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도] 北탱크 300대 남침..."피난 거부" 이승만...<대통령의 피신>은 너무 늦었다

자유경제원 / 2015-06-01 / 조회: 4,226       뉴데일리

세계에서 유일무이하게 폄하되는 건국 대통령 


한 국가의 건국 대통령 치고, 그것도 성공한 역사를 자랑하는 한 국가의 건국 대통령 치고,
우남 이승만 초대 대통령만큼이나 철저하게 폄하되고 오해받고 있는 대통령도 세계에서 유례를 찾아보기 힘들 것이다.
'민족 분단의 원흉’ '민족 지도자 김구 암살 을 사주한 자’ '친일 청산은커녕 친일파를 중용한 인물’ '6.25 발발 시 수도와 국민을 버리고 도주한 대통령’ '부정선거로 당선된 대통령’ '무자비한 독재자’ 등등이 예외 없 이 이승만에 따라 붙는 수식어들이다.
건국 대통령으로서 사회주의에 경도되어 있던 대한민국을 자유민주주의로 이끈 업적, 소련을 위시한 공산주의 세력의 한반도 공산화를 막아낸 업적, 자유와 번영을 이루게 한 자유시장경제와 민주주의의 씨앗을 심은 공로 등은 부정적인 수식어에 완전히 묻혀 버렸다.

부정적 인식이 너무 강해 건국 대 통령임에도 불구하고 그 흔한 동상 하나 보기 힘들고,
광화문 광장은 조선시대의 인물들로 채워져 있다.
대한민국 국민임을 무척 자랑스러워하는 젊은이들도 그런 자랑 스러운 대한민국이 될 수 있도록 든든한 초석을 놓은 건국 대통령 이승만에 대해서는 매우 부정적인 생각을 갖고 있다.
홍길동은 아버지를 아버지라 부르지 못해 원통해 했었는데,
대한민국은 건국의 아버지를 감추고 숨기다 못해 완전히 묻어버리지 못해 원통해하는 듯하다.

무언가 이상한 나라임엔 틀림없다.
남한만의 단독정부 수립을 고집해 민족분단을 가져왔다는 비판만 해도 이승만에게는 억울하기
짝이 없는 일일 것이다. 이승만이 단독정부를 수립해야 한다는 공식적인 발언을 한 것은 1946년 6월 3일 이른바 '정읍 발언’이었다. 하지만, 북한에서는 이미 그 이전인 1946년 2월에 소련군과 김일성이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를 설립하고 실질적인 정부 역할을 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곧 이어 이 기구는 정식기구가 되면서 헌법 논의 시작, 군대 창설, 법령 제정 및 반포, 게다가 '토지의 무상몰수 국유화’라는 '토 지개악’까지 실시한다. 사실상의 정부였던 것이다.

이승만의 단독정부 발언은 이미 북한에서 소련에 의해 공산주의가 확고하게 자리를 잡았으며,
때를 놓치면 한반도 전체 가 공산화 될 위험에 처했다는 판단에서 나온 것이다.
실제로 북한에서는 우리가 5.10 총선거를 실시하기 1년 전에 이미 단독 선거를 실시하여
단독 국회를 구성하고 단독 정부를 구성했다.

민족 분단에 대한 비판의 화살이 김일성과 소련에게로 향해야 마땅함에도
오히려 한반도 전체 공산화를 우려하여 대응했던 우남 이승만에게로 향하고 있는 것이다.
이처럼 이승만에 대한 비판과 오해는 대부분이 사실에 대한 왜곡과 거짓에서 기인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왜곡과 거짓이 국민들 사이에 너무나 깊숙이 파고들어서
거짓이 마치 사실인 것처럼 되어버렸다. 6.25가 발발하자마자 이승만이 혼자 몰 래 도망갔다고
하는 것도 그런 것들 중의 하나이다. 이승만은 비겁자? 국민을 버리고 제일 먼저 도망갔다?
우남 이승만에 대한 비판 혹은 비난 중 가장 치욕적인 것은 '비겁한 자’라는 비난일 것이다.
 '6.25가 발발하자마자 수도 서울과 국민을 저버리고 혼자 몰래 도망갔으며, 그것도 모자라 거짓방송으로 국민을 우롱했다’는 것이 그것이다. 최고사령관인 대통령이 국민을 속이고 혼자만 몰래 도망쳤다면 비난을 받아 마땅하다.

지난 해 세월호 사건이 나자 SNS상에는 승객들을 버리고 도망친 선장 이준석을 이승만에 빗대는 글들 이 숱하게 올라 왔다. 한두 개만 소개하면 이렇다.
“이승만이 서울 시민에게 걱정 말 라고 해놓고 부산으로......세월호 탑승객에게 가만히 있으라고 해놓고 침몰......” “이 승만이 국부라니......지나가는 개가 웃겄소~.” SNS 상에서 국부 이승만은 파렴치한이 나 다름없는 취급을 받고 있다. 그래서일까, 백인철이라는 영화배우는 '4.19 역사 바로 세우기 토론회’에서 “이승만이 개자식이다”라면서 자신이 “제일 역사적으로 미워하는 놈이 선조라는 놈하고 이승만 이다”고 말했다. 선조가 의주를 거쳐 명나라로 도망가고자 했던 것과 비교하면서 이 승만 역시 그런 선조와 같은 부류의 형편없는 인간이라는 것이다.

김용옥은 한겨레신문 <세월호 참사 특별 기고>에 다음과 같은 글을 실었다. “1950년 6월 25일, 국민 전체의 안위를 책임지고 있었던 이승만은 새벽부터 전쟁 발발의 소식 을 듣고 우선 자기 혼자 도망갈 생각부터 했다. 26일 아침 8시 신성모 국방장관이 방송에 나와 <국군이 인민군을 물리치고 북진중에 있다>는 담화를 발표한다. 그런데 27 일 새벽부터 비상국무회의가 열렸지만 이승만은 회의에 참석조차 하지 않고 열차편으로 이미 몰래 서울을 빠져나가고 있었다....임진왜란이 일어났을 때도 선조는 대책 없 이 먼저 도망쳤다...” 막말로 유명한 김용민도 자신의 블로그에 이와 유사한 내용의 '이승만과 6.25’라는 글을 올려 길게 설명하면서 “이승만 대통령은 이 사건만으로도 국부의 권위는 물론, 대통령으로서의 권위마저 상실했다”고 평했다.

