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도] 빛바랜 사진이라 말하지 말라

자유경제원 / 2015-08-04 / 조회: 4,314       전남일보
빛바랜 사진이라 말하지 말라
[전국에 뿌리내린 전라도의 발자취] <2> 서울 구로공단 호남 출신 여성근로자들
한국 수출 역군들, 오빠 동생 학비 댄 억척 언니들
입력시간 : 2015. 07.30. 00:00



 

봉제작업을 하는 구로공단 여공.

꽃다운 10대 상경해 고된 노동 구로동ㆍ독산동ㆍ가리봉동…
벌집촌ㆍ닭장집에서 가위잠 자며 월급 7만~8만원 대부분 고향집 송금
열악한 노동여건과 저임금에도 수출 최일선에 서고 노동운동 주도
월남용사ㆍ중동 근로자ㆍ파독 광부 이들과 동등한 역사적 대접 받아야 


우리나라 산업화의 상징적 공간이었던 서울 '구로공단'. 이곳은 우리나라 산업화 초기 경공업 중심의 수출지향 경제발전을 이끈 첨병이었다. 노동집약적인 섬유, 봉제, 전자 및 잡화(가발 등) 업종이 중심이 된 구로공단은 1977년 우리나라가 10억 달러 수출을 달성할 당시 전체의 10%(1억 달러)를 점유할 정도로 수출을 주도했다.

1964년 9월 제정ㆍ공포된 '수출산업공업단지개발조성법'에 따라 한국수출산업공단으로 출범한 구로공단은 1973년까지 총 198만2000㎡(약 60만 평) 규모의 3개 단지가 단계적으로 조성됐다. 그러나 구로공단은 1988년에 수출 42억 달러, 1987년 고용인원 7만3000여 명을 정점으로 경공업 중심의 성장에 한계를 드러내기 시작됐다. 이에 따라 1997년 구로산업단지 첨단화 계획이 고시됐고 2000년 2월 14일 '구로공단'에서 '서울디지털산업단지'로 명칭을 변경, 첨단 도시형 산업단지로 변모하게 됐다.

구로공단의 주역은 바로 10대 중반~20대 초반의 여성근로자였다. 구로공단 근로자의 80% 이상을 점유한 여성근로자들은 대부분 전라도와 충청도에서 가족의 생계를 책임지기 위해 고향을 떠나 산업전선에 뛰어든 꽃다운 소녀들이었다. 

특히 '농도(農道)' 전라도 사람들은 산업화를 뒷받침하기 위해 도입된 저곡가 정책으로 농사만으로는 생계를 꾸려가기 어려웠다. 그래서 급격한 이농현상을 겪으며 산업노동자로 뛰어든 이유가 여기에 있다. 여성도 예외일 수 없었다. 

구로공단 여성노동자의 절반 이상이 전라도 출신이었다는 점이 이상할 게 없었다. 고향을 떠난 전라도 여성들은 구로공단 인근 '닭장집', '벌집'이란 비좁은 공간에서 최저의 생활을 하면서도 고향 가족의 생계를 책임져야 했다. 

지난 22ㆍ23일, 당시 전라도 출신 구로공단 여성근로자들의 생활상을 알아보기 위해 서울시 금천구 벚꽃로 44길 17(가산동)에 위치한 구로공단노동자생활체험관을 찾았다. 그곳에 비치된 자료와 함께 구로공단 내 대우어패럴 노조위원장과 사무국장을 지냈던 김준용(56ㆍ국민대통합위 위원)ㆍ강명자(52ㆍ대우어패럴동지회 회장)씨를 통해 당시 상황을 들었다.

"서른일곱 개의 방이 있던 그 집, 미로 속에 놓인 방들, 계단을 타고 구불구불 들어가 이젠 더 어쩔 수 없을 것 같은 곳에 작은 부엌이 딸린 방이 또 있던 3층 붉은 벽돌집…(중략)…서른일곱 개 방 중의 하나, 우리들의 외딴 방. 그토록 많은 방을 가진 집들이 앞뒤로 서 있었건만, 창문만 열면 전철역에서 셀 수 없는 많은 사람들이 쏟아져 나오는 게 보였다." 

1980년대 서울 구로공단에서 여성근로자로 일했던 소설가 신경숙이 그의 자전적 소설 '외딴방'에서 묘사한 '벌집촌'의 모습이다. 

지난 22일 찾은 구로공단 노동자생활체험관에는 30~50여 년 전 '벌집'과 '닭장집'이라 불린 쪽방에서 2~3명의 10대 여성들이 가위잠을 청해야 했던 생활상이 지하 1층과 지상 2층 건물에 그대로 재현돼 있었다. 한 평도 안된 '쪽방' 부엌에 있는 연탄아궁와 석유곤로, 그리고 방안에는 철제 프레임에 비닐을 씌운 '비키니장'이 놓여 있었고, 소녀들의 우상이었던 청춘스타의 사진들이 벽에 붙어있었다. 보증금 20만원에 월세 3만~4만원이었던 방세를 분담하기 위해 2~3명이 한 방에서 쪽잠을 청해야 했던 우리 '누님들'의 모습을 바로 눈앞에서 지켜 보는 듯했다.

1960년대 중반부터 1980년대 중반까지 가족의 생계를 책임져야 했고, 오빠ㆍ남동생 학비 마련을 위해 서울로 향했던 전라도의 꽃다운 소녀들은 분명 이곳에서 살았다. 꿈 많은 소녀시절을 희생한 채 '공순이'라는 말을 들으면서도 이를 악물고 악착같이 삶을 이어갔던 그들은 월급 7만~8만원 가운데 월세와 최소한의 생활비를 제외한 대부분의 월급을 매달 고향집으로 송금했다.

