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도] [8·15 특집] 시장경제를 택해 한강의 기적을 이루다

자유경제원 / 2015-08-17 / 조회: 5,054       미디어펜
[8·15 특집] 시장경제를 택해 한강의 기적을 이루다이승만 "10년이면 산업화 자신"…대한민국 부국의 기틀 마련
김학은  |  media@mediape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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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5.08.15  09:35: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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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경제원은 13일 ‘해방 70년, 광복 67주년’ 기념 특별토론회를 개최했다. 이날 토론회는 송복 연세대학교 사회학과 명예교수와 복거일 작가의 기조강연에 이어 Session 1-‘대한민국 건국의 역사적 의미’, Session 2-‘대한민국–시장경제를 택해 부국을 이루다’로 나뉘어 진행됐다. 

세션 1은 현진권 자유경제원 원장의 사회로 ‘대한민국 역사’의 저자인 서울대학교 경제학부 이영훈 교수의 ‘건국의 역사적 의의와 현실’이라는 주제 발표에 이어 강규형 명지대학교 기록대학원 교수, 류석춘 연세대학교 이승만연구원 원장, 이명희 공주대학교 역사학과 교수, 이한우 조선일보 문화부장이 열띤 토론을 벌였다.

세션 2는 박동운 단국대학교 경제학과 명예교수의 사회로 김학은 연세대학교 경제학부 명예교수의 ‘대한민국-시장경제를 택해 부국을 이루다’는 주제 발표에 이어 김승욱 중앙대학교 경제학부 교수, 김용삼 미래한국 편집장, 조우석 문화평론가가 토론을 펼쳤다.

자유경제원은 “해방 후 3년 만에 이루어진 대한민국의 건국은 극심한 좌우 갈등 속에서도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를 이념으로 하는 근대국가를 세웠다는 데 가장 큰 의미가 있다”며 “광복 67주년을 기념하여 대한민국 건국의 의미를 되새기기 위해 자리를 마련했다”고 밝혔다. 아래 글은 김학은 연세대학교 경제학부 명예교수의 '대한민국–시장경제를 택해 부국을 이루다' 발제문 전문이다. [편집자 주]

  
▲ 자유경제원은 지난 13일 ‘해방 70년, 광복 67주년’ 기념 특별토론회를 개최했다. 김학은 연세대학교 경제학부 명예교수가 '대한민국–시장경제를 택해 부국을 이루다' 발제문을 발표하고 있다.

대한민국 – 시장경제를 택해 부국을 이루다



1. 필자에게 주어진 제목은 <대한민국-시장경제를 택하여 부국을 이루다>이다. 여기서 시장경제는 시장자본주의경제라고 이해된다. 다소 생소한 이 용어를 언급하는 이유는 한국이 시장경제를 선택하던 1948년 당시에 1930년대부터 시작된 시장사회주의 논쟁이 치열하게 전개되었기 때문이다.[Lange 1935]. 이 글에서는 후자와 대립되는 전자를 편의상 시장경제라고 부르겠다. 시장경제는 세 가지 측면이 있다. 장소로서 시장경제, 제도로서 시장경제, 기구로서 시장경제이다. 시장제도는 인위적 법률로 만들어 진다. 시장기구는 자연적 법칙이다. 법률로 시장제도를 만들었다 하여도 시장기구로서 실패할 수 있다.

2. 필자는 이 글의 제목이 암묵적으로 한정하는 시기가 1945-1960년이라고 이해한다. 이 시기는 이승만의 국가건설, 국가방위, 국가재건의 시기와 일치한다. 제목의 시사점은 이승만이 시장[자본주의]경제를 한국역사에서 최초로 도입했다는 것으로 이해된다.

3. 따라서 제목은 두 가지 차원에서 상대적이다. 첫째, 동일한 시간에서 두 가지 다른 공간 사이의 비교경제제도의 상대성이다. 둘째, 동일한 공간에서 두 가지 다른 시간 사이의 비교경제제도의 상대성이다. 전자의 예가 동일한 시대에 남한과 북한 사이의 경제제도의 비교이다. 대한민국의 시장경제와 북한의 공산주의경제의 대비이다. 이것은 이미 여러 사람들에 의해 충분히 논의되어 왔다. 후자의 예는 동일한 공간인 한반도에 일제강점기와 대한민국 초기 사이의 경제제도의 비교이다. 

이것은 일제강점기의 경제제도가 무슨 경제제도였든가에 대한 문의이다. 통제경제였지만 무슨 통제경제였던가? 그것은 공산주의 경제도 아니었고 사회주의 경제도 아니었다. 봉건경제도 아니었다. 그렇다면 하나만 남게 되는데 그것이 시장경제였든가? 시장경제였다면 이 글의 제목은 의미가 없다. <대한민국이 시장경제를 선택하였다>는 이 글의 제목이 고유한 의미를 가지려면 일제강점기의 경제제도는 시장경제가 아니었어야 한다. 과연 그러했나? 이 질문은 필자가 과문한 탓인지 한 번도 제기된 적이 없다.

4. 이 사실의 확인이 중요한 것은 지금까지 일제하 및 대한민국 초기 한국경제발전과 관련된 연구가 주로 실물부문에 초점을 맞추었기 때문이다. 이에 금융부문에 관한 연구가 Woo(1991)에 의해 수행되었지만 경제학이론에 입각한 것은 아니었다. 다시 말하면 경제변수 사이의 관계를 규명하는 일반균형론에 근거를 두지 않은 정치학적인 접근이었다. 그의 연구는 일제하 공적 금융시장의 존재성을 검토함이 없이 당연히 존재한다는 암묵적인 가정 하에 금융활동이 조선[한국]의 경제발전에 미친 효과의 검토였다. 그 가운데 특히 일제 시기는 식민지경제였다. 

식민지경제를 연구하려면 지대, 이자율, 이윤율, 임금, 가격, 조세 등 경제변수의 상호 관계를 조사하지 않으면 안 된다.[Smith 1776 Volume Two Book IV]. 식민지 착취로 이들 경제변수의 부정적인 왜곡이 식민지 경영비용을 상승시켜 마침내 식민지 이익을 초과하는 지경에 이르게 되는데 이때 식민모국은 식민지 저항과 마주하게 된다. 아담 스미스가 아메리카식민지의 저항과 독립을 예측하고 영국에 그 독립을 허용할 것을 권한 이유이다. 식민지에 법률로서 시장제도는 있지만 시장기구가 작동하지 않기 때문이다.

5. 지난 1세기 동안 한국에서 대출이 예금을 항상 ‘월등히’ 초과한 시기는 일제하였다.[우대형 1996] 자금의 부족분은 항상 일본에서 조달하였다. 다시 말하면 식민지 개발을 위한 목표자금액을 정해놓고 조선에서 예금을 강제로 동원하는 제도였다. 그 일환으로 일제하 금융밀도(점포수/인구수)가 세계에서 유래 없이 빠르게 높아져 갔다.[우대형 1996] 이것은 회귀방정식으로도 확인된다. 이 방정식의 추정에 문제가 있긴 하지만 예금화폐의 증가율이 이자율 및 국민소득의 변화율과 통계적으로 유의한 관계가 아니라는 사실이 일제하 조선에는 금융제도만이 존재하고 공적 금융시장은 시장기구로서 사실상 작동하지 않았다는 증거이다.[우대형 1996] 금융에 관한 한 일제하 조선에는 공적 금융시장이 사실상 작동하지 않았다고 말해도 과장되지 않는다. 

사적 금융시장이 공적 금융시장을 대체하였다고 해석된다. 고율의 금리에 대한 연구[김준보 1970]가 이와 관련 있을 것으로 사료된다. 그밖에 화폐화monetization도 중요한 척도인데 일제치하의 그것에 관한 연구는 아직 보이지 않는다. 35년의 일제강점기 이전의 25년의 선교학교 교육이 그 후에 미친 영향에 대한 연구도 중요하다. 예를 들면 조병옥은 선교학교 공주 영명학교를 졸업하고 평양 숭실학교와 서울 배재학교를 거쳐 미국 유학을 다녀온 후 역시 선교학교인 연희전문에서 가르쳤다.