과연 이승만은 자기 한 목숨 부지하고자 국민들을 버리고 몰래 도망친 비겁한 파렴치한이었을까? 여기서 국가원수가 적군이 코앞에 닥치고 여차하면 체포되거나 사살될 수도 있는 상황에서 시민들을 안전하게 피신시킨 후 자신도 피신했어야 옳다고 주장 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는 '말 같지도 않은 말’이라서 다루지 않기로 한다.

서울 시청앞을 진격하는 북한군 탱크부대.
▲ 서울 시청앞을 진격하는 북한군 탱크부대.


 

긴박했던 개전 초기 4일 


혼자 살겠다고 국민을 버리고 도망쳤다, 사기 방송이라는 만행을 저질렀다 등등의 비판은
6.25 발발 초기 3-4일 만에 일어난 일들이다. 따라서 사건의 진실을 보기 위해 서는 6월 25일
새벽부터 6월 28일까지의 개전 초기 4일 간의 이승만의 행적을 살펴 보는 일이 필요하다.

1950년 6월 25일 일요일 새벽 4시 북한 인민군이 38선 전역에서 맹렬한 포격을 가한 후 240여 대의 탱크를 앞세워 남침을 했다. 개전과 동시에 인민군은 동해의 정동진 등에 육전대(대한민국의 해병대)를 상륙시켰고, 특수부대원 600여 명을 부산 등 후방 기지로 침투시켰다. 다행하게도 특수부대원을 태운 무장 수송선은 해상에서 우리 해 군의 백두산함에 발각돼 교전 끝에 격침됐다.
만약 이 무장 수송선을 발견하여 격침 시키지 못했다면 부산 등 후방기지가 인민군 특수부대원들에 의해 장악되거나 교란되어 국군의 정비와 유엔군의 상륙 등이 저지됨으로써 전황을 반전시킬 기회조차 얻기 어려웠을 것이다.

6월 25일 일요일 아침까지도 이승만은 북한의 남침 사실을 모르고 있었다.
아침을 먹은 이승만은 9시30분 경 경회루(慶會樓)로 낚시를 하러 갔고, 같은 시각 영부인 프란체스카 여사는 어금니 치료를 받으러 치과에 갔다는 사실이 이를 뒷받침한다. 이승만이 북한의 남침에 대해 처음 보고를 받은 것은 낚시를 하던 중인 9시30분~10시경이었다. 경무대 경찰서장 김장흥 총경으로부터 북한의 남침 상황을 보고 받고 경무대로 돌아왔다. 오전 10시 30분경 신성모 국방장관(국무총리서리 겸임)이 경무대로 들어와 보고드릴 긴급상황이 있다면서 '오전 9시에 개성이 함락되었고, 탱크를 앞세운 인민군이 춘천 근교에 도달했다’고 보고했다.

하지만 이때까지도 대통령과 각료들 모두 사태의 심각 성을 깨닫지 못하고 '장난치다 그만 두겠지’라고들 생각하는 정도였다. 그도 그럴 것 이 당시에는 38선을 사이에 두고 크고 작은 충돌들이 자주 일어나곤 했었기 때문이다.
 신성모 국방장관도 “크게 걱정하실 것 없습니다.”라는 말을 되풀이했다.
하지만 그 이후 들어오는 경찰정보는 달랐다. “상황이 심각하고 위급하다”는 정보였고, 고재봉 비서관을 통해 알아본 정보 역시 “적의 힘이 예상 밖으로 강력해 위험하다.”는 것이었다.

북한군이 촬영한 북한 탱크부대 서울 시가 공격 모습.
▲ 북한군이 촬영한 북한 탱크부대 서울 시가 공격 모습.


이승만은 잠을 못 이루고 자정을 넘긴다. 앉은 채로 꼬박 밤을 새우는 중에도 서울 상공에 인민군의 야크기가 선회를 하고, 그 때마다 공습경보가 요란하게 울렸다. 전황이 악화되고 있다는 것을 확인한 이승만은 6월 26일 새벽 3시에 도쿄에 있는 맥아더 사령관에게 전화를 걸어 '당신들 미국의 책임이 막중하니 어서 한국을 구하시오’라며 강력하게 항의했다.
이에 맥아더는 무스탕 전투기 10대, 105mm 곡사포 36문, 155mm 곡사포 36문, 그리고 바주카포를 긴급지원하겠다고 약속했다. 맥아더 사령관과의 전화를 끝내고 이승만은 워싱턴의 장면(張勉) 대사에게 전화를 걸 어 '적이 우리 문전에 와 있으며, 미 의회가 승인하고 트루먼 대통령이 결재한 1천만 달러 무기지원은 어떻게 된 것이냐’고 트루먼 대통령에게 전하라고 지시한다.

6월 26일 오후 2시. 이승만은 직접 육군본부와 치안국 상황실로 나가 상황을 보고 받는다.
의정부에서 2개 방면으로 방어선을 전개하고 있으나 탱크를 저지하지 못해 계속 뚫리고 있다는 보고였다. 이 보고를 받은 이승만이 경무대로 돌아올 때 서울 상공 에는 북한군의 야크기가 맴돌고 있었고, 그 때마다 대통령과 프란체스카 여사는 방공호로 들어가야 할 정도로 상황은 긴박했다.

 대통령의 피난 문제가 처음 거론되기 시작한 것은 6월 26일 밤이었다.
서울의 관문인 의정부가 인민군에게 점령당하자 정부 각료들이 대통령의 피난 문제를 거론했던 것이다. 6월 26일 밤 9시 김태선 서울시경 국장이 경무대로 와서 '서대문 형무소에 갇혀 있는 수천 명의 공산분자들이 탈옥하면 제일 먼저 경무대로 올 것이므로, 일시 피난을 해서 전쟁의 전반을 지도해야 한다’고 보고했다.

자정을 넘겨 막 잠자리에 들었던 6월 27일 새벽 2시. 신성모 국방장관, 이기붕 서울 시장, 조병옥 등이 경무대로 급히 찾아 왔다. 그들은 “각하 사태가 급박합니다. 빨리 피하셔야겠습니다.”라면서 간곡하게 건의를 했다. 그러자 이승만은 “안 돼! 서울을 사 수해야 돼! 나는 떠날 수 없어!”라고 말하고는 문을 쾅 닫으며 방으로 들어가 버렸다.
뒤 따라 들어간 프란체스카 여사가 '국가원수에게 불행한 일이 생기면 더 큰 혼란이 발생하고 대한민국의 존속이 어렵게 된다. 그러니 일단 수원까지 내려갔다가 곧 올라 오는 게 좋겠다’고 간절하게 부탁했다. 이 말에 이승만은 '누가 그런 소리를 하느냐며 절대 떠나지 않겠다’고 고함을 질렀다.