구로공단이 제모습을 갖춘 1970년대, 10대 소녀들은 학교와 자매결연을 맺은 기업체에 모집돼 노동현장에 본격 투입됐다. 당시 오빠나 남동생의 진학을 위해 배움의 길에서 소외됐던 그녀들은 가족의 생계를 책임져야 했고 아들들의 학자금을 조달해야 했다. 대부분의 여성근로자들은 이같은 상황을 숙명적으로 받아들였다. 자신을 위해 돈을 쓸 수 있는 시간은 1주일 중 유일하게 외출이 허락된 토요일 오후. 그들은 주말 오후, 당시 소녀들이 즐겨 찾았던 구로공단 인근 고고장(젊은이들이 춤을 출 수 있었던 곳)이나 음악다방에서 1000원짜리 쿨피스(음료수) 한 잔을 주문하고 한 주간의 피로를 풀었던 것이 사실상 전부였다. 또 영등포여상 등 산업체근로학교에 진학해 미래의 꿈을 꾸었던 것이 본인에게 주어진 유일한 희망이었다. 

처음 입사한 초년생들은 갑작스런 환경변화에 적응하지 못해 몇 달간씩 가족과 고향을 그리며 눈물로 지새우기도 했다. 명절이 다가오면 100일 전부터 손꼽아 기다렸고, 명절 이후엔 동구 밖까지 나와 배웅하며 손을 흔들었던 가족들의 모습을 떠올리며 눈물지었다.

기숙사를 갖추고 이들 여성근로자들에게 숙식을 제공한 기업체도 있었지만 하루 10~12시간의 작업 뒤 주어지는 잠자리는 내일의 생산을 위한 하나의 수단에 불과했다. 수용인원에 비해 턱없이 부족한 기숙사 시설, 부모가 찾아와도 토요일을 제외하고는 외박이 허용되지 않았던 통제, 밤 11시면 어김없이 소등돼 억지로 잠을 청해야 했던 열악한 노동환경을 감내해야 했다. 심지어 퇴근때면 몸수색까지 받아야 했다. 기숙사의 혜택(?)을 보지 못하는 여성근로자들이 찾은 곳이 바로 구로공단 인근 구로동ㆍ독산동ㆍ가리봉동에 자리한 '닭장집' '벌집'들이다.

그러나 그녀들은 연약하지 않았다. 열악한 노동여건과 저임금 등에 억눌렸던 구로공단 노동자들은 노조를 결성해 조직적으로 대응하기 시작했다. 노동자들의 분노가 폭발한 것이 1985년 6월22일부터 29일까지 전개된 '구로공단 동맹파업'이다. 당시 대우어패럴 노조위원장 김준용과 사무국장 강명자씨 등 3명의 노조간부들을 당국이 구속하자 이에 대항해 5개 노조가 동맹파업에 동참하면서 지지연대투쟁으로 확산됐고, 이는 노동운동 단체와 민중운동세력의 지지연대투쟁으로 확대됐다. 43명이 구속됐지만 이 사건으로 인해 우리사회에 노동운동이 눈을 뜨는 결정적 계기가 됐다. 구로공단이 우리나라 노동운동의 발상지가 된 것도 여기서 비롯된다.

구로공단 여성근로자들이 가족에 대한 부담에서 벗어나는 시점은 결혼이었다. 그들은 자신의 가정을 꾸리고서야 독립된 생활인이 될 수 있었다. 그러나 빈손으로 또 다른 생활을 시작해야 했다. 자녀를 키우고, 집 한칸 마련을 위해 맨주먹으로 새로운 삶을 개척해야 했다.

노동집약적 경공업이 쇠퇴하면서 구로공단 여성근로자들은 인근 구로동ㆍ독산동ㆍ가리봉동에 봉제공장을 차리거나 종업원으로 취업해 생계를 이어갔다. 지금도 이곳에 전라도 사람들이 많이 살고 있는 이유이다. 일부는 봉제공장 사장으로 성공한 사람도 있지만 대부분 소량의 내수를 담당하는 소규모 공장주나 종업원에 머물고 있다. 

30~50여 년이 지난 지금, 청춘을 바쳐 가정을 지켜왔고, 우리나라 산업화의 역군이었던 구로공단 여성근로자들에게 돌아온 것은 여전히 고단한 삶이였다. 그러다보니 자신들의 삶에 대해 아쉬움을 갖는 이들도 상당수에 이른다고 한다. 

다행인 것은 최근들어 당시 구로공단 여성노동자들에 대한 재조명 움직임이 일고 있다는 점이다. 그녀들의 희생으로 수출산업 중심의 자립경제 과업을 달성했기 때문에 월남참전용사나 중동파견 건설근로자, 그리고 파독 광부와 간호사들과 동일한 기능과 역할을 담당한 산업역군으로 평가를 받아야 한다는 것이다.

지난 5월12일 자유경제원이 주최한 '경제발전의 뿌리를 찾아서'라는 정책토론회에서 이상희 한국산업기술대 지식융합학부 교수는 "구로공단 근로자들은 과거의 인물이 아니라 동시대에 경제성장의 종잣돈 마련을 위한 주요 전략의 한 축에 해당하는 큰 임무를 담당한 세대로 자리매김할 필요가 있다"면서 "후세대에게 존경받을 수 있도록 하는 국가적 헌신과 관련한 실증적 자료 제작이나 이들의 업적을 기리는 교육자료 반영, 이들에 대한 존경을 표하는 상징적 행사 등을 모색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강덕균 선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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