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화시장은 6.25전쟁 당시 남한으로 내려온 북한 피난민들이 이 지역에서 미싱 한 두 대로 옷을
만들거나 미군복을 염색, 탈색해 판매하던 것이 모태가 되었다. 판자촌으로 출발한 평화시장은 전쟁이후 청계천변에 노점상들이 대거 몰려들면서
본격적인 상권이 형성되었다. 하지만 1958년 이 일대의 대화재 이후 판자촌들은 사라졌고 1962년 지금의 현대식 건물이 들어섰다.
‘평화시장’이라는 이름은 평화통일을 기리는 실향민들의 염원에 따라 붙여졌다. 평화시장은 개인들이 어려움 속에서도 치열하게 일하고 성공한 승리의
현장이었다. 현재 평화시장은 3개 층, 2070개 점포, 5300 여 명이 종사하는 평화시장(주)라는 기업형태의 56년 전통을 자랑하는
재래시장이다.
이에 자유경제원에서는 평화시장의 경제적·역사적 의미를 짚어보는 자리를 마련했다. 자유경제원이 10일 오후 2시 리버티홀에서 개최한
‘경제발전의 뿌리를 찾아서: 평화시장’ 토론회에서 참석한 전문가들은 “평화시장이야말로 대한민국 빈곤탈출의 표상, 고용 역사의 현장, 산업화
민주화의 조우를 드러내는 상징적 장소”라며 입을 모았다. 아래 글은 발표자로 참석한 조동근 명지대 경제학과 교수의 발제문 전문이다. 미디어펜은
조동근 교수의 발제문을 상, 하편으로 나눠 게재한다. 아래 글은 상편이다.
[편집자주] | 평화시장 여성노동자의 땀과 눈물: 대한민국 빈곤탈출의
조역자 [상]
1. 원조를 받던 국가에서 원조를 주는 국가로 변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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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동근 명지대 경제학과
교수 | 한국은 반세기 만에 원조를 받던 나라에서 원조를 주는 나라로 변한 유일한 나라이다. 한국은
누대에 걸친 가난과 빈곤에서 탈출한, 앵거스 디턴의 “위대한 탈출”의 모델국가이다. 1962년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을 수립할 당시 한국은
최빈국이었다. 그 후 우리나라 명목 달러 표시 1인당 국민소득은 1962년 대비해 2014년에 311배 증가했다.
우리나라는 이승만 정부 때 미국의 잉여농산물인 PL 480의 무상원조를 받았다. 이승만
정부도 무상원조에 기댈 수만은 없다고 판단하고 경제개발계획을 구상했다. 하지만 실제 실행에 옮기지는 못했다. 1962년 제 1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 시행으로 자립경제의 첫 단추를 끼웠다. 앵거스 디턴은 『위대한 탈출』에서 후진국에 대한 원조가 그 나라를 빈곤에서 탈출하게 하는 데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비판한 바 있다. 전후(戰後) 많이 이루어져 온 후진국 지원은 공여국과 수혜국 모두 원조를 집권에 이용하려는 정치적 문제와
수혜국의 제도미비로 지원의 유효성을 떨어뜨리고 성장에 기여하지 못했다는 것이다.1)
한국의 경제개발계획은 ‘수출지향적 공업화 전략’을 실천하는 것이었다. 1962년 당시
세계 대부분의 나라들은 ‘수입대체 공업화’ 전략을 채택했다. 한국의 수출 중심의 대외성장 전략은 당시 국제 정세 속에서의 절묘한 선택이었다.
미국은 제 2차 대전이 끝난 후 소련과 중국의 사회주의가 팽창하지 못하도록 묶어두는 이른바 ‘봉쇄전략’(containment strategy)을
채택했다.2) 미국은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일본을 극동의 병참기지로 삼아 일본의 경제부흥을 지원했다.
미국의 동아시아 전략의 핵심은
일본을 경제적으로 부흥시켜 소련과 중국을 견제하고 한국을 통해 한반도에 반공(反共)의 방화벽(fire wall)을 세우는 것이었다. 미국
입장에서는 한국의 경제성장이 절실히 요구되었다. 미국은 한국에 자신의 시장을 기꺼이 내주었다. 한국으로선 경제를 일으킬 거대한 시장을 얻은
것이다. 그리고 주한미군을 통해 안보부담을 크게 줄일 수 있었다. 수출 중심의 경제성장 전략은 이렇게 쨔여진 것이다.