그 때 경찰간부 한 사람이 들어와서 적의 탱크가 청량리까지 들어왔다는 메모를 전했다. 인민군의 탱크가 청량리까지 들어왔다면 더 이상 지체할 수는 없는 상황이다. 그러자 할 수 없이 이승만은 남하를 하기로 결정하게 된다. 물론 인민군의 탱크가 청량 리까지 들어왔다는 정보는 사실이 아니었고, 대통령의 남하를 재촉하려는 참모들의 꾀였다고 한다. 6월 27일 새벽 3시30분, 이승만은 기관차와 3등 객차 2량으로 만들 어진 특별열차에 탑승하여 남하하기 시작한다.
금고를 탈탈 털어도 5만원 밖에 없었고, 옷가지도 챙기지 못했으며, 특별열차는 차창이 깨지고 좌석의 스프링이 튀어나와 있었다고 한다.

기차는 오전 11시40분 대구에 도착했다.
이승만은 여기가 어디냐고 물어본 뒤 자기 평생 처음으로 판단을 잘못해서 여기까지 오게 되었다면서 곧바로 기차를 돌려 서울로 올라갈 것을 명한다. 대구에 잠시 머물렀던 기차는 12시30분 서울 방향으로 되돌아갔다. 서울이 아직 점령되지는 않았지만, 위험하다는 보고를 받은 대통령은 “수원까 지만 가면 서울에는 자동차로 갈 수 있겠지...”라며 조바심을 냈다.

기차가 대전에 도착하자 소식을 들은 윤치영과 허정이 왔고, 그들은 서울이 이미 점 령당했으니 더 이상의 북상은 안 된다고 만류했지만, 이때까지도 이승만은 서울행을 고집하고 있었다. 잠시 대전역 사무실에서 쉬고 있는데 신성모 국방장관으로부터 전화가 왔다. 신 장관은 서울이 적의 수중에 들어갔으니 더 이상 북상하지 말라고 했다. 그러나 대통령은 고집을 꺾지 않고, 수원까지라도 가야겠다고 했다. 사실 그 때 까지 서울은 점령되지 않은 상태였지만, 거짓말을 한 것은 역시 더 이상의 북상을 막 으려는 참모들의 꾀라고 해야 할 것이다.

이때 미 대사관의 드럼라이트 참사관이 사무실로 찾아왔다. 그는 유엔이 대북 군사제 재를 결의했고, 트루먼 대통령이 해·공군 출동 및 대한(對韓) 무기원조 명령을 내렸다 고 전했다. 암담했던 분위기는 이 소식으로 활기를 되찾았고 이승만 대통령은 북상을 단념하고 정부를 대전으로 옮기기로 결정했다. 그날 밤 이승만 대통령의 숙소는 충남 도지사 관저였다.
그날 밤에 무초 미국 대사가 이승만을 찾아왔다. 무초 대사는 '하느님이 한국을 버리지 않았다’며 “전쟁은 이제부터 당신의 전쟁이 아니라 우리의 전쟁이 되었다”면서 미국의 적극 개입방침을 설명했다. 이 말에 힘을 얻은 이승만은 국민을 안심시키고 국군의 사기를 북돋우는 방송을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공보처장과 상의한 후 서울중앙 방송국으로 전화를 해 6월 27일 밤 10시에 방송을 하기로 했다. 내용은 “유엔과 미국 이 우리를 도와 싸우기로 했다. 지금 공중과 해상으로 무기, 군수품을 날라 와 우리 를 돕기 시작했으니 국민들은 고생이 되더라도 굳게 참고 있으면 적을 물리칠 수 있 으니 안심하라”는 취지였다.

서울 시내를 점령한 북한 인민군부대.
▲ 서울 시내를 점령한 북한 인민군부대.


 

 이승만은 북한과 대한민국의 군사력 차이를 몰랐을까? 


개전 초기 국군은 인민군의 파죽지세와도 같은 공격에 속수무책으로 당했다. 이렇게 초기 전황이 어렵게 전개된 이유는 미국의 전략적 판단착오와 UN의 지시를 모범적으로 따른 결과였다. 미국은 한국과 같이 산악이 많은 지형에서는 탱크를 쓸 수 없다고 판단하여 탱크는 물론이고 대전차무기조차 공급하지 않았다. 또 미국은 이승만이 수 차에 걸쳐 요구했던 적정한 무장지원을 도외시했다. 또한 대한민국 국군은 무장도 열세였을 뿐만이 아니라 UN의 지시에 따라 방어적으로만 조직되어 있었다.

6.25가 발발하기 이틀 전 한국 주재 UN위원단은 38선을 따라 정기적인 시찰을 한 후 뉴욕 본부에 다음과 같은 보고서를 보냈다. “38선을 따라 이 루어진 현장 조사 후에 관측자들이 받은 주된 인상은 남한군은 전적으로 방어를 위해 조직되어 있고 북한군에 대해 공격을 감행할 수 있는 조건이 전혀 갖추어져 있지 않 다.” 반면에 북한은 3년 동안 치밀하게 준비해 왔고, 공격 직전 몇 개월 동안 남침 을 위해 전진 배치된 압도적인 군사력에 의해 공격, 그것도 기습공격을 당한 것이다. 전쟁 발발 초기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밖에 없었던 상황이었다.

이승만은 이런 상황을 몰랐을까? 이승만은 수시로 '북진통일’을 외쳤다. 이로 인해 좌 익세력들로부터 호전광이라는 비난도 들었고, 나아가 일부 좌익세력과 좌편향 학자들 에 의해 대한민국이 먼저 북침을 했다는 북침설의 배경으로 이용되기도 하였다. 하지만, 이승만은 북한의 군사력과 남한의 군비상황에 대해 비교적 상세히 파악하고 있었다.

6.25 발발 이전에 이승만이 쓴 편지의 내용은 이렇다.
“저들 북한은 시종일관 우리보다 잘 준비되어 있고 우리보다 사거리가 긴 포와 소총을 갖추고 있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승만이 북진통일을 외쳤던 이유는 “한국민의 정치적 정신적 결집을 강화 하고 사기와 전의를 북돋워주기 위해”, “북한과의 정통성 경쟁에서 우위를 점할 수 있는 선전도구”로서, 그리고 “미군 철수가 감행되는 시점에서 그것을 늦추거나 철군 에 따른 보상과 보장을 받기 위해 한반도의 긴장을 높일 필요”가 있었기 때문이라는 분석이다.

