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거일은 대전상업고등학교(현 우송고등학교 전신)를 거쳐 서울대학교 상대 경제학과를 나온 뒤 중소기업은행을 비롯하여 기업, 연구소 등에 16년간을 근무하다가 1983년에 소설창작에 전념하기 위해 직장을 그만두고 자유생활을 선언하였다. 1987년 소설 《비명을 찾아서》로 등단하였는데 이 소설은 대체역사소설로는 드물게 한국 주류 문학계에서 관심받는 소설에 속한다. 이후, 소설에 국한하지 않고 시와 소설을 다수 발표하였다. |
지도력의 본질 측천무후
▲ 복거일 |
지도력이 발휘되는 것을 볼 때면, 우리는 이내 그것을 인식한다. 그러나 지도력을 정의하기는 무척 어렵다. 정치학자들과 경영학자들의 끈질긴 노력에도 불구하고, 지도력의 본질은 아직 제대로 밝혀지지 않았다. 정치 지도자들이 지도력을 제대로 펼치지 못해서 우리 사회가 큰 어려움을 맞은 지금, 동양 역사에서 가장 뛰어난 지도력을 보인 통치자들 가운데 한 사람인 측천무후(則天武后)의 삶을 살피는 것은 그래서 뜻이 작지 않을 것이다.
측천무후는 당(唐) 초기 624년에 상인이었던 무씨(武氏)가문에서 태어났다. 빼어난 미모 덕분에 그녀는 14살 때 태종(太宗, 598~649)의 후궁으로 뽑혔는데, 당시 태자였던 고종(高宗, 628~683)이 그녀를 보고 사모하게 됐다. 그러나 태종이 죽자, 그녀는 다른 궁녀들과 함께 장안(長安)의 감업사(感業寺)의 비구니가 되었다. 뒷날 태종의 5주기에 고종이 그 절을 찾았을 때, 두 사람이 다시 만났고, 옛정이 되살아나, 그들은 함께 눈물을 흘렸다.
그 일은 곧 황후 왕씨(王氏)에게 알려졌다. 마침 그녀는 숙비(淑妃) 소씨(蕭氏)가 고종의 사랑을 받는 것을 시샘하던 참이었다. 그래서 그녀는 비구니 무씨에게 머리를 기르도록 명하고, 이어 고종에게 그녀를 궁궐로 부르도록 권했다. 그때 무씨는 이미 서른한 살이었고 고종보다 네 살이나 많았다. 그러나 재색을 겸비한 그녀는 이내 황제의 사랑을 독차지했다. 뜻밖의 일에 놀란 황후는 숙비와 연합해서 그녀를 헐뜯었으나, 헛일이었다.
대신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이듬해 황후와 숙비는 모두 폐해졌고 무씨가 황후가 됐다. 쫓겨난 두 여인들은 뒤에 무씨에게 참살됐다. 황후가 되자, 무씨는 정치적 수완을 발휘해서 빠르게 권력을 움켜쥐었다. 먼저, 그녀는 고종을 설득해서 조정을 장안에서 낙양(洛陽)으로 옮겼다. 그렇게 함으로써, 그녀는 제국의 서쪽 지역을 기반으로 한 조신(朝臣)들의 세력을 약화시키고 대신 동쪽의 인재들을 등용해서 자신의 정치적 기반을 넓힐 수 있었다.
고종이 병 때문에 국사를 제대로 챙길 수 없었다는 사정도 그녀를 도왔다. 그래서 고종의 치세 후기에 그녀는 당의 실질적 통치자가 됐고, 뛰어난 정치적 재능으로 나라를 잘 다스렸다. 683년에 고종이 죽자, 그녀의 아들인 중종(中宗)이 즉위했는데, 태후가 된 무씨는 권력을 계속 잡았다. 중종이 실권을 쥐려는 태도를 보이자, 그녀는 그를 폐위하고 어린 아들을 예종(睿宗)으로 세워 권력을 유지했다. 그리고 조신들과 종실들을 포함한 반대 세력들을 제거하고 자신의 집안 사람들을 등용했다.
