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요판] 커버스토리 / 번역 왜곡 어떻게 알았나?
나는 앵거스 디턴 교수의 <위대한 탈출> 한국판 번역이 왜곡됐음을 처음 알아냈다. 이 사실은 디턴과 프린스턴대학교출판부에까지 알려져 현재와 같은 조처가 나오게 되었다. 그 전말을 밝힌다.번역 왜곡을 처음 발견한 날은 지난 16일이었다. 디턴의 노벨 경제학상 수상이 발표된 지 4일째였다. 디턴의 노벨상 수상은, 그간 자신들의 이데올로기 선전에 그를 ‘이용’해온 <한국경제>와 자유경제원이 ‘디턴 대 피케티’ ‘불평등의 긍정성 대 부정성’이라는 잘못된 대립구도에 다시금 불을 지피는 좋은 불쏘시개였다. 디턴의 노벨상 수상은 ‘불평등은 성장의 촉진제’라는 그들 입장의 최종적인 승리를 확정하는 소식이었고, 이런 근거 없는 해석은 디턴에 대한 정보가 많지 않았던 몇몇 언론매체를 통해 무분별하게 재생산됐다.사실 그동안 디턴에 대해 별 관심이 없었다. 그의 글도 거의 읽어본 바가 없었다. 다만 위와 같은 해석이 잘못됐음은 디턴에 대한 단편적인 지식만으로도 확실히 알 수 있었다. <위대한 탈출>을 좀 더 꼼꼼히 읽어보기로 결정했다. 그리고 번역이 왜곡됐음을 어렵지 않게 발견했다. 한국어판 문장들 및 문단들의 연결이 자연스럽지 않았기 때문이다. 원문과 대조했고, 오류를 쉽게 발견했다.몇몇 문장이 단순히 누락된 게 아님을 깨닫는 데 오랜 시간이 걸리진 않았다. 텍스트에 심각한 변경이 가해졌다. 문단이 통째로 사라지기도 했다. 사라졌나 싶었던 게 저 뒤에 나타나기도 했다. 원문에 있는 ‘서문’(Preface)이 보이지 않았고, 한글판에서는 ‘프롤로그’로 번역된 ‘인트로덕션’(Introduction)은 무려 3분의 2가 잘려 나갔다.한경비피는 이러한 텍스트 왜곡을 독자 편의를 위한 ‘편집상의 변경’(editorial change)이라고 불렀다. 잘려 나간 내용들과 그에 따른 문맥 훼손은 분명 독자의 이해관계에 반하는 수준이었다. 나는 저자의 이해관계에도 반한다고 확신했다. 18일 정오께 블로그에 이 사실을 게시했고, 저자와 원출판사에도 이메일을 보냈다. 내 글은 에스엔에스를 통해 삽시간에 수천번 공유되었다. 블로그 방문객도 폭증했다. 그동안 자신들의 ‘자유주의’ 이념을 설파하는 데 디턴을 아전인수 격으로 ‘인용’해온 정규재 <한국경제> 주필과 현진권 자유경제원장에 대한 대중의 반감이 읽혔다.19일까지 디턴 쪽에서는 응답이 없었다. 디턴과 프린스턴대학교출판부가 나서지 않는다면, 내가 밝혀낸 ‘사실’도 그저 ‘의혹 제기’에만 머물 공산이 컸다. 출판사인 한경비피에서 발뺌하면 그만이었다. 그러는 사이, 디턴으로부터 해당 사안을 ‘조사중’이며 ‘이 문제를 알려준 사람이 당신 말고도 더 있다’는 내용의 대답을 받았다는 한 누리꾼의 덧글이 이날 내 블로그에 달렸다. 그는 한 매체의 객원기자이자 번역가인 김수빈씨였다. 사태가 점점 재밌어졌다. 대표적인 보수경제지 <한국경제>의 자회사인 한경비피가 최근 ‘교과서 국정화’를 주도하는 주요 세력 중 하나인 자유경제원과 더불어 노벨상 수상자의 책을 왜곡해 번역·출간했고 이를 저자 쪽에서 알고 조사중이라니 커다란 뉴스감이었다.사태가 이렇게 된 이상 한경비피에서도 빨리 손을 쓰지 않을 수 없었으리라. 그들은 20일 오후에 입장문을 냈다. 텍스트 변경 사실은 인정하면서도 어디까지나 독자의 편의를 위한 통상적인 편집 과정의 일환이었고 저자의 의도를 왜곡할 의도는 없었다는 게 골자였다. 그들은 “이 같은 논란에 대해 저작권사를 통해 디턴 교수에게 설명했고 다음 판 인쇄 때 수정할 것을 약속했다”고도 밝혔다.번역 문제를 제기한 쪽의 명백한 승리였지만, 뒷맛이 깔끔하진 않았다. 한경비피가 계속 거짓말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본문의 번역에 대해서도 왜곡 의혹이 있지만 내용을 왜곡하거나 바꾼 게 없음을 분명히 말씀드립니다”라고 밝혔지만, 이미 나는 본문에서도 매우 심각한 텍스트 변경과 저자의 의도에 대한 왜곡 사례를 모아놓고 있었다. 이를 정리해 21일 <한겨레>와 블로그를 통해 추가 공개했다. 디턴 교수에게는 갈무리한 내용을 보냈다.디턴 교수에게서는 24일 답신이 왔다. 그는 이메일에서 “나와 프린스턴대학교출판부는 이 사안에 대하여 당신이 쏟은 노력에 감사한다”며 프린스턴대학교출판사 명의의 보도자료가 22일(현지시각)에 발표되었음을 알려주었다. 이 보도자료의 내용은 앞서 한경비피가 내놓은 입장보다 훨씬 강경했다. 특히 현행 판을 시장에서 전량 회수하고, 새로운 번역본은 독립적 감수 과정을 거쳐야 하며 ‘피케티 vs 디턴, 불평등을 논하다’라는 제목이 붙은 현진권 원장의 서문을 새로운 판에서는 빼야 한다고 주문했다는 내용이 눈에 띄었다. 사태를 축소하려는 한경비피의 속임수가 드러난 순간이었다.김공회 한겨레경제사회연구원 연구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