그 속내야 무엇이 되었든 이승만은 북한이 장시간 잘 준비한 상태이며, 대한민국은 이에 대해 제대로 대항하지 못할 것이라는 점을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그는 가능한 한 미군의 철수를 늦추고자 했으며, 철군에 따른 군비확충을 서둘렀지만 미국의 비협 조 등으로 뜻을 이루지 못한 상태였다. 이렇게 상황을 잘 알고 있었던 이승만이 비겁자이며 파렴치한이라면 전쟁 발발 소식을 듣자마자 도망을 쳐야 마땅할 것이다.

그런데, 그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이승만은 전황이 명백히 불리해지고 적기가 서울 상공을 선회하는 중에도 맥아더 사령관에게 지원을 요청하고 트루먼 미국 대통령에게서 무기지원을 받아내려고 노력했다. 또 육군본부 등을 직접 방문하여 전황을 보고받 는 등 상황파악과 대응책 마련에 부심하고 있었다.

1948년 8월15일 중앙청에서 열린 대한민국 건국선포식에서 이승만 건국대통령이 기념사를 읽고 있다.
▲ 1948년 8월15일 중앙청에서 열린 대한민국 건국선포식에서 이승만 건국대통령이 기념사를 읽고 있다.


서울로, 서울로!

이승만은 가능한 한 끝까지 서울을 사수해 보려고 노력했다. 그는 급히 맥아더 사령 관에게 지원을 요청했고 미국에 대해 군수지원을 요구했다. 서울의 관문이라 할 수 있는 의정부가 뚫렸다 해도 그는 움직일 생각이 없었다. 결국 광화문에서 지척 거리 에 있는 청량리에 인민군 탱크가 들어왔다는 소식을 접하고서야 어쩔 수 없이 움직일 수밖에 없었다.
 대구까지 남하했던 이승만은 평생 처음으로 판단을 잘못했다며 서울로 돌아갈 것을 명령한다.
대전으로 와서 서울이 위험하다는 보고를 받고도 서울행을 고집한다. 서울이 적의 수중에 들어갔다는 보고를 받은 후에도 서울서 가장 가까운 수원행을 고집한 다. 후에 대전이 위험해 졌을 때 미 대사관 1등 서기관 노블이 대전 이남으로 옮겨야 한다고 했을 때도 이승만은 '대전에서 죽는 것이 낫지 더 이상 남하하여 경멸을 당하 지 않겠다’며 대전 사수를 고집했다.

그러면서 그는 유언과도 같은 메모를 쓴다. “죽음이 결코 두려운 것은 아니다. 다만 어떻게 죽느냐가 문제다. 나는 자유와 민주 제단에 생명을 바치려니와 나의 존경하는 민주 국민들은 끝까지 싸워서 남북통일을 이룩해야 할 것이다.” 이승만을 다시 찾은 노블이 애원에 가까운 설득을 하고, 신성모 장관 등 각료들이 울음 섞인 목소리로 남하를 건의하고서야 남하를 결정한다.

이렇듯 이승만 대통령이 전선에 근접해 있고자 하였던 이유는 두 가지로 생각할 수 있다.
하나는 최고사령관이 전선 가까이에 있어야 국민의 동요를 막고 악전고투하고 있는 국군들의 사기를 북돋우고, 그래서 극단적 열세에서나마 버틸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미국 등 유엔의 참전 촉구 때문이었을 것이다. 침략을 받은 국가의 원수가 긴박한 위험에 처해 있다는 상황은 미국과 유엔으로 하여금 서둘러 참전을 하게 만드는 도화선으로 활용할 수 있다. 노련한 외교가이며 국제정치학 박사인 이승만으로서는 충분히 해볼 수 있는 시도였을 것이다. (당시 트루먼 대통령은 전쟁 발발 사흘만인 6월 27일 일본의 맥아더 사령관에게 한국을 도우라는 명령을 내린다. 거의 같은 시간 유엔안전보장이사회도 북한을 침략자로 규정하고 유엔군을 편성하여 공산군을 저지하기로 결의했다.)
이승만이 그와 같은 구상을 했을 것이라는 정황은 전쟁 발발 첫 날인 6월 25일 경무대로 찾아 온 무초 미국 대사를 만나서 이야기한 '국가수호를 위한 전쟁목표 4원칙’에서 엿볼 수 있다.

 “1. 한국에서 일어난 전쟁이 세계대전의 빌미를 제공하는 장(場)이 되어서는 안 된다.
  2. 한국민은 모든 국민이 참여하는 총력전을 펼친다.
  3. 북한의 불법 남침을 남북통일의 절호의 기회로 삼는다. 해방 후 미·소에 의해 인위적으로
     그어진 38선은 북한이 먼저 침범했기 때문에 이제 필요 없어졌다.
  4. 위기를 타개하고 북진통일을 위 해서는 미국과 유엔의 지원이 필요하다.”


이승만은 기습남침을 당한 위기 상황에서도 미국과 유엔의 지원을 이끌어내고,
통일을 달성하는 기회로 활용하겠다는 대담한 구상을 하고 즉각 실행에 옮기는 사람이다.

그는 국제정세와 미래를 내다보는 혜안을 가지고 있었다.
1950년 7월 11일 자유중국 (대만)이 2만~2만5천 명의 군인을 파견할 용의가 있다고 참전의사를 밝힌다. 단 한 명의 병사라도 아쉬울 판국인데도 이승만은 이 제안을 정중히 거절한다.
왜 그랬느냐 는 프란체스카 여사의 물음에 이승만은 “중공군을 내 손으로 불러들일 수는 없잖아.
” 라고 대답을 했다.
이승만은 적을 보자 허둥지둥 꼬리를 감추고 도망가는 그런 졸장부가 아니다.

전선을 시찰하는 이승만 대통령.
▲ 전선을 시찰하는 이승만 대통령.


 

나보고 한반도를 떠나라고? 여기서 죽을 것이오! 


윌리엄 딘 장군의 대전 방어가 실패로 돌아가자 임시수도를 대구로 옮길 수밖에 없게 되었다.
이때 무초 대사는 정부를 더 멀리 제주도로 이전할 것을 권고한다.
제주도가 적의 직접 공격으로부터 거리를 두고 있고, 설혹 한반도 전체가 공산화되더라도
망명 정부를 존속시킬 수 있는 곳이라는 이유를 들었다.

이 말을 들은 이승만은 주머니에서 권총을 뽑았다.
순간 무초 대사는 입이 굳고 얼굴 색이 하얗게 질렸다.
이승만은 권총을 아래위로 흔들면서 이렇게 말했다.