6. 이제 남은 작업은 제도와 기구로서 시장경제의 선택이 대한민국 건국의 고유한 업적임을 보이는 일이다. 지난 70년 동안 한국은 한국사뿐만 아니라 세계사에 유래 없는 경제성장을 하였다. 문맹률은 80퍼센트에서 0퍼센트로 낮아졌고 평균수명은 45세에서 82세로 연장될 정도로 건강해졌다. 이러한 성과는 풍부한 자연자원 덕택도 아니고 제국주의가 되어 약소국가를 침략하여 식민지를 착취한 결과도 아니다. 자연자원은 빈약하고 특히 20세기의 총아인 석유는 전혀 생산되지 않고 있는 형편이다. 

식민지를 가져보기는커녕 오히려 다른 나라에 수탈당한 식민지였다. 무엇보다 육이오 전란으로 그나마 갖고 있던 약간의 자본마저 대부분 전화에 사라졌고 국토는 두 동강나서 남한은 주로 농업에만 의존하는 형편이었다. 여기에 지난 70년 동안 국방비 부담이 그나마 축적한 자원을 경제적으로 사용할 수 없게 만들었다. 이처럼 열악한 환경에서 반 세기만에 이러한 성과를 올린 나라는 일찍이 없었다. 제2차 대전 이후 독립된 국가 가운데 한국과 비슷한 성과를 올린 나라가 전혀 없진 않지만 한국만큼 열악한 조건에서 출발하지 않았다.

  
▲ 자유경제원 주최 ‘해방 70년, 광복 67주년’ 기념 특별토론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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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떻게 이러한 성취가 가능하였을까. 지난 70년 동안 한국은 불완전하지만 자유주의 시장경제의 한 쪽을 차지하고 있었던 덕택이었다고 말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이에 대하여 북한은 공산주의를 선택한 결과 식량을 걱정하기에 이를 정도로 경제가 어려워진 것도 사실이다. 전 세계적으로도 70년의 공산주의 실험은 실패로 끝났다. 그러므로 어느 제도가 우수한가는 분명해졌다. 이제 우리에게 남은 문제는 자유주의 시장경제를 더욱 발전시키는 것이다. 이것이 세계사적 조류이다. 대한민국 건국과 함께 채택한 자유주의 시장경제 채택의 지적 또는 사상적 배경은 무엇이었나?

8. 이승만은 청년기부터 기독교와 함께 자유주의를 수용하였다. “에이비슨 박사는 그가 이 땅에 전한 기독교 정신으로부터 오는 자유주의 사상의 상징으로써 본 대통령[이승만]의 신실한 친구이며 또 본 대통령의 청년시기에 기독교 민주주의의 새 사상을 호흡케 하였다.”[연세대학교 의과대학 1985]. 에이비슨Avison의 자유주의가 잘 나타난 것은 삼일운동 직후 당황한 총독부가 그에게 사태수습의 의견을 요청했을 때 전개한 그의 발언에서 발견할 수 있다. 에이비슨은 당시 영국의 속국인 캐나다 시민이었다. “대영제국의 신민으로써 어떤 의미에서 미국 친구들보다 언론의 자유가 [더] 있을 수 있다. 

대영제국 신민으로써 생각하지 않으면 안 된다. 세키야[關玉貞三郞 총독부 학무국장]씨가 솔직히 말을 했으니 마음에서 솔직한 의견을 말하겠다. … 인간의 자유에 관하여 내 생각을 말하겠다. 1. 민족정신은 대단히 중요하다. 나는 [영국의] 식민지 백성으로서 경험을 말할 수 있다. … 2. 자유인은 민족의 언어를 사용할 권리가 있다. … 3. 언론의 자유는 또 하나의 권리이다. … 4. 동시에 출판의 자유가 있다. … 5. 이것과 관련하여 집회의 자유가 있다. … 6. 모든 자유인은 참정권을 갖는다.”[이성전 2006]

9. 조선에는 예로부터 불기不羈라는 말은 있었다. 그러나 한국 최초로 자유의 개념을 접한 사람은 박영효라고 알려졌다. 그는 그 뜻을 충분히 이해하지 못하였다. 그 후 유길준이 1895년에 출판한 ‘서유견문록’이 자유에 관한 최초의 입문서라고 여겨진다. 그는 “욕심을 버리고 천리로 정직한 도를 따르는 양자유와 인욕의 사벽을 따르는 악자유”로 구분하였다.[정용화 2000, 70쪽] 유길준의 자유는 일본의 후쿠자와 유기치의 자유를 수입한 것이다. 그러나 이들이 말하는 자유는 liberty였지 freedom이 아니었다. 전자는 주인이 노예를 속박에서 풀어주며 베푸는 인위의 자유이고 후자는 개인이 태어날 때부터 하늘로부터 부여받은 양도할 수 없는 천부의 자유이다. 

청년 이승만은 이 차이를 알고 있었다. “새 교화의 자유 하는 도로써 오랜 풍속의 결박 받은 민심을 풀어 주어야 비로소 고질 된 구습을 벽파하고 만일 그 마음의 결박 받은 것을 풀지 못하여 옛 풍속의 압제 속에서 자유하지 못하며 몸만 자유를 얻으려 할진대 이는 결단코 되지 못할 일이라.”[이승만 1904, 101쪽] 마음의 자유가 양자유이고, 몸의 자유가 악자유이다. 

이승만의 애송 성경구절 “주께서 우리를 자유롭게 하려고 그 자유를 주셨으니 그러므로 굳건하게 서서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 말라.”[갈라디아서 5:1]. 이승만의 자유주의 사상은 그 후에도 1923년 3월 ‘공산당의 당부당,’ 1945년 12월 19일 “공산당에 대한 나의 입장,” 1946년 2월 6일 “27개항,” 1946년 미국무성에 제출한 “6개항,” 1949년 9월 “일민주의” 등에서 드러난다. [유영익 2013] 이승만이 독립정신을 감옥에서 쓰게 된 것은 감옥동료인 유성준의 권유에 의한 것인데 그는 유길준의 아우였다. 다시 말하면 이승만은 우리나라 최초로 liberty와 freedom의 차이를 이해하였다. 그 후 그의 여러 글에서도 확인되며 특히 그가 일본으로부터 자유를 찾는 것이 천부의 자유freedom임을 강조한다.

10. 서양에서 자유라는 말은 오래 전부터 있었지만 자유주의라는 용어가 문헌에 처음 나타난 것은 1821년이다. [Salleron, 1978, Ch.1]. 그것은 대체로 개인주의, 소유주의, 시장주의로 요약된다. 개인주의는 전체보다 개인을 먼저 생각하는 사상인데 로크가 ‘시민정부론’에서 주장한대로 역사적으로 개인이 사회보다 먼저 존재해왔다는데 그 근거를 둔다. 개인주의 아래에서 자유는 자기 자신에 대한 완전한 소유이다. 이것이 개인소유권의 출발점이 된다. 자신의 운명은 자신이 자유로이 결정한다. 소유권을 갖고 자신의 운명을 결정하는 수단이 시장이며 시장은 개인으로 하여금 자신의 소유와 남의 소유를 교환하도록 도와준다. 

교환이 비로소 개인이 다른 개인을 만나게 하여 사회형성의 조정을 가능하게 한다. 그러나 개인이 사회에 참여하는 것은 다른 사람에게 빼앗길 수 없고 양도할 수 없는 천부의 자유가 보장되는 것을 전제로 하며 이러한 조건이 지켜지지 않을 때에는 그 정부를 전복하여 다른 정부를 구성할 수 있다. 이것이 로크의 ‘시민정부론’이다. 어떠한 철학학설이라도 자유주의라는 이름을 가지지 않는 이유는 자유주의가 너무 원초적인 사상이기 때문이다. 사회주의라는 용어가 처음 등장한 것은 1831년이다. 그 후 1백 년 동안 261개의 의미가 혼재하였다. 혼란스런 개념에서 공통점은 평등사회, 사유재산 제한, 계획경제였다.[Salleron 1978]

11. 기독교사상에 의하면 하나님과 언약을 깨고 죄를 지은 인간에게 하나님이 부과한 형벌이 자원의 희소성이다.[Perlman 1996] 유대교사상에 의하면 하나님은 희소성에 추가하여 불확실성을 만들었다고 한다.[Perlman 1996] 여기서 자유가 탄생한다. 왜 자유인가. 평등, 정의, 질서, 안전을 제치고 자유를 사회의 최우선 덕목으로 삼아야 하는 이유가 무엇인가. 이에 대하여 명쾌하게 답을 제시한 학자는 없다. 다만 프리드만은 자유의 본질이 불확실성과 마주한 개인의 무지라는 점을 깨달았다.[Friedman 1987]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한다.’는 성서의 가르침의 본질을 표현한 것이다. 프리드만은 유대인이다.