한국의 경제적 성공은 소소한 성공이 켜켜이 쌓여 임계치(critical mass)에
도달했기에 가능했던 것이다. 평화시장도 한국의 경제성장에 작지만 일조했다. 평화시장은 개인들이 어려움 속에서 굴하지 않고 치열하게 일해 성공한
‘승리의 현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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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동대문패션시장의 원조인 평화시장이야말로
우리나라 경제성장의 거대한 압축판이다./사진=평화시장 웹사이트 메인페이지 캡처 |
평화시장은 6.25전쟁 당시 남한으로 내려온 북한 피난민들이 이 지역에서 미싱 한 두
대로 옷을 만들거나 미군복을 염색·탈색해 판매하던 것이 모태가 되었다. 판자촌으로 출발한 평화시장은 625전쟁 이후 청계천변에 노점상들이 대거
몰려들면서 본격적인 상권이 형성되었다. 당시 상인들의 60%가량은 북에서 내려온 실향민들이었다고 한다. 그래서 더욱 억척스럽게 현실과 맞부친
것이다. 1958년에 이 일대에 대 화재가 난후 판자촌들은 사라졌고 1962년 지금의 현대식 건물이 들어섰다. 1958년을 기점으로 현재 3개
층의 매장, 2070개의 점포, 5300여명이 종사하는 ‘평화시장(주)’이 56년째 이어져 내려오고 있는 것이다.
2. 저임과 착취의 대명사가 된 평화시장
1) 전태일 열사
평화시장은 저임과 착취의 대명사가 됐다. 그리고 ‘전태일 열사’의 분신의 현장이기도
하다. 고(故) 조영래 변호사는 <전태일 평전>에 이렇게 썼다. “평화시장의 공장들이 닭장처럼 되어 있고 어두컴컴한 곳에서 어린
여공들이 쉴 새 없이 하루하루 자신의 목숨을 갉아먹고 있다. 하루 16~18시간씩 일을 하면서도 하루 일당은 불과 커피 한 잔 값 정도에 지나지
않았다.” 사실을 적시한 기술은 아니겠지만 당시 여공의 임금이 박했음을 상징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평화시장을 논의하면서 ‘전태일 열사’를 빼 놓을 수는 없다. 평화시장은 노동운동가
전태일의 성지와도 같다.3) 전태열 열사의 분신이 갖는 상징성은 그만큼 크다. 따라서 전태일 열사에 가려 평화시장의 다른 측면을 보지 못할 수도
있다. 이글에서는 위키백과를 중심으로 전태일 열사를 기술하고자 한다.4)
전태일(全泰壹)은 1948년 8월 26일 대구에서 태어나 1970년 11월 13일에
유명을 달리한 대한민국의 봉제 노동자이자 노동운동가 그리고 인권 운동가이다. 1960년대 평화시장 봉제공장의 재봉사, 재단사로 일하며 노동자의
권리를 주장했다.5)
평전작가 안재성은 전태일을 별난 재단사로 그리고 있다.6) “자기가 공장을 세워 좋은
조건으로 노동을 시키면 다른 사업주들도 따라 하지 않을까” 하는 공상도 나누고, 좋은 재단사들이 모임을 만들어 근로조건개선에 앞장서자는 제안도
했다. 이렇게 해서 만들어진 것이 ‘삼동회’였다. 청계천 일대의 세 곳의 옷 제조상가 재단사들이 모였다는 뜻이었다.
전태일은 1968년 근로기준법의 존재를 알게 되어 1969년 7월부터 노동청을 방문,
노동자들의 열악한 작업환경 개선과 위생환경 개선을 요구하였으나 번번히 거절당했다. 그는 동대문구청과 서울특별시의 근로감독관과 노동청을 찾아가
열악하고 위험한 노동환경 개선을 요구했으나 묵살당했고, 박정희 대통령에게 서한을 보냈으나 전달되지 못했다. 1970년 10월에는 본격적으로
근로조건 시위를 주도했다. 그러다 1970년 11월 13일 그는 분신했다.7) 그의 분신 이후 평화시장에 ‘청계피복노동조합’이 결성되었다.
