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도] SM엔터테인먼트 창업자 이수만 (2) - 약사略史 이수만

자유경제원 / 2015-04-06 / 조회: 2,910       업코리아
자유경제원은 한국의 기업가 시리즈를 연재하고 있다. 숭실대 문예창작학과 남정욱 교수가 SM엔터테인먼트 창업자 이수만을 정리하였다.


약사略史 이수만  

   
▲ SM엔터테인먼트 창업자 이수만

6.25 전쟁의 아수라장 속에 부산으로 밀려온 젊은 부부가 있었다. 남편의 이름은 이희재, 아내의 이름은 김경현이었다. 이희재는 강원도 정선에서 한학을 가르쳐온 학식 있는 집안의 자제로 배재학당과 연세대학교의 전신인 연희전문에서 수학물리과를 다녔다. 전쟁 전 그의 직업은 교사였다. 김경현은 이화여자대학교의 전신이 이화여전 출신으로 성악으로 입학하여 피아노과를 졸업한 재원이었다. 
 
부산으로 피난을 오기 전 두 사람 사이에는 두 아들이 있었다. 셋째는 전쟁이 발발한 지 만 2년이 되던 해 태어났다. 다른 아이들보다 조금 체구가 작았던 이 아이가 나중에 대한민국 음악 산업을 좌지우지하게 될 이수만이다.

전쟁이 끝나고 다섯 식구는 경부선 열차를 타고 서울로 입성한다. 이들이 새로 둥지를 튼 곳은 인왕산 자락의 부암동이었다. 이곳에서 이수만은 청운국민학교에 입학한다. 당시 이수만은 얌전하고 내성적인 성격이었다. 이수만은 어려서부터 공부에 두각을 나타냈다. 초등학교를 전교 다섯 손가락 안에 드는 등수로 졸업하고 명문이었던 경복중학교에 입학하는데 중학교 입시가 있던 시절이었고 이는 나중에 경기고, 경복고, 서울고 등으로 이어지고 서울대로 마감하는 전형적인 엘리트 코스였다. 그가 입학했을 당시 경복고등학교에는 3학년에 '교내 2대 명물’이었던 임성훈과 최병걸이 재학하고 있었다. 

클래식을 전공한 어머니 덕분에 음악적인 소양이 남달랐던 이수만을 대중음악의 세계로 인도한 것은 그의 작은 형 이수영이었다. 이수영은 이수만에서 비틀즈를 들려주었고 이수만은 비틀즈를 뿌리로 하여 레드 제플린, 딥 퍼플 등으로 청취 영역을 확장해 나간다.

항공대학에 진학한 이수영은 입학과 동시에 '활주로runway’를 결성하여 음악적인 갈증을 푼다. 송골매 멤버로 알려진 배철수가 이 런웨이의 6기 멤버다. 형이 대학에서 밴드를 결성한 것을 따라하듯 이수만은 경복고등학교에서 '후로그Frog'라는 밴드를 만든다. 아마도 서양 팝의 카피 밴드였을 것으로 추정되는 이 그룹에서 이수만은 팀의 리더을 맡는다. 

이는 밴드 음악을 조금이라도 아는 사람은 다 아는 것인데 밴드의 리더는 일반 멤버들과 달리 밴드의 운영이라는 짐 하나를 더 짊어진 존재다. 그의 리더 역할은 집단과 자신의 영역에서 최고가 되려는 그의 욕망과 기질을 반영한다. 1969년 클리프 리차드의 내한 공연이 한국 사회를 왈칵 뒤집어 놓는다. 음악도 음악이었지만 고등학생이었던 이수만은 클리프 리차드 현상에서 음악 이외의 것을 발견했다.

그것은 남성 뮤지션과 여성 팬들이 만들어내는 팽팽한 긴장감과 측정불가의 폭발력이었다. 이수만은 음악과 비즈니스 그리고 팬덤(특정한 인물이나 장르를 열정적으로 좋아하는 사람들 혹은 그 사회 현상)의 의미를 어설프게나마 더듬어봤을 것이다. 아울러 외국 가수가 한국에서 음악으로 팬들을 열광시키는 일이 그 반대이어야 할 이유가 없다는 근거 불충분의 이상한 오기까지. 

1971년 이수만은 서울대학교 농과대학 농업 기계과에 입학한다. 아버지는 아들이 학자가 되기를 바랐고 이수만은 집안의 기대와 음악적인 욕구 사이를 갈등하며 대학시절을 보내게 된다. 이수만의 음악적 여정은 세시봉의 뒤를 이은 명동 청개구리 홀에서 본격적으로 시작된다.

