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도] 구로공단, 여공의 손으로 한국경제를 일구다

자유경제원 / 2015-05-18 / 조회: 3,609       미디어펜

광복 이후 분단과 전쟁을 거치면서 생산 기반이 취약해진 우리나라는 외국의 원조에 의존한 채 빈곤에서 쉽게 헤어 나오지 못하였다.

1950년대까지는 원조 물자를 가공하는 소위 삼백 산업, 즉 밀가루, 설탕, 면직물 산업이 발달하여 수입을 대체할 수 있는 소비개 산업이 발달하였지만 빈곤의 악순환을 끊기에는 한계가 있었다.

휴전 당시인 1953년 기준 1인당 국민소득 67달러 정도의 최 극빈에 속하는 전 근대적인 농경 국가였다. 그러나 1960년대에는 농업 국가에서 수출 주도형 경공업 산업 국가로 점차 변화해갔다. 이에 급속한 도시화가 진행되었고, 이촌 향도 현상으로 많은 농촌 인구가 도시로 이동하게 되었다.

우리나라 최초의 국가산업단지인 서울디지털산업단지(정식명칭: 한국수출국가산업단지)는 수출을 통해 경제를 발전시키기 위해 섬유·봉제산업 중심으로 조성되었다. 1960년대 저렴한 노동력 측면에서의 국제 비교우위를 적극적으로 활용하기 위해 정부는 경공업 육성전략을 세웠고, 이에 따라 노동력 확보가 용이하고 다양한 자원이 집중되어 있는 구로 지역에 1964년 4월 한국수출공단 제1단지를 지정하였다.

서울디지털산업단지(舊구로공단)는 1964년 9월 제정·공포된 「수출산업공업단지개발조성법」으로 설립된 한국수출산업공단(한국산업단지공단의 전신)이 1965년부터 1973년까지 조성하였다. 1967년 10월 제2단지, 1970년 1월 제3단지가 각각 지정되어, 1973년까지 3개 단지가 총 1,982천㎡ 규모로 단계적으로 조성되었다.

<서울디지털단지 연혁>

63.03.07 : 수출산업촉진위원회 설치
64.09.14 : 수출산업공업단지개발조성법 제정. 공포 (법률 제 1656호)
65.03.12 : 제1단지 착공
67.04.01 : 제1단지 준공 452,647㎡(137천평)
68.06.30 : 제2단지 준공 395,777㎡(119천평)
73.11.24 : 제3단지 준공 1,133,128㎡(344천평)
97.01.09 : 한국산업단지공단 설립
00.12.14 : 서울디지털산업단지로 명칭 변경

구로공단은 1960년대부터 1970년대까지 경공업 중심의 공업단지로서 노동집약적인 섬유, 봉제, 전자 및 잡화(가발, 광학 등) 업종 등의 수출기업들을 입주시켰다. 선진국의 임금 상승으로 사양 산업이 된 노동집약적 산업과 재일교포기업의 기술 도입에 의미를 둔 것이다.

물론 초기 단지 조성과 함께 시작된 수출공단에의 기업유치는 계획대로 순탄하지만은 않아 조성 초기에는 계획보다 입주 희망업체가 적었다. 다행히 1967년 단지 조성이 가시화되면 입주희망업체들이 증가하기 시작하여, 1969년 제1,2단지가 초기에 가동되던 당시 섬유 및 봉제는 국내수출의 40%를 차지할 정도의 주력 업종이었으며, 이후에도 1970년대 말까지는 특수 업종인 가발제조업의 경우 주력 수출업종으로 성장하였다.

한편 전기전자업종도 1975년 이후에는 섬유업종에 이어 수출 주력업종이 되었다. 이처럼 수출 진흥에 총력을 기울인 결과, 국가수출 10억 달러를 달성한 1977년 당시 한국수출산업국가 산업단지는 1억 달러 첫 수출을 달성할 수 있었다. 이러한 수출공단의 성공은 지방자치단체가 산업단지개발에 참여하는 도화선이 되어, 도청소재지 등 지방 중심도시는 물론 중소도시도 산업단지 조성을 활성화시키는 계기가 되기도 하였다.