전태일의 분신은 노동계 전반에 큰 영향을 주어 본격적 노동운동의 시발점이 됐다.
2) 탐하킨 법안의 함의
아동착취 그 중에서도 아동의 노동착취만큼 공분(公憤)을 사는 일은 없다. 이는 은밀하지도
않은 공개적인 사회범죄이기 때문이다. 1993년 방글라데시 아동들이 월마트(Wal-mart)에 납품하기 위해 만든 의류의 생산 현장이 공개된
적이 있다. 작업환경과 급여가 좋을 리 없다. 미국 언론은 이를 아동 노동 착취로 대서특필했다. 여론은 들끓었다.
미국 아이오아주 상원의원 탐하킨(Tom Harkin)은 아동 노동착취를 금하는 법안을
제출했다. 미성년자가 만든 의류의 ‘미국 내 반입’을 금지하는 법안이었다. 명시적이지는 않았지만 암묵적으로 방글라데시를 겨냥했다. 미국의 의류
수입이 중단되자 방글라데시 공장은 문을 닫았다. 그러면 공장에서 일하던 아동은 학교와 집으로 돌아갔는가. 그들은 ‘길거리의 아이들’로 남았다.
길거리가 공장보다 좋을 리 없다. 그들에게 공장은 ‘미래의 꿈’을 키우는 곳일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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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금 우리는 그 시대의 큰 진실을 놔둔
채 작은 진실에만 코 박고 있다. 전태일도 그렇지만, 조영래 붐도 그러하다./사진=『전태일 평전』(조영래 著)의
표지 |
인권과 아동복지가 중요한 것은 당연하지만 명분만 확보한다고 가치가 실현되는 것은 아니다.
도덕적 명분 확보가 세상을 바꾸는 충분조건일 수는 없다. 탐하킨의 입법규제는 ‘예기치 않은 결과의 가설’의 전형이 되었다. ‘화려한 약속,
우울한 성과’ 비판은 프리드만(M. Friedman)의 도덕적 명분에 기초한 규제에 대한 촌철살인(寸鐵殺人)이다.
전태일 열사를 분신에 이르게 한 것은 그의 분노였을 것이다. 평화시장의 열악한 작업환경과
기초생계비에도 못 미치는 저임이 그를 분노하게 했을 것이다. 그러면 이 문제를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 악덕 업주 형사고발과 작업장 폐쇄가 대안이
될 수 있을 가? 당장은 평화시장 여공의 마음을 달랠 수 있겠지만, 진정한 대안은 아닐 것이다. 저임이지만 그래도 소득원이고 또한 미래의 꿈을
키우는 처소(處所)이기 때문이다.
청계여공의 삶이 궁핍했던 것은 누가 착취를 해서가 아니라 그 이전 시대로부터 가난을
물려받았기 때문이다. 이 문제는 뒤에서 다시 논의한다.
