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도] `젊은 자유인상` 이원우 "자유주의는 질문법을 알려주었다"

자유경제원 / 2014-12-11 / 조회: 1,922       미디어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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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젊은 자유인상' 이원우 "자유주의는 질문법을 알려주었다" "수상 기념 칼럼 '자유주의자의 과거 현재 그리고 미래'
이원우 기자  |  m_bishop@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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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4.12.10  15:31: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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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경제원(원장 현진권)은 ‘2014 올해의 자유인 상’을 수상한 미디어펜 이원우 기자의 수상 기념 칼럼 <자유주의자의 과거, 현재 그리고 미래>를 자유경제원 홈페이지에 공개했다.

이원우 수상자는 “‘2014 젊은 자유인상’을 받은 것은 자유주의 공부 10년을 맞이한 저에게 무엇과도 비할 수 없는 영광이다. 이 상을 마련하신 분들과 저를 뽑아주신 분들, 그리고 강단 위와 책 속에서 저를 가르쳐주신 수많은 스승님께 감사의 말씀을 올린다”고 전했다. 아래는 칼럼 전문이다.


   
▲ 이원우 기자

들어가는 말

자유경제원에서 수여하는 ‘2014 젊은 자유인상’을 받은 것은 자유주의 공부 10년을 맞이한 저에게 무엇과도 비할 수 없는 영광입니다. 이 상을 마련하신 분들과 저를 뽑아주신 분들, 그리고 강단 위와 책 속에서 저를 가르쳐주신 수많은 스승님들께 감사의 말씀을 올립니다.

가장 개인적인 것이 때로는 가장 보편적이라는 믿음으로, 과거를 돌아보고 미래를 타진하는 이 글이 자유주의에 관심을 갖는 분들에게 작은 불꽃 하나라도 틔울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1. 비교하는 인간

20대의 테마는 비교(比較)가 아닐까요?

열정에 비해 준비된 건 없습니다. 돈은 없는데 시간만 많습니다. 시쳇말로 ‘잉여’라 불러도 좋을 이 청춘의 에너지를 20대들은 비교하는 데 사용합니다. 비슷한 나이대의 다른 사람과 자신을 비교하고 과거의 자신을 현재의 자신과 비교하는 것이죠. 쟤는 저런데, 난 왜 이렇지? 예전엔 그랬는데, 지금은 왜 이렇지?

저도 그랬습니다. 세상엔 딱 두 부류가 있는 것 같았습니다. 뭘 해도 잘 되는 녀석과 뭘 해도 안 되는 놈. 그리고 그 양분법에서 나는 두 말할 것도 없는 후자이고 루저이며, 이제 내 앞에 남아있는 삶은 거대한 똥이라고 생각했던 게 불과 10년 전의 일입니다.

왜냐고요? 근거는 충분해 보였습니다. 저는 대학에 총 8번 떨어졌습니다. 3수를 했는데 고3때와 재수생 때 지원한 각 3곳의 대학으로부터 전부 거부당했기 때문입니다. 삼수생 때 지원한 곳에서도 3곳 중 2곳은 날 거절했습니다. 그런 기분은 처음이었습니다.

그때 나를 부른 곳은 홍익대학교 경영학과밖에 없었습니다. 다른 곳들과는 달리 어서 오라며 나를 환대하는 것 같았습니다. 문제는 자존심이었습니다. 거긴 고3때 지원했어도 충분히 갈 수 있는 곳이었기 때문입니다. 홍대에 지원한 유일한 이유는 누나가 그곳에 다니기 때문이었습니다(자기가 갈 대학교를 이런 식으로 고르는 사람은 아직까지 만나본 적이 없습니다).

진짜 갈 생각이 있어서 원서를 낸 게 아니었습니다. 경영학? 한 번도 생각해 본 적 없었습니다.

‘진짜 내가 저길 가야하는 건가.’

물론 저에겐 선택의 여지가 없었습니다. 열린 문은 오로지 그곳 하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인생은 거대한 똥이라고 생각했습니다.

2. 모든 선택에는 대가가 있다

저는 학교를 혼자 다니기로 결심했습니다. 그때나 지금이나 혼자 노는 것에 익숙하긴 하지만, 당시의 이유는 자존심 때문이었습니다. 손상된 자존감을 그런 방식으로 보상 받고 싶었던 것 같습니다. 지금 생각하면 얼굴이 화끈거릴 일입니다만 그땐 그랬습니다.