그러나 1980년대 중반 이후 선진국의 보호무역주의의 확대와 임금상승, 3D 업종 기피 및 제조시설의 해외 이전 등으로 산업단지 공동화가 진행되었고, 경공업 중심의 노후화된 산업단지 경쟁력으론 더 이상 버텨내기 힘들어 급속한 쇠락을 경험하게 되었다.

단지 조성 이후 20년이 경과하며 산업단지가 노후화되기 시작하고 1990년대부터 노동집약적 업종들이 동남아와 중국 및 지방으로 공장을 이전하는 등 산업구조가 급속하게 변화되기 시작하였다.

또한, 국가별·지역별로 특정 지역의 입지경쟁력을 활용하여 관련 자원을 집적시킴으로써 산업경쟁력을 제고하기 위한 산업클러스터 조성이 활발히 이루어지고 있었다.

그 결과 구로공단은 굴뚝산업의 대명사로, 여공이 많이 일하던 회색 빛 이미지로 그저 공단오거리 쪽방촌과 군청색 작업복 차림의 근로자들이 넘치던 곳으로 사람들에게 기억될 뿐이었다. 1990년대 중반부터 구조조정의 시대가 도래하여 기업 부도 현상이 본격화되었고, 수출 및 고용은 각각 1988년에 42억 달러, 1987년에 7만 3천명을 정점으로 찍은 후에 감소세로 전환되어 단지의 공동화가 본격화되기 시작하였다.

이러한 상황변화에 부응하여 중앙정부와 관리기관(한국산업단지공단)은 구로단지를 첨단산업단지로 변화시킬 필요성을 인식하여 1997년 구로산업단지 첨단화 계획을 고시하였다. 이는 수도권 지역 내 산업입지로서 최적의 입지를 갖춘 이점을 활용하여 벤처기업과 R&D, 첨단정보·지식산업 중심으로 산업구조를 개편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였다.

이에 기초하여 제조업 공동화에 대응하고 노후 단지를 재개발하기 위해, 고비용·저효율로 경쟁력이 약화된 제조업 중심의 산업단지를 벤처, R&D, 정보·지식기반산업 중심의 도심형 첨단산업단지로 구조를 개편·발전시키는 사업이 1997년부터 2006년까지 중·장기적으로 추진되었고, 자율적인 업종 전환과 대체 입주 유도를 시작하였다.

이와 동시에 1997년 7월 「공업배치 및 공장설립에 관한 법률」시행령 개정을 통해 수도권 과밀억제지역 내에서의 행위 제한 및 산업단지 입주업종 제한을 대폭 완화하여, 비제조업 및 R&D업종의 서울단지 진입을 허용하는 구로공단 부활을 위한 제도적 기반도 마련하였다.

이러한 노력으로 산업단지 구조고도화가 본격 추진되었고, 2000년 2월 14일 ‘구로공단’에서 ‘서울디지털산업단지’로 명칭을 변경하였다. 구조고도화를 촉진시킬 혁신인자로서의 역할을 한국산업단지공단이 적극 수행하고, 21세기 주력산업인 고도기술, 벤처, 첨단 지식기반 산업구조로의 개편을 위해 연구개발, 엔지니어링, S/W분야의 업종의 입주허용을 대폭 확대하고 아파트형공장 입주 및 건축 시 자금지원과 세제혜택을 부여하여 민간건설사의 참여를 적극 유도하였다.

그 결과 단지 내 지식산업센터(아파트형공장)가 급속하게 증가하고 고부가가치첨단산업, 정보지식형산업, 연구소, 벤처기업 등이 입주하는 첨단 도시형 산업단지로 변모하게 되었다.