이수만은 당시 음악적 파트너였던 백순진과 포크 그룹 '4월과 5월’을 결성하여 무대에 서기 시작한다. '4월과 5월’의 데뷔 앨범은 DJ 이종환의 도움으로 세상에 나왔다. 당시 음반을 내는 데에는 20만 원 정도가 들었는데 1인당 국민 소득이 10만원이 채 되지 못했던 시기라 이들은 그저 음반을 내주는 것만으로도 감지덕지였다.  

당연히 제대로 된 계약서가 있을 리 없었고 판매수익에서는 완벽하게 소외되는 것이 또 그들이었다. 대학생 포크가수들은 아마추어와 상업 가수의 중간쯤에 어정쩡하게 위치하고 있었고 이들이 만들어내는 수익은 기획사와 음반사와 매니저 아닌 매니저였던 이종환 사이에서 관행적으로 '적당히’ 배분되었다. 

1974년 이수만은 방송국으로 진출한다. 개그맨 박성원이 진행하던 '비바팝스’라는 라디오 프로그램의 후속 진행자가 된 것이다. DJ로서의 이수만의 재질이 빛나던 시절이다. 이수만의 입담과 프로그램 진행 능력은 TV로 이어졌다.
 
  

1977년 제 1회 대학가요제의 사회를 맡아 이수만은 재치 있는 진행으로 강한 인상을 남긴다. 1980년 11월 30일, 이수만에게는 친정이나 다름없던 TBC가 신군부의 언론통폐합 조치로 문을 닫는다. 이를 계기로 이수만은 미국 유학을 결심한다. 연예계 생활 10년의 결산은 이수만에게 그렇게 자의반 타의반으로 다가왔다. 그는 플로리다주 멜버른에 위치한 FIT(플로리다 공대)에 입학한 최초의 한국인 학생이 되었다.  

공학도로 인생의 방향을 설정하긴 했지만 한번 빠졌던 음악적 자장磁場에서 이수만은 쉽게 탈출하지 못했다. 특히 1981년 8월 1일 뉴욕에 본부를 둔 케이블 TV의 형태로 개국한 MTV는 그에게 큰 충격이었다. 듣는 음악에서 보는 음악으로 대중음악의 얼굴이 바뀌고 있었다. MTV의 문화적 세례를 받은 이수만은 뮤직 비디오 제작이라는 영역에 관심을 갖게 된다.
  

연예계로 돌아가지 않겠다는 인터뷰까지 하고 온 그에게 심정적인 변화가 생긴 것이다. 이수만은 다시 작곡에 손을 댔다. 24시간 음악의 물결이 출렁이는 MTV는 한 청년의 삶을 극적으로 바꿔놓았다. 음악적인 소득이 MTV였다면 개인적인 소득은 평생의 동반자 김지혜를 만난 것이다. 

디자인을 전공하던 김지혜는 이수만과 아홉 살 차이였지만 문화라는 양식을 공유하던 둘에게 장벽은 없었다. 1984년 이수만과 김지혜는 LA 토랜스 감리교회 목사 앞에 팔짱을 끼고 나란히 선다. 이수만은 MTV를 즐긴 것이 아니라 '공부’했다. 그는 새로운 사실을 알게 되었다. 시청자들이 MTV를 보는 가장 큰 이유가 스타의 패션을 보기 위해서라는 설문 조사 결과는 이수만에게 새로운 인식의 문을 열어주었다. 


패션에 이어 가수의 율동을 보기 위해서가 두 번째였고 노래를 듣기 위해서는 세 번째였다. 이수만의 사업적인 '촉’은 이 부분에서 예리하게 발동한다. 이미 클리프 리차드 공연에서도 음악 이상의 이면을 곰곰이 따져봤던 혜안이 아니던가. 그는 근시일내에 MTV가 한국에 상륙할 것이라는 사실과 그것이 대중음악의 판도를 바꿔놓을 것이라는 사실을 간파했다. 

집안의 기대는 아직 완전히 이수만의 한쪽 발목을 잡고 있었다. 고민은 오래 가지 않았다. 그는 컴퓨터공학 석사 학위로 받을 수 있는 초임 연봉 3만 달러를 포기했고 국내 대학에서의 강의를 거절했다. 음악으로 발길을 돌린 그는 학교에서 배운 컴퓨터 공학을 음악과 융합한다면 아날로그 방식과는 전혀 다른 획기적인 변화를 가져올 것으로 믿었다. 이수만은 1985년 6월 귀국한다.

그는 귀국 인터뷰에서 “볼 것이 있고 들을 것도 있는 가수로 팬들에게 선 보이겠다”는 매우 상징적인 워딩으로 연예계 은퇴를 번복한다. 그의 연예계 복귀는 KBS FM 라디오의 '젊은이의 노래’로 이루어졌고 이후 같은 방송국의 '연예가 중계’의 메인 MC로 대중과 만난다. 음악 작업은 조심스럽게 진행된다. 그의 기획과 대중들의 취향 사이에는 아직 간극이 있었다. 