그녀의 그런 전횡은 당연히 황실과 가까운 사람들의 불만과 저항을 불렀다. 684년 서경업(徐敬業)은 제국 동남부 양주(揚州)에서 반란을 일으켰고, 중종의 복위를 내세운 그 반란은 큰 호응을 얻어서 이내 10만이 넘는 병력이 모였다. 그러나 서경업의 반군을 무씨가 보낸 토벌군에게 연패했고 서경업은 부하들에게 죽었다. 서경업의 반란이 실패하자, 무씨는 반대 세력들을 더욱 무자비하게 숙청하면서 자신이 황제가 되기 위한 준비를 조직적으로 했다.
그래서 새로운 역법을 시행하고, 조라는 이름을 쓰기 시작했다. 690년 마침 내 그녀는 즉위하여 성신황제(聖神皇帝)라는 칭호를 받고 나라 이름을 주(周)로 고쳤다. 야심이 컸던 터라, 무씨는 명실상부한 황제가 되려고 애썼다. 그녀는 남복을 하고 면류관을 쓰고서 직접 신하들을 만나 국사를 처리했다. 남성 황제들처럼 후궁도 두었으니, 공학감(拱鶴監)을 두어 남첩들을 관장하게 하고 그들에게 내공봉(內供奉)이란 이름을 내렸다. 무씨가 황제가 된 뒤의 치적에 대해선 알려진 것이 적다. 후세의 사가들이 그녀를 폄하해서 그저 음탕한 여인으로 그렸을 뿐 그녀의 통치에 대해선 제대로 기록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분명한 것은 그녀의 통치가 상당히 성공적이었다는 점이다. 안으로는 사회적 혼란이 없었고, 재위 초기 서경업의 기병을 빼놓고는, 반대 세력읠 저항이나 반란도 없었다. 밖으로는 외족의 침입으로 영토가 크게 줄어들지 않았다. 특히 시사적인 것은 그녀가 늙고 병들어서야 권력을 내놓았고, 그녀가 죽은 뒤에도 그녀의 딸인 태평공주(太平公主)가 황제가 되려는 야심을 품었을 만큼 그녀의 세력이 온존했다는 사실이다. 712년 그녀의 손자인 현종(玄宗, 685~762)이 즉위해서 정치가 안정되자, 바로 당의 극성기인 ‘개원지치(開元之治)’가 나왔다는 점도 시사적이다.
만일 그녀가 나라를 제대로 다스리지 못했다면, 그녀가 권력을 놓은 지 채 10년도 아니 된 때에 갑자기 성세가 나오기 어려웠을 터이다. 704년 만80세가 된 무씨가 병이 들어 여러 달 조정에 나오지 못하자, 조신들은 금군을 동원해서 그녀의 총애를 받은 ‘후궁’들인 장역지 형제를 죽였다. 이어 그녀의 전위를 받아 태자였던 중종이 복위했고, 나라 이름도 당으로 되돌아왔다. 퇴위한 무씨는 측천대성황제(則天大聖皇帝)라는 존칭을 받았다. 측천무후는 황후로 24년, 태후로 7년 그리고 황제로 15년, 도합46년 동안 권력을 잡았다.
그녀가 후궁의 신분에서 일어나 스스로 황제가 되고 오랫동안 나라를 다스릴 수 있었던 것은 물론 그녀의 뛰어난 지도력 덕분이었다. 그 지도력을 이룬 특질들은 과연 무엇이었나? 먼저 꼽아야 할 것은 그녀의 뛰어난 정치 감각이다. 그런 뛰어난 정치 감각은 낙양 천도에서 잘 드러난다. 그녀가 권력을 쥐는 과정에서 처음 넘어야 했던 장애는 황후 왕씨를 폐하고 그녀를 대신 황후로 만드는 일에 반대한 조신들이었다. 그들은 대부분 서위(西魏), 북주(北周), 그리고 수(隋)로 이어진 주류 왕조들에서 줄곧 지배 계급을 형성했던 명문거족들의 후예들로 수도 장안을 중심으로 한 제국의 서쪽 사람들이었다.