12. 우리의 주변은 불확실한 것들로 둘러싸여 있다. 뿐만 아니라 불확실성을 넘어서서 무지한 세계로 둘러싸여 있다. 정신세계나 물질세계나 마찬가지이다. 자신이 무지한 것을 다른 사람에게 강요할 수 없다는 데에서 자유는 출발한다. 자신이 옳다는 것을 증명하려면 다른 사람을 강제하는 것이 아니라 설득시켜야 한다. 이것은 사상의 자유가 표현의 자유로 전환할 때 가능하다. 언론의 자유가 자유 가운데 중요한 이유이다.

13. 무지는 자유에게 두 가지 특성을 부여하였다. 첫째, 자유를 초월하는 덕목을 부정하는 것이다. 자유를 초월하는 덕목을 인정하는 순간 무지는 그의 노예가 된다. 진리를 깨닫지 못하면 자유롭지 못한 것과 같은 이치이다. 이것은 자유가 누구에게도 양도할 수 없이 천부적으로 주어졌다는 공리의 다른 표현이다. 모든 사람이 찬성하여도 한 사람의 언론의 자유를 빼앗을 수 없다. 자유의 이러한 특징은 자유가 보편적이며 소극적이라는 점을 의미하기도 한다. 다른 사람의 자유를 침해하는 특수하며 적극적인 자유가 아니라 외부로부터 자유를 박탈당하지 않는 소극성이다. 이래서 자유는 수단이 아니라 목적이 된다. 둘째, 자유가 천부적으로 주어졌지만 그렇다고 결정된 것은 아니다. 

개인은 스스로 자신의 인격과 지적 능력을 개발할 수 있다. 1776년 스미스가 ‘국부의 본질과 근본에 관한 탐구’를 발표했을 때 ‘탐구’라는 단어는 그 이전에는 기독교신자라면 사용할 수 없는 금기였다. 교회는 개인에게 지적호기심을 허락하지 않았다. 1785년 아담 베르크는 ‘계몽주의가 혁명을 유발 하는가’를 썼고 1784년 칸트는 ‘질문에 대한 대답: 계몽주의란 무엇인가’를 발표하였다. 이들은 한 결 같이 주장하기를 자유인은 모름지기 정부까지 포함하여 어느 누구의 도움 없이 스스로 독립적으로 자신의 인격과 재능을 개발할 의무를 지는 것이다. 

이승만은 이 내용도 알고 있었다. “사람을 두 가지 등분에 나누어 구별하나니 제 손으로 제 몸을 다스리는 자와 남에게 다스림을 받는 자라. 제 몸을 다스리는 자는 남의 힘을 조금도 받지 않는 고로 제 지혜와 수족을 의지하여 세상을 따로 서서” 독립된 삶을 영위할 수 있다.[이승만 1904 287쪽] ‘지혜로울 지어다!’라는 칸트의 계몽주의 금언에 합당하다. 그것의 구체적인 형태가 ‘탐구’이다.

  
▲ 자유경제원 토론회 참석자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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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천부적이고 개별적이고 보편적이며 계몽적인 자유가 신장되는 곳이 시장이다. 그것도 경쟁시장이다. 자신의 소질과 재능을 자유롭고 독립적으로 사용할 수 있는 유일한 곳인데 이것이 가능한 것은 경쟁시장의 균형을 찾아가는 과정에서 무지가 해결되기 때문이다. 경쟁시장에서 경쟁이란 무지의 균형가격을 찾아가는 ‘탐색과정’이다. 그런데 시장의 원리는 공리주의에 철학적 기초를 두고 있다. 이것은 사회현상의 판단 기준을 ‘옳고-그름right or wrong’ 사이의 선택에서 ‘좋고-나쁨good or bad’ 사이의 선택으로 전환되는 인식의 혁명이기도 하다. 교회가 가르쳐주는 ‘옳고-그름’이 아니라 개인이 판단하는 ‘좋고-나쁨’이다. 
이승만은 이 차이도 인식하였다. “대저 고로움을 면하고 편안을 … 도모함은 모든 생명 가진 종류의 천연한 성정이라.”[이승만 1904 72쪽] 이것은 벤담의 공리주의가 선언한 대로 “자연은 인간에게 두 가지 주인을 주었으니 곧 고통과 쾌락이다.”와 동일한 표현이다.

공리주의는 시장원리의 기초가 생산비가 아니라 효용에 있음을 주장한다. 효용이 바로 ‘좋고-나쁨’을 판단하는 척도이다. ‘옳고-그름’에 근거한 노동가치설의 마르크스주의경제학이 대표하는 전자에 대하여 ‘좋고-나쁨’에 근거한 한계효용설의 제본스-멩거 근대경제학이 대표하는 후자가 대응한다. 여기에 왈라스의 로잔Lausanne 일반균형론이 계승한다.

15. 효율성을 기준으로 삼는 대표적인 철학이 공리주의이다. 이것은 두 가지로 분류된다. 첫째, 주어진 자원을 배분하는 정태적 효율성이다.(resource allocation) 농경시대에 토지는 주어진 자원이었다. 맹자가 말한 不患貧患不均은 바로 농경시대에나 어울리는 명언이다. 이를 계승한 것이 현대판 평등주의이다. 

둘째, 주어진 자원을 이용하는 동태적 효율성이다.(resource utilization) 산업시대에 주어진 자원이란 없다. 자본은 자원을 어떻게 이용하느냐 따라 축적되기도 하고 축소되기도 한다. 그 과정이 불확실성의 미래에 대한 위험과 수익의 관계로 나타나는 투자이다. 특히 여기에 ‘옳고-그름’이 아니라 ‘좋고-나쁨’만이 판단기준이다. 이승만은 이것도 이해하고 있었다. 그는 조지 워싱턴 대학과 하버드대학에서 경제학을 수강하였지만 도미 전이라도 그의 경제학 지식은 흥미롭다. “비컨대 밭에 좋은 씨를 뿌릴진대 처음은 잘 되다가 해마다 그 씨를 받아 땅에 다시 심으면 점점 줄어지고 줄어들어 필경은 잡풀과 같이 되고 …” 이것을 현대 경제학 용어로 말하자면 한계생산성 체감이라는 현상이다. 특히 문장 가운데 ‘줄어지고 줄어들어’라는 표현이 체감을 풀어쓴 말이다. 이 체감을 막기 위하여 “하루 바삐 새 기운을 받지 않으면 … 몇 세대를 지나지 아니하여 종자도 구하기 어렵게 되리로다.” 현대어로 바꾸면 기술혁신이 없는 한 생산성 하락은 어쩔 수 없다는 뜻이다. 

이러한 현상은 농민이라면 일상적인 경험으로 터득했겠지만 백면서생인 이승만은 그러하지 못했을 것이다. 기술혁신에 그의 통찰력은 드디어 “수많은 농기구와 옷감 짜는 기계를 만들어 수많은 사람들이 땀 흘리고 하던 일을 기계를 이용하여 한 두 사람이 쉽게 해내며, 매일 신기한 것들을 만들어 내고 있으니 앞으로 백 년 동안 얼마나 많은 변화와 발전이 있을지 짐작하기 어렵다.”라는데 이르러 제조업의 기술진보 가능성에 무한한 신뢰를 표시하고 있다.[이승만 1904 59쪽] 

이때는 서구에서도 한계생산 하락의 법칙이 이론적으로 정착된 지 얼마 아니 된 시점이었고 더욱이 기술혁신이 그 하락을 막을 수 있다는 발상은 아직도 이론적으로 정착되지 않은 시점이었다. 이승만이 이러한 경제이론을 어떻게 습득했는지는 모르겠으나 이같이 풍부하게 생산된 물건을 “세계와 교류하지 못한 나라가 없으며 … 더 개화된 사람들은 편안하고 즐겁게 살며 다른 나라 사람들처럼 교류하려 하지만 그 목적이 남을 해치고 자기들의 이익만을 얻고자 하는 것이 아니다. … 함께 이익을 누리고자 함이다.”에 이르러 생산-기술-통상-상호이익의 연결에 주목하고 있다. [이승만 1904 14쪽]

그 결과 “우리나라에서 가장 싼 인명과 노동력이 미국에서는 가장 비싸”지만, “상업으로 흥왕 시켜 각국의 재물을 벌어드리며 공법과 농업을 부지런히 하여 재물이 부요하며 사람이 따라 귀중하여지며”라는 논저는 1950년대 수학적으로 증명된 국가 사이에 ‘생산요소가격균등화현상’을 떠올리게 한다.[Samuelson 1958] 
여기에 패자의 손해로 승자의 이익이 되는 제로섬 게임 즉 승자독식 게임이 아니라 상호이익을 가져오는 통상이 평화를 보장한다는 포지티브섬 게임 즉 윈-윈 게임을 주장한 스미스-칸트의 논리가 숨어 있다. 이러한 이승만의 주장은 조선의 이용후생파 실학자들이 상공업의 중요성을 주장했지만 그것과 평화를 연결하지 못했다는 점과 비교할 때 이승만의 독창성이 드러난다.