“만약 공산 군에게 포위당한다면 나와 내 아내는 이 총으로 자결할 것이오.
우리는 정부를 한반도 밖으로 옮길 생각은 조금도 없소.
우리 모두는 함께 일어나 싸울 것이오. 결코 도 망치는 일은 없을 것이오.”


긴장한 무초 대사는 더 이상 아무 말도 못하고 혼비백산 하여 돌아갔다고 한다.

이승만은 비겁자?


인민군의 야크기가 서울 상공을 장악하고 있어도 본인이 직접 전황 보고를 살피러 다녔던 이승만이다. 격추당할 위험이 매우 큼에도 불구하고, 또 야크기 두 대의 추격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위험천만한 저공비행을 하며 전황을 살피기 위해 수원에 오는 맥아더 사령관을 만났던 이승만이다. 맥아더가 한창 모내기를 하고 있던 논의 못자리를 발로 밟고 있다고 지적을 하는 여유를 부리던 이승만이다.

미국이 휴전으로 방향을 잡자 이승만 대통령은 트루먼 대통령에게 다음과 같은 편지 를 보낸다.

“전쟁 이전의 상태로 돌아가 적이 전열을 재정비하고 재훈련하고 재무장 하여
적절한 시기를 택하여 다시 공격하도록 말미를 준다는 것은
극히 어리석은 일이 될 것입니다.

한국의 가슴 속에 부자연스럽게 자라난 악성종양인 제국주의 침략이라 는 암을
영원히 도려낼 시간이 찾아온 것입니다.”


이런 편지를 보내고 휴전을 결사반 대하면서 단독으로라도 북진통일을 하겠다고 주장하면서
목숨까지 걸었던 이승만이다. 목숨까지 걸었다는 것은 다음과 같은 이유 때문이다.

1952년 대선에서 아이젠하워가 대통령이 되고 미국은 이승만 제거계획을 은밀히 추진했다.
미국은 한국의 모 장군을 동원, 이승만 제거작전을 세웠지만, 실패했다.
이승만 대통령은 미국의 전후정책 수행에 치명적인 장애물이었던 것이다.
미국의 이익을 위해 휴전조인을 강행할 경우 이승만이 단독 북진한다면 휴전은 깨지게 된다.
게다가 휴전 조인 한달 전 이승만은 반공포로를 석방함으로써 세계를 놀라게 했다.
 당황한 미국은 이승만을 달래기 위해 부랴부랴 미국으로 초청했지만, 그는 자신은 갈 수 없다며 국무장관을 보내라고 요구한다. 미국은 어쩔 수 없이 국무차관보를 보냈고, 이를 통해 이승만은 휴전 수락 조건들을 제시하고 수락을 받아낸다.

그 조건은 이렇다.
 “1. 한미방위조약 체결
2. 장기 경제원조 및 첫 조치로 2억 달러 공여
3. 한국군 증강 원조 지속
4. 한미고위급회담 정례화 등이다.”


 적을 보자마자 꼬리를 사리고 도망가는 비겁자가 위험을 무릅쓰고 전황을 살피고 우방의 사령관을 만나러 다닐 수 있을까? 또 그런 사람이 자신의 생명을 건 정치적 도박을 할 수 있을까?
국민을 버리고 제 한 몸 살겠다고 도망치는 파렴치한이 생명까지 걸린 커다란 위험을 감수하면서도 한미방위조약 등 향후 대한민국의 안보를 반석 위에 올려놓는 위대한 구상을 하고
그것을 현실로 만들 수 있을까?

건국 대통령 우남 이승만은 '대한민국의 정통성을 부정하고 대한민국 죽이기’에 나선 일부 세력들이 왜곡하고 비틀어서 억지로 만들어 낸 그런 허접한 인물이 아니다.

1953년 8월 한미상화장위조역에 서명하는 변영태 외무장관(왼쪽)과 덜레스 미국무장관 뒤에 서서 서명을 지켜보는 이승만 대통령.
▲ 1953년 8월 한미상화장위조역에 서명하는 변영태 외무장관(왼쪽)과 덜레스 미국무장관 뒤에 서서 서명을 지켜보는 이승만 대통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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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토론문-김용삼  미래한국편집장>

 이승만의 6·25 당시 행적에 대한 진실

 -남침 초기 도주설과 국군의 작전지휘권 이양에 대하여 

 

김용삼 미래한국 편집장.
▲ 김용삼 미래한국 편집장.


 

로마 제국의 33대 황제였던 푸불리우스 리키니우스 발레리아누스(재위 253~260년), 흔히 발레리아누스 1세라고 부르는 이 황제가 서기 260년 적에게 포로로 사로잡혔다. 로마 황제가 적과의 전투 중 전사(戰死)한 사례는 있었어도 포로로 잡힌 것은 이때가 역사상 처음이었다.
후에 동서 로마가 분열된 후 동로마제국(비잔틴 제국)의 황제 로마노스 4세도 적에게 포로로 잡힌 사례가 있다. 군인 황제였던 발레리아누스 황제를 사로잡은 군주는 사산조 페르시아의 샤푸르 1세 였다. 황제가 이끄는 7만 명의 로마 군단은 유프라테스 강을 건너 에데사 성벽 근처 에서 벌어진 전투에서 페르시아 군대에게 패해 포로가 되었는데, 에드워드 기번이 쓴 <로마제국 쇠망사>에는 발레리아누스가 사푸르 1세에게 당한 고초에 대해 이렇게 기 록하고 있다.

“황제의 자주색 옷을 입은 채 사슬에 묶인 발레리아누스가 구경거리를 제공하는 몰락한 귀인의 모습으로 내세워진데다 페르시아 왕은 말에 올라 탈 때면 이 로마 황제의 목을 발판으로 삼았다는 기록이 전해진다.…발레리아누스가 수치심과 비통함의 무게를 견디지 못해 사망하자 샤푸르는 시체의 피부 속에 짚을 넣어 인간의 형상과 흡사 하게 만든 후 이것을 페르시아의 가장 유명한 신전에 오랫동안 보존하도록 했다.”

오늘날 이승만 대통령에게 가해지는 모욕 중의 큰 부분을 차지하는 것 중의 하나가 6 ‧25 전쟁 초기 이승만 대통령이 국민들을 팽개치고 자기 목숨을 구하고자 새벽에 비 밀리에 도주했다는 이야기, 그리고 6‧25 전쟁 중에 한국군의 작전지휘권을 외국군에 게 넘겼다는 것이다.
그런데 6월 25일 기습을 당해 인민군들이 노도처럼 밀려들던 당시 상황을 정밀 복기 해 보면,
이런 주장들은 그야말로 이승만을 흠집 내기 위한 의도적인 선동이자 역사 왜곡이다.