OT를 가지 않는 건 너무나 당연한 선택이었습니다. 조모임을 제외하면 수업 때 만난 누구와도 전화번호를 교환하지 않았습니다. 살갑게 말을 걸어오는 동기들에겐 “저 스물 둘인데요”라고 퉁명스럽게 답했습니다. 뒤에선 아마 웬 병신 한 마리가 들어왔다고 비웃었을 테지만 그러거나 말거나였습니다.

침묵의 관찰 속에서 한 가지 느낀 점은 있었습니다. 세상엔 참 다양한 사람들이 있다는 깨달음이었습니다. 등 뒤에 홍익대학교 경영학과라는 꼬리표가 붙은 게 너무 싫었던 나 같은 사람이 있는 반면, 이곳에 들어온 자체를 인생의 기적으로 여기는 동기들도 있었습니다.

단 한 번도 자신이 서울 4년제 학교에 올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지 않았던 사람들에게 홍대는 기적의 약속이었습니다. 똑같은 캠퍼스에서 똑같은 시간을 살지만, 그런 이들과 나의 삶은 완전히 다른 빛깔을 띠고 있었습니다.

그들의 웃는 표정 앞에서 잠시 생각했습니다. 나는 지금 옳은 선택을 하고 있는 걸까. 나의 현실과 상황을 부정하고 비관과 냉소의 세계로 침잠하는 것이 과연 맞는 것일까.

경영학과 학생들은 누구나 일단은 경제학수업부터 들어야 합니다. ‘경영학’은 엄밀히 말해 그 자체로 체계를 갖춘 학문(學問)이라기보다는 다른 학문들에 조금씩 빚을 지면서 발돋움하는 일종의 기술이며 기법에 가깝습니다. 특히 경제학은 경영학의 테크닉을 떠받치고 있는 근본 학문입니다. 따라서 그 경제학을 누구에게 배우느냐는 당연히 매우 중요합니다.

저에게 김종석 교수님(現 홍익대 경영대학장)의 존재를 알려준 것은 영문학과에 재학 중이던 누나였습니다. 프린스턴대학교 대학원 경제학박사에 빛나는 지성과 유머러스하고 신사적인 인품 덕분에 김 교수님은 이미 학교의 스타셨습니다. 그렇게 저 역시 300명 정도를 수용할 수 있는 큰 강의실에서 김종석 교수님의 경제학원론을 수강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그것이 제 지난 10년의 삶이 변하기 시작한 원점이었습니다.

수업 교재는 그 유명한 ‘맨큐의 경제학’이었습니다. 이 책은 다음과 같은 10가지 법칙으로 시작됩니다.

①모든 선택에는 대가가 있다.
②선택의 대가는 그것을 얻기 위해 포기한 그 무엇이다.
③합리적 판단은 한계적(marginal)으로 이뤄진다.
④사람들은 경제적 유인(incentive)에 반응한다.
⑤자유로운 거래는 모든 사람을 이롭게 한다.
⑥일반적으로 시장이 경제활동을 조직하는 좋은 수단이다.
⑦경우에 따라 정부가 시장성과를 개선할 수 있다.
⑧한 나라의 생활수준은 그 나라의 생산 능력에 달려 있다.
⑨통화량이 지나치게 늘면 물가가 상승한다.
⑩단기적으로 인플레이션과 실업 사이에는 상충 관계가 있다.

김종석 교수님의 수업은 쉽고 재미있었습니다. 1학년생들을 대상으로 한 수업이었기 때문에 교수님은 풀어서 설명하는 것에 많은 노력을 기울이셨습니다. 저 10가지 원리를 우리 삶에 적용시켜 보길 원하셨습니다. ‘경제학 = 그래프’라고 생각했던 입장에선 신선한 접근법이었습니다.

제가 놀란 것은 경제학이라는 학문에 이른바 인문학적 성찰이 깃들어 있다는 발견이었습니다. 경제학과 인문학을 교차시킨다는 게 지금은 그렇게까지 신선한 접근이 아니지만 그때의 인식은 지금과 달랐습니다.

맨큐의 첫 번째 법칙을 다시 읽어보겠습니다.

‘모든 선택에는 대가가 있다.’

3년이라는 시간을 오로지 ‘SKY’라는 이름표 하나를 얻기 위해 몰빵했다 실패한 저에게 이 문장은 일종의 실존적 함의를 띠고 다가왔습니다. 그레고리 맨큐는 저에게 이렇게 말하는 것 같았습니다.

“모든 선택에는 대가가 있어. 앞으로 어떻게 사는 게 좋겠니?”

예기치 못한 질문을 받은 상태로 그렇게 한 학기가 지나갔습니다. 제가 이 수업에서 A+를 받았다는 사실은 굳이 강조할 필요가 없을 것입니다.

