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년이 지난 2015년 ‘개혁’은 다시 한 번 한국 경제의 화두로 떠오르고 있다. 이미 저성장 기조가 고착화된 한국 경제의 구조를 근본적으로 바꾸지 않는다면 밝은 미래를 꿈꿀 수 없다는 절박한 위기의식이다. ‘한경비즈니스 지령 1000호’를 맞아 홍재형 전 부총리와 다시 마주 앉았다. 지난 20년간 한국 경제의 발전을 지켜본 경제계 원로로서 향후 우리 경제의 발전을 위한 제언을 아낌없이 쏟아냈다.
1995년 당시 한국 경제의 수장을 맡았습니다. 지난 20년간 한국 경제의 발전 과정을 지켜본 소회가 궁금합니다.
“가장 두드러진 변화는 ‘저성장의 고착화’입니다. 당시만 해도 성장률이 8~9%에 달했는데 지금은 4%도 어려운 시기가 됐으니까요. 가까운 일본과 비교해 보더라도 현재 우리의 소득수준은 일본에 못 미치는데, 이미 흐름은 일본의 ‘잃어버린 20년’으로 가고 있습니다. 고령화 속도는 우리가 일본보다 빠릅니다. 자칫 잘못하면 4% 경제성장률이 또다시 반 토막 날 수 있는 상황이란 겁니다. 그런 점에서 한 가지 아쉬운 게 있다면 박근혜 정부가 국민들에게 ‘위기의식’을 더 고취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렇다면 1995년 당시와 현재 한국 경제의 상황을 비교했을 때 닮은 점과 다른 점은 무엇인가요.
“한 국가의 경제 상황을 판단하기 위해 봐야 할 지표는 크게 다섯 가지입니다. 성장·고용·물가·국제수지·개혁 작업이죠. 제가 재정경제원 장관을 맡았던 1990년대 중반에는 성장이나 고용 지표가 매우 좋았던 시대입니다. 오히려 정부는 업계가 지나치게 과열되는 걸 누르려고 했고 업계는 이 같은 조치를 풀어달라고 요청했죠. 반면 물가는 7%로 지나치게 높았고 국제수지도 적자였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지표상으로는 정반대입니다. 물가나 국제수지 등은 괜찮은데 성장과 고용 지표가 좋지 못합니다. 특히 청년 실업이 심각합니다. 그래서 중요한 게 ‘구조 개혁’입니다. 박근혜 정부가 지난 1월 12일 신년 기자회견에서 ‘경제 혁신 3개년 계획’을 발표했습니다. 그 성과가 어떻게 될지에 따라 향후 한국 경제의 미래를 가늠하게 될 것으로 보입니다.”
창간호 인터뷰 당시 “한 번 개혁했다고 다 끝난 것이 아니라 상황에 따라 지속적으로 개혁 과제가 생긴다”고 강조했습니다. 지난 20년간 한국의 경제정책은 각각의 시기에 맞게 잘 대응해 왔다고 봅니까.
“각각의 정부마다 가장 중요한 경제정책 과제가 있기 마련입니다. 김대중 정부 때는 노동문제를 해결하는 게 가장 큰 과제였는데, 해결하기가 쉽지 않았죠. 노무현 정부는 한미 자유무역협정(FTA)을 성사시킨 것이 큰 성과라고 봅니다. 이명박 정부에서는 미국발 금융 위기 등을 그래도 잘 넘기지 않았나 생각합니다. 하지만 747공약(7% 성장, 국민소득 4만 달러, 세계 7대 강국)은 추락했고 4대강 사업 등에 너무 막대한 자금을 쏟아부은 것도 실책이었다고 봅니다. 박근혜 정부가 최근 발표한 ‘경제 혁신 3개년 계획’은 일단 구조 개혁의 신호탄을 쐈다는 점에서 긍정적입니다. 다만 시기상 아쉬움이 있습니다. 더 빨리 시작했다면 좋았을 텐데 말입니다. 집권 3년 차인 박 대통령이 남은 임기 내에 얼마나 성과를 낼 수 있을지 우려가 있는 것도 사실입니다.”
당시에도 ‘금융실명제’나 ‘부동산실명제’ 등 파격적인 개혁 정책을 이끌었습니다. 이 같은 개혁 정책을 추진하는 과정에서 주변의 반발도 많았을 것 같습니다.