3. ‘여공의 자기역사 쓰기’에 비춰진 평화시장
1) 불쌍한 여공으로 비춰지는 게 싫어서
『열세살 여공의 삶(신순애, 한겨레 출판, 20140』은 평화시장 ‘이름 없는 여공’의
자기 성장 이야기다. 시골에서 올라온 열세 살의 어린 소녀는 1966년에 평화시장의 ‘시다’(보조원)로 서울 생활을 시작한다. 그리고 미싱사로,
노동운동가로 변신한다. 그녀는 공부를 통해 새로운 삶의 전기를 맞는다. 가난한 시절, 초등학교를 졸업하지 못했던 그녀는 검정고시를 거쳐 대학생이
되고 끝내 대학원생이 된다. 그리고 석사논문의 형식을 빌려 자신의 이야기를 정리한다. 열세 살 소녀였던 여공은 60대가 되어 자신의 생애를
연구한 연구자가 되었다. 그리고 논문을 책으로 펴낸 것이 『열세 살 여공의 삶』이다.8)
주인공은 1970년대 청계천 평화시장 봉제공장에서 일한 신순애씨(61)다.9) 『열세 살
여공의 삶』은 노동운동가로 성장한 한 여성의 생애사이기도 하지만, 그녀의 삶을 통해 당시 청계천 평화시장의 생생한 모습을 되돌아 볼 수
있다.10)
신씨는 13세에 시다로 처음 일을 했다. ‘7번 미싱사’ 밑에서 일을 하게 돼 신씨는
‘7번 시다’로 불렸다. 신씨는 2년6개월이나 같이 일한 ‘7번 미싱사’의 이름조차 몰랐다. 한 달 동안 일을 하고 손에 쥔 첫 달 월급은
700원으로, 당시 쌀 한 가마니 값은 3400원이었다. 그러다 2년 반 동안 시다로 일하고 나서 신씨는 ‘미싱 보조’로 승진했다. 월급이
3000원으로 올랐다. 힘들었지만 기술을 배운다는 자부심이 있었다. 신씨뿐 아니라 당시 여성 노동자들은 ‘열심히 일하면 가난한 가정에 보탬이
된다’는 생각에 하루 16시간의 중노동을 견뎌냈다.
신씨는 5년 만인 18세에 미싱 기술자가 됐다. 일하는 만큼 돈을 벌었고 때로 조카들과
아버지에게 용돈을 주기도 했다. 열심히 모은 돈으로 셋째오빠의 결혼 자금도 댔다. 몇 년만 미싱 기술자로 일하면 집안 형편이 필거라는 희망도
있었지만 생활은 나아지지 않았다.
1975년 3월쯤의 일이다. 유인물 한 장이 신씨의 인생을 바꿨다. 공장 안에 뿌려진
유인물에는 ‘중등 수업 무료’라고 적혀 있었다. 육성회비를 내지 못해 초등학교도 졸업하지 못한 신씨는 퇴근하자마자 ‘청계피복 노동교실’로
달려갔다. 그녀는 자신의 이름을 노동교실에서 처음으로 다시 찾았다. 그전에는 ‘7번 시다, 3번 미싱사, 1번 오야’로 불렸기 때문이다. 입학
신청을 하고 손꼽아 입학식 날을 기다렸다. 그곳이 노동조합인지 몰랐던 신씨는 청계피복 노조 사람들로부터 전태일이라는 이름을 처음 들었다.
노동운동가로서의 그녀의 삶은 이렇게 시작됐다.
신씨는 2006년 성공회대 사회과학부에 입학해 사회학을 전공한 뒤 2010년 정치경제학
대학원에 진학했다. 신씨는 대학에 진학하기 전에도 “생애사를 책으로 써보라”는 지인과 옛 동지들의 권유를 수차례 받았지만 망설였다. 그러나
평화시장 노동자들을 다룬 책과 논문들을 접하고 마음이 달라졌다. 지식인들이 평화시장 여공들에 대해 쓴 저술을 볼 때마다 이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여성 노동자들이 ‘전태일이 알던 불쌍한 여공들’로만 그려지는 게 신씨는 못내 안타까웠다. 그동안 지식인들이 노동자들의 경험과
인식을 대변해 왔지만, 노동자 개인이 갖고 있는 주체적인 인식이 제대로 전달되지는 않았다고 그녀는 생각했다.11)
신씨는 논문을 쓰며 여전히 노동자들이 경제성장의 성과를 나눠 갖지 못하는 현실이 슬펐다고
했다. “우리가 투쟁할 때 정부 관계자들이 나와서 ‘GDP 1만달러만 되면 당신들 요구를 다 들어주겠다’고 말했어요. 사실 그때부터 분배를
했어야 해요. 공부를 해보니까 유럽에서는 경제성장기부터 노동자들에게도 성과를 분배했더라고요. 그때부터 쌓인 모순이 지금까지 커지고 있는 게
아닐까요?”