   
▲ 이원우 미디어펜 기자(左)와 현진권 자유경제원 원장(右)

3. 무엇을 선택할 것인가

당시까지의 저는 ‘장래희망’에 대한 고민을 한 번도 해 본 적이 없었습니다. 10대 중반부터 너무나 당연히 음악을 하는 사람이 되리라고 생각해 왔기 때문입니다. 그런 제가 SKY를 가려고 기를 쓰고 애썼던 이유는 저열하리만치 단순했습니다. 그게 좋은 ‘간판’이 될 거라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애초부터 의도가 불순했던 셈이지만 실력으로 극복할 수 있다고 멋대로 믿고서 방학을 맞아 피아노 학원에 다녔습니다. 제가 만든 노래를 좀 더 자유롭게 연주하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선생님께서는 “이 학원에 다니는 모든 초중고교생들을 포함해 원우 학생이 제일 열심히 하세요”라며 나를 격려해 주셨습니다(다음 달 수업료 납부일이 언제인지도 친절하게 알려 주셨습니다).

문제는 실력이 전혀 늘지 않는다는 점이었습니다. 방학 기간을 모두 쏟아 부었는데도 거의 그대로였습니다. 비로소 한 번도 스스로 제기하지 않았던 질문이 솟구쳐 올랐습니다.

‘내가 지금 옳은 선택을 하고 있는 것일까?’

‘이 길은 내가 걸어 마땅한 길인가?’

‘모든 선택에는 대가가 있는데….’

‘내가 하고 있는 이 선택의 대가는 그것을 얻기 위해 포기한 그 무엇일 텐데….’

그 무렵 꿈과 재능, 이상과 현실에 대해 새로운 관점을 제시해 준 학자는 데이비드 리카도였습니다. 너무도 유명한 그의 비교우위론은 다음과 같은 내용으로 구성돼 있습니다.

강대국 A는 약소국 B에 비해 모든 면에서 월등할 수 있습니다. 그런 상황에서도 A와 B가 무역거래를 하는 것이 B에게도 유리합니다. 이때 A는 A가 가장 잘하는 것에 집중하고 B는 B가 (그나마) 가장 잘하는 것에 집중하면 효과는 극대화됩니다. 모든 면에서 열등한 약소국 B도 당당히 A의 파트너가 될 수 있는 길이 열리는 것입니다.

언뜻 들으면 다단계 사기처럼 들리는 이 이론은 저에게 굉장한 충격을 줬습니다. 열등한 인간에게도 기회가 있다니, 진짜?

저는 리카도의 내용을 ‘꿈’에 관한 내용으로 전환해서 2009년에 발간한 첫 책 ‘유니크’에 썼습니다. 장래희망을 찾는 비결은 어차피 비현실적이고 막연한 자신의 ‘꿈’ 따위에 천착하는 게 아니라고 썼습니다. ‘하고 싶은 일’이 아닌 ‘잘 하는 일’을 찾아야 한다고 썼습니다.

이때 반드시 ‘세상에서 내가 최고로 잘 하는 일’을 찾기 위해 애쓸 필요는 없습니다. 자신이 ‘그나마’ 잘 하는 일이면 충분합니다. 그걸 계속 하다 보면 인생이 어떻게 바뀔지 모르기 때문입니다. ‘계속’의 힘은 막강합니다. 낙수가 바위를 뚫습니다.

“세상이 바라보는 나를 보지 못하고 ‘내가 바라보는 세상’만 고집부리는 행동은 10대 소년소녀들이 하니까 귀여울 뿐이다.”

- 유니크(YOU NEEd Questions, 2009)

리카르도가 준 깨달음 이후 저는 음악의 길을 포기했습니다. 음악은 단지 제가 막연히 ‘하고 싶은’ 일이었을 뿐이었습니다. 열심히 한다고 칭찬해 주던 피아노 선생님도 재능 여부를 묻는 제 질문엔 난색을 표했습니다(진실을 말하면 다음 달에 등록 안할 눈빛이었나 봅니다). 음악은 제가 ‘그나마 잘 하는 일’조차 아니었습니다. 앞으로 무슨 일을 하게 될지는 모르지만 작곡가가 제 길이 아닌 건 확실하다고 생각했습니다.

저는 다시 근본으로 돌아가서 질문을 던져 보았습니다.

앞으로 무엇을 해야 할 것인가.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

보통은 10대 때 시작되는 고민이 스물 둘의 저에게 시작됐습니다.

