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와 그녀의 책장] [노예의 길], 시대를 뛰어넘는 울화통 터지는 대화 기사입력2015.10.30 오전 9:13 기사원문 댓글0 아이즈 ize 글 천관율 | 디자인

자유경제원 / 2015-11-10 / 조회: 5,816       아이즈

[그와 그녀의 책장] [노예의 길], 시대를 뛰어넘는 울화통 터지는 대화

아이즈 ize 글 천관율 | 디자인 전유림

고전이 “시대를 뛰어넘어 현재와 대화하는 책”이라는 말을 들을 때면 나는 시간이 지나도 살아남을 지혜를 전수하는 근사한 대화를 상상하곤 했다. 생각이 짧았다. 싸우고 구박하고 짜증내고 울화통 터지는 대화도 있는 걸 깜빡했다. 오늘 소개할 고전과 우리 시대의 대화가 그렇다. 프리드리히 하이에크가 1944년에 내놓은 [노예의 길]은 자유주의의 핵심 원리를 제시하는 고전이다. 역사 교과서 국정화를 지지하는 2015년 한국의 자칭 자유주의자들과 이 책의 문답을 몇 개만 소개해도 분량이 넘친다. 부끄러움도 넘친다는 게 더 문제지만.

2015년 한국. “자유주의 사상에 뿌리를 둔다”라고 스스로 소개하는 자유경제원이라는 연구단체가 역사 교과서 국정화를 지지하는 연속 토론회를 연다. 10월 21일 4차 토론회에서는 이영훈 교수가 발제자로 나와 이렇게 말했다. “국정화는 이 나라가 선진화하려면 패배해서는 안 될 이념 전쟁이다.” 1944년 하이에크는 뭐라고 답할까. 그는 역사, 법, 경제학이 전체주의자들이 특히 탐내는 먹잇감이라고 봤다. 이들 학문이 인간의 문제를 정면으로 다루므로 정치적 견해에 직접 영향을 끼치기 때문이다. “이 분야는 당국이 어떤 교리들을 가르치고 출판할지 결정한다.” 이게 하이에크가 학을 떼는 전체주의다.

2015년 한국. 일부 학자들은 이런 대응논리를 편다. “국정화는 무리기는 하지만 비상수단이다. 역사학계가 워낙 좌편향이어서 우선 시급히 균형을 맞춰야 하기 때문이다.” 역사학계가 어떤 오류에 빠졌고 어떻게 교정해야 할지 자신들이 안다는 얘기다. 그럴 수도 있다 치자. 70년 전 하이에크는 이렇게 쓴다. “전문가들이 자신의 이상을 실현하는데 전혀 제약이 없는 체제만큼 더 견디기 힘들고 불합리한 세상은 없다.” 진리를 안다고 믿는 독단과, 그걸 관철하는 데 제약이 없는 체제. 이야말로 자유주의의 주적이다.

2015년 한국. 대통령 국회 연설. “올바른 역사교과서로 아이들에게 대한민국의 자부심과 정통성을 심어줘야 한다.” 70년 전 하이에크. “전체주의에서는 체제에 대한 사람들의 충성심에 어떤 효과를 미칠지가 정보가 출판될지 차단될지 결정하는 기준이다.” 2015년 한국. 이영훈 교수 발제문. “국정화 논쟁은 자유사관과 민중사관의 일대 투쟁이다.” 70년 전 하이에크. “언어의 철저한 악용은 전체주의의 특징이다. 가장 심한 홍역을 치른 단어는 물론 ‘자유’다.” 끝도 없이 짝을 지어줄 수 있지만 내가 민망해서 더 못 쓰겠다.

한국의 자칭 자유주의자들이 자유주의에 별 관심이 없다는 의심을 평소에 했었다. 이게 교과서 정국에서 확신으로 바뀌었다. 이 책에서 하이에크는 자유주의가 위기에 처한 이유를 여럿 나열한다. 그 중에는 이런 지적도 있다. “반사회적 특권을 방어하는 데 자유주의의 말투를 빌려 쓰는 사람들에 대한 정당한 분노.” 전체주의 냄새가 물씬 나는 교과서 국정화를 자유주의의 말투를 빌려 옹호하는 한국에서 이 문장을 곱씹자니, 70년 시차 따위 가볍게 뛰어넘는 하이에크의 울화가 느껴진다. 과연 고전 맞네.

천관율
[시사IN] 기자. 6년 동안 정치 기사를 썼다. 2014년 11월부터 사회 기사를 쓴다. 농땡이를 보다 못한 조직이 발로 뛰는 부서로 보냈다는 소문이 돌았는데, 정확하다.

디자인. 전유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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