즉, 이전의 구로공단이 2000년 12월 구조고도화를 시작한 지 불과 10여년 만에 전국의 수많은 산업단지 가운데 입주업체 수 및 고용 증가 측면에서 단연 최고의 증가율을 기록하는 첨단단지가 되었다. 2012년 12월말 현재, 서울단지는 993개 산업단지 총 입주업체(7만 5,794개사)의 15.1%, 총고용(187만 8,108명)의 8.2%로 매우 높은 비중을 차지하게 되었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노후화된 산업단지가 이처럼 짧은 기간 동안 양적 성장을 할 수 있었던 사례는 국내는 물론 세계적으로 보기 드문 사례가 될 것이다. 국내에는 조성된 지 수십 년이 지난 노후 산업단지가 많은 가운데, 서울디지털단지가 지식기반 산업형 첨단 산업단지의 성공 모델로 탈바꿈할 수 있었던 요인으로는 무엇보다 수도 서울 중심에 소재한 유일한 산업단지라는 데서 찾을 수 있을 것이다.

구로공단 구조고도화 정책

구로공단은 1990년대 후반 들어서 입주업종의 노후화가 심각한 상황에 이르러 공단의 경쟁력이 약화되었다. 또한 1997년 외경제위기로 인해 대기업과 기존 금융권 세력이 약화되고, 그동안 경제성장의 주역이었던 자동차, 조선, 전자산업 등 전통적 설비제조업의 경쟁력이 떨어졌다.

반면, 기술집약적 첨단산업, 벤처산업, 지식기반산업이 중요한 전략산업으로 등장했다. 지가, 임금 등 생산요소 가격의 상승으로 노동집약적 산업이 쇠퇴하였고 이러한 업종들을 대신하여 아파트형공장과 벤처빌딩 등이 생겨났다. 여기에 기술집약적 중소기업이나 벤처기업들이 입주해오기 시작했다.

   
▲ 우리나라 최초의 국가산업단지인 서울디지털산업단지(정식명칭: 한국수출국가산업단지)는 수출을 통해 경제를 발전시키기 위해 섬유·봉제산업 중심으로 조성되었다. /사진=연합뉴스TV 캡쳐

이에, 구로공단은 단순제조업에서 첨단지식·정보화산업 등 고부가가치 첨단산업으로의 재배치를 통해 경쟁력을 강화하려는 정책이 추진되었다. 구로공단은 그 명칭을 ‘서울 디지털산업단지’로 변경하고 산업단지 구조고도화 정책을 추진하였다.

산업단지 구조고도화 정책

산업단지 구조고도화란 지식기반경제의 도래로 산업 환경 전반에 걸친 급속한 변화에 대응하기 위해 산업단지도 기존의 틀을 벗어나 경쟁력을 갖춘 단지로 활성화되어 나가야 한다는 방향 제시성 개념이다. 이는 기존의 생산 중심적이고 하드웨어적인 산업단지의 개념에서 생산·업무·연구·교육 등을 포함하는 개념으로 신산업을 창출할 수 있는 공간, 환경친화적인 공간, 미래지향적인 공간으로 산업단지를 바꾸어 나가자는 개념이다.

구로공단은 1997년 7월에 ‘공업배치 및 공장설립에 관한 법률’ 시행령 개정 및 관리 기본계획 변경을 통해서 새로운 변화를 모색하기에 이르렀다. 이에 따르면, 산업단지를 연구개발(R&D), 첨단 정보·지식 산업단지로 육성하고, 벤처산업 육성을 위한 테크노파크(Techno-park)를 조성하는 등의 계획을 세우고 있고, 토지이용의 고도화 및 환경친화적인 산업단지를 조성하려는 목표를 세우고 있다.

기존의 노동·자본집약 산업중심의 업종을 기술개발과 정보화 등을 통하여 지식·기술·정보 업종으로 전환하거나, 이러한 업종들을 신규로 입주시키는 방식을 택하고 있다. 이에 따르면 단지를 고도기술산업, 벤처산업, 패션디자인산업, 기타 지식산업 등 4개의 첨단 정보·지식산업으로 재구성하고 공간적 측면에서도 이들 업종을 중심으로 재배치를 추진 중에 있다.