4. 대답의 시간

누나는 1학년 2학기의 수강신청에도 결정적인 조언을 해줬습니다. 어째서 경영학과의 사정을 그렇게 잘 알고 있었는지는 지금도 미스터리지만, 박광량 교수님의 ‘기업과 경영(경영학원론)’을 들어보라고 말해줬던 것입니다. 김 교수님과의 만남이 태풍이었다면 박광량 교수님과의 만남이 제 인생의 쓰나미가 될 거라는 걸 그때는 알지 못했습니다.

박광량 교수님은 머리부터 발끝까지 젠틀맨인 김종석 교수님과는 스타일부터 달랐습니다. 유머는 시니컬했고 화법은 급진적이었습니다. 다른 교수님들과 어울리는 모습을 본 적도 거의 없었습니다. 대신 수업이 끝나면 혼자 양복을 입으시고 학교 뒷산에 올라가는 모습을 여러 번 봤습니다. 괴짜였습니다.

강의 내용은 전복적이고 혁명적이었습니다. 어찌나 열강을 하시는지 가끔씩 입가에 하얀 거품이 생길 정도였는데, 그렇게 수업이 끝나고 나면 학생들의 절반가량도 분노의 거품을 물고 있었습니다. 시장을 철저하게 옹호하는 그의 관점이 나름의 정의(justice)를 추구하는 20대들에게는 궤변으로 인식됐기 때문입니다.

몇몇 학생들은 수강철회를 할 정도로 불편해하던 그때, 저는 알았습니다. 그는 지금 대단히 중요한 말을 하고 있다는 것을. 그는 자신의 정체성을 “좌파도 우파도 아닌 자유주의자(Libertarian)”라고 말했습니다. 그때 처음 느꼈습니다.

‘자유주의라는 게 뭔지는 잘 모르겠지만, 끝내주는 거구나.’

   
 

‘기업과 경영’은 1학기 때 제게 던져진 의문 –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지’에 대한 암시를 줬습니다. 어쩌면 이곳에서부터 길을 찾으면 될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때부터 6개월간의 저는 거의 미친 사람처럼 자유주의 저작들을 독파하기 시작했습니다. 수업 교재이자 박광량 교수님의 책인 ‘경영 경제학’을 포함해 스티븐 랜즈버그의 ‘안락의자의 경제학자’, 토드 부크홀츠의 ‘죽은 경제학자의 살아있는 아이디어’, 폴 헤인의 ‘경제학적 사고방식’ 등으로 기본을 익혔습니다. 수업 내용이 깊어지면서 드디어 등장한 하이에크와 미제스는 차라리 복음의 발견이었습니다. 유레카!

그 무렵 음습한 책 냄새가 자욱한 중앙도서관 한구석에서 하이에크와 미제스의 책 위에 쌓인 먼지를 후후 불어낸 뒤 대출하는 것은 이미 저의 일과가 되어 있었습니다. 자유기업원이 번역한 흰색과 파란색 표지의 자유주의 저작들을 끝도 없이 실성한 사람처럼 읽어댔습니다. 단언컨대 제 인생에서 가장 책을 열심히, 그리고 재미있게 읽은 시간이었습니다. 꿈처럼 6개월이 흘러갔습니다.

제가 ‘기업과 경영’ 수업에서 A+를 받았다는 사실은 굳이 강조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것은 제가 자유주의자로 살아가기로 결심했음을 의미하는 하나의 상징이자 확인이며 분기점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5. 쓰다

글쓰기가 직업이 된 이때까지 저는 정식으로 누군가에게 글쓰기를 배워본 일은 없습니다. 다만 10대 무렵 PC통신 시절부터 저는 음악에 대해, 영화에 대해, 제 나름의 생각에 대해 여러 가지 글을 써왔습니다.

6개월간 치열한 속도로 책을 읽고 난 뒤 제가 자유주의적 관점에서 글을 쓰기로 한 것은 그런 면에서 당연한 수순이었습니다. 미세먼지가 걷히고 난 하늘처럼, 저의 세상은 반년 전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청명해져 있었습니다. 자유주의라는 틀에서 세상을 바라보면 어떠한 커다란 이슈 앞에서도 황당하거나 당황할 필요가 없었습니다.

때마침 자유기업원에서 시장경제대상을 개최한다는 소식이 들려왔습니다. 논문과 독후감 부문으로 나뉜 그 대회에 아직 초심자인 저는 독후감 부문으로 참가했습니다. 공병호 박사의 1997년작 ‘시장경제와 그 적들’에 대한 글이었습니다.