여기서 숨은 그림을 찾아야 한다. 2년반 만에 시다에서 미싱보조로 승진하고 월급도
700원에서 3000원으로 올랐으면, 그리고 5년 만에 미싱 기술자가 됐다면 봉제시장 생태계에서의 역동성(mobility), 즉 상향이동 속도는
결코 느린 것이 아니다. 쌀 한 가마에 3500원할 때 한달 월급이 700원이면 쌀 반 가마는커녕 쌀 2말 밖에 사지 못하는 저임이다. 하지만
월급이 3000원으로 오를 수 있었던 것은, 봉제시장 자체가 커졌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당시 평화시장 여공들은 여전히 빈곤선 아래에 위치해
있었다. 하지만 최소한 점차 빈곤선의 ‘유리 천장’을 향해 올라오고 있었음은 분명한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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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유경제원이 10일 오후 2시
리버티홀에서 개최한 ‘경제발전의 뿌리를 찾아서: 평화시장’ 토론회에서 참석한 전문가들은 “평화시장이야말로 대한민국 빈곤탈출의 표상, 고용 역사의
현장, 산업화 민주화의 조우를 드러내는 상징적 장소”라며 입을 모았다. 조동근 명지대 경제학과 교수가 발표하고
있다./사진=자유경제원 |
2) 요소가격 균등화정리(factor price equalization
theorem)
신씨의 문제의식, 즉 노동자들이 경제성장의 성과를 나눠 갖지 못했다는 문제의식에 대해
살펴보자. 이 문제에 답하기 위해서는 ‘요소가격균등화정리’를 이해할 필요가 있다.
요소가격균등화정리는 무역이 자유롭게 이루어진다면 노동과 자본 등의 생산요소가격은
국제적으로 균등화하는 경향이 있다는 것이다. 헥셔 · 오린 정리에 따라서, 가령 자본이 상대적으로 풍부한 A국은 자본집약적 상품 X를, 노동이
상대적으로 풍부한 B국은 노동집약적 상품 Y를 수출한다고 하자. 이때에 무역으로 인하여 A국에서는 Y재의 생산에 사용하였던 자본과 노동을 X재의
생산에 전용하게 되지만 이 경우 X재의 생산에 전용된 요소 가운데 자본을 보다 많이 사용하기 때문에 자본에 대한 수요가 상대적으로 증가하는
반면에 노동에 대한 수요는 감소한다. 따라서 자본의 가격은 상대적으로 상승하며 노동의 가격은 하락한다. 그 결과로 무역개시 전에 상대적으로
낮았던 자본의 가격은 상승하고 반면에 높았던 노동의 가격은 하락한다.
한편 B국에서는 반대로 상대적으로 낮았던 노동의 가격이 높아지고 상대적으로 높았던 자본의
가격이 낮아진다. 결국 국가 간의 두 생산요소의 가격은 각각 상대적으로나 절대적으로 균등화 경향을 갖게 될 것이다. 이와 같이 비록 생산요소의
이동이 없더라도 무역을 통하여 생산요소의 가격은 국제적으로 균등화되는 경향이 있다는 것이다.
헥셔·오린 정리와 요소가격균등화정리를 이용하여, 슈톨퍼(Stolper)와
사뮤엘슨(Samuelson)은 고임금국 노동자의 생활수준이 저임금국과의 자유무역을 통하여 어떠한 영향을 받는가에 관해서 검토하였다. 고임금국
노동자의 임금수준이 저임금국과의 경쟁으로 인하여 인하된다는 것을 논증하였는 바, 이것을 슈톨퍼·사뮤엘슨 정리(Stolper-Samuelson
theorem)라고 부른다.
쉽게 풀어 설명하면 다음과 같다. 주지하다시피 1970년 한국은 자본에 비해 노동이
풍부한 나라였다. 한마디로 자본은 귀한 대접을 받고 노동은 그렇지 못했다. 그만큼 노동이라는 생산요소는 천덕구러기였다. 그러면 어떻게 노동을
가진 사람(또는 계층)들의 처지를 개선시킬 수 있겠는 가? 그것은 노동을 집약적으로 필요로 하는 ‘노동집약적 재화’를 많이 만들어 해외에 파는
것이다. 그러면 노동의 수요가 많아져, 그 흔해 보이던 노동이 점차 귀해지고 그 결과 노동의 가격인 노임이 증가하는 것이다. 노동집약적인 재화를
해외에 파는 것은 ‘노동을 간접적으로 파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따라서 관건은 노동집약적인 재화의 ‘수출 물고’를 트는 것이다. 한국의 전략은
옳았다. 과거 개발년대, 즉 1970년대 1980년대의 대외지향적 수출전략이 이를 웅변하고 있다.