구로공단은 변경된 관리기본계획에서 첨단기술산업과 컴퓨터소프트웨어개발업, 연구개발업, 패션디자인업과 같은 지식산업, 그리고 정보통신관련산업, 벤처기업과 같은 업종을 주요 입주대상업종으로 선정하였고, 입주업체의 사업지원을 위하여 금융·보험·의료·교육과 같은 서비스업도 입주대상 업체에 포함시켰다. 공해업종, 용수다소비업종은 입주를 제한하였고, 이에 염색, 원모피처리 및 가공, 펄프제조업은 입주제한 업종에 포함되었다.

특히 구로공단은 2000년대 주력산업으로 성장이 예상되는 기술혁신형 벤처산업을 위해 구로 제1단지 8만평을 테크노파크(Techno-park)로 전환하려는 계획을 세우고 이미 조성된 키콕스벤처센터에 추가하여 2차를 건설할 계획을 가지고 있다. 2000년 12월에는 구로공단이라는 명칭을 ‘서울디지털산업단지’로 변경하고, 전통 제조업과 첨단 IT산업이 융합된 디지털산업단지로의 변화를 본격적으로 시도하게 되었다.

따라서 현재, 섬유·봉제, 염색 등 단순노동집약적 산업구조에서 기계화(자동화), 정보화, 업종다양화 등을 통해 기업의 생산력이 꾸준히 향상되고 있다. 첨단지식·정보화 산업 등 복합 첨단산업단지로의 대체입주 등이 가속화될 경우 생산력 등 부가가치가 큰 폭으로 상승될 것으로 기대된다.

그러나 기존업체의 연구개발을 통한 고부가가치 생산성 향상 의지 부족으로 구조재편이 장기화될 것으로 예상하는 견해도 있다. 또한 기존 입주기업의 기업 활동에 지장이 없도록 중·장기적으로 추진하는 것을 원칙으로 하고 있으며, 기존 입주업체의 강제이전을 배제하고, 자율적으로 산업재배치 계획상 적합한 업종으로 전환할 수 있도록 유도하고 있기 때문에 구로공단의 구조재편은 상당한 시일이 걸릴 것으로 예상할 수 있다.

업종 간 갈등, 예를 들어 공해유발 업체와 신규 입주한 기술집약적 중소기업과 벤처기업간의 갈등도 예상되기 때문에 이에 대한 대책도 필요하다.

아파트형공장과 벤처빌딩의 설립

정부는 다양한 중소기업, 벤처기업 지원시책을 추진 중에 있는데, 이것의 일환으로 입지지원 정책이 이루어지고 있다. 구로공단에서도 이러한 입지지원 정책들이 이루어지고 있으며, 대표적인 것으로 벤처집적시설인 벤처빌딩과 아파트형공장을 들 수 있다.

특히 이러한 시설들은 1990년대 후반에 들어서 급속히 증가하고 있으며, 구로공단 입주업체수 증가와 기술집약적 중소기업의 증가도 이러한 시설의 증가와 밀접한 관계가 있다.

2001년 7월 말 현재, 구로공단에 입주완료 된 아파트형공장은 5개로 1단지에 3개, 3단지에 2개가 있으며, 모두 244개 업체가 입주해 있다. 96년에 준공된 1개를 제외하고는 모두 1998년 후반 이후에 지어졌다. 또한 이것 외에도 구로공단 곳곳에서 상당수의 아파트형공장이 분양중이거나 건설 중이고, 건설예정인 곳도 있다.

분양중인 아파트형공장 관계자와의 인터뷰 결과, 아파트형공장은 취득세, 등록세가 면제되는 등의 세제혜택이 있기 때문에 분양단가가 저렴하여 많은 업체가 입주를 원하고 있고, 특히 강남·서초구에 있는 업체들이 그 곳의 비싼 건물임대료와 관리비 때문에 이곳에 입주하려는 현상이 나타나고 있다고 한다.