‘시장경제와 그 적들’은 시장경제의 관점에서 1997년의 대한민국을 바라보는 책입니다. 그 책의 문제의식을 당시(2004년)의 현실로 투사해 보는 게 독후감의 골간이었습니다. 당연히 원고의 제목은 ‘시장경제와 그 적들 - 2004년 하반기의 관점에서’가 되었습니다.

솔직히 말하면 원고는 쓰기 편했습니다. 2004년 하반기는 ‘적들’이 너무나도, 너무나도 많은 시기였기 때문입니다. 소재는 지천에 널려 있었습니다. 노무현 대통령의 정책 몇 개만 언급해서 자유주의 원칙과 대비해도 챕터 한두 개가 완성됐습니다. 질투와 시기심, 자기기만, 통제욕구, 유토피아를 향한 열정이 시장경제를 망치고 있다는 공 박사의 문제의식은 그 무렵 더욱 심해져 있었던 것입니다.

그 발자취를 따라서 당시 한창 논쟁 중이던 4대 쟁점법안(국가보안법 폐지, 과거사 진상규명법, 언론개혁법 제정, 사립학교법 개정), 한국형 뉴딜정책, 성매매특별법, 유토피아의 꿈에 사로잡힌 한국인들에 대한 얘기를 이어나갔습니다.

“비록 ‘시장경제와 그 적들’이 출간된 이후 7년 동안 진보의 보폭은 넓지 않았지만 중요한 것은 오늘과 내일이며, 그래서 여전히 이 책은 우리에게 소중한 기록이다. 부디 지금으로부터 7년 후에는 지금과 다른 고민을 하고 있기를 바래본다. 어제의 결과로 오늘의 기회가 파생되듯이, 미래에 우리가 어떤 고민을 하고 있을지도 결국은 오늘 우리의 행동 하나하나가 결정하게 될 것이다.

- 시장경제와 그 적들 - 2004년 하반기의 관점에서(2004)

일련의 작업은 언젠가는 멋진 논문을 쓰고 싶다는 다짐을 확인해 두기 위한 연습이었지만, 놀랍게도 이 대회에서 3위에 입상했습니다.

시상식은 2005년 1월, 서울 마포구의 어느 호텔 지하 중식당에서 이뤄졌습니다.

그곳에서 김정호 당시 자유기업원 원장님과 소설가 복거일 선생님을 처음으로 뵀습니다. 바로 그날 복 선생께선 당시 신간이었던 ‘정의로운 체제로서의 자본주의’를 선물해주셨습니다. 그 도발적인 제목도 그 무렵엔 더 이상 이상하게 들리지 않았습니다.

이후부터 저는 자유주의연대의 청년논객으로, 자유기업원의 시민논객으로, 대학생신문 바이트의 창간멤버로, 대학내일의 칼럼니스트로 글을 쓰기 시작했습니다. 反시장정책의 결정판을 보여줬으면서도 재임 막판엔 한미FTA를 추진한 故노무현 대통령은 지나치리만치(?) 좋은 소재가 되어줬습니다. 하루 종일 노무현만 따라다녀도 성실한 칼럼니스트 행세를 할 수 있는 시절이었습니다.

“환호로 시작하여 탄식으로 끝난 노무현 대통령과의 4년은 쉽게 잊히지 않을 듯하다. 대학이라는 탑 안에서 자유주의라는 프리즘으로 비쳐 본 노무현의 세계는 화려한 겉모습과 허울 좋은 명분과는 반대로 반(反)자유주의적 부작용을 창출하는 거대한 함수와도 같았다.

그 부작용의 메커니즘을 학생 입장에서 면밀하게 바라보고 자유주의와 대비해 볼 수 있었던 건 행운이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곧 학생신분을 벗어나려는 지금 시점에선 그 모든 부작용이 자유주의자들의 과제이자 현실로 느껴지는 가운데, 지금 이 거대한 끝은 시작되고 있다.”

- 자유기업원 칼럼 ‘끝의 시작 - 노무현 대통령과 함께 한 4년(2007)’

더 이상 경제문제에만 소재가 국한될 필요도 없었습니다. 자유주의는 이미 저의 세계관(世界觀)이었습니다. 정치, 사회, 문화, 예술을 자유주의적으로 바라봤더니 대다수의 한국인들이 추종하는 대세와는 색다른 필치로 세상을 바라볼 수 있었습니다. 그것만으로도 큰 기쁨이었습니다.

