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주경제 채명석 기자 = “누구보다 먼저 움직여 시장을 차지하는 이건희 삼성전자 회장의 기업가 정신은 인정받아야 한다.”
조동근 명지대학교 경제학과 교수는 이 회장의 경영관에 대해 이같이 평가했다.
조 교수는 자유경제원(원장 현진권) 주최로 지난 13일 오후 여의도 자유경제원 회의실에서 열린 ‘제4차 기업가연구회’에서 주제 발표자로 나서 ‘처자식 빼고 다 바꿔라’는 이 회장의 이른바 프랑크푸르트 선언에 대한 문명사적 조망을 시도했다.
그는 이 회장이 ‘신경영 선언’을 천명한 배경을 1993년 전후의 한국 및 국제경제의 대변화와 연계해서 설명했다.
그에 따르면, 1993년은 한국의 경우 김영삼 정부 출범 1년차로 경기 부진에 시달렸다. 당시 박재윤 청와대 경제수석은 ‘신경제 100일’을 수립해 초단기 경기 부양에 나섰다. 문제의식의 시상은 그만큼 짧았다. 또한 국제적으로는 20세기에서 21세기로 넘어가는 세기 말이자 산업화 시대에서 정보화 시대로 넘어가는 변화의 분수령이었다.
조 교수는 “이런 상황 속에서 이 회장은 1993년 6월 7일 ‘프랑크푸르트 선언’을 했다. 세기말적 변화를 앞두고 초일류 기업만이 살아남을 수 있다는 믿음과 선견지명을 갖고 신경영을 선언했다”며, “‘변화하지 않으면 생존을 보장받을 수 없고, 환골탈태하면 새로운 지평을 열 수 있다’는 생각으로 ‘질 경영’이라는 실천적 메시지를 던졌다. 또한 이 회장은 ‘3만명이 제품을 만들고 6000명이 애프터 서비스를 해서 무슨 경쟁력이 있겠냐’며 세계 초일류 기업 속의 삼성을 지향했다”고 설명했다.
신경영 선언의 장소로 프랑크푸르트를 선정한 데 대해 조 교수는 “프랑크푸르트는 ‘라인강 기적’의 진원지다. 또한 1993년은 유럽연합(EU) 출범을 앞둔 시기였다. ‘기적’과 유럽시장 공략을 위한 ‘전초지’로서의 의미를 가질 수 있다”며, “또한 벤치마크 대상이자 경쟁대상자이면서 종국적으로는 극복 대상인 일본을 굳이 자극할 필요는 없다는 점도 작용했을 것”이라고 전했다.
변화의 조짐이 보이는 시기에 위기를 기회로 만들기 위한 방안으로 김영삼 정부가 신경제를, 이 회장은 신경영을 선언한 점, 또한 그 내용은 절묘하게 맞아 떨어졌다. 하지만 5년 후 한국은 국제통화기금(IMF) 외환위기 사태가 도래해 국가 부도 위기에 빠졌다. 신경제와 신경영을 어떻게 구현하느냐의 방법론에서 정부는 실패를, 삼성은 성공을 거뒀다. “신경영 덕분에 삼성은 2000년대 들어 초일류 기업의 반열에 올라섰다”고 조 교수는 주장했다.
이 회장의 신경영 성공 요인으로 조 교수는 △기존 경영 관습에 대한 철저한 자기부정 및 △양 위주에서 질 즉 수익 위주의 경영으로의 전환을 꼽았다.
특히, 아젠다(비전) 제시와 기획, 실행 등 삼성그룹내 삼각편대식 역할 분담 구조가 강력한 추진력을 발휘했다고 분석했다.
조 교수는 “아젠다 제시는 이 회장이, 그룹차원의 실행계획 마련은 구조조정본부가, 현장에서의 실천은 계열사가 담당함으로써 실행효율을 높일 수 있었다”며, “삼성경제연구소는 신경영에 대한 논리개발과 이론화 작업을, 삼성인력개발원은 교육 프로그램을 통한 신경영의 기업문화 확산을 담당했다. 이로써 ‘비전-전략-실행’이 정열됐으며, 신경에 대한 기업문화가 구성원간에 ‘공유’될 수 있었다”고 강조했다.
핵심 계열사인 삼성전자의 다각화 전략도 신경영 성공에 일조했다.