위의 신씨의 증언에서처럼 그나마 월급이 700원에서 3000원으로 오른 데는 이 같은
경제원리가 작용했기 때문이다. 아무리 악덕업주였다 하더라도 월급을 올려주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경제원리는 이렇게 작동한다.
여기서 잠시 전태일로 돌아가 보자.12) 이런 말이 나온다. “1970년대 청계천
일대에는 2천여 개의 피복공장이 성황을 이루고 있었다. 옷공장 1년이면 집을 산다느니, 3년이면 빌딩을 산다느니 하던 호시절이었다. 하지만 그
밑에서 일하는 2만 7천여 노동자들에게 돌아오는 것은 끔찍한 노동과 가난뿐이었다. 하루 평균 14시간에서 16시간까지, 일요일은 물론 국경일조차
거의 놀지 못한 채 일 년 내내 혹독한 노동에 시달려야 했다.”
업주는 옷 공장 1년이면 집 한 채를 사는 데, 여공은 왜 늘 노동과 가난뿐인가? 신씨의
문제의식처럼 노동자들은 왜 경제성장의 성과를 나눠 갖지 못했다 가를 살펴보자. 먼저 떠오르는 것이 ‘착취’다. 줄 것을 주지 않았다는 것이다.
착취를 100% 부인할 수는 없지만 착취만으로 설명할 수는 없다. 그러면 지금도 업주가 옷 공장 하나만 있으면 집 한 채를 살 수 있는가?
그렇지 않다. ‘착취를 못해서 그렇지 않다’고 설명할 수는 없을 것이다. 당시 여공의 삶이 팍팍한 것은 여전히 노동이 풍부해 노동의 값, 즉
임금이 충분히 비싸지 않았기 때문이다. 업주의 소득이 높은 이유는 자본이 귀해 자본가격이 높아서만은 아니다.
업주는 조그만 규모의
기업을 운영하는 ‘기업가’다. 상업세계에서 기업가는 늘 위험부담을 진다. 따라서 위험부담에 대한 대가가 자본사용에 대한 대가에 더해져, 업주의
소득이 높아져 보이는 것이다. 하지만 사업자의 소득이 높아지면 빠른 속도로 다른 사업자들이 봉제 산업으로의 진입이 이루어진다. 신규진입이 늘면,
그만큼 여공에 대한 수요가 늘기 때문에 여공에게 불리하지 않다. 1970년대, 80년대 산업화 시대에 여공의 삶이 팍팍한 것은 사실이었지만,
누군가 착취해서 그런 것은 아니다. 저임이지만 점차 시간이 지나면서 임금은 높아지고 있다. 우리나라에서 고부가가치 패션이 아닌 단순 봉제사업은
더 이상 황금알을 낳는 거위가 아니다. 그 이유는 임금이 높아졌기 때문이다. 착취를 주장하는 사람들은 현재의 고임금을 설명할 수 없다. 따라서
착취는 설득력이 없다.
4. 평화시장 지역 개관 및 의류생산 네트워크
평화시장에 대한 차분한 논의는 결코 쉽지 않다. 전술한 대로, 노동착취, 저임, 분신
등이 중첩되기 때문이다. 여기에서는 실증적인 측면에서 평화시장에 접근한 ‘주은선’의 연구에 기초하고 있다.13)
1) 평화시장 개관
1950년대부터 광장시장에는 6.25전쟁 이후 부산 등지에서 구호품으로 들어오던 옷을
파는 의류도매상가가 성업했다. 1955년 청계천 복개 시작 전부터 청계천 변을 따라 분포한 2층 판자촌에 의류제조업체들이 들어서 있었다. 그 후
1961년 청계천 남쪽 평화시장이 옷 도매시장으로 자리 잡으면서 광장시장의 의류 제조업체들도 평화시장으로 몰려들었다. 평화시장이 위치한 청계천변
남쪽이 크게 번창했다. 80년대 중반까지 평화시장, 연쇄, 통일 등의 상가와 중앙시장 등지에 밀집되어 있던 의류제조업체는 80년대 후반부터
지리적 분산을 시작했다. 1998년에는 평화시장 주변의 의류제조업체는 청계천 6가와 동대문 운동장 주변의 창신동, 충신동 등지의 주택가로
분산됐으며, 평화, 동화, 통일 신평화 등 기존 상가의 공장은 크게 줄었다.