낙양으로 조정을 옮기고 과거를 통해 상대적으로 홀대받은 동쪽 지역 인재들을 등용함으로써, 그녀는 단숨에 조신들의 영향력을 줄이면서 자신에게 충성하는 관료 집단을 만들어냈다. 다음에 꼽아야 할 것은 훌륭한 사람들을 가려 쓸 줄 아는 능력이다. 위원충(魏元忠), 누사덕(屢師德), 적인걸(狄人傑)과 같은 당시의 뛰어난 장상(將相)들은 물론이고 현종 때의 명신들인 요숭(姚崇), 송경(宋璟)과 같은 이들도 그녀가 등용한 인물들이었다. 그녀는 특히 적인걸을 신뢰하여 이름 대신 ‘국로(國老)’라 부르고 늘 그의 뜻을 따라 자신의 뜻을 굽혔다.
적인걸의 가장 큰 공적은 폐위되어 여릉왕(廬陵王)이 된 중종을 태자로 삼도록 무후를 설득해서 정치적 안정을 도모한 것이었다. 원래 무후는 친정 조카인 무삼사(武三思)를 신임해서 그에게 전위할 뜻을 품었었다. 적인걸은 그녀에게 폐위된 중종을 태자로 삼아 전위하도록 간곡히 권했다. “고모, 조카 사이와 모자 사이에 어느 쪽이 친합니까? 폐하께서 여릉왕을 세우시면, 종묘는 고모를 제사 지내지 않습니다.”라는 적인걸의 충언에 감복해서, 그녀는 마침내 여릉왕을 태자로 삼았다.
지도력에서 가장 미묘한 부분은 아마도 무자비함과 너그러움의 조화일 것이다. 그저 무자비하면, 폭군이 되기 쉽고 지지 기반을 넓히기 어렵다. 반면에, 너그러움만으로는 치열한 경쟁에서 이겨 권력을 잡기 어렵다. 무후는 무자비함과 너그러움 사이의 그 어렵고 미묘한 조화를 잘 이루어냈다. 그녀의 두 손은 정적들의 피로 흥건히 젖었지만, 적인걸을 우대한 데서 엿볼 수 있듯이, 그녀는 너그러운 면도 지녔었다. 특히 인상적인 것은 낙빈왕(駱賓王, 640?~684?)에 대해 보인 너그러움이다. 낙빈왕은 ‘초당사걸(初唐四傑)’의 한 사람으로 일컬어진 뛰어난 시인인데, 서경업이 기병하자, 거기 가담해서 무후를 토벌하는 격문을 지었다.
이 『토무후격(討武后檄)』은 그 뒤로 천년을 전해올 만큼 뛰어난 글이어서, 당사자인 무후로선 소름이 돋는 글이었을 터이다. 그러나 그녀는 그의 시문을 소중하게 여겨 사람들을 보내서 흩어진 그의 글들을 수습했다.
여기서 연 태자 단을 이별할 때,
장사의 머리털이 관을 찔렀네.
옛적 사람들은 이미 죽었지만.
오늘도 물은 차기만 하다.
此地別燕丹
壯士髮衝冠
昔時人巳沒
今日水猶寒
전국시대(戰國時代)에 뒷날 시황제(始皇帝)가 된 진왕(秦王) 정(政)(기원전 259~210)을 암사랗려 떠나던 형가(荊軻, ?~기원전 227)가 “바람은 쓸쓸하고 역수는 차도다. 장사가 한번 가면 다시 돌아오지 못하리라(風蕭蕭兮易水寒 壯士一去兮不復還)”고 부른 노래를 되새기면서 읊은 이 비장한 『역수송별(易水送別)』도, 무후의 너그러움이 아니었다면, 잊혀졌을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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