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5 전쟁의 아수라장 속에 부산으로 밀려온 젊은 부부가 있었다. 남편의 이름은
이희재, 아내의 이름은 김경현이었다. 이희재는 강원도 정선에서 한학을 가르쳐온 학식 있는 집안의 자제로 배재학당과 연세대학교의 전신인
연희전문에서 수학물리과를 다녔다. 전쟁 전 그의 직업은 교사였다. 김경현은 이화여자대학교의 전신이 이화여전 출신으로 성악으로 입학하여 피아노과를
졸업한 재원이었다. 클래식을 전공한 어머니 덕분에 음악적인 소양이 남달랐던 이수만을 대중음악의 세계로
인도한 것은 그의 작은 형 이수영이었다. 이수영은 이수만에서 비틀즈를 들려주었고 이수만은 비틀즈를 뿌리로 하여 레드 제플린, 딥 퍼플 등으로
청취 영역을 확장해 나간다. 그것은 남성 뮤지션과 여성 팬들이 만들어내는 팽팽한 긴장감과 측정불가의 폭발력이었다. 이수만은 음악과 비즈니스 그리고 팬덤(특정한 인물이나 장르를 열정적으로 좋아하는 사람들 혹은 그 사회 현상)의 의미를 어설프게나마 더듬어봤을 것이다. 아울러 외국 가수가 한국에서 음악으로 팬들을 열광시키는 일이 그 반대이어야 할 이유가 없다는 근거 불충분의 이상한 오기까지. 1971년 이수만은 서울대학교 농과대학 농업 기계과에 입학한다. 아버지는 아들이 학자가 되기를 바랐고 이수만은 집안의 기대와 음악적인 욕구 사이를 갈등하며 대학시절을 보내게 된다. 이수만의 음악적 여정은 세시봉의 뒤를 이은 명동 청개구리 홀에서 본격적으로 시작된다. 이수만은 당시 음악적 파트너였던 백순진과 포크 그룹 '4월과 5월’을 결성하여
무대에 서기 시작한다. '4월과 5월’의 데뷔 앨범은 DJ 이종환의 도움으로 세상에 나왔다. 당시 음반을 내는 데에는 20만 원 정도가 들었는데
1인당 국민 소득이 10만원이 채 되지 못했던 시기라 이들은 그저 음반을 내주는 것만으로도 감지덕지였다. 1977년 제 1회 대학가요제의 사회를 맡아 이수만은 재치 있는 진행으로 강한 인상을 남긴다. 1980년 11월 30일, 이수만에게는 친정이나 다름없던 TBC가 신군부의 언론통폐합 조치로 문을 닫는다. 이를 계기로 이수만은 미국 유학을 결심한다. 연예계 생활 10년의 결산은 이수만에게 그렇게 자의반 타의반으로 다가왔다. 그는 플로리다주 멜버른에 위치한 FIT(플로리다 공대)에 입학한 최초의 한국인 학생이 되었다. 공학도로 인생의 방향을 설정하긴 했지만 한번 빠졌던 음악적 자장磁場에서 이수만은
쉽게 탈출하지 못했다. 특히 1981년 8월 1일 뉴욕에 본부를 둔 케이블 TV의 형태로 개국한 MTV는 그에게 큰 충격이었다. 듣는 음악에서
보는 음악으로 대중음악의 얼굴이 바뀌고 있었다. MTV의 문화적 세례를 받은 이수만은 뮤직 비디오 제작이라는 영역에 관심을 갖게 된다.
연예계로 돌아가지 않겠다는 인터뷰까지 하고 온 그에게 심정적인 변화가 생긴
것이다. 이수만은 다시 작곡에 손을 댔다. 24시간 음악의 물결이 출렁이는 MTV는 한 청년의 삶을 극적으로 바꿔놓았다. 음악적인 소득이
MTV였다면 개인적인 소득은 평생의 동반자 김지혜를 만난 것이다.
그가 홍종화, 곽영준과 만든 프로젝트 밴드 CPU는 외면당한다. 유학시절부터 이수만의 오랜 꿈이었던 컴퓨터를 이용한 음악은 아직 그 시기가 오지 않았던 것이다. 1984년 9월 MTV 음악시상식의 하이라이트는 마돈나가 장식했다. 2년의 시차를
두고 한국에서는 김완선이 데뷔한다. 만 열 일곱의 나이로 김완선은 이문세의 발라드와 함께 가요계를 양분한다. 볼륨감 있는 몸매와 수준급의 춤
솜씨로 순식간에 가요계의 한 면을 장악한 김완선을 키운 것은 그녀의 이모 한백희였다. “음악에서 예전처럼 주먹구구식으로 하던 시대는 끝났어. 나는 전문적인 프로덕션 시스템을 도입할 예정이야. 회사를 하나 차려서 음반 기획과 제작을 모두 하려고 해. 그렇게 만든 노래들을 방송국에 소개하는 일도, 그리고 팬들을 관리하는 일도 지금부터는 체계적으로 분업화해서 처리해야 하거든. 여러 팀의 가수들을 동시에 회사에 두고서 일을 해나가려면 그 방법밖에 없어. 그러자면 그런 일을 전문적으로 담당해 줄 인력이 필요해.” 최진열은 이수만의 제안을 받아들인다. 인기 절정의 DJ로서는 부러울 게 없었지만
그에게도 갈증이란 게 있었다. 최진열의 합류는 그를 따르던 청소년 춤꾼들의 합류를 의미했다. 허현석, 이주노, 양현석이 그 이름들이다. 이수만은
그 중 하나인 허현석을 '남자 김완선’으로 만들기로 결정한다. 본래 기업가 열전이란 인물과 업적이 3 : 7 정도의 비율로 배정되는 게
정석이다. 그러나 이수만의 경우 그의 행적과 사업적인 성취를 분리하는 것이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 따라서 이수만의 여정을 따라가는 것 자체가
한국 음악 산업의 발전을 살피는 것과 같은 의미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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