의류 제조는 수출용과 내수용으로 구분되며, 품목에 따라 남자대인복, 숙녀복, 아동복,
작업복, 와이셔츠 및 남방 등으로 구분된다. 평화시장은 숙녀복을 제외한 나머지 품목을 주로 생산했다. 와이셔츠는 라인작업을 하지만 나머지 품목은
숙련노동자의 기술에 의존해 조립봉제 혹은 완제방식으로 만들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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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은 반세기 만에 원조를 받던
나라에서 원조를 주는 나라로 변한 유일한 나라이다. 한국은 누대에 걸친 가난과 빈곤에서 탈출한, 앵거스 디턴의 “위대한 탈출”의
모델국가이다./사진=자유경제원. 윤서인 작. |
2) 평화시장 주변 의류생산 네트워크의 일반적 특성
평화시장은 의류제조업이 집중되어있고 사업장 규모 면에서 영세하며 동질성이 강하다.14)
자연스럽게 평화시장 상가를 중심으로 일정한 지역적 테두리 내에서 완결성을 갖는다. 판매와 생산의 연결망이 지역적으로 일치하며 생산과정 상의
작업분화 또한 동일지역의 하청망 및 인적 연결망을 통해 이루어진다.
생산네트워크는 지역노동자의 소득수준이나 소득안정성, 노동대가 선정방식, 구직경로,
고용형태 등을 규정한다. 생산네트워크는 수평적이건 수직적이건 노동자들의 직무범위 및 공임수준 등을 규정하고, 연결망에서 이루어지는 거래의
안전성이 직접 소득의 안정성을 규정한다. 하청관계의 형성으로 인해 지역 노동자들의 임금 및 고용에 대한 결정력은 기존의 사업장 단위에서 사업장
간의 연계 및 기업과 개인의 연계로 확장된다.
기업 간 하청관계에 초점을 맞춰 논의를 구체화해보자. 첫째, ‘보상수준’의 결정
문제이다. 하청업체의 임금은 상위 업체와의 계약단가에 의해 제약받는다. 원청업체에 비해 하청업체가 많은 경우 우월적 지위를 이용한 불공정 거래의
위험이 커지며 하청업체들의 계약단가 압박은 커진다. 계약단가에는 통상적으로 하청업체의 고정자본 마모비가 포함되지 않는다.
둘째, ‘임금불안정성’의 문제다. 하청은 원청업체의 ‘수량적 유연성’ 확보 수단이 될 수
있으며 이 경우 하청업체 노동자가 비수기에 임금을 안정적으로 확보 받지 못할 수도 있다. 하청에 재하청을 거듭하는 영세자영업체가 밀집되어 있는
평화시장 노동자들의 임금불안정성은 그만큼 높을 수밖에 없다.
셋째, 임금체계 및 고용형태의 문제이다. 원청업체는 해고에 따른 부담이 적은 ‘유연한
고용형태’를 도입하길 원한다. 이는 하청업체도 마찬가지다. ‘객공제, 갯수급, 소사장제’등이 그것이다. 넷째, 생산구조면에서의 주변화이다.
의류는 공정분화와 제품운반이 쉬운 재화이다. 단순공정을 쪼개어 하청업체에 맡길 수 있다. 원청업체는 디자인 등을 맡고 하청업체는 주어진 ‘기술적
기준’에 맞춰 봉제작업만 하는 경우가 많다. 원청과 하청부문이 분리되면, 하청업체는 이동성이 큰, 즉 이직률이 높은 하청노동자를 고용하게 되어
그만큼 기술력을 쌓기 어렵다. 이렇게 해서 ‘주변적 성격’이 강해진다. 하청관계라는 생산네트워크 형성이 핵심노동자와 주변부 노동자를 가르는
역할을 한다.