그 외에도 서울시 내에 공장과 사무실을 보유하려는 지방업체나 서울 각지의 무등록공장 등이 주로 입주할 예정이라고 한다. 또한 업체 인터뷰 결과, 아파트형공장에서 생산활동을 하는 업체도 있지만, 주로 외주제작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아파트형공장 내에서는 간단한 조립이나 시작생산을 주로 하고, 사무실 용도로 사용하거나 연구소로 이용하는 경우가 많았다.

서울시에서 입주 업체에 시설 자금을 융자해주기도 하고, 아파트형공장 건설업체에도 자금을 융자해주는 등의 지원책이 많기 때문에 아파트형공장 건설은 앞으로도 당분간 활기를 띌 것으로 보인다. 아파트형공장 입주업체의 특성을 살펴보면, 설문결과 하나의 사업장에서 생산, 관리·서비스 기능을 모두 수행하는 업체가 81.9%를 차지함으로써, 대부분 생산과 관리기능이 동시에 이루어짐을 알 수 있다.

벤처기업의 입지지원 정책 중 또 다른 하나는 벤처빌딩의 건설이다. 구로공단에는 한국산업단지공단이 건설한 벤처빌딩인 ‘키콕스벤처센터’가 있다. 이 벤처빌딩은 벤처집적시설로 지정되어 있다. 벤처집적시설은 교통, 정보통신, 연구, 금융 등의 기능이 집중되어 기업 경영 여건이 우수한 도심에 벤처기업이 집단적으로 입주할 수 있는 공간을 사전에 확보하기 위하여 민간 빌딩 등을 벤처기업 집적시설로 지정하여, 각종 지원을 실시함으로써 도심의 벤처 입지공간 확대를 도모하는 사업이다.

벤처집적시설로 지정되면 등록세, 취득세, 재산세에 있어서의 혜택과 각종 자금지원을 받을 수 있다. 2000년 10월 말 현재 전국에 155개 벤처집적시설이 있으며, 이중 107개가 서울에 있다. 키콕스벤처센터는 97년 8월에 착공되어 2000년 10월에 완공되었는데, 이 건물은 처음부터 벤처기업을 위한 빌딩으로 지어져 벤처집적시설 1호로 지정되어 있다.

   
▲ 구로공단은 2000년 이후 명칭을 ‘서울디지털산업단지’로 바꾸면서 기존 이미지를 제고하고, 기업 인큐베이터 기능도 본격화했다. /사진=연합뉴스TV 캡쳐

키콕스벤처센터에는 현재, 벤처기업 43개사와 창업보육기업 21개사가 있다. 또한 법률, 세무·회계, 특허, 경영컨설팅 등의 분야별 지원기관 6개사가 입주해 있다. 특히 유망 벤처기업에 대해 3년간의 임대료를 주식으로 대신 납부하는 임대료 출자전환방식을 채택하고 있어서, 인터뷰 결과 이에 대한 입주업체들의 만족도가 높았다.

산업단지공단에서는 또 제2벤처센터를 인근에 건설하려는 계획을 가지고 있으며, 이와 연계하여 구로공단 1단지 벤처산업구역 8만평을 기술혁신·교류 중심의 “서울테크노파크”로 조성키로 계획하고 있다. 벤처빌딩에 입주한 업체들을 살펴보면, 설문조사 결과 생산시설 없이 100% 외주생산하거나 소프트웨어 업체로서 연구기능만 갖춘 업체가 전체의 72.7%를 차지하여 대부분 하나의 사업장에서 관리·서비스 기능만 이루어지는 것으로 나타났다.

한편 구로공단 내에서는 관리기능만 수행하고, 생산시설은 지방이나 구로공단 외부에 위치한 업체도 18.2%였다.

구로공단에서 성장한 기업

산업단지 조성 초기에는 입주희망 기업이 적었다. 김종혁 한국산업단지공단 과장에 의하면, 이 시기에 실질적으로 공단 조성을 위하여 이원만 코오롱그룹 창업주의 노력이 컸다고 한다. 당시 한국나이론공업협회장 자격으로 산업 구상을 하고 수출산업공단이라는 사단법인을 만들어 입주 기업을 모았다고 한다.