전쟁의 원칙과 목표 설정

우선 첫째, 6월 27일 새벽 3시 이승만 대통령이 특별열차 편으로 서울을 빠져나간 것은 대통령이 먼저 도주한 것이 아니라 위급 상황에서 국가 원수의 대피가 너무 늦었다.
국가가 위급 상황에 빠지면 국가의 안위와 정부의 연속성을 위해 국가원수가 긴급 피난을 하는 것은 상식 중의 상식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승만의 피난을 비난하는 것은 국가 위급상황에서 대통령이 로마 황제 발레이아누스처럼 포로가 되었어야 옳다는 뜻인가?

이승만 대통령이 인민군의 전면 남침 상황을 최초로 보고받은 것은 6월 25일 오전 10시 30분
신성모 국방장관으로부터였다. 이때부터 이승만 대통령은 북한의 대거 남침 상황을 보고 받고
한국군 단독으로는 북한의 남침을 막는 데 한계가 있다는 사실 을 인지하고는 미국의 지원과 유엔의 개입을 위한 전시외교에 주력했다.

이 대통령이 국가원수이자 국군통수권자로서 가장 먼저 취한 조치는 전쟁의 원칙과 목표를 설정하는 것이었다. 긴박한 상황에서 오전 11시 35분 무초 미국 대사의 방문 을 받은 자리에서 이승만은 발제자께서 발표하신 '국가수호를 위한 전쟁목표 4원칙’ 을 밝혔다.

그 중에서도 우리가 눈여겨 봐야 하는 부분은 북한의 불법남침을 통일의 기회로 삼는다는 세 번째 원칙이다. 이승만은 창졸간에 기습을 당해 우리 국군의 방어선이 무너지고 있는 위기 상황에서
전쟁의 목표를 확고히 정했다. 해방 후 미국과 소련에 의해 설정된 38선은 북한이 먼저 침략을 했기 때문에 원천 무효가 되었으며, 따라서 침략자를 퇴치하고 전 국토를 통일하여 통일 민주국가를 수립한다는 원대한 구상을 할 정도로 깊은 전략적 안목을 가지고 있었다.

당시 이승만과 회담한 무초 대사는 그날 14시 전문을 통해 미 국무장 관에게 다음과 같이 보고했다. “내가(무초 대사) 보가에 대통령(이승만)은 상당히 긴장한 듯 보였으나 태연한 태도를 잃지 않았다.… 대통령은 필요할 경우 모든 남녀와 어린아이들까지도 돌멩이나 몽둥이라도 들고 나와 싸워야 한다는 것을 호소해 왔다고 말했다.”

창졸간에 기습을 당한 서울 상공에 북한 비행기가 나타난 것은 오전 10시 무렵이었다. 김포와 여의도 공군기지를 정찰한 인민군 비행기에 이어 정오 무렵 야크 전투기 4대가 서울 상공에 나타나 용산역과 통신소 등 주요 시설에 기총소사를 하고 폭탄을 투하했다.
이처럼 긴급한 상황에서 14시에 비상 국무회의가 소집되었는데, 이 때만 해도 채병덕 육군참모총장은 “북한군이 전면 남침했으나 격퇴가 가능하다”고 발언했다. 그러나 당시 전방 상황은 압도적인 병력과 화력, 전차를 앞세운 인민군의 전면 공격에 우리 국군은 곳곳에서 저항선이 무너져 내리고 있었다.

무초 대사에게 “대전 천도(遷都)” 발언을 한 이유

이승만은 오후 1시, 주미대사관에 전화를 걸어 장면 대사에게 미국의 원조를 얻어내도록 지시했고, 전황이 계속 악화되자 25일 밤 10시에 무초 대사를 경무대로 다시 불러 대책을 논의했다.
이날 회의에 참석했던 무초 대사는 회의가 끝난 후 본국 정부에 회의 내용을 보고했는데,
그 자료 중에 논란이 되는 이승만의 대전 천도(遷都) 이야기 가 들어 있다.

당시 이승만의 대전 천도 발언의 요지는 다음과 같다.

“이 결정이 나의 개인적 안전을 위한 것이 아니라
정부의 역할이 계속되어야 한다는 생각에서 비롯된 것이며,
만약 내가 공산주의자들에게 체포된다면
한국의 장래를 위해서 매우 심각한 사태가 발생할 수 있다.
한국은 미국에게 그렇게 원조를 요청 했지만,
이제 미군 원조도 너무 늦었다.”

이승만의 대전 천도 발언에 대해 무초 대사는 “정부는 서울에 머물러 있어야 하며 대통령이 서울을 떠나더라도 나는 서울에 남아 있겠다”고 발언했다. 이것이 마치 이승만이 비겁자처럼 대전으로 도주하려 했고, 무초는 목숨 걸고 서울을 지키려고 했다는 식으로 해석되는 단서가 되었다.
그런데 무초가 서울 잔류 발언을 한 이유가 있다.
중국 대륙에서 국공내전이 벌어졌을 때 모택동의 공산군이 장개석의 국민당 군대를 몰아내고
북경을 점령했을 때 북경에 있던 미국대사관 요원들은 피난하지 않고 그대로 북경에 머물러 있었다. 그런데 모택동은 미 대사관 직원들을 포로로 붙잡지 않고 국제관계를 고려하여 미국대사관 요원들을 석방한 전례가 있었다. 한 마디로 무초는 중국 사례를 보고 “아무리 공산군이라 해도 국제적으로 면책 특권이 있는 외교관을 함부로 할 수는 없을 것”이라고 믿 는 구석이 있었던 것이다.

 무초 대사처럼 공산군의 태도를 낙관했다가 날벼락을 맞은 곳이 주한 교황청 대사관 이었다.
당시 주한 교황청 대사관의 대표였던 패트릭 번(한국명 방일은·方溢恩) 주교는 일부 외국인 성직자들을 일본으로 피신시킨 뒤 교황 대사관을 끝까지 지키다가 7월 11일 보좌역인 부드 신부와 함께 공산군에 체포되었다. 패트릭 번 주교는 서울 소공동 삼화 빌딩에 감금됐다가 인민 재판에서 사형 선고를 받았다. 번 주교는 이후 인 민군이 후퇴할 때 북한으로 끌려가 평양감옥, 만포, 고산진, 초산진, 중강진 하창리 수용소을 잇는 '죽음의 행진’을 겪으며 극심한 고문과 수난을 당하다 1950년 11월 25일 하창리 수용소에서 순교했다.