16. 1948년 초대 재무부장관에 발탁된 인물이 아메리칸 대학 경제학박사 김도연이다. 그때의 감회를 적었다. "오늘을 위하여 20년이란 해외유학을 통해 품어온 내 포부를 학창시절에 전공한 경제학의 학문적 이론과 경륜을 토대로 실현하여 나의 정치적 소신을 관철해야 되겠다."[김도연 1967 188쪽] 김도연이 컬럼비아 대학에서 석사과정을 공부하고 있을 때 학생대회를 열어 “독립운동의 방법과 조국의 경제건설”이란 제목 하에 학생들이 논문을 발표하고 토론하였다고 술회하였는데 그 내용은 알 수 없으나 일단 학생신분으로 독립과 경제를 연결시켰다는 점에 주목된다. 이 주장을 실증적으로 연구한 성과가 김도연의 박사학위 논문 『한국의 농촌사정』(1931)이다. 

그는 일제 식민 정책이 한국경제를 발전시켰다는 홍보가 고전경제학에 비추어 이론적으로 틀렸고 그것을 증명하기 위하여 아담 스미스가 열거한 여러 가지 경제변수 가운데 높은 세금과 높은 금리가 한국 농촌사정을 어렵게 만들었다고 주장하였다. 나아가서 이 문제를 해결하는 방법은 독립뿐이라고 과감한 결론을 내렸다. 아담 스미스가 신대륙을 독립시키라는 주장의 여러 이유 가운데 생산요소의 생산성 하락과 높은 생산비를 꼽고 있다. 스미스에 의하면 식민지 경제사정은 개선될 수 없다. 장기적으로 보면 식민지 유지비용이 이익보다 크므로 독립시켜야 한다는 것이다.

17. 김도연은 취임과 더불어 당장 대한경제원조문제를 토의하기 위한 <한미경제회담>에 임하였다. 워싱턴에 소재하는 경제협조처ECA에서 미국 대표들이 파견되었다. 한국 측에서는 재무부장관 김도연과 기획처장 이순탁이 참여하였다. 요즈음의 기재부장관이다. 2개월에 걸친 협상 끝에 1948년 12월에 <한미협정>이 체결되었다. 전문 12조로 된 이 협정의 내용은 대체로 다음과 같다. “미국정부가 제출하는 원조를 대한민국정부는 유효한 방법으로 이용하여 정부의 지출을 절약하고 수입을 증가하여 예산의 균형을 도모하고 통화발행의 통제와 공사신용의 통제를 실시하여 한국경제부흥에 공헌하기 위하여 일체의 외국환거래의 관리와 일체의 외국무역통제를 실시한다.” 이 협정은 대체로 한국 측 견해를 반영한 것으로 평가된다.[이현진 2009] 이 협정에 근거하여 재정정책과 무역정책에 관한 방침이 수립되었다. 

아울러 관세정책도 검토되었다. 김도연은 아메리칸 대학의 박사과정에서 미국경제사상사를 수강하였는데 이 강의에서 타우식Taussig 교수의 국제경제학을 접했을 것이다.[아메리칸 대학 김도연 학적부] 그 이유는 타우식 교수는 20세기 초 국제경제학을 개척한 미국경제학계의 거물이었던 만큼 당시 미국경제사상사에서 당연히 타우식을 언급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타우식의 제자가 방대한 『국제경제이론의 연구』(1937)를 저술한 바이너Viner이다. 바이너는 자신이 그 책을 쓰게 된 동기가 스승의 교재와 그 영향에 의존했음을 밝히면서 그 책을 스승에게 헌정하고 있다.

18. 해방과 더불어 가장 심각한 경제문제 가운데 하나는 물자부족으로 인한 살인적인 물가앙등이었다. 이에 대해 1950년 1월 한미경제안정위원회가 발족하였고 여기서 <경제안정15원칙>이 결성되었다. 한국 측 위원으로 재무부장관 김도연, 조선은행 총재 최순주, 그리고 관계부처 장관으로 구성되었다. 원칙1-8은 재정과 금융안정에 관한 것이고, 원칙9-11은 유통질서에 관한 것이고, 원칙12-15는 생산과 무역에 관한 원칙이다. 김도연은 자신의 구상을 다음과 같이 피력하였다. “부흥에의 가장 현실적인 방법은 외부의 원조에 의하거나 수입 강화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으니 위의 제 원칙은 이러한 여건의 인식에서 세워진 것이다. 

전후 서구의 마샬 플랜을 위시하여 서독의 로오강 구상 등에 의한 수입진흥책은 부흥의 라스트 헤비를 걸었던 것이다. 그러나 우리나라의 경제적 사정은 그 당시 3개월이 지나면 경제원조가 일단 마감되므로 효과적인 부흥책이란 수입의 강화에 의하여 재화량을 증대하는 방법이 현실적으로 적합 했던 만큼 과단성 있게 대담한 원칙을 세우게 된 것이다. 

이와 같이 수입의 중요성을 인정하는 동시에 수출의 필요성에 비하여는 제2의적으로 생각하지 않을 수 없어 대외수지의 균형을 기하도록 노력하자는 것이며 기득 원조물자를 활용하고 지정품목의 수출진흥을 위하여 국내생산체제의 합리적 조사를 기하자는 것이다. 수출산업의 장려책으로는 보조금제도와 같은 것이 고려되어야 하고 긴축재정의 제2원칙 등에 대하여 기계적 해석은 금물이며 산업합리화 수출산업의 진흥책으로 세워두자는 것이다.”[김도연 1967 218쪽]

한 마디로 수출진흥정책이다. 평소의 김도연의 주장이 반영되었다. 여기서 평소의 주장이란 그가 박사학위 논문에서 전개한 이래 그가 갖고 있었던 경제학지식을 가리킨다. 김도연의 박사학위 논문은 다음의 문장으로 시작한다. “한국은 예전에는 은둔의 왕국이 아니었다. 한국은 아라비아 및 페르시아와 무역을 하였다.” 고려시대를 일컫는 것인데 이때는 송의 산업혁명시대였다. 

송은 인구가 1억 명을 넘어섰고 60억 개의 동전을 유통시켰으며 마침내 최초로 지폐가 등장하였다. 이웃국가와 통상이 성행하였고 그에 필요한 우편제도가 정비되었다. 그에 영향을 받은 고려도 통상이 성행하였다는 뜻이다. 송 다음에 원에 오면 고려의 통상은 더욱 커진다. 세계제국을 건설한 원의 국제통상망이 예성강까지 이어져 개성은 국제도시가 되었다. 김도연이 지적한 그대로이다. 명대에 와서 정화가 대함대를 이끌고 해양을 정복하려고 원정을 떠나게 된 것도 이에 연유한다. 다시 말하면 조선에서 해외통상을 경시했다는 것이다. 

김도연은 박사학위 논문을 벗어나서 실천도 보여주었다. 해방 전 조선흥업주식회사를 설립하고 수출사업을 한 것이 그것이다. 이어서 그는 해방이 되자 <한국무역협회>를 설립한다. 그 설립취지문은 다음과 같다. “우리에게도 광명한 천지는 왔다. 수동적 무역, 독점적 무역, 착취적 무역시대는 물러가고 우호적이요 자주 경제적 무역시대가 왔다.”[김용삼 2013 164쪽] 독점적 통상에서 우호 자주적 통상으로. 이것이 칸트가 말하던 영구평화의 조건이다. 한국무역회관의 정초에는 다음 문장이 들어있다. “세계는 바야흐로 교역을 통한 평화공존의 시대로 옮겨가고 있다.”[김용삼 2013 164쪽] 스미스와 칸트의 교역을 통한 영구평화의 내용과 일치한다. 이 글은 라익진이 썼다. 
 

