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7일 열린 삼성물산 주주총회 모습. ⓒ뉴데일리 정상윤 기자.
최근 해외 투기자본으로부터 공격받는 기업이 빠르게 늘면서 '경영권 방어'라는 주제가 뜨거운 감자로 떠올랐다. 미국계 헤지펀드 엘리엇이 지난 달 초 한국 사회를 헤집고 다니는 바람에 이 같은 논쟁에 불이 붙었다.
하지만 지금처럼 반기업, 반재벌 정서가 팽배하다면 100가지 처방도 무효하다는 게 전문가들의 공통된 시각이다.
반기업 정서를 교묘하게 활용한 해외 투기자본 앞에 현행 상법에서 규정하고 있는 10여 가지 경영권 방어 수단이 잇따라 무력화됐다는 사실을 되돌아보면 더욱 그렇다.
◇반(反)재벌·기업 정서... "우리 기업보다 투기자본 더 예뻐"
20일 자유경제원에 따르면 국내 금융시장은 외환위기를 겪으며 이미 개방된 상태다. 이후 우리 기업들은 수차례 외국계 헤지펀드로부터 공격을 받아왔다.
예를 들어 지난 2003년 SK는 영국계 헤지펀드 소버린에 끌려다니다 약 1조원의 시세차익을 내줬다. '투명 경영'이라는 그럴듯한 명분을 내걸고 공격해 오는 소비린 앞에 SK는 가까스로 경영권만 지켜냈을 뿐 많은 상처를 입었다.
당시 소버린의 든든한 후원군은 참여연대와 같은 우리나라 시민단체였다. 지갑을 두둑하게 채운 소버린은 1조원을 들고 곧바로 한국을 떠났다.
지난 2004년 삼성물산과 헤르매스, 2006년 KT&G와 칼 아이칸의 사례도 비슷한 경우다. 특히 KT&G의 경우 기업 지배구조가 단단하다는 평가를 받았었지만 '먹튀' 칼 아이칸에 속절 없이 무너졌다.
재벌 총수 기업이라고 하면 해외 투기자본보다 더 못한 대접을 받는 게 한국 사회의 현주소인 셈이다.
조금 다른 성격의 예이긴 하지만 SK그룹 최태원 회장도 반기업 정서의 희생양이다. 더 정확히 얘기하면 옥중에 머물러 있는 최 회장의 사면을 간절히 기다리고 있는 SK하이닉스가 최대 피해자다.
SK하이닉스는 매 분기마다 사상 최대 실적 기록을 갈아치울 만큼 잘 나가는 글로벌 반도체 기업으로 손 꼽힌다. 그럼에도 직원들 얼굴은 그리 밝지 않다. 지금의 영광이 곧 꺾일 수 있다는 걱정 때문이다.
SK하이닉스는 관련 업계 사이에서 '반쪽짜리' 기업이라는 비아냥을 듣고 있다. 실제 이 회사는 반도체 사업 양대산맥 가운데 하나인 시스템반도체 부문의 경우 중국 시장을 겨냥한 저가형 제품을 소량 생산할 뿐 사실상 손도 못 대고 있다.
메모리반도체 하나만으론 반도체 시장에서 큰 힘을 쓸 수 없다는 게 업계의 중론이다. 메모리반도체 하나에만 매달려 '마른 수건 짜기'식 실적 높이기는 결국 한계를 맞을 수밖에 없다.
하지만 해마다 수조원이 들어가는 시스템 반도체 투자를 최 회장 없이 결정한다는 건 불가능에 가깝다. 기업의 명운을 건 책임 있는 의사결정은 총수만 내릴 수 있기 때문이다.
SK하이닉스 입장에선 최 회장의 사면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최 회장은 현재 2년 6개월째 수감 생활을 이어가며 가석방 요건을 벌써 충족했다. 형량의 절반 이상을 채워 일반 범법자와 같은 기준을 적용한다면 이번 광복절에 특사 사면을 기대해 볼 수 있다.
그러나 재벌 총수 사면에 대한 부정적 여론을 어떻게 누그러 뜨리냐가 관건이다. 더욱이 이 문제는 정치적 이슈와도 맞물려 있어 쉽지 않다. 이번 사면은 박근혜 정부 들어 두 번째다. 노무현 정권 당시 8차례나 사면이 이뤄졌음을 고려하면 어렵지 않아 보이지만 갈수록 커져가는 반기업, 반재벌 정서를 어떻게 극복하느냐가 숙제다.