초창기 입주기업으로 삼화합성공업(비닐완구), 평화안경공업(안경), 대륙금속공업(수도금류), 심산산업(장식품), 싸니전기(수정발진자), 대경물산(철물) 등 재일교포기업과 동남전기공업(라디오·TV), 한국면양(양모·양피제품), 동남미네론화학공업(인조피혁), 한국광학(광학렌즈)등 국내기업이 있다.

현재의 구로공단의 모습은 1997년 ‘구로단지 첨단화 계획’에서 비롯되었다. 경쟁력이 떨어져 문을 닫거나 해외로 떠난 옛 공장 터에 지식산업센터(아파트형 공장)가 들어서기 시작했다. 1999년 완공된 키콕스 벤처타운을 시작으로 수많은 IT업체가 입주하면서 구로공단은 모습을 바꿔가기 시작했다.

2000년 이후 명칭을 ‘서울디지털산업단지’로 바꾸면서 기존 이미지를 제고하고, 기업 인큐베이터 기능도 본격화했다. 2002년 이후 대기업의 연구개발(R&D)센터, 시제품 제작시설, 지식산업, 정보통신, 소프트웨어, 패션디자인 관련 기업의 입주로 단지의 첨단성도 높아졌다. 2000년대 중반부터는 높은 임대료를 피해 강남 테헤란밸리를 떠난 IT벤처기업들이 가세하였고, 2006년 12월에는 한국벤처기업협회가 강남에서 이곳으로 이전했다.

저규제·저비용, 입지적 비교우위, 네트워크 효과로 정리되는 강점(2007, 박용규 삼성경제연구소)을 기반으로 정부의 규제완화 및 사업 시행자에게 자금지원 및 취득세·등록세, 재산세·종합토지세, 특별부가세 등의 각종 세제감면 혜택을 통하여 지식산업센터는 대규모로 공급되었다.

지식산업센터 건설 초기에 에이스 종합건설, 대륭종합건설, 우림건설 등이 입주하였으며, 당시 유행하던 삐삐 제조·수리와 관련한 소규모 정보통신 사업체들이 입주하였다. 이는 한국경제변화와 같이 구로공단도 경공업 중심에서 IT산업으로 변화할 것을 내다본 것이다.

지식산업센터는 대형화와 고급화를 거쳤다. 2004년 12월에 준공된 우림라이온스밸리 1차는 400개에 이르는 업체가 입주했으며 2007년 4월 준공된 삼성IT밸리는 첨단비즈니스 시설로 차별화했다. 내실은 첨단 산업이 채웠다. 기존의 주력 업종이었던 제조업에서 출판, 영상, 방송, 정보서비스업, 전문, 과학 및 기술 서비스업 부문으로 주력 업종이 확대되었고 2013년 10월 말 기준으로 입주 기업수는 총 1만 1931개에 이르렀다.

이들 업체들의 업종은 비제조업체(콘텐츠 개발 등 IT관련 포함)가 7198개로 가장 많고, 이어 전기전자 2553개, 기계 663개, 섬유의복 651개 순이다. 정보통신업체가 30%를 넘고, 전체 입주기업의 절반 이상이 IT업체다. 고용 근로자는 16만 3000명으로 급증했으며 이들은 2013년 기준 15조 3190억 원 어치를 생산하고 29억 6600만 달러 어치를 수출했다.

유명 기업으로는 LG전자 휴대폰 본부, 롯데정보통신(U시티 사업), 천재교육(학습지·참고서) 등이 있다. 중소기업으로는 고영테크놀러지, 에듀윌(온라인 교육), 웰크론(극세사 제품), 한경희생활과학(생활가전), 신영와코르(이너웨어) 등이 있다. 경동나비엔(보일러), 양지사(다이어리), 웅진코웨이개발(생활가전), 이랜드(의류), 한국후지필름(카메라·인화), 솔브레인이엔지(반도체·LCD재료), 해피랜드(아동복) 등도 있다.