온창일 박사의 연구에 의하면 이승만 대통령이 인민군의 남침 공격을 당한 절박한 상황에서 무초 대사에게 대전으로의 천도를 꺼낸 것은 서울 천도를 내세워 미국의 신속하고도 적극적인 지원을 얻어내기 위한 일종의 외교적 압박이라고 해석했다.

당시 중앙청을 점령한 공산군들.
▲ 당시 중앙청을 점령한 공산군들.


국가원수의 피난은 너무 늦었다

대통령의 피난 문제가 처음 제기된 것은 남침 다음날인 6월 26일이다. 이날 오후 2시 40분 인민군 전차부대가 의정부를 점령했고, 곧 인민군 전차부대가 미아리 고개를 넘 어 서울 시내로 들이닥칠지 모르는 다급한 상황이 되었다. 당시 전황이 얼마나 심각 했는지는 인민군 105탱크여단의 작전장교로 참전했다가 후에 귀순한 오기완(당시 인 민군 중좌)의 말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인민군 전차부대는 “남침 순간 쇠몽둥이로 솜뭉치를 뚫는 것처럼 쉬웠다”는 것이다.
인민군은 의정부-창동 노선, 고양-서울 노선, 퇴계원-서울 노선 등 3개 축선으로 서울을 공격해 왔다. 의정부-창동-서울로 향하는 침략부대에는 총 300대의 보유 전차 중 100대의 T34 전차가 배정되어 있었다.

그런데 한국을 구한 결정적인 사건이 발생 한다.
사실 인민군의 남침 작전계획은 스탈린의 작품이다. 스탈린은 바실리예프 중장을 평양 주재 소련 군사고문단장으로 보내 북한의 남침 공격을 위한 작전계획을 작성하여 인민군 총참모장 강건에게 넘겨주었다. 강건은 러시아어로 작성된 이 계획을 한국어로 번역해 김일성에게 보고했는데,
이 과정에서 '선제 타격 계획’이라고 명명되어 있는 명칭이 자신들이 먼저 남침했다는 사실을
적나라하게 드러낼 수 있다 하여 '반격 계획’이라고 바꾸었다.

그런데 소련군이 작성한 남침계획을 전투 현장에서 운영한 지휘관들은 중국의 국공내전에서 게릴라전으로 잔뼈가 굻은 중공군 출신의 조선족 지휘관들이었다. 이들은 국공내전 당시 산전수전 다 겪은 전투방식을 한반도에 그대로 적용하여 전투를 벌였다.  조선족 지휘관들은 국공내전에서 철저히 보병 위주의 게릴라식 전투에만 익숙했기 때문에 기계화 부대의 전략이나 위력에 대해서는 거의 까막눈이나 다름없었다. 덕분에 중공군에서 인민군으로 넘어온 인민군 전방 지휘관들은
전차를 보병 전투의 보조수단 으로만 사용했다. 때문에 보병의 진격속도와 맞추기 위해 전차부대가 너무 앞서 전진 하는 것을 가로막았고, 전차부대가 너무 앞서 진격하면 연락을 하여 뒤로 후퇴시켜 보병부대와 같이 움직이도록 전선을 정리했다. 이처럼 속도전의 총아인 전차를 무려 300대나 보유하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굼벵이처럼 꾸물거리는 바람에 서울 점령까지 사흘이나 걸렸던 것은 우리에게는 실로 천운이었다.

소련군이 북한에 제공한 T-34 전차의 최고시속은 60km, 서울에서 38선까지의 거리 는 48km였다. 인민군은 300대의 전차 중 100대를 38선-의정부-창동-미아리 노선에 투입했다. 만약 인민군 전차 지휘관 중 구데리안 같은 전격전 개념을 잘 아는 지휘관 이 전차전을 운영했다면 서울은 남침 후 불과 반 나절이면 점령되었을 가능성이 높았 다.

창졸간에 의정부가 함락되고 서울로 언제 전차가 들이닥칠지 모르는 위급 상황이 되자 비서들이 교통부장관에게 피난열차 대기를 요청했다. 그러나 이승만은 요지부동이 었다.
27일 새벽 2시 경 신성모 장관, 조병옥, 이기붕 서울시장 등이 참석한 가운데 비상회의가 열렸다. 정일화의 증언에 의하면 이날 경무대에서 열린 비상 국무회의에 원로 자격으로 초청된 이범석은 인민군이 이미 의정부를 점령하고 서울 함락이 경각 에 달렸으니 일단 정부가 한강 이남으로 철수해야 하며, 정부가 철수함과 동시에 한 강 다리를 끊어 배수진을 치고 시가전을 벌여야 한다고 주장했다.

참모들이 이승만 대통령에게 사태의 긴박함을 보고하고 피난을 요청했으나 서울을 떠 날 수 없다는 대통령의 강력한 의지를 꺾을 방법이 없었다. 이 와중에 김태선 서울시경국장이 “서대문형무소에 수 천 명의 공산분자들이 갇혀 있다. 그들이 탈옥하면 인왕산을 넘어 제일 먼저 경무대로 온다. 각하께서 일시 피난하셔서 전쟁 전반을 지도 하셔야 한다”는 보고, 그리고 적 전차가 청량리까지 들어왔다는 경찰 보고가 들어왔다. 이것은 잘못된 보고였음이 밝혀졌는데 실제로 인민군 탱크는
6월 27일 12시경 창동 에 진출했고, 28일 새벽이 되어서야 미아리고개와 퇴계원-중량교를 넘어 서울로 진입 했다. 만약 인민군 전차가 청량리에 들어왔다는 잘못된 보고가 없었다면 이승만 대통 령은 경무대에서 더 지체하다가 서울 탈출 시기를 놓쳤을 가능성도 있다.

주한 미국대사관의 노블 참사관은 이승만 대통령을 비롯한 장관과 고위관리, 국회의 원들이 한강을 넘어 피난함으로써 대한민국의 정체를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은 후일 대한민국의 생존과 번영을 위해 행운이었다고 말한다. 만약 서울 사수를 고집하고 어물 거리다가 정부 요인이 한꺼번에 인민군 포로가 되었다면 정부가 와해될 수도 있었다는 것이다. 6월 27일 새벽 주한미국대사관은 700여 명에 달하는 미국인들을 인천항의 선박편을 이용하여 일본으로 철수시켰고, 이날 아침 애치슨 국무장관은 무초 대사에게 전문을 보내 “무초 대사가 서울에 남을 특별한 이유가 어떤 것인지는 모르나 인민군이 들어 오는데 대사와 외교관들이 자발적으로 포로가 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으니 철수하 라”고 지시했다. 무초 대사는 27일 오전 10시 대사관 암호체계를 파괴하고 11시에  대사관의 2인자 드럼라이트 공사를 대전으로 내려보냈으며, 자신은 자동차편으로 오후 2시 한강교를 넘어 수원으로 떠났다.