◇재벌 무조건 나쁘다?.. "기업 경영방식 중 하나 인정해야"
지난 17일 결판 난 삼성물산 합병 과정에서도 재벌과 대기업에 대한 노골적인 혐오증을 드러내며 '삼성 때리기'에 바쁜 일부 시민단체와 국민들의 모습을 확인할 수 있었다. 이들은 외국 투기자본, 먹튀보다 재벌이 더 싫다는 식의 사고를 적나라하게 표출했다.
하지만 재벌 총수 구조를 지지하는 목소리도 상당수 있었다. 재벌 총수가 이끄는 경영방식도 기업 스스로가 정할 수 있는 하나의 선택지로 인정해야 한다는 주장이었다.
김선정 동국대 법과대학 교수는 "재벌 총수가 있으면 무조건 문제가 있다는 식의 감정적 표현을 멈춰야 한다"면서 "한국과 같은 문화에선 총수가 있는 기업이 더 효율적이고 경쟁력 있는 경영을 이어갈 수 있다"고 밝혔다.
그는 "우리의 경영 풍토가 미국과 동일했다면 전문 경영인 중심의 기업이 다수 나왔겠지만 우린 상황 자체가 다르다"며 "선진화된 지배구조를 갖은 기업이란 해당 풍토에 적합하게 발전하고 수익을 내는 회사"라고 설명했다.
김 교수는 또 "미국의 형태가 무조건 정답이 될 수 없고 각 나라 풍토에 맞게 꾸려나가면 된다. 삼성과 LG, 현대, SK 등이 좋은 예시"라면서 "경제민주화라는 환상에서 벗어나 합리적인 시각으로 기업을 들여다 봐야 한다"고 강조했다.
가장 선진화된 기업 생태계를 가졌다는 미국 기업도 '경제민주화 잣대'를 들이대면 허점이 많다. 기업 내 일부가 의사 결정권을 몰아 쥐는 '비민주적(황금주)' 방식을 경영권 방어 수단이라는 명분 아래 허용하고 있다. 주식 1주당 1개의 의결권만 부여하는 우리 기업보다 오히려 더 수직적인 체계라고 볼 수 있다.
황금주 제도는 구글과 페이스북, 뉴욕타임즈 등 미국의 대표 기업들이 두루 쓰고 있다. 뉴욕타임즈의 경우 슐츠버그재단이 0.6%의 지분으로 의결권 100%를 독점하고 있다. 차등의결권 제도를 인정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 제도는 복수의결권 또는 황금주라고 불린다.
주주들의 의사결정은 이익 극대화로 치우칠 수밖에 없다. '진실의 파수꾼, 정론직필'의 길을 걸어야 할 언론사가 삼아야 할 가치와는 차이가 있다. 때문에 뉴욕타임즈는 재단에 의결권 전부를 위임해 기업의 전통과 지향점을 모두 지키도록 했다. 구글과 페이스북도 마찬가지 이유로 황금주 제도를 도입했다.
경제민주화와 정반대 편에 서 있는 황금주 제도가 미국에선 성공적으로 자리를 잡은 것이다.
◇'반기업 색안경' 벗어야.. 경영권 방어 최선책 '국민 지지'
이번 엘리엇 사태를 겪으며 국민과 기업 사이 신뢰가 필요하다는 사실을 누구 하나 가릴 것 없이 모두가 절감했다.
특히 일이 터졌을 때만 벼락치기식 선심성 정책을 내놓는 일부 기업에겐 사회적 책임의 중요성을 다시 한 번 진진하게 고민해 볼 수 있는 계기가 됐을 것으로 보인다.
과거의 잘못만 따지다 보면 한 발도 내딛을 수 없다. 시시비비를 가리는 언쟁을 벌이는 동안 수많은 우리 기업들이 해외 투기자본의 먹잇감이 될 수도 있다. 빈대 잡자고 초가삼간 태우는 꼴은 면해야 한다.
재계 한 관계자는 "국민들은 색안경을 벗고, 합리적 시각으로 시장을 바라볼 수 있어야 하며, 기업들은 최고의 경영권 방어 수단이 '국민의 지지'라는 점을 무겁게 다시 한번 생각해야 할 때"라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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