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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적 경제 기본법안의 간추린 내용 초고속 성장을 이룩한 대한민국. 거기에 양극화라는 그늘이 있다. 이 양극화로 인해 대한민국이라는 공동체가 내부로부터 붕괴될 위험에 처했다. 그래서 역사적 소명의식을 가진 의원들이 한국경제의 체제를 개혁해야 한다. 이제까지의 패러다임인 국가의 복지, 자유시장경제를 통한 성장으로는 역부족이다. 대안은 사회적 경제다. 사회적 경제란 사회적 가치를 추구하는 모든 경제적 활동을 의미한다. 여기서 사회적 가치란 “빈곤을 해소하는 복지, 따뜻한 일자리, 사람과 노동의 가치, 협력과 연대의 가치, 지역공동체의 복원 그리고 이러한 것들을 추구하는 사람들의 선한 정신과 의지 등”을 말한다. 그런데, 이러한 사회적 가치를 추구하는 사회적 경제조직들은 자생력이 없다. 그냥 내버려두면 안 된다. 이 자생력 없는 사회적 경제조직들이 살아남고 지속성장할 수 있도록 정부가 적극 지원하고 육성해야 한다. 이상이 '사회적 경제 기본법안’의 간추린 내용이다. 문제는, 세상의 대부분의 일이 그렇듯이, 어떤 법안이나 정책의 의도와 목적이 선하고 훌륭하다고 해서 그것의 효과와 결과까지도 선하고 훌륭하리라는 보장은 없다는 점이다. 오히려 그 반대인 경우가 많다는 것을 우리는 현실에서 심심찮게 목격하고 있다. 이미 200년도 더 이전에 애덤 스미스는 “나는 공공선을 위해 사업을 하는 척하는 사람이 이루어놓은 좋은 일을 결코 많이 알지 못한다.”고 일갈했던 것도 이런 이유가 아니었을까. '사회적’이라는 용어는 '족제비 같은 말’ 근본적으로 '사회적’이라는 말 속에는 자유주의 시장경제에 대한 반감이 내포되어 있다. 또한 이 용어에는 이미 '좋다’ '나쁘다’는 가치판단이 내재되어 있다. 자유시장경제체제는 빈곤을 낳고, 허접하고 차가운 일자리만 만들어내며, 사람과 노동의 소외를 낳고, 협력과 연대를 사라지게 만들며, 경쟁만 부추기고 공동체를 파괴하며, 사람들의 정신까지도 황폐화시키는 나쁜 체제라는 것이다. 반면 사회적 경제는 '빈곤을 해소하는 복지’ '차가운 일자리가 아닌 따뜻한 일자리’ '사람과 노동의 가치’ '협력과 연대의 가치’ '파괴된 지역공동체의 복원’ '사람들의 선한 정산과 의지’ 등 이른바 '사회적 가치’가 추구되는 좋은 체제로 인식된다. 따라서 나쁜 체제인 자유시장경제체제는 마땅히 개혁되어야만 하며, 그 방향은 사회적 경제라고 결론 내린다. 그런데, 하이에크는 자신의 저서 『치명적 자만』에서 '사회적’이라는 말을 일컬어 '족제비 같은 말(weasel word)’이라고 표현했다. 족제비가 알의 겉은 멀쩡하게 남겨두고 속의 내용물만 전부 빨아먹은 것을 빗대어 표현한 것으로, 사회적이라는 단어가 수식하는 명사의 겉은 멀쩡한데 그 내용은 흔적도 없이 사라진다는 뜻이다. '사회적 경제’에서 사회적이라는 말이 수식하는 '경제’는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그 자리를 '정치’가 차지할 것이다. 사회적 경제에서 '경제논리’는 사라지고, 그 자리를 '정치논리’가 대신할 것이다. 역사적으로 볼 때도 사회적이라는 용어는 정치권의 권력을 강화하고 정부가 큰 정부로 가는 길을 열심히 도와 왔다. 이러한 정황은 법안 내용에서도 이미 파악될 수 있다. 법안에는 “정부는 사회적경제의 금융기반 조성과 사회적경제조직의 지원에 필요한 재원을 확보하기 위하여 사회적 경제 발전기금을 설치, 운영한다.”고 하면서 “기금은 기획재정부장관이 운용, 관리한다.”고 하고 있다. 다시 말해 자금줄을 정부가 쥐고, 자원배분의 주도권을 행사하겠다는 이야기다. 나아가 대통령 소속의 사회적경제위원회, 시도(市道) 사회적경제위원회를 조직하고, 전국민 지역단위, 업종 및 분야단위의 협의회를 조직하도록 하고 있다. 다시 말하면 사회적 경제라는 이름으로 정부가 자금과 조직을 장악하고 통제하게 될 것이다. 결국 사회적 경제는 사회주의 통제경제의 변종이 되거나 기껏해야 관치경제의 전면적 부활에 불과하게 될 것이다. 원시공동체에 대한 끝없는 향수 '사회적’이라는 용어는 현대 대규모 사회에서의 인간관계(즉, 자생적 질서)를 소규모 집단에서의 인간관계(즉, 원시공동체적 질서)와 접목하거나 대체하고자 하는 시도이다. 