“어떤 개혁이든지 반대 세력에는 그 효과가 직접적으로 아프게 느껴지는 반면 찬성하는 쪽에서는 그 혜택이 간접적으로 느껴지기 마련입니다. 오랜 시간이 지나야 비로소 효과를 느낄 수 있으니까요. 그래서 개혁이 어려운 겁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시 개혁에 성공할 수 있었던 것은 ‘광범위한 국민의 지지’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사실 실명제는 전두환 정부나 노태우 정부 시절에도 몇 차례 시도됐다가 무산되길 거듭했습니다. 그 시기를 거치면서 우리 국민들이 자연스레 실명제에 대해 학습이 된 겁니다. 왜 필요한지, 무엇을 바꿔야 하는지, 그런 것들에 대한 폭넓은 공감대가 갖춰져 있었고 자연스럽게 개혁을 위한 시기가 무르익었다는 게 맞는 표현일 겁니다.”
‘금융실명제’와 ‘부동산실명제’ 시행 이후에 어려움은 없었나요.
“개혁이라는 게 시작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이후 일관성 있게 끌고 나가는 게 더 중요합니다. 실명제만 하더라도 어렵게 시행됐지만 그 뒤에도 어려움이 많았습니다. 오죽하면 국제통화기금(IMF) 위기가 온 게 금융실명제 때문이라는 얘기가 나올 정도였으니까요. 이 때문에 중요한 것은 대통령의 정책 의지입니다. 실명제는 김영삼 정부도 단호한 의지를 갖고 밀어붙였고 국민의 지지가 워낙 탄탄했기 때문에 국회에서도 순탄하게 찬성표를 이끌어 냈습니다. 말하자면 3박자가 잘 갖춰졌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그래서 개혁을 위해서는 ‘소통’이 중요하다는 얘기가 나오는 겁니다. ”
최근에도 ‘규제 완화’가 한국 경제의 큰 이슈입니다. 당시 인터뷰에도 “자유롭게 경쟁할 수 있어야 한국 경제가 장기적으로 발전할 수 있다”고 말했습니다. 향후에도 더 많은 규제 완화가 필요하다고 생각하나요.
“지난 20년간 우리 정부는 지속적으로 규제 완화를 추진해 왔습니다. 하지만 한쪽에서 규제를 완화하더라도 다른 쪽에서 더 많은 규제가 생겨날 수 있습니다. 수많은 규제가 사라졌지만 총량으로 보면 규제가 더 늘어나는 것은 그 때문입니다. 저는 ‘규제 완화’보다 ‘규제 합리화’라는 표현이 더 적합하다고 생각합니다. 무조건 규제를 없애는 게 중요한 게 아니라 상황에 따라 ‘불필요한 규제’를 없애는 게 핵심입니다. 예를 들어 경제가 성장하기 위해서는 기업의 투자를 유도해야 합니다. 기업들의 투자를 막는 규제는 과감히 폐지하는 게 맞습니다. 반면 환경이나 안전 문제의 규제는 더 강화해야 합니다. 다만 새로운 규제가 필요할 때에도 ‘무조건 안전도를 높이겠다’는 태도가 아니라 ‘최소한의 경제적 비용으로 최대의 효과를 얻을 수 있는’ 방안에 대한 고민이 필요합니다.”
당시 인터뷰에서 ‘완전연소’라는 표현이 인상적이었습니다. 조금 더 구체적으로 설명해 주시죠.
“저 역시 양지에만 있었던 사람도 아니고 음지에서 보낸 시절이 적지 않습니다. 그런데 음지에 있더라도 이를 적극 활용하면 오히려 복이 될 수 있는 기회가 오더라고요. 더 중요한 건 이겁니다. 제 자신을 ‘완전연소’시키면 나만 활활 불타오르는 게 아닙니다. 내 주변의 사람들도 같이 불타오릅니다. 리더가 솔선수범하면 자연스레 전파되는 겁니다. 그런 차원에서 지금이야말로 국가 지도층에 있는 사람들이 ‘위기의식’을 갖고 ‘완전연소’가 필요한 시기라고 생각합니다. 개인적으로는 박근혜 대통령뿐만 아니라 지금 경제 지도층에 있는 사람들이 지금의 한국 상황에 대한 위기의식이 적은 게 아닌가 싶습니다. 예전에는 대통령부터 말단 관료까지 경제지표를 사소한 것 하나라도 놓치지 않기 위해 꼼꼼히 살폈습니다. 그런데도 예상치 못한 위기를 겪어야 했고 이를 극복하기 위해 불철주야 노력했습니다. 지금 경제 관료들도 그만큼의 위기의식을 갖고 ‘완전연소’를 하고 있는지 묻고 싶습니다.”