그가 홍종화, 곽영준과 만든 프로젝트 밴드 CPU는 외면당한다. 유학시절부터 이수만의 오랜 꿈이었던 컴퓨터를 이용한 음악은 아직 그 시기가 오지 않았던 것이다. 

1984년 9월 MTV 음악시상식의 하이라이트는 마돈나가 장식했다. 2년의 시차를 두고 한국에서는 김완선이 데뷔한다. 만 열 일곱의 나이로 김완선은 이문세의 발라드와 함께 가요계를 양분한다. 볼륨감 있는 몸매와 수준급의 춤 솜씨로 순식간에 가요계의 한 면을 장악한 김완선을 키운 것은 그녀의 이모 한백희였다. 

김완선은 인순이에 이은 한백희의 두 번째 작품이었고 한백희는 김완선을 가둬놓다 시피하고 3년이나 모질게 트레이닝 시켰다. 가수를 발굴하여 숙식까지 제공하며 도제식으로 키우는 건 일본 바둑계에서나 쓰던 방식이다. 이수만은 김완선의 데뷔 과정을 주목한다.

그의 머릿속에는 향후 그가 추진할 1990년대 아이돌 프로젝트에 대한 밑그림이 구체화되고 있었다. 이수만은 평소 친분이 있던 클럽 DJ 최진열을 떠올린다. 이후 SM 최초의 매니저가 될 최진열에게 이수만은 이런 제의를 한다. 
 

“음악에서 예전처럼 주먹구구식으로 하던 시대는 끝났어. 나는 전문적인 프로덕션 시스템을 도입할 예정이야. 회사를 하나 차려서 음반 기획과 제작을 모두 하려고 해. 그렇게 만든 노래들을 방송국에 소개하는 일도, 그리고 팬들을 관리하는 일도 지금부터는 체계적으로 분업화해서 처리해야 하거든. 여러 팀의 가수들을 동시에 회사에 두고서 일을 해나가려면 그 방법밖에 없어. 그러자면 그런 일을 전문적으로 담당해 줄 인력이 필요해.” 

최진열은 이수만의 제안을 받아들인다. 인기 절정의 DJ로서는 부러울 게 없었지만 그에게도 갈증이란 게 있었다. 최진열의 합류는 그를 따르던 청소년 춤꾼들의 합류를 의미했다. 허현석, 이주노, 양현석이 그 이름들이다. 이수만은 그 중 하나인 허현석을 '남자 김완선’으로 만들기로 결정한다. 

추구하는 지점은 미국의 팝 스타 바비 브라운이었다. 한남동에서 살았던 허현석은 구슬치기나 딱지놀이 같은 우리나라 어린이들의 놀이 대신 랩이나 브레이크 댄스가 익숙한 독특한 성장기를 보냈다. 이수만이 그를 낙점했을 때 허현석의 나이는 열일곱 살이었다.

이수만은 허현석에게 현진영이라는 예명을 지어주고 두 명의 백댄서를 붙인다. 이 둘이 강남 최고의 춤꾼이었던 강원래와 구준엽이다. 1990년 여름, 흑인 음악과 토끼춤을 장착한 현진영과 와와가 TV화면에 등장했다. 현진영의 손에는 마이크가 들려있지 않았다. 마이크는 귀에 걸어 입 앞으로 연결되는 무선 마이크였다. 

두 손이 자유로워진 현진영은 역동적인 춤으로 무대를 장악했다. 데뷔와 동시에 정상에 올랐지만 인기 절정의 순간에서 현진영은 대마초 흡연 혐의로 추락한다. 자숙의 시간을 거친 후 현진영은 '흐린 기억 속의 그대’로 컴백한다. 그러나 또 다시 대마초 흡연이 그의 발목을 잡았다. 현진영 사건은 이수만에게 경제적 부담으로 남고 가수에 대한 불신으로 이어진다. 
 

본래 기업가 열전이란 인물과 업적이 3 : 7 정도의 비율로 배정되는 게 정석이다. 그러나 이수만의 경우 그의 행적과 사업적인 성취를 분리하는 것이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 따라서 이수만의 여정을 따라가는 것 자체가 한국 음악 산업의 발전을 살피는 것과 같은 의미다.

현진영의 부침을 겪는 동안 이수만은 두 가지 사업 방향을 확신했다. 하나는 컴퓨터 음악이 언젠가는 대세가 될 것이라는 것과 해외 팝 시장으로 진출하는 것이 한국 음악계의 출구가 될 것이라는 사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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