또한 각종 기관 및 협회도 있다. KAIST EMDEC, 한국산업기술대 등 산학협력기관, 한국산업기술시험원 등 시험인증기관 등과 동반성장위원회와 중소기업협력재단 등의 정부기관, LG전자 3개 연구소 등 기업부설연구소도 1000개가 넘는다.

산업역군, 구로공단의 근로자들

1960년대 대형 가뭄과 홍수가 전국을 강타하면서 흉년이 계속되었다. 6·25전쟁 후 대한민국은 ‘가난’ 그 자체였다. 더군다나 미국의 원조가 줄어들게 되자 정부는 경제 부흥을 시도하지 않을 수 없었다.

1962년 당시 제조업 부문은 GNP의 16.2%에 불과했고, 반면 농업, 임업, 수산업 부문은 36.6%를 차지하고 있었다. 당시 세계경제는
전후 최대의 호황기를 맞이한 선진국들이 자국의 노동력 부족과 임금상승으로 인해서 산업구조재편을 진행 중에 있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우리나라는 경제개발 초기부터 국제분업에 입각해 대외지향적 경제개발 전략을 추구하였다. 이러한 정책의 일환으로 서울 구로동에 공업단지를 조성하였는데 이로 인해 많은 일자리가 창출되었다. 이에 농촌의 처녀·총각, 그리고 심지어는 10대 소년·소녀들도 돈을 벌기 위해 서울로 상경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들 대부분은 구로공단에서 일을 하기 시작했다.

근로자의 70%가 가난한 농사꾼의 아들딸로 태어나 서울에 올라와 큰 공장에 취직했다. 청운의 품을 품고 이촌향도한 이들의 삶은 열악했으나, 이들은 번 돈을 고향집에 보내 동생들 공부시키고 소와 돼지를 사서 키우도록 했다. 게다가 수출 산업 역군으로 조국 근대화에 헌신한 자랑스러운 아들딸들이었다.

지금은 중국동포가 상권을 장악해 ‘가리베가스’라고 불리기도 하는 가리봉동은 당시 가난한 노동자들이 몸을 부비고 피곤한 몸을 눕혔던 쪽방들과 순대, 떡볶이를 파는 시장이 있었다. 박노해 시인의 ‘가리봉 시장에서’라는 시가 탄생하기도 했다. 또한, 1980년대 구로공단에서 여공으로 일했던 소설가 신경숙이 그의 자전적 소설 <외딴방>에서 '벌집촌'을 묘사하였다.

"서른일곱 개의 방이 있던 그 집, 미로 속에 놓인 방들, 계단을 타고 구불구불 들어가 이젠 더 어쩔 수 없을 것 같은 곳에 작은 부엌이 딸린 방이 또 있던 3층 붉은 벽돌집…(중략)…서른일곱 개의 방 중의 하나, 우리들의 외딴 방. 그토록 많은 방을 가진 집들이 앞뒤로 서 있었건만, 창문만 열면 전철역에서 셀 수도 없는 많은 사람들이 쏟아져 나오는 게 보였다."

수십 가구가 사는 데도 화장실은 달랑 한 개였고, 미로 같은 계단 끝에 발만 간신히 뻗을 수 있는 서너 평의 방에서 살아야 했던 게 당시 여공들의 생활이었다. 그나마 혼자서는 사글세를 감당키 어려워 2평 남짓한 단칸방에 세 명이 동거하는 경우도 다반사였다. 철제 프레임에 비닐을 씌운 ‘비키니장’을 들여놓으면 셋이서 모로 누워 쪽잠을 자야했다.

한창 피어나야 할 10대 후반 ~ 20대 초반 어린 여공들의 얼굴은 잔업과 철야로 누렇게 떴지만 월급을 쪼개 고향집에 부치며 밝은 표정을 잃지 않았다.