   
 

6. 기회주의와의 결별

물론 일련의 상황이 언제나 100% 기쁨으로만 가득 찬 것은 아니었습니다. 남들과 다른 방식으로 세상을 본다는 것은 남들과 다른 방식으로 비판(비난) 받는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20대였던 제가 또래들의 전폭적 지지를 받던 노무현 대통령을 비판하는 건 때로 많은 이들을 불편하게 만들기도 했습니다. 특히 한미FTA에 찬성하는 칼럼을 썼을 때 맞았던 악플의 십자포화는 꽤 오랫동안 저의 마음을 어둡게 만들기도 했습니다. 비슷한 포지션으로 젊은이들의 사랑을 받았던 안철수를 비판했을 때에도 유사한 상황이 펼쳐졌습니다.

남들과 다른 지점에 서 있다는 걸 알았을 때 외로움과 두려움을 느끼지 않는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오로지 나의 마음에 상처를 주기 위해 날 세워 작성된 메시지를 읽고 평정심을 유지할 수 있는 사람 또한 많지 않을 것입니다.

‘악플을 아예 읽지 말라’고 조언하는 분들도 많이 있습니다. 굳이 안 받아도 될 상처를 받아가면서 일할 필요는 없다는 것입니다. 타당성이 없는 말은 아니지만, 제 생각은 조금 다릅니다.

자유주의자는 자신에게 쏟아지는 악플들에 용기 내어 직면해야 합니다. 상처 받지 않기보다는 상처를 통해 강해지는 길을 선택해야 합니다. 현재의 세상이 어디를 향해 있는지를 알고 혼자만의 원칙론에 빠지지 않는 일이 자유주의자들에게는 특히 더욱 중요합니다.

자유주의 거장 미제스의 다음 말은 외로움과 두려움을 느끼던 시절부터 지금까지 저에게 큰 힘이 되어주고 있습니다.

“저술은 의견의 일치가 아니라 의견의 불일치가 그 원칙이다. 모든 사람이 찬성하고 듣기 원하는 것만을 되풀이할 뿐인 저술가는 그리 대단한 존재가 못 된다. 중요한 것은 오로지 혁신자, 반대자, 미개척 분야의 선구자, 즉 전통적인 기준들을 거부하고 낡은 가치와 관념을 새로운 것으로 대치시키는 것을 목표로 하는 사람이다. 이러한 사람은 반드시 반독재/반정부적이며, 대중들이 책을 사주지 않는 저술가이다.”

- 자본주의 정신과 반자본주의 심리 (루드비히 폰 미제스, 1979)

여론이란 이름으로 잘 포장된 기회주의 노선을 따르고 싶은 마음은 애초부터 없었습니다. 그럴 시간에 한 번쯤 살면서 맞닥뜨리는 삶의 모든 문제를 스스로 해석해 보고 싶다는 욕구가 생겼습니다. 그렇게 출발한 것이 2008년 SONY 웹진에 연재했던 ‘20代의 20大 의문’이라는 시리즈 칼럼입니다.

꿈, 직업, 정치, 연애, 실존 등 모든 주제를 망라하는 이 시리즈는 청출판이라는 작지만 단단한 회사의 눈에 띄었습니다. 그리고 저는 졸지에 유니크(2009)라는 책을 출간한 작가가 됐습니다. 책의 헌사는 어머니와 박광량 교수에게 바쳤습니다.

그 이후 연애의 뒷면(2010)과 예쁜 여자(2013)라는 책을 두 권 더 냈습니다. 한권 한권이 꿈같았습니다. 2012년부턴 미래한국에서 연락을 받아 기자와 편집장으로 일하게 됐습니다. 올해 11월부턴 온라인 매체 미디어펜으로 자리를 옮겨 좀 더 생동감 있는 활동을 시작했습니다. 정신을 차려 보니 10년의 세월이 흘러 있었습니다.

반드시 이루려고 노력했던 것들이 많았던 10년 전, 세상은 저에게 어떤 여지도 허락해 주지 않는 난공불락의 성 같았습니다. 그러나 자유주의를 만난 뒤에는 흐름에 몸을 맡기고 그저 나인 채로 살았을 뿐인데 더 많은 일들이 순조롭게 진행됐습니다.

한때는 뭘 해도 안 되는 느림보라고 스스로를 평가절하 했습니다. 허나 역설적이게도 저는 어느덧 서른둘의 나이에 책을 3권 내고, 마음껏 글을 쓰고, 팟캐스트 방송을 진행하고 토론회에서 발언하는 사람이 돼 있습니다. 스스로 책임질 수 있기만 하다면 누구의 눈치도 보지 않고 마음껏 말하고 글을 씁니다. 그냥 나인 채로 살고 나인 채로 표현할수록 실력을 인정받는 신기한 직업입니다.