그의 글은 이어진다. “우리 무역계도 그동안 허다한 험로를 걸어왔지만 이제는 어느 정도의 소지가 이룩되어 새로운 경지에 도달하였다.” 여기서 ‘새로운 경지’란 무엇인가. 이것은 일찍이 이순탁의 “국제적 평화는 [통상국인] 벨기에 사람들에게 참으로 절실하다.”라는 견해와 일치한다.[이순탁 1934 164쪽] 한국이나 벨기에나 소국이며 이들에게 통상이 곧 평화라는 등식의 재확인이다. 한국무역협회는 1948년 4월에 동경지부를 설치하였다. 정부수립 이전이다. 한국의 통상이 동북아의 평화에 혜택을 입었고 기여도 하였다.

19. 앞서 소개하였듯이 일제하 조선에는 공적 금융시장이 존재하지 않았다. 그 정점에 있던 조선은행이 신생 대한민국의 시장경제운영에 어울리지 않는다고 판단한 김도연이 <한국은행>을 창설하였다. 그가 모범으로 삼은 것이 미국의 연방준비제도였다. 미연준을 창설한 인물이 이승만의 스승 윌슨 대통령이고 샌프란시스코 연준 초대총재는 이승만의 논문지도교수였던 엘리어트 박사이다. 그 시기가 이승만의 학위논문이 출판되고 1년 후이다. 

사기업이 활발하게 국제통상에 종사하려면 관련제도가 뒷받침되어야 한다. 특히 외국환관련제도와 금융제도가 그렇다. 한국무역협회 초대 회장에서 1948년 건국정부에 초대 재무부장관으로 자리를 옮긴 김도연은 일본경제에 예속되도록 만들어진 구 조선은행이 현대식 중앙은행의 역할을 제대로 할 수 없다고 판단하여 말한 대로 구 조선은행을 해체하고 한국은행을 창설하게 된다. 

미국 경제협조처ECA에서 보낸 고문의 권고에 김도연이 동의한 것이다. 다시 말하면 미국은 신생 독립국인 대한민국이 국제적으로 자생하려면 경제의 혈맥과 같은 금융제도를 바꾸지 않는 한 어렵다고 판단한 것이다. 금융제도의 핵심은 중앙은행이다. 김도연은 미국 연방준비제도에 두 사람의 전문가를 파견해줄 것을 요청하였다. 당시 구 조선은행의 총재가 최순주였는데 한국은행 창설에 재무부장관 김도연을 적극 돕는다. 결국 그가 김도연을 이어서 재무부장관이 되면서 한국은행 창설 작업이 마무리된다. 

파견된 두 전문가는 한국은행 창설의 세 가지 목표를 적시하였다. 첫째, 살인적인 물가의 안정이다. 둘째, 불투명한 ‘미래의 생산과 통상’을 염두에 두며 외국환관리에 관해 적절한 수정을 최우선으로 고려한다. 셋째, 불안정한 한국경제의 특성과 금융제도를 적절한 수준의 궤도로 올리는 것이다. 첫째와 셋째 목표를 달성하지 않고는 둘째 목표가 성취되지 않는다는데 그 중요성이 있다. 두 전문가 가운데 한 사람이 블룸필드Arthur Bloomfield이다. 그는 세계 여러 나라의 중앙은행을 설계한 경험이 있다. 그의 박사학위 논문이 국제금융이었던 만큼 그는 국제통상과 외국환의 중요성을 알고 있었다.[Bloomfield and Jensen 1963] 

한국은행 출범의 준비와 병행하여 외환시장이 문을 열었고 그 후 물가상승이 진정될 기미를 보이면서 국제수지도 조금씩 개선되기 시작하였다. 많은 제안 가운데 둘째 목표인 통상 및 외국환과 관련한 제안이 그 중요성을 발휘한 것이다. 

그것은 다름 아닌 외국환업무를 한국은행에 귀속시키고 한국은행은 금융기관과 정부기관 이외와는 업무를 수행하지 않지만 외환업무에 대해서는 예외적으로 만들었다는 점이다. “[한국]은행에게 사기업과 외국환 거래를 하고 사기업이 외국통상을 금융 하는 경우 그로부터 외화예금을 수신하고 외화대출을 여신 하는 업무를 허용한다.” 장래 한국경제에서 통상의 중추가 되는 사기업의 역할을 예상한 원려이다. “한국정부의 1950년의 전반기 5개월에 국제수지적자는 더욱 줄어들었는데 그것은 수입이 줄고 수출이 증가했기 때문이다. … 수출은 거의 일본에 대한 미곡이다. 이 같은 개선에도 국제수지적자는 북한의 남침 때까지 여전히 계속되었다. 적자를 줄이려면 수출을 혁신적으로 증가시키고 수입을 줄여야 한다.” 

이른바 수출지향정책을 적극 권유한다. 그럼에도 “북한의 남침이 없었더라도 한국경제가 생존능력을 얻기 위한 충분한 국제수지의 전환은 경제협조처가 설정한 목표에 맞게 1952-53년에 이루어지기 어려웠을 것이라고 믿는 이유가 있다.” 뒤집어 말하면 1950대초 신생 한국경제의 대외 생존능력은 사기업의 국제통상에 달려 있었다는 주장이다. 그것은 경제협조처의 의견이기도 하였다. 

블룸필드가 보기에 그 실천은 충분하지 않다고 보고 있다. “좀 더 공격적인 수출지향정책이 필요하다.” 블룸필드가 간과한 것이 있으니 신생 한국은 대일무역에 강한 거부감을 갖고 있었다는 점이다. 그럼에도 재무부장관 김도연에게는 나름대로 수출 진흥 방침이 있었다. “무역면에서 … 국내중요 자원의 적극개발 및 국내생산품과 수출생산품의 적극증산을 기한다. 

수입의 중요성을 인정하는 동시에 수출의 필요성에 비하여는 제2의적으로 생각하지 않을 수 없어 대외수지의 균형을 기하도록 노력하자는 것이며 기득 원조물자를 활용하고 지정품목의 수출 진흥을 위하여 국내생산체제의 합리적 조사를 기하자는 것이다. 수출산업의 장려책으로는 보조금제도와 같은 것이 고려되어야 하고 제2원칙 등에 대하여 기계적 해석은 금물이며 산업합리화 수출산업의 진흥책으로 세워 두자는 것이다. 대외수출품중의 보호육성을 기할 것이나 현재의 관세는 전부 종가세로 통일하여 수입품에 대해서는 일률적으로 일할을 징수하여 세계에서 유래 없는 저율을 적용하고 있으므로 현실에 알맞은 관세율을 책정하고 보호관세정책을 실시할 것이다.” 

한국은 독립되자마자 국제통상의 중요성을 실천하는데 주저하지 않았다. 신생 한국이 살길 이 해외에 달려있음을 절감하였다. 특히 수출지향 정책이다.[이제민 2002] 남북한의 사상 대립에 있어서도 남한은 자유통상을 통한 평화를 추구하여 자유주의 사상의 우월함을 과시하였다. 또한 제2차 대전 이후 독립한 수많은 신생국 가운데 한국이 특별한 위치를 차지한 역사적 이유도 제공한다.

20. 서양경제력이 동양의 그것을 앞선 여러 가지 이유 가운데 세 가지 예를 들고 있다.[North and Thomas 1973 Ch.1] 첫째가 국제통상. 둘째가 해상교역. 셋째가 농지개혁이다. 합치면 통상과 농지이다. 이 셋을 관통하는 단일 주제는 재산권의 확립이다. 통상에는 주식회사의 주식의 소유권이 선행되어야 하고 농지 역시 농지의 소유권이 보장되어야 한다. 그밖에 주식회사 운영에 필요한 환어음제도, 발명에 따르는 저작권과 특허권의 보호도 필요하다. 

블룸필드 보고서에 눈에 띠는 한 구절. “[통상으로 한국경제의] 대외 생존능력에 진전이 보이지만 그 속도는 계속되는 물가상승으로 저지되었다.” 이 같은 대외 생존능력이 얼마나 중요한지는 “미국의 원조 없이는 비정상적인 대규모 무역적자로 한국경제는 급속히 붕괴될 것이다. … 외환사정은 아주 어렵지만 그럼에도 농지를 소작인에게 분배한 것으로 출발의 방향은 잡혔다.” 통상의 중요성과 함께 농지개혁을 긍정적으로 평가한 것이다.