방마다 화장실이 없어, 아침 5시 30분에 일어났는데도 단 두 개 밖에 없는 공용화장실에 긴 줄을 서서 아침을 준비했다. 공용화장실 가는 것을 포기하고 일단 공동세면장으로 발길을 돌리면 세면장도 벌써부터 북적이고 있었다.

각자 자신들의 부엌에서 연탄아궁이에 데운 물을 들고 나와 짧은 시간에 부리나케 머리를 감고 세수를 했다. 방과 부엌이 병렬로 계속 이어지는 구조여서 연탄가스가 새어나와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난 이도 종종 있었다. 이처럼 구로공단의 근로자들은 하루하루가 고단한 일상이었다. 그럼에도 그들이 번 월급의 대부분은 고향 부모님, 동생, 오빠들 학비를 위해 쓰였다.

그러나 이들에게도 삶은 존재했다. 당시 동아일보 1991년 12월 4일자 기사에 5년동안 여공생활을 해왔지만 시집을 펴낸 남미순씨의 일화가 소개되었다. 공장생활에서 겪은 애환을 자신의 소박한 꿈에 실어 한권의 예쁜 시집으로 펴냈다. 남씨는 “억압이나 착취만을 떠올리게 하는 공장생활에서 그래도 이렇게 예쁘게 살아가는 삶도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었다”며 시집출판의 동기를 설명했다.

당시 하루 12시간 작업으로 시간도 돈도 넉넉지 못했던 그녀는 일요일이면 시내 서점에서 온종일 서서 책을 읽었다고 했다. 시와 글은 배운 사람들의 전유물인 줄 알았지만 생각나는 대로 쓰고 읽는 버릇이 생기니까, 어느 순간 남씨도 글을 쓸 수 있다는 자신감이 생겼다고 한다.

남씨의 시집을 출판한 ‘길’출판사 사장 최기영씨(32)는 “지적유희가 난무하는 이 시대에 노력하고 성실히 살아가는 사람의 모습이 반가웠다.”고 말했다.

남씨처럼 다수의 근로자들을 포함해서 산업체에서 일하고 있는 청소년들 대부분은 초등학교만 졸업한 학력을 가지고 있었다. 이에 1976년에는 ‘산업체 특별학급’이 설치가 되었는데 입학금을 포함한 수업료, 기타 공납금을 일절 내지 않고 중등교육을 제공하였다. 다시 말해, ‘주경야독’이 가능해진 것이다.

사람이 공부만 하고, 일만 하며 사는 것도 힘든 일인데 주경야독을 한 이들의 삶은 참으로 고단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산업화의 전진 기지 속에서 묵묵히 일해 왔던 그들은 엄연히 대한민국의 산업 역군들이었다.

이러한 이들의 노력은 빛을 냈다. 1967년 구로공단이 정식으로 출범할 당시 대한민국의 수출액은 3억 2000만 달러였다. 그 후 10년이 지나고 100억 달러를 달성했다. 수출 품목에서 상위권을 차지하던 것은 섬유·의류·봉제, 전기·전자조립, 가발과 잡화였다.

이는 1970년대 구로공단의 주력 업종이었으니 5000년 역사상 가장 위대한 경제발전은 구로공단에서 시작되었다는 말은 과언이 아닐 것이다. 따라서 당시 구로공단에서 구슬땀을 흘리며 일을 했던 근로자들은 스스로의 삶을 개척한 산업 역군들이라 할 수 있다. 영화 ‘국제시장’으로 인해 서독 파견 간호사, 광부, 월남참전 용사까지 대한민국 산업 역군으로 재조명되었다.

하지만 공장에서 일한다고 ‘공돌이’, ‘공순이’로 불렸던 구로공단의 근로자들은 아직 재조명되지 못하고 있다. 스스로 일어서려는 의지가 있었고, 치열한 삶을 살아간 그들이 있었기에 미래는 밝아졌다. 대한민국은 자신의 삶을 개척한 이들이 성공하면서 번성한 나라가 되었다. /최승노 자유경제원 부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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