한때는 제가 열고 싶었던 어떤 문도 열지 못했는데, 지금은 날 기다리는 다른 문들이 보입니다. 문들이 많아진 것일까요, 아니면 저의 시야가 넓어진 것일까요.

열린 문 안쪽의 세상은 미지의 시나리오로 가득 차 있습니다. 우리가 인생을 알 수 없듯 이 질문에 대한 대답도 알 수는 없습니다. 허나 모르면 모르는 채로 살아가도 관계없다는 사실을 알려준 것도 돌아보면 자유주의였습니다.

7. 연애와 자유주의

마지막으로 꼭 밝혀두고 싶은 자유주의의 이점 한 가지. 잘 알려지지 않은, 하지만 제가 가장 유용(?)하다고 느꼈던 장점은 사실 따로 있습니다. 자유주의가 연애(戀愛)를 편하게 만들어 주었다는 사실입니다.

여기에서부터는 가족들이 알아서는 안 될 내용이므로 글자 크기를 좀 줄여줬으면 좋겠는데, 저는 연애 다(多)경험자입니다. 하여간 이런저런 사람을 많이도 만났습니다. 횟수만 많은 게 아니라 특이한 경험도 많이 했습니다(이를테면 여자친구가 군대에 간다든지). 그 과정에서 부끄러운 기억과 치명적인 실수들이 왜 없었겠느냐만, 그런 경험들마저도 결국엔 저를 성장하게 만들어 줬다고 저는 믿고 싶습니다.

그다지 뛰어난 외모도 무난한 성격도 아닌 제가 이런 경험을 할 수 있었던 건 자유주의를 빼놓고는 설명이 되지 않습니다. 자유주의가 품고 있는 그 관용적 측면이 순식간에 저를 (제 입으로 말하기 민망하지만) ‘배려하는 남자’ ‘좋은 남자친구’로 만들어 줬던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자유주의라는 단어 앞에 신(新) 자까지 붙여가며 매도하는 부분은 그것이 ‘비인간적’이라는 점입니다.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알고 보면 자유주의만큼 관용적이고 인간적인 사상은 없습니다. 도리어 너무 인간적이어서 인본주의(人本主義)와 도그마 수준으로 결탁할 가능성을 우려해야 할 정도입니다.

자유주의의 관용은 나와 다른 사람을 있는 그대로 인정해 줍니다. 내가 남과 다르다고 해서 주눅 들지 않으며 남이 나와 다르다고 해서 배척하지 않기를 권장하는 것입니다. 제 나름의 다채로운 경험을 결집시킨 책 ‘연애의 뒷면’에서 저는 이렇게 썼습니다.

"사랑은 결국 나와는 다른 사람에게 마음의 방 한 칸을 내주는 과정이다. 그걸 아는 사람은 섣불리 ‘믿는다’고 말하지 않는다. 믿음이라는 허울 좋은 단어 속에 ‘내 마음에 안 드는 짓은 하지 말라’는 사인을 숨겨두지 않는다. 많은 경우 믿음은 비겁함과 무관심의 다른 이름일 뿐, 진짜 사랑은 믿음이라는 족쇄 대신 이해를 말한다. 믿는다고 말하는 사람을 믿지 말자. 사랑은 이해다."

- 연애의 뒷면(2010)

그리고 눈앞의 한 사람을 온전히 이해할 수 있는 사람은 세상도 이해할 수 있습니다.

   
▲ 이원우 기자 저서

8. 여전히 인생은 물음표

처음으로 공부를 시작했던 10년 전에 비하면 자유주의에 동의하는 젊은이들은 대단히 많아졌습니다. 돌아보면 아무도 없다고 생각했던 시절은 지나가고, 이제 SNS나 인터넷 커뮤니티에서 자유주의자를 자처하는 사람들이 많아졌습니다. 이는 자유경제원(자유기업원)을 중심으로 하는 한국 자유주의자들의 노고에서 비롯된 것임에 틀림이 없습니다.

스승들의 모습에서 미래를 본다면, 이제 막 자유주의를 공부하기 시작한 사람들의 모습에선 제 과거가 스쳐가기도 합니다. 세상의 비밀을 알게 된 느낌, 이거면 됐다는 안도감, 인생을 부유하는 수많은 물음표들을 비로소 느낌표로 바꿀 때가 왔다는 직감들….