21. 서양역사에서 농지개혁의 성공을 사유재산권의 확립에 두고 있었느니 만큼 “효율적인 경제조직은 경제성장의 기초 요건이다. 그러한 조직이라면 사회는 원하는 대로 성장할 수 있다. … 그러한 경우 개인이 토지, 노동, 자본, 그리고 기타 소유를 알맞게 사용할 수 있는 배타적인 권리를 가질 것을 요구한다.”[North and Thomas 1973, 431] 여기에 역사적으로 농산물이 통상교역상품으로 발전하면서 토지의 사유화 요구는 더욱 필수적이 되었다. 달리 말하면 토지국유화로는 농산물이 국제시장에서 경쟁적이 되기가 어렵다는 뜻이다. 

초대 기획처장에 발탁된 이순탁은 농지가 한국사회가 해결해야 할 가장 중요한 문제라고 보았다. 그는 중소농 제도의 확립을 주장하였다. 그의 주장의 백미는 이른바 가산농지제도이다. 가산농지제도란 농민이 농지를 자의대로 팔지 못하게 하는 최소한도의 농지를 말한다. 농민은 흉년에 쉽게 희생자가 될 수 있다. 이걸 막으려면 일가족이 생활을 영위할 수 있는 최소단위의 농지의 매매, 양도, 저당을 금하는 제도이다. “자기의 가족과 더불어 통상적으로 경작이 가능한 면적보다는 크지 않고, 가족을 부양하기보다는 작지 않은 토지소유자”이다. 

이순탁은 1947년 토지개혁법과 1949년 농지개혁법 입안과정 참여에서부터 상정까지 주도하였다. 이 법안의 내용이 유상매입 유상분배이다. 이승만은 이미 복안을 갖고 있었다. “지주들은 토지를 팔고 정부에서는 토지를 농민에게 유상으로 분배하여 그 소출로 대금을 갚은 후에는 다 각각 제 소유로 만들게 할 것이며 지주는 그 대금으로 공장이나 혹은 다른 장구 이익을 도모할 것이니 이 공업시대에 재산을 토지에만 넣지 말고 자본을 다른 공업에 사용하면 개인이나 국가경제에 크게 이익 될 것이요 공업과 상업상으로도 큰 재산가가 될 수 있으니 이것이 곧 경제의 세 가지 기본 되는 토지와 자본과 노동이 합작해서 서로 평균이익을 누리자는 유일한 계획일 것이다.”[유영익 1996, 224쪽] 

이러한 업적은 이승만의 실천실학을 떼어놓고서는 그가 받은 미국교육만으로 설명이 되지 않는다. 영국교육을 받은 네루는 농지개혁에 실패하였고 신분제와 남녀차별도 철폐하지 못했다. 거꾸로 외국교육을 받지 못한 필리핀의 대통령들도 농지개혁에 실패하였다. 북한의 농지개혁은 실학파가 생각한 그것이 아니었다.

22. 이승만은 제2대 재무부장관에 뉴욕대학 출신 최순주를 선택하였다. 최순주는 해방 후 초대 조선은행(한국은행 전신) 총재도 지냈다. 최순주가 그의 박사학위논문에서 당시 한국의 경제상황을 검토하고 통상교육의 강화를 제안하던 당시 한국 통상의 90퍼센트는 일본인이 담당하였다. 여러 가지 불리한 입장이지만 그럼에도 비교우위를 활용하여 수출산업을 일으킬 수 있다고 그는 주장한다. 어느 미국선교사의 관찰이다. “한국은 국내산업에서 가능성이 풍부하다. 한국인은 기술, 근면, 창의, 예술적 능력에 있어서 어느 동양국가에 뒤지지 않는다.” 대표적인 예가 사과이다. 미국선교사가 한국에 사과를 소개한 이후 20년이 채 지나기 전에 한국인 사과 재배업자는 자신의 상품을 상하기 쉬운 열대지방을 피하여 서늘한 캐나다 철도를 거쳐 유럽에 판매로를 개척하는데 성공하였다. 

그밖에 최순주는 일본보다 저렴한 임금으로 면화, 모시, 마, 도자기, 유리, 종이 등에서 유리하다고 보았다. 이러한 것이 상과 교육에 반영되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1.상과학생에게 상품가격에 미치는 요인을 이해시켜야 한다. 2.상과학생에게 국제통상과 국내통상의 방법과 원리를 완전히 습득시켜야 한다. 3.상과학생은 운송비에 대해서 완전히 습득해야 한다. 4.상과학생은 국제통상에 대한 정부정책을 이해해야 한다. 5.상과학생은 국제통상에 관한 법률지식을 갖추어야 한다.[Chey 1930 158]

이어서 최순주는 일제하에서 생각하기 어려운 제안을 한다. 6.상과학생은 경제발전의 요인으로 민주정부의 중요성을 이해해야 한다. 7.상과학생은 정부정책을 평가할 수 있는 건설적 안목을 지녀야 한다. 식민통치하에서 민주정부가 가능한 일일까. 정부정책을 평가할 수 있을까. 그의 대답은 부정적이다. “정부[조선총독부]의 인식부족과 적대적 태도가 최대의 걸림돌이다.” 그는 통상을 통해서 비평할 수 있는 독립조국의 민주정부를 꿈꾸고 있는 것이다. 그러한 정부와 정책을 실현하기 위해서 준비가 필요하다. 

상과교육에 국제경제학을 도입해야 한다고 주장한 최순주는 그답게 조선무역에도 대하여 비상한 관심을 가졌다. 1927년 뉴욕대학 재학 중에 이미 「조선과 미국무역의 증진에 대한 조사요령」을 발표한 바 있고 이것을 동아일보에 「조선의 대미무역증진책」이라는 제목으로 20회에 걸쳐 게재하였다. 여기서 관학경제학자들이 조선경제가 무역의 증가와 함께 비약적인 발전을 하고 있다고 주장하는데 대항하여 최순주가 부정적인 견해를 밝힌 것은 당연한 일이다. “조선산업의 비약적 발전을 흔히는 무역증가로써 표명한다. 

사실상 수자로 보면 12배 이상 증가됨은 이론이 없다. … 무역액의 12배 이상 비약적 증가에 물가와 인구의 증가를 넣어 검토하면 오직 3-4배 증가에 불과하다.… 물론 무역증감이 생산발전 여하를 표명하는 한 방도는 된다. 그러나 산업 발전 소장을 항상 보이는 것은 아니다. … 우리 조선 무역은 조선인 경제 소장을 표명키 어렵다. 근년에 이출액이 많아짐은 미米의 일인당 소비량을 감소시키면서도 이출을 격증시킴이요, 수입의 증가는 대체 만주粟 소비의 증가인 까닭이다. 그러므로 조선무역 증가를 통계적 수자만 보고 물가변동 인구증가 수출입품 종류를 고찰치 않고 산업발달을 표현함은 실로 무의미한 바이다.”

23. 고승제는 일제 때부터 조선경제사에 관심을 두었다. 그 결과 산업사 연구서를 남겼는데 여기에서 해외통상의 중요성을 피력하고 있다. 이조면업사에서 면업 발전에 저해요인을 분석한 그는 섬유공업에 국제경쟁력의 잠재력이 있음을 예견하였다. 그에 따라 섬유공업이 발전하는데 저해되는 요인을 제거하는 방법이 무역정책과 수출진흥책에 있다는데 도달하였다. “우리나라의 경제를 자립적으로 부흥시키는데 있어서 대외무역은 국민경제의 외변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 기축을 이루고 있다. 다시 말하면 우리나라로서는 잉여공업제품의 판로와 초과이윤의 원천을 찾아서 해외시장을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 생산부흥을 위해서 그리고 생산체계의 확립을 위해서 외국무역을 절대로 필요로 하는 것이다.”[고승제 1958 180]

24. 신국가건설에 중요한 두 문제인 통상과 농지. 다른 참여자의 다른 요인도 가세하였지만 대체로 통상은 김도연, 장희창, 최순주 손에서, 농지는 이순탁의 손에 의해서 개혁의 올바른 방향이 잡혀졌다고 대외적으로 평가된다. 여기에 대외적으로 미국의 아시아전략이 배경이 된다. 

