 거부권 활용과 같은 방안도 고려할 수 있다. 어쨌든 과반수결이 적정한 의사 결정 규칙일 가능성은 희박하다. 역으로 소수결도 옹호되어야 한다. FTA 같은 자유 무역 법안은 1/3결과 같은 소수결이 적정 의사 결정 규칙일 것이다. 자유 무역은 거의 모든 경제학자들에 의해 옹호된다. 그렇다면 이것은 아주 낮은 외부 비용과 높은 의사 결정 비용을 가지고 있는 쟁점으로서 소수결이 적합하다. 다른 말로 하면 자유 무역을 통과시키는 데 1/3결과 같은 소수결을 요구하고, 금지하는 데 2/3결과 같은 보강된 다수결을 요구하는 것이 적정 의사 결정 규칙이라는 것이다. 자신이 여당이 될지 야당이 될지, 자신이 농부가 될지 자동차 제조업자가 될지, 자신이 진보적일지 보수적일지 모르는 불확실성 아래에서 결정을 내리는 대표적 개인은 아마도 자유 무역 법안을 통과하는 데 적정한 의사 결정 규칙이 이를테면 1/3결과 같은 소수결이라고 판단할 것이고 이러한 규칙을 선택하는 데에는 모든 사람들이 만장일치로 동의할 것이다. 규제의 폐지에 대해서도 같은 말을 할 수 있다. 일반 입법에 치중하여 법률을 만들면 그것이 설사 그저 과반수로 통과되더라도 공익에 일치하는 법률이 된다. 공공 부문이 커지고 법률이 차별적, 편파적일 때는 이익 집단의 조직 이익이 올라간다. 경제 민주화 입법이라든가 무상 급식 등 복지 지출에 관한 입법이 여기에 해당한다. 반면, 집합적 활동이 일반 편익을 가지고 있을 때는 이익 집단들의 조직 이익이 낮아지고, 사익과 공익이 일치한다. 재산권의 보장이나 국방, 치안에 관한 입법이 여기에 해당한다. 이 경우에는 만장일치나 보강된 다수결이 아니라 과반수로 통과시키더라도 상관없다. 규칙은 과반수 규칙이더라도 대부분의 구성원들이 동의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의회는 일반 입법에만 국한하여 입법하지 않는다. 그리고 일반성의 외관을 지니고 있는 법안도 구체적으로는 차별적 항목들이 포함되어 있다. 이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편익 과세를 활용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편익을 누리는 지역이나 집단이 비용도 같이 부담하는 것이다. 이런 제도를 통해 만장일치 합의가 증대한다. 사익이 공익으로 연결된다. 때로는 재분배 문제로 편익 과세가 어려울 수도 있다. 재분배 문제가 고려될 때, 혜택을 누리는 특정 지역이 가난해서 비용을 부담하는 것이 바람직하지 않은 경우도 있다. 이때는 혜택을 누리는 특정 지역과 비용을 부담하는 다른 특정 지역을 대응(matching)시키는 방법을 고려해 볼 만하다. 예로서, 웨스트버지니아 탄광의 특별 편익을 오클라호마 주민들에 대한 특별세로 재원 조달하는 것이다. 그렇지 않고 특정 지역에 혜택을 주는 사업을 일반세로 재원 조달한다면 너도 나도 이런 입법을 요구하게 되어 판도라의 상자가 열리게 된다(뷰캐넌 및 털럭, 2012: pp. 536-538). 그렇다고 어려운 웨스트버지니아 주민들에게 큰 비용을 부담하라고 하는 것도 무리일지 모른다. 이런 경우에는 이런 대응 정책이 재분배 문제도 고려하면서 무분별한 특혜 입법의 단초를 열지 않는 장점을 지니게 되어 공익을 더 가깝게 반영할 것이다. 마지막으로, 분권화 제도가 합의를 증대하고 공익을 실현하는 데 도움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중앙 집권적으로 처리하면 이익이 다른 많은 지역들, 집단들을 다루게 된다. 중앙 집권적으로 결정이 이루어지면, 사익들의 충돌이 심해진다. 반면, 분권화하면 이익이 같은 집단들로 나뉜다. 분권화는 그 결과 합의 가능성을 높인다. 외부 비용과 의사 결정 비용이 줄어들어 총 정부 비용이 줄어들기도 한다. 무상 급식을 실시하고 싶은 작은 지역이 있다면 그 지역에 국한해서 실시하는 것이 특별시나 광역시나 도에 걸쳐서 실시하는 것보다 더 낫다. 그렇게 하는 것이 그나마 원하지 않는 지역들에 외부 비용을 끼치는 일을 줄일 수 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가능하면 집합적으로 처리하지 말고 시장에 넘기는 것이 좋다. 교육 문제에서 이를테면 한자 교육을 예로 들어보자. 국가에 의해서 내려지는 처방은 한글 한자 혼용이나 한글 전용 중 어느 하나로 결정되어 강요된다. 그 경우 어느 한 쪽은 사익이 침해된다. 그러나 교육이 사립학교 등 시장에 의해 제공되면 학교에 따라 한자를 교육할 수도 있고 그렇게 하지 않을 수도 있다. 어느 쪽이 공익에 더 일치할까? 시장에 넘기면 학부모나 학생은 자기의 이익에 따라 학교를 선택할 수 있다. 모두의 이익이 충족된다. 결론 개인들의 사익을 최대한 충족시키기 위해, 즉 할 수 있는 한 최대한 공익을 실현하기 위해 시장 거래에 맡기고 시장 거래의 이점을 활용해야 한다. 외부성의 문제도 재산권의 설정을 통해 시장 거래를 활용해야 한다. 따라서 가능한 시장에 맡기고 정부에 할당할 일은 제한되어야 한다. 시장 거래를 이용할 수 없는 경우 정부의 집합적 행동에 의존한다. 그럴 때도 정부가 할 일은 구성원들이 만장일치 합의를 볼 수 있는 일에 국한되어야 한다. 그렇게 하기 위해선 정부는 직접적으로 자원 배분을 결정하기보다 규칙의 제정에 치중해야 한다. 공익은 규칙에서 나타나기 때문이다. 이 때 공익에 이바지하는 바람직한 규칙이 되려면 규칙 제정자들이 불확실성 아래에서 혹은 무지의 장막 뒤에서 결정해야 한다. 그렇게 만장일치를 통해 나온 규칙은 과반수결일 수도 있고 소수결일 수도 있으며 보강된 다수결일 수도 있다. 그 규칙을 채택하기로 만장일치로 합의를 하게 되면 그 규칙은 “공정한” 규칙, 공익에 일치하는 규칙이 된다. 여하간 적정 의사 결정 규칙의 관점에서 볼 때 과반수 규칙은 특정 문제에 적합한 규칙이지 모든 문제에 적합한 규칙은 아니다, 적합한 규칙은 문제 따라 달라진다. 일반 입법, 편익 과세, 대응, 분권화 등이 집합적 행동에서 사익을 공익으로 전환하기 위해 이용될 수 있다. /황수연 경성대 행정학과 교수 참고 문헌:뷰캐넌, 제임스, 고든 털럭 지음; 황수연 옮김 (2012), '국민 합의의 분석', 지만지.
(이 글은 자유경제원의 시장경제에 대한 그릇된 통념깨기 연속토론회 '공익이 아니라 사익으로 인해 세상은 발전한다' 주제로 열린 토론회에서 황수연 경성대 행정학과 교수가 발표한 내용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