실제로도 자유주의는 학구적(academic)인 논쟁에선 적수가 거의 없다고 평가받습니다. 그런 면모가 많은 지적 청춘들의 뇌와 심장을 설레게 하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자유주의가 인생 모든 물음표를 느낌표로 바꿔줄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삶이란 원래 물음표로 가득 차 있는 것이기에 그렇습니다. 그것들을 느낌표로 바꾸는 과정에 사상은 큰 몫을 담당하지만, 궁극적으로 판단을 내리는 건 사상이 아닌 자기 자신입니다.

미제스와 하이에크는 위대한 사상가들이지만 그들의 저술 그대로를 따라 읊을 필요는 없습니다. 그들의 저작은 성경이 아닙니다. 다만 그들이 인생에 질문을 던졌던 방법, 그리고 질문에 대답하는 나름의 방식 - 그 모든 과정(process)을 습득하는 것이야말로 자유주의를 공부하는 바람직한 자세일 것입니다.

자유주의는 해답이 아니라 ‘질문 방식’을 알려주는 체계라고 생각합니다. 누구도 궁금하다고 생각하지조차 않았던 기존의 틀에 의문을 던지고, 그것을 풀어나가는 과정에서는 똑같은 탐구자의 하나가 되어 고민합니다. 각자에겐 각자의 대답이 있음을 인정하며 누구라도 틀릴 수 있음을 잊지 않습니다.

여전히 자유주의를 ‘대답의 체계’로 여기는 사람들은 ‘신자유주의’라는 말을 쓰지만, 사실 이 세상에 신자유주의라는 고정된 실체는 없습니다. 다만 끊임없이 변화하는 자유주의가 존재할 뿐입니다.

과오를 포섭하고 반성하고 개선하는 것이야말로 자유주의의 본질입니다. 이것은 타인을 베기 위한 검(sword)이 아니라 자기 자신을 위한 면도날(razor)입니다. 물음표를 없애는 사상이 아니라 그 물음표[問]들을 가지고 새로운 문(門)을 열어보라고 응원해주는 체계입니다.

9. 자유주의라는 이름의 검은 백조

백조(白鳥)는 모두 하얗다는 명제를 부순 것은 검은 백조 단 한 마리의 출현이었습니다. 우리 삶엔 이렇게 작은 가능성이 전체를 뒤흔드는 놀라운 사건들이 얼마든지 일어납니다. 어쩌면 그런 것들이 바로 인생의 묘미이자 진면목입니다.

세상엔 똑똑한 사람들이 참 많지만 그들은 ‘이 세상엔 그냥 두는 게 나은 일들도 많다’는 점을 종종 잊곤 합니다. 지난 10년간 저는 그들의 망각을 향해 글을 쓰고 싶었고, 지금도 그렇게 하고 있습니다.

그 과정에서 반드시 자유주의(Libertarianism)라는 표현을 명시적으로 할 필요는 없을 수도 있습니다. 때로는 그 이름을 가리는 게 오히려 자유주의적일 수도 있다는 고민을 요즘 하고 있습니다. 반드시 남들이 나를 자유주의자로 인정하고 알아봐주지 않더라도 묵묵히 나의 관점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것. 그 과정을 공유하는 것. 그게 중요한 것 아닐까요.

자유주의의 프리즘으로 세상을 바라보면 남과의 비교나 세속적 기준의 명예는 더 이상 필요도 의미도 없어집니다. 그저 나답게 생각하고 말하면 됩니다. 또한 남들이 그러는 걸 사심 없이 지켜보면 됩니다. 타인의 자유를 훼손하는 게 아니라면 관용의 시선을 가지고서 말입니다.

타인에 대한 관용을 유지하는 사람은 결국 불완전한 과거의 자신을 용서하고 알 수 없는 미래의 자신에게 희망을 갖는 법을 배우게 됩니다. 자유주의자의 과거 현재 그리고 미래는 확실한 게 없어서 더욱 흥미진진한 미지의 매력으로 넘쳐납니다.

이상의 것들이 제 인생에 날아오른 자유주의라는 이름의 검은 백조가 저에게 선물해 준 것들입니다. 모든 사람이 자유주의자가 될 필요는 없을 것입니다. 다만 한 번쯤 이 멋진 사상의 향기에 몸을 맡겨보는 건 그 자체만으로도 참 멋진 일이라는 생각을 해 봅니다. 멋진 안경이 완벽한 행복을 담보하지는 못하겠지만, 적어도 우리의 삶을 풍요롭고 멋지게 만들어 줄 수는 있으니까요.

저의 머리를 스쳐간 수많은 스승님들에게 이 자리를 빌려 다시 한 번 감사의 말씀을 올립니다. [미디어펜=이원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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