제2차 대전에서 승리한 미국은 소련의 팽창을 저지하기 위하여 군사적 대립과 병행하여 경제적 대립을 취하였다. 세계는 둘로 나뉘었다. 남한은 미국 영향 하 들어갔다. 미국은 유럽과 아시아를 5개의 경제원조지역으로 나누고 유럽에서는 마살 플랜을 아시아에서는 지역통합을 시도하였다. 그 목표는 통상으로 소련을 경제적으로 봉쇄하는 것이다. 이 목적을 위하여 미국은 경제협조처를 신설하였다. 미국이 구상한 아시아지역의 지역통상은 일본 중심이었다.

일본에 진주한 미국은 무장해제, 경제구호, 민주주의를 목표로 삼고 일본을 재정비하기 시작하였다. 일본을 국제사회의 일원으로 재등장시키는데 자유통상을 기본으로 삼았다. 맥아더 사령부는 재무장관을 해임하고 공산주의의 온상이라고 지목된 동경대학과 경도대학의 법학부와 경제학부 교수들을 경질하였다. 일본에서 자유주의 경제학의 시대가 열린 것이다.

미국은 통상 범위를 확대하여 아시아에 지역 간 자유통상을 촉진시킬 목적으로 1947년 국제연합 아시아 극동 경제협력기구 Economic Commission for Asia and Far East (ECAFE 현재 ESCAP)를 설립하였다. 일제 말 통제경제를 청산하고 자유통상의 시대가 온 것이다. 한국도 예외가 아니었다.

미국의 세계전략, 아시아전략에 맞물려 한국에서는 4가지 정책이 실시되었다. 1949년의 <한미경제협정>, 1950년의 <경제안정 15원칙>, 1950년의 <한국은행 창설>, 1950년의 <농지개혁>이다. 앞서 보았듯이 한미원조협정에는 김도연과 이순탁, 경제안정 15원칙에는 김도연과 최순주, 한국은행의 창설에 김도연과 최순주, 농지개혁에 이순탁이 기여하였다. 

이승만, 김도연, 최순주, 이순탁 등 이외에도 건국 초기에 많은 경제인들이 신생 대한민국의 시장경제의 터를 닦는데 기여하였음은 말할 필요도 없다. 그러나 이들 정치경제 지도자들만으로 경제가 하루아침에 시장경제로 전환되지 않는다. 두 가지를 살펴야 한다. 첫째, 일제하 조선학생에 대한 경제학교육. 둘째, 해방 후 경제학교육정책.

25. 첫째, 해방 당시 18개의 전문학교에서 3,000명의 학생이 공부했는데 대부분 일본학생이었다. 1930년 이래 전문학교 입학에 조선학생이 일본학생에 비해 1/3에서 1/5에 불과하였다.[동아일보 1936년 2월 4일] 대체로 조선학생이 600-1000명이었다. 1942년 조선학생만이 다니던 연희전문의 상과 재학생은 155명이었다. 이들이 수강하는 과목은 다음과 같다.[1924년] 경제학[경제원론, 경제정책, 재정학, 통계학], 상학[상업통론, 상업지리, 상업사, 상품학, 은행론, 화폐론, 보험론, 교통론, 세관 및 창고론, 증권론, 상업수학, 회계학, 상업실천, 타자법], 법학[국내법제, 국제사법, 민법, 상법] 등이다. 이 교과과정은 1922년 총독부가 개정한 신 교육령에 의한 것인데 조선의 상업교육제도를 일본의 그것과 원칙적으로 동일하게 만들었다.
 
그런데 일본의 상업교육 목표는 국제통상의 전문가를 육성하는 것이다. 여기에 더하여 대학의 상업교육은 고등상업학교 교과에 반영되어야 하고 그것은 다시 중학의 교과에 반영되도록 요구되었다.[Chey 1930, 195, 55, 220] 상과에 대한 연전 교장 에이비슨의 목표도 이에 부합한다. “한국 상업 진흥의 지도자가 될 만한 졸업생을 배출시켜 한국인과 상업상 관계를 맺는 국제상업사가 되도록 교육시킨다.” 연전 상과는 1931-1938년 기간에 타우식Taussig과 올린Ohlin의 국제경제학 교재를 사용하였다. 1915-1945년 기간에 연전 상과 졸업생 수는 약 700명이었다. 

일제가 이러한 상업교육 목표를 정한 데에는 국제통상을 급속히 성장시키려는데 있다. 1910년 영국 맨체스터상업학교의 통상교재의 다음 글이 주목된다. “이 나라[영국]가 세계시장을 독점하던 시대가 지나고 있다. 매년 통상에 경쟁자가 나타나고 있다. 우리의 오랜 경쟁자인 독일과 미국에 추가하여 지난 몇 년 동안 일본이 극동통상에서 새로운 경쟁자로 대두되는 것이 목격된다.”[Calvert 1910] 그 이유를 “일본은 그 지리적 이점과 함께 상업 및 기술교육 확산과 최신지식 채택에 힘입어 가공할 경쟁자가 되었다.”라고 분석하고 있다. 

이에 연전 상과과장 이순탁이 동의한다. “영국은 일찍이 면업국으로서 세계 제일의 자리를 누렸는데 근래에는 기술의 미개량, 경영/판매방법의 구태, 노동문제의 격화, 후진국의 대두 때문에 점점 경쟁력을 상실하여 근년에 이르러서는 특혜국 대우를 가지고도 비록 자기네의 영내에서도 외국상품 특히 일본 상품과 경쟁을 하지 못하게 되었다.”[이순탁 1934 69쪽] 경영/판매방법의 구태와 기술의 미개량. 이것이 영국 통상교육의 결과이며 책임이다.

26. 둘째, 해방 후 교육정책에 대한 이승만의 생각은 어떠했는가. 그의 글이 시사적이다. “지금 와서는 각국과 원래 상통치 않은 곳이 없으며 … 필경 인종까지 없어져서 장차 온 세 상사람이 다 한 결 같이 되어 … 근본을 생각하면 사해가 다 형제라.”[이승만 1904 254, 258쪽] 이것은 무슨 뜻인가. 자유통상에는 두 가지가 있다. 첫째, 물건을 만드는 사람과 그 물건이 분리되어 물건만 다른 나라로 이동하는 통상방법이다. 농산물과 공산품이 그것이다. 둘째, 물건과 그것을 만드는 사람이 분리될 수 없어 물건이 다른 나라로 이동할 때 만든 사람도 함께 이동하지 않으면 안 되는 통상이 있다. 서비스이다. 선교사가 미국에 앉아서 한국 신자에게 복음을 전할 없고 의사가 미국병원에서 한국에 있는 환자를 치료할 수 없다. 교원이 미국에 앉아서 한국에 있는 학생을 가르칠 수 없는 노릇이다. 

말하자면 두 번째 종류의 자유통상은 국가 간 고급인력의 이동이다. 그 결과 이승만이 주장하는 대로 마침내 인종의 구분이 없어지고 만다. 그렇게 되기 위해서는 한국인을 선교사로, 의사로, 교사로, 과학자로, 기술자로 교육시켜야 한다. 교육이 인구 이동을 가능하게 만들고 인종의 구분을 없게 만든다. 이승만은 벌써 한국의 고급인력의 교육까지 내다본 것이다. 이승만은 이러한 통찰을 에이비슨 의사를 비롯한 서양 선교사에게서 발견했을 것이다. 많은 선교사들이 한국 젊은이들을 교육시켜 미국으로 유학 보내는 것을 보았다. 오늘날 자유무역협정의 마지막 단계가 서비스업 개방이다.

이것은 다른 나라도 마찬가지이다. 한국에 다른 나라의 선교사, 의사, 교사, 과학자, 기술자가 입국한다. 상품의 통상이 전쟁과 병존할 수 없어서 평화가 가능하듯이 이보다 사람의 활발한 교류가 전쟁을 억제하여 평화를 더욱 공고히 한다. 약소국일수록 인적교류가 왕성할수록 평화가 보장된다는 사실을 이승만은 벌써 터득한 것이다. 