조 교수는 “1997~1998년 IMF 외환위기 당시 국내의 전문가와 정책당국은 ‘선택과 집중’의 논리에 의거해 주력 산업인 메모리 반도체 이외의 사업을 정리할 것을 권고했으나 이 회장은 오히려 반도체, 휴대전화, 디지털미디어, 가전 등 각 사업을 고루 갖추는 이익을 분산시키는 ‘다각화 전략’을 선택했다. 다양한 사업부문으로 이익구조를 분산시킨 이 전략은 불황기에 진가를 발휘했다”고 설명했다.
이어 “사업다각화는 완충을 넘어 시너지 효과를 창출했다. 반도체, 통신, 가전, 컴퓨터, 디스플레이를 모두 구비한 기업은 삼성전자 밖에 없다. 삼성전자는 디지털 제품들이 융합하는 ‘디지털 컨버전스’ 시대에 최적의 조건을 갖췄다. 이같은 다각화 전략의 초석은 1988년 이 회장이 주도한 삼성전자와 삼성반도체통신의 합병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덧붙였다.
‘시장선도전략’(MDS)을 통해 ‘브랜드 이미지’ 제고를 꾀한 것도 주효했다.
조 교수는 “1998년 당시 구조본이 진단한 삼성 브랜드 이미지는 ‘저가, 저품질, 모방’ 등으로 브랜드 파워는 진공상태였다. 삼성전자는 후발주자의 이미지를 벗어나기 위해 시장의 변화를 먼저 보고 경쟁사보다 한발 먼저 움직여서, 경쟁사를 제압해 시장을 먼저 차지하는 ‘선경(先見), 선수(先手), 선제(先制), 선점(先占)’으로 요약되는 시장선도전략을 채택했다”고 설명했다.
삼성전자는 실제로 휴대전화, 디지털TV, DVD플레이어 등 시장이 원하는 기능과 디자인을 갖춘 제품을 경쟁사보다 빨리 시장에 출시해 ‘제값받기’에 나서는 등 ‘고품질·고가전략’을 펼친 끝에 ‘디지털 기업’ 이미지를 심는 데 성공했다.
조 교수는 이와 함께 “협력업체와 한몸이 돼라”는 뜻으로 이 회장이 직접 지어낸 ‘구매의 예술화’도 신경영의 성공을 이끈 중요한 축이라고 강조했다.
조 교수는 “조립산업은 원가의 80%를 구매가 차지하기 때문에 협력업체를 잘 육성해 질을 높여야만 경쟁력을 높일 수 있다”며, “이 회장은 조달만 하는 단순한 구매가 아니라 협력업체에게 베풀면서 도움받는 관계 구축을 통해 양질의 부품을 싸게 신속히 구매하는 예술의 경지까지 끌어올려야 한다고 강조했다”고 말했다.
일례로 삼성전자의 협력업체 모임인 ‘협성회’와 관련한 이 회장의 일화를 소개했다. 이 회장은 협성회 회원들에게 “우리 회사에 오시면 어디에 주차하십니까?”라는 질문을 던지고는, 협력업체 대표에게 상시 삼성전자 출입이 가능한 ‘프리패스’ 제도를 도입했다. “부품의 품질이 확보되지 않으면 100년이 가도 일류가 될 수 없다”는 게 이 회장의 지론이다.
조 교수는 “‘구매의 예술화’는 제조업체와 납품업체의 공존공영체제다”며, “2000년대 들어 삼성은 이를 협력포털, 공급망관리(SCM) 등으로 시스템화 했다”고 말했다.
끝으로 조 교수는 “인센티브란 인간이 만든 위대한 발명품 중 하나이며 자본주의가 공산주의를 이기게 한 요인”이라는 점을 사장단에게 강조한 이 회장의 일화를 소개하며, 권위와 위엄의 중요성을 알되 이를 자율적 경영이라는 철학으로 실천해내는, 마치 장자의 달생편(達生篇)에 나오는 ‘목계(木鷄)’, 채찍없이 말을 달리게 하는 벤허의 리더십 등이 이 회장의 시장경제관과 닮았다고 전했다.
자유주의 학자 및 저술가 20여명이 모여 지난 10월 발족한 기업가연구회는 한국 경제를 일으켜 세운 기업가들의 업적의 의미를 시장경제적 시각으로 발표하는 형식으로 진행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