따라서 사회적이라는 말 속에는 공동으로 달성해야 할 정치적 목적과 그리고 이를 달성하기 위한 유대감이 전제되고 있다. 물론 원시공동체 시절에는 지역 구성원들 간 공동의 이해와 목적이 존재할 수 있다. 경제활동의 패턴이 동일할 수 있기 때문이다(예: 마을 구성원 전체가 농민). 그래서 '공동의 욕구를 가진 사람들’이 “따뜻한 복된 마을 공동체”(이른바 '따복마을 건설’: 남경필 경기도지사)를 만들 수도 있다. 하지만 현대의 대규모사회에서 이런 따복마을을 꿈꾼다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지역 구성원이라고 해도 이들의 이해와 경제활동의 다양성으로 인해 공동의 이해를 도출하기가 사실상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회적 경제에서는 '구성원 상호 간의 협력과 연대’를 추구하고, '지역공동체의 복원과 발전’을 도모한다고 하고 있다. 이것은 5,000만 명의 국민이 살고 있는 현재의 대한민국을 100명, 200명이 옹기종기 모여 살던 원시공동체 시절의 '연대, 협동, 단결, 공동체’가 강조되던 시절로 복귀시키고자 하는 망상이다. 사회적 경제는 원시적 경제로 복귀하려는 시도에 다름 아니다. '치명적 자만’을 부리고 있는 정치권 사회적 경제는 자생적 질서인 시장경제 대신에 인위적인 자원배분 방식을 우선시킨다. 그리고 이를 통해 빈곤해소, 따뜻한 일자리, 협력과 연대의 가치 등 사회적 가치를 구현할 수 있다고 한다. 이는 정부 관료들을 비롯한 그 어떤 사람, 그리고 그 사람들로 이루어진 어떤 조직일지라도 그들이 갖고 있는 능력과 정보가 매우 제한적이라는 사실을 망각한 주장이다. 이러한 인간의 결함을 보완하여 정보가 전달되고 수집되고 가공되고 활용되도록 하는 시스템이 시장인데, 그 시장을 인간의 이성과 지식으로 대체하겠다는 것이니 대단한 '치명적 자만’을 부리고 있는 것이다. 1차원적 시각 사회적 경제 기본법안의 출발점 중의 하나는 자유시장경제에서는 협력과 연대가 배제되고 경쟁만이 강조된다고 하는 점이다. 그래서 사회적 경제를 통해 사회적 가치인 '협력과 연대’를 되살려야 한다는 것이다. 이런 시각은 시장경제를 경쟁만이 지배하고 협력과 연대가 배제된 비정한 시스템으로 보는 것으로서, 시장을 매우 단편적이고 1차원적으로만 파악하고 있다. 일찍이 애덤 스미스는 상품의 공급자나 상인들이 자신의 이익을 추구하는 과정에서 비록 의도하지 않았지만 타인이 원하는 것을 잘 제공한다는 점을 밝혔다. 시장경제에서의 성공은 바로 타인이 원하는 것을 가장 잘 제공한 사람에게 내리는 상이다. 그리고 이것은 바로 협력과 연대의 산물이다. 비록 의도하지는 않았지만, 보이지 않는 손의 작용을 통해 자연스럽게 협력과 연대가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사회적 경제를 주장하는 사람들은 이 부분을 읽지 못한다. 그들은 눈에 보이는 협력과 연대, 누군가의 지시와 명령 등에 의해 이루어지는 협력과 연대만을 파악하고, 반면에 눈에 보이지 않는 광범위한 시장에서의 협력과 연대를 보지 못하는 1차원적 시각을 갖고 있다. 그러다보니 시장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상상도 할 수 없을 만큼 엄청난 규모의 협력과 연대를 무시하고 그 대신에 인위적으로 협력과 연대를 만들고자 하는 시도를 하는 것이다. 사회적 경제의 종착지는 사회주의 사회적 경제는 사회주의 통제경제의 변종으로서 원시공동체에 대한 향수를 가진
사람들의 원시적 경제로의 복귀 시도이다. 이들은 자원배분 메커니즘을 시장의 '보이지 않는 손’ 대신에 정부의 '보이는 손’으로 대체하고자 한다.
또한 이들은 명령과 통제 등에 의한 눈에 보이는 협력과 연대만을 중시하며, 시장에서의 눈에 보이지 않는 광범위한 협력과 연대를 보지 못하고
있다. 이런 근본적 문제들을 갖고 있는 사회적 경제는 시장과 개인의 자유에 대한 정부의 개입을 확대시키고, 정부의 몸집과 권력을 더욱 크게 만들
것이다. 만약 사회적 경제가 우리 사회의 지배적인 경제 체제가 된다면, 그것은 다름 아닌 사회주의가 될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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