당시 인민군이 보유하고 있던 전차의 속도나 성능, 무장능력 등을 고려했을 때 이승만 대통령을 중심으로 한 국가지도부의 피신은 너무 빨랐던 것이 아니라 시기를 놓친 셈이다.
국가 위급 시에 군 통수권자의 안전지대로의 피난은 전쟁 지휘와 국가의 보존을 위해 가장 중요한 일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국가지도자의 피난을 이처럼 몹쓸 언어를 동원하여 비난하는 그 저의가 무엇인지 냉정히 꿰뚫어 봐야 한다.

6.25 이듬해 기념식에서<북진이다, 삼천만 통일이다> 현수막을 걸고 통일을 다짐하는 이승만 대통령 부부.
▲ 6.25 이듬해 기념식에서<북진이다, 삼천만 통일이다> 현수막을 걸고 통일을 다짐하는 이승만 대통령 부부.



국군의 작전지휘권 이양이 주권 포기라고?


또 한 가지, 이승만의 6·25와 관련한 행적을 비난하는 무기가 국군의 작전지휘권을 유엔군에게
넘긴 조치다. 좌파들은 마치 이승만이 국가의 주권을 외국군에게 넘긴 것 처럼 주장들을 하는데, 과연 그게 사실인지 따져봐야 한다.

1950년 7월 7일 유엔안보리는 유엔군사령부 설치에 대한 결의안을 채택했다. 이 결의안은 유엔안보리를 대신하여 한국에서 침략자와의 전쟁을 수행하는 권한을 미국 대통령에게 위임하고, 회원국들이 파견한 군대는 미국의 통일된 지휘체제 아래 둔다는 내용이었다.
7월 13일 한국에서 유엔군 지상부대를 통합 지휘할 미군사령부가 대구로 이동했고, 다음날인 7월 14일 한국군 육군본부도 대구의 미8군 사령부 인접지역으로 이전했다.

이날 이승만 대통령은 무초 주한 미국 대사를 통해 유엔군사령관 맥아더 장군에게 “현재와 같은 적대상태가 지속되는 동안 한국의 육해공군에 대한 지휘권(command authority)을 귀하에게 이양한다”는 서한을 전달했다. 이승만의 편지를 받은 맥아더 장군은 7월 18일 무초 주한 미국 대사를 통해 “이승만 대통령의 결정을 영광으로 생각하는 바이며, 유엔군의 종국적인 승리를 확신한”는 요지의 답신을 보냈다. 이승만의 서한과 맥아더의 회답은 7월 25일 유엔 사무총장에게 전달되어 안보리에 제출됨 으로써 유엔통합군사령관이 한국군에 대한 지휘권을 갖게 되었다.

당시 한국은 유엔에 가입하지 못해 정식 회원국이 아니었다. 그런데 유엔의 결의에 의해 유엔군이 파병되면서 이승만의 외교적 수완이 발동했다. 이승만은 한국군의 작전 지휘권을 맥아더 장군에게 이양함으로써 유엔군사령부에 한국전 수행 책임을 전적으로 맡기고, 한국군은 유엔군의 일원이 되어 전쟁을 하는 군대로 탈바꿈했다.
이것이 이승만이 국군의 작전 지휘권을 이양한 이유다.
 비록 한국이 유엔에 가입하지는 않았 지만, 한국군을 맥아더 유엔통합군사령관의 지휘아래 둠으로써 한국군을 유엔군의 일원으로 만들고, 한국을 유엔의 일원으로 만드는 효과를 발휘하고자 한 것이다.

이승만 대통령은 유엔군이 38선에서 진격을 멈추자, 정일권 총장(오른쪽)에게 "38선은 국군이 먼저 돌파하라"고 지시하였다. 국군 작전통제권의 유엔군 일원화도 이승만이 먼저 제안하였고, 이와 별도로 국군통수권자로서 지휘권도 당당히 구사하는 군사전략가 대통령이었다.
▲ 이승만 대통령은 유엔군이 38선에서 진격을 멈추자, 정일권 총장(오른쪽)에게 "38선은 국군이 먼저 돌파하라"고 지시하였다. 국군 작전통제권의 유엔군 일원화도 이승만이 먼저 제안하였고, 이와 별도로 국군통수권자로서 지휘권도 당당히 구사하는 군사전략가 대통령이었다.


남정욱은 이승만 대통령의 작전지휘권 이양은 주권의 포기가 아니라 유엔 회원국이 아닌 한국에게 유엔 회원국의 자격을 주었고, 유엔군이 아닌 국군에게 유엔군의 일부로 싸울 수 있는 여건을 제공함과 동시에, 미국 주도의 유엔군에게 전쟁에 대한 무한 책임을 지우려는 이승만의 심모원려에서 나온 조치라고 평가한다.

전략가 클라우제비츠는 명저 '전쟁론’에서 전쟁의 승리는 지휘통제체제의 단일화에서 시작된다고 주장했다. 정일화는 이승만은 국군의 작전지휘권을 유엔군사령관인 맥아 더에게 이양함으로써 하나의 전쟁에서 한 명령체제의 원칙이 적용되도록 해 유엔군사 령부가 한국전쟁을 성공적으로 수행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고 지적한다.

미 육군대학 전략문제 교과서로 쓰이고 있는 '전략: 월남전의 비판적 분석’(On Strategy: A Critical Analysys of the Vietnam War)이란 책에 의하면 이 책의 저 자 해리 서머스는 월남전이 패배한 이유 중 하나는 한국전쟁으로부터 지휘통제체제의 단일성을 배우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썼다. 서머스는 한국전쟁은 한국이 전쟁 당사국 이고 미국이 주요 참전국으로 두 대통령이 최고사령관이었으나 공산침략 저지라는 동 일한 목적을 갖고 유엔의 깃발아래 하나의 지휘체제를 움직여 훌륭한 전쟁 수행을 할 수 있었다. 그러나 월남전은 전쟁 목적도 다르고, 하나의 적을 두고 두 개의 군대(미 군과 월남군)가 따로 싸우게 되어 결국 패배했다고 서머스는 지적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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