이승만 집권 시에 교육은 크게 성장하였다. 제2차 대전이 끝날 무렵 한국 성인의 90퍼센트가 정식교육을 받지 못했다. 문맹률은 75퍼센트였다. 1959년 22퍼센트로 대폭 낮아졌다. 남한에서는 252개의 중학교에 62,136명의 학생이 있었다. 2년 후 중학교 수가 415개로, 학생도 277,447명으로 증가하였다. 1960년까지 중학생은 10배, 고등학생은 3배로 증가하였다. 1945년 당시 18개의 전문학교에서 3,000명의 학생이 공부했는데 대부분 일본학생이었다. 연희대학교 고려대학교 이화여자대학교가 1946년에 설립인가를 받고 국립서울대학교가 1947년에 개편되어 학생수가 20,000명으로 증가하였다.[Nahm 1993, 355-356] 

이승만이 신생 대한민국 정부의 경제 분야 요직에 미국 유학파를 발탁하자 상대적으로 일본 유학파가 퇴조하였다. 그 후 많은 젊은이들이 미국으로 유학을 떠났다. 1953-1973년 해외유학생 총수에서 미국이 차지하는 비율이 약 90퍼센트였다. 육이오 전란의 포화 속에서도 임시수도 부산에서 대학교육은 쉬지 않았다. 전쟁 중인데도 불구하고 그들에게 병역혜택을 주었다. 1960년에는 대학수가 65개로 늘어나 대학생 10만 명 시대를 열었다. 이 증가는 교육에 정부예산의 10퍼센트를 담당하면서 가능하게 되었다. 교육이 후일 경제를 일으키는데 커다란 원동력이 되었지만 이승만을 권좌에서 물러나게 만든 역설이 되었다. 경제학교육에 대해서는 [신태환 1982]과 그밖에 미국교육원조에 대해서는[김용삼 2013]을 참조할 수 있다.

27. 이상이 대한민국 건국이 시장경제를 선택하게 된 지적 배경이다. 그 모습은 어떠하였나? 시장자본주의의 본질을 이해하려면 두 가지 측면에서 보아야 한다. 첫째, 국제경제와 국내경제의 통합. 둘째, 실물부문과 금융부문의 종합. 전자가 국제통상이고 후자가 자본형성이다. 시장자본주의의 꽃이다. 

이승만은 10년이면 한국의 산업화가 충분하다고 보았다. 그것은 청년기 이래 관찰이다. ‘조선보다 뒤떨어졌다던’ 일본은 명치유신 후 10년 만에 조선과 조약을 맺고 그 야욕의 첫 발을 디디는데 성공하지 않았는가. 이승만은 조선정부가 아무 조치도 취하지 않고 허송세월한 그 10년을 크게 분노하며 탄식하였다.[이승만 1904] 당시 10년은 그렇게 두 나라의 향후 1백년의 운명을 갈라놓았다. 조선과는 반대 이유로 일본도 그 10년을 탄식하였다. “한 가지 분명한 것은 구주 열강이 한국에 주목하지 않은 이유가 그들이 중국에 너무 열중하여 상대적으로 작은 [조선]반도에 관심이 거의 가지 않기 때문이라는 점이다. 

그러나 구주열강은 한국에 대하여 곧 눈을 돌릴 것이며 그 때는 일본이 어떤 일을 수행하려 해도 너무 늦을 것이다. 일본은 한국을 단호하게 그의 영향권 하에 둘 어떤 조치를 취하지 않으면 안 된다.”[신용하 1985 518쪽] 고종의 밀사가 도움을 청했을 때 미국 부영사 스트레이트는 잘라 말했다. “한국이 항의를 할 때에는 이미 지나갔소. 한국은 10년 동안이나 개선할 기회를 갖고 있었는데 솔직히 말해서 황제나 관리들은 그 기회를 이용하려는 의사를 추호도 보이지 않았소.”[Esthus 1966 109] 

결론부터 말하면 이승만은 12년 집권기에 국제통상과 자본재형성을 추진하였다. 그 간접적인 증거가 아래표이다. 표가 보이는 대로 다른 시기에 비하여 이승만 집권기에 제조업과 중화학공업의 성장률이 빠르다. 1960년대 이후 중화학공업의 성장은 이승만 집권기의 연장이다.[이제민 2002]

  
 

28. 이 결과는 이승만이 미국원조의 사용처를 두고 대립하여 얻은 대가이다. 미국은 한국을 일본의 뒷마당으로 육성시키려고 하였다. 소련과 군사 대칭하는데 일본의 전략적 위치가 중요했기 때문이다. 일본경제를 전전 수준으로 복구시키는 목표 아래 한국은 소비재 위주의 일본시장 역할을 기대하였다. 지정학적 위치로 한국이 미국에 절대적으로 필요하다는 미국의 약점을 이승만이 이용하여 원조의 사용처를 둘러싸고 다툼이 있었다 하지만 이승만에게는 정치경제학적 논리가 따로 있었다. 

이승만은 전쟁 이전부터 이러한 논리를 충분히 숙지하고 있었다. “강대국들은 전쟁을 해도 상호간에 영속적인 적대감정을 가지려 하지 않는다. 전쟁이 끝나면 전승국은 패전국을 전쟁 전의 상태로 회복시켜 주기 위하여 친절하게 부흥을 도와주고 있다.”[이원순 1988 178쪽] 전승국이 상품을 패전국에 팔려면 그 국민들의 소득이 전쟁 전 상태로 회복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전쟁에서 패한 일본을 미국이 도왔다. 

그의 정치경제사상이 이러하매 육이오 동란으로 피폐해진 한국을 우방이 돕는 것도 이승만이 보기에 당연한 논리였다. 그러나 원조국이 수원국에게 원조의 사용처를 지정하는 것은 용납할 수 없는 노릇이다. 그 논리를 들어보자. “18세기까지는 자국 식민지와의 통상교류로부터 외국선박을 배제시키고 식민지 무역과 연안무역은 엄격하게 자국선박에게만 유보시키는 것이 모든 유럽국가의 관행이었다.”[김학은 2014, 178] 다시 말하면 선박에서 상품으로 확장하면 식민지는 모국이 정한 상품만 구매하고 판매할 수 있다. 일본이 한국을 자기들의 병참기지로 만들려는 식민지정책이나 미국이 한국을 일본의 소비재시장으로 만들려는 정책은 이승만에게는 본질적으로 다르지 않았다. 이러한 논리로 이승만은 원조국의 요구를 거부할 수 있었다. 그는 소비재산업뿐만 아니라 자본재산업에 투자하는데 힘을 쏟았다.

29. 앞서 일제하에 공적 금융시장이 사실상 존재하지 않았다고 말했다. 이승만 집권기에 대체로 10년 기간에 산업을 부흥시키려는 목표에서 금융의 역할을 생각해 본다. 일반적으로 경제를 실물부문과 금융부문으로 나눈다. 낙후한 실물부문을 급속히 성장시키는 작업에는 불확실성이 따른다. 특히 소비재부문뿐 아니라 자본재부문까지 동시에 육성시키는 데에는 불확실성이 증폭된다. 성장률은 저축율과 투자수익률의 곱이다. 여기에는 몇 가지 불확실성이 개재한다. 

첫째, 저축이 금융을 통하여 대출로 전환되는 경로에서 도덕적 해이의 불확실성이다. 둘째, 대출이 투자로 전환되는 경로에서 역선택의 불확실성이다. 이 불확실성을 제어해주는 부문이 금융부문이다. 실물부문의 불확실성이 클 때 사용하는 방법이 금융부문의 불확실성을 제거하는 것이다.[Poole 1971]. 1960년대 이후 한국경제의 성장전략에서 금융을 국가가 통제한 경우가 여기에 속한다. 이 측면에서 보면 이승만 집권기는 두 가지로 나뉜다. 1957년까지 금융의 국가통제와 1957년의 은행산업민영화이다.[김동욱 1996] 다시 말하면 1957년에 와서 한국은 실물부문과 금융부문에서 모두 시장경제를 실시했다고 평가된다.

30. 한국경제가 금융부문을 통제할 수 있었던 이유는 실물부문의 불확실성을 제어한다는 논리 이외에 제2차 대전 이후의 미국의 대외 경제정책에도 기인한다. 제1차 대전의 원이 각국이 채택한 보호무역에 있었다는 반성으로 제2차 대전 이후에는 자유무역을 원칙으로 하는 체제가 출범하였다. 그러나 자유무역의 품목은 제2차 산업에 제한하였다. 1980년대에 와서 제1차 산업을 포함시키는 체제가 추가되었다. 1990년대에 와서 제3차 산업까지 포함시키기에 이르렀다. 이승만 집권기에는 제2차 산업만이 자유통상의 대상이었으므로 제3차 산업은 정부가 통제할 수 있었다. /김학은 연세대학교 경제학부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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