다섯째, 사회보장으로부터의 누락이다. 이는 의류산업이기 때문이 아니다. 영세성에서
비롯된다고 보는 것이 정확하다. 1998년까지 근로기준법, 산재보험, 국민연금, 고용보험은 모두 사업장의 상용근로자를 기준으로 적용여부가
결정됐다. 여섯째 노동자 분산에 따른 분할지배(divide and control)는 계급역량의 약화를 초래한다. 이로써 임금수준 및 고용보호의
등의 문제가 대두된다. 이는 원청업체 노동자의 노조조직 역량에도 영향을 미친다. 파업 시 하청생산으로 인해 원청업체 노조의 교섭력이 약화된다.
Brusco(1981)는 이탈리아 등지에서 하청관계가 발달하게 된 계기를 노동운동이 활발했던 시기에 사업주들의 대응전략으로 해석하고 있다.15)
평화시장의 경우 봉제 노동자의 하청확대와 노조역량 쇠퇴가 시기적으로 일치한다. 이는 봉제가 자동차 같은 ‘장치산업’이 아니기 때문이다. 산업의
특성에서 오는 것으로 노조를 탄압해서만은 아니다. /조동근 명지대 경제학과 교수
1) 그는 수혜국 집권자들로 하여금 국민들에 관심을 두어야 할 필요성을 적게 해 민주주의 발전에도 역행하고 있다고 비판한다.
2) 1947년의 트루만 독트린이다.
3) 전태일의 흉상은 청계천 8가에 있다.
4) https://ko.wikipedia.org/wiki/%EC%A0%84%ED%83%9C%EC%9D%BC
5) 전태일은 아버지가 사기를 당해 정규 교육을 받지 못하고 서울로 올라와 청계천 피복 공장에 취직했다. 1965년에는 청계천내 삼일회사
재봉사로 일하다가 강제 해고된 여공을 돕다가 함께 해고됐다. 이후 한미사의 재단보조로 있다가 재단사가 사장과의 갈등으로 해고되자, 그가 재단사가
되었다.
6) http://archives.kdemo.or.kr/RecordContentsView?pId=11
7) 청년들은 평화시장 곳곳을 뛰어다니며 소리쳤다. 종이로 만든 플래카드에는 ‘일주일에 한 번만이라도 햇빛을!’ ‘우리는 기계가 아니다!’
같은 글귀들이 쓰여 있었다. “근로기준법을 준수하라!” “일요일은 쉬게 하라! 노동자를 혹사시키지 마라!” 그는 화염에 휩싸였다. 불길은
순식간에 그의 전신을 휘감았다.
8) http://www.suwonedu.org/suwon/issue/62453
9)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1206152148185&code=940702
10) 저자는 기성학자가 연구하지 않았기에 스스로의 역사를 쓰게 되었노라고 말한다. 이 책은 “한 여성노동자의 자기 역사 쓰기”이다.
역사에 대한 해석은 역사가들(또는 지식인들)의 전유물만은 아니다.
11) 사장·공장장·재단사·미싱사·시다들 사이에 촘촘하게 이어진 위계관계, 그 속에서 위계의 최하층에 있었던 여공의 일과 삶에 대한
구체적인 서술은 단지 한 개인의 경험으로 끝나지 않는다. 대신 당시 보편적인 삶의 현장을 고스란히 불러온다.
12) http://archives.kdemo.or.kr/RecordContentsView?pId=11
13) 주은선, “평화시장 근처의 의류생산 네트워크와 지역 노동자의 경제생활 변천에 관한 연구”(1999), 서울학연구 13,
245-283
14) 사회경제적 동질성 뿐만 아니라 문화적 동질성까지 담보한 지역노동시장(local labor market) 주석 1번
15) Brusco, S.(1982) “The Emillian Model: productive decentralization and
social integration”, Cabridge Journal of Economics,
167-18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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