한국 경제가 지속적으로 성장하기 위해서는 ‘근본적인 구조 개혁’이 필요하다는 얘기들이 많이 나옵니다.
“영국이나 독일과 같은 선진국들도 구조 개혁을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한국은 저성장에 고령화까지 겹치면서 그 어느 때보다 구조 개혁이 필요한 시기입니다. 1990년대 중반만 해도 9%씩 올라가던 경제성장률이 반 토막 이하로 떨어졌습니다. 저는 지금의 상황을 20년 전인 1995년과 비슷하다고 보고 있습니다. 1995년에는 지표상으로 한국 경제의 펀더멘털이 모두 좋았는데도 1997년에 위기가 닥쳤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위기가 되는 지표들을 알고 있지 않습니까. 당연히 대비해야 하는 상황입니다. 선진국들도 성장률이 더 떨어지지 않도록 하기 위해 애쓰고 있는데, 한국은 이와 같은 경제정책이 더 필요한 것 아니겠습니까.”
그렇다면 지금 현재 한국 경제가 발전하기 위해 가장 시급한 문제는 무엇인가요.
“박근혜 정부의 4대 구조 개혁 분야는 ‘노동·교육·금융·공공’입니다. 그중에서도 개인적으로는 ‘노동·교육’ 두 개 분야가 가장 시급하다고 생각합니다. 이 정부의 명운을 걸고 집중해야 하는 문제입니다. 해결책은 명확합니다. ‘사람이 필요한 곳에 제때 갈 수 있도록 하는 것’이면 충분합니다. 노동 개혁은 사실 지난 20년간 제기돼 온 문제입니다. 정규직은 되기가 너무 힘들고 이 때문에 업무량에 과부하가 걸릴 수밖에 없습니다. 반면 비정규직은 임금이 너무 적은데다 보호 장치가 거의 없습니다. 그것부터 바로잡아야 합니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선 노사정위가 아니라 정부나 국회가 나서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교육 문제도 마찬가지입니다. 현재 사범대학을 졸업한 사람 7명 중 1명만 선생님이 됩니다. 반면 간호대학은 100% 취업이 됩니다. 답이 명확한 겁니다. 사람이 많이 필요한 곳과 아닌 곳을 살펴보고 그에 따라 더 많은 사람이 필요한 곳에 더 많은 인력이 교육받을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이민정책도 과감해질 필요가 있습니다. 독일이 다른 유럽 나라들보다 제조업이 건실한 데는 터키나 스페인 등으로부터 유입되는 이민자들의 영향을 무시하지 못합니다. 한국도 2017년이면 생산 가능 인구가 정점에서 내려가게 됩니다. 기존의 경제성장 전략만 가지고는 한계가 있습니다. 발상의 전환이 필요한 시기입니다.”
한국 경제가 오랫동안 어려움을 겪으면서 ‘희망’을 많이 잃어버린 듯합니다. 우리 경제의 희망은 어디서 찾을 수 있을까요.
“요즘 젊은 세대를 ‘4포세대’, ‘5포세대’라고 하더군요. 그러나 저는 젊은 사람들은 물론 지금 세대에게 희망이 없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한국 경제의 희망은 명백하게 ‘한국 국민의 DNA’에서 찾을 수밖에 없습니다. 불과 10년 전, 20년 전만 보더라도 알 수 있습니다. 가족들을 위해, 돈을 벌기 위해 뜨거운 중동에 나가 횃불을 켜 놓고 밤새도록 일했던 게 우리 민족입니다. 신나게 일할 수 있는 여건을 만들어 주면 한국 국민은 누구보다 열정을 바쳐 일하는 민족입니다. 물론 과거의 성공이 앞으로의 성공을 보장하지는 못합니다. 하지만 한 번 성공했던 성취감을 맛본 민족, 그 기억을 가진 민족은 앞으로도 성공할 가능성이 높다고 생각합니다.
또 하나 희망을 찾을 수 있는 게 통일입니다. ‘통일 대박론’이라고 하잖습니까. 말이 중요한 게 아니라 개성공단과 같은 교류 협력을 점차 확대하는 등의 실질적인 노력이 뒤따라야 합니다. 더욱이 통일이 되면 노동문제도 자연스레 해결됩니다. 그만큼 저출산·고령화가 완화될 테니까요. 희망이 없다고 좌절하면 그건 우리 다음의 세대에게 굉장히 잘못하는 일입니다. 어떤 어려움 속에서도 희망을 찾아내고 우리가 나아갈 길을 찾아내는 게 우리 세대에게 주어진 몫이라고 생각합니다.”
이정흔 기자 vivajh@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