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도] "이승만 없었다면 한반도는 어떻게 됐을까"

자유경제원 / 2016-02-25 / 조회: 5,926       뉴데일리

 자유경제원은 지난 15일 ‘이승만과 그의 저서, 자유주의 정신이 상륙하다’를 주제로 세미나를 열었다. 패널로 나선 복거일 소설가의 토론문을 전재한다. 복거일 작가는 올해 1월부터 '월간 중앙'에 이승만 연재소설을 발표하고 있다.[편집자주]


우남 이승만은 우람한 나무와 같다.
바로 앞에서 살피면, 그의 모습이 제대로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
둥치에 난 상처들, 뒤틀린 가지들과 삭정이들, 벌레 먹은 잎새들과 같은 것들이 먼저 눈길을 끈다. 멀리 떨어져서 보아야, 비로소 그가 관목들 위로 훌쩍 솟구친 교목임이 눈에 들어온다.
그리고 그 큰 품속에 많은 생명들이 깃들었음을 깨닫게 된다.
그런 점에서 그의 삶을 거대한 벽화에 비기는 것이 나을지도 모른다.
모든 사람들에게 적용되는 얘기겠지만, 우남처럼 위대한 인물의 삶은 특히 멀찌감치 떨어져서
한눈에 조망해야 비로소 그 뜻이 마음에 들어온다.

우남의 업적은 크고 다양했을 뿐 아니라 자신의 시대를 뛰어넘는 면들이 있었다.
그래서 그를 기리는 사람들도 무심코 놓치게 되는 부분들이 있다.
그런 부분들 가운에 하나는 자유주의 이념과 자본주의 체제가 우리 사회에 뿌리를 내리는 과정에서 우남이 기여한 몫이다. 지금 많은 시민들이 그를 '독재자'라 여긴다는 사정도 있을 것이고 자유주의가 이해하기 쉽지 않은 이념이라는 사정도 있을 것이다. 아마도 가장 큰 이유는 자본주의와 그것을 떠받치는 이념인 경제적 자유주의를 이해하고 지키려는 사람들이 늘 소수라는 사정일 것이다. 자연히, 우남이 일관된 자유주의자여서 전체주의와 명령경제를 물리치고 자유주의와 시장경제를 옹호했다는 사실은 흔히 잊혀진다. 

우남의 업적을 기리는 연속 토론회 '이승만은 산타였다'가 우남의 자유주의를 맨 먼저 다룬 것은 그래서 반갑다. 우남의 사상을 잘 드러낸 그의 대표작 <독립졍신>이 분석의 대상이 된 것도 자연스럽다. <독립졍신>은 "이승만이 옥중에서 순한글로 저술한 국민계몽서이다. 이 책은 구한말 한국의 개화선각자들이 펴낸 저술 중 내용상으로나 인쇄. 제본. 기술면에서 단연 백미로 꼽을 수 있는 역작이다." [류영익, '이승만 저작 해제']

원본 '독립졍신'을 현대어로 풀어 간추린 '독립정신' 현대어 판. (동서문화사, 2010년 3월 발행)
▲ 원본 '독립졍신'을 현대어로 풀어 간추린 '독립정신' 현대어 판. (동서문화사, 2010년 3월 발행)


 


안타깝게도, <독립졍신>은 일반 독자들이 쉽게 접근할 수 없는 책이다.
당시 글은 지금 우리가 쓰는 글과 많이 다르다. 특히 한자를 모르면 이해하기 어려운 낱말들이 많다. 남정욱 교수는 <독립졍신>을 자유주의의 관점에서 살피고 일반 독자들에게 자신이 본 얘기를 쉬운 말로 들려준다. 글을 재미있게 쓴다는 평판에 부응해서, 남 교수는 자칫 삭막해질 수도 있는 얘기를 재미있게 풀어놓는다. 그의 글을 읽으면, 우남에 대해 많이 알지 못하는 독자들도 우남의 자유주의에 대해 알게 되고 우리의 전통에 없었던 자유주의가 우리 사회에 튼튼한 뿌리를 내리는 과정에서 우남이 한 일들을 나름으로 그릴 수 있을 것이다.

아쉬운 것은, <독립졍신>에 나온 자유주의를 주로 다루었으므로, 자유주의에 관한 우남의 업적의 전모가 드러나지 않는다는 점이다. 우남은 평생 조국의 근대화와 독립과 자주를 위해 노력한 운동가다. 그의 모든 말과 글에서 우리가 선동가의 체취를 짙게 느끼는 까닭이 거기 있다. 당연히, 우리는 그가 자유주의의 정착을 위해 그가 실제로 한 일들도 살펴야 한다. 

   

<독립졍신>은 1904년 2월부터 6월까지 4개월 동안 한성감옥서 안에서 집필되었다.
1905년 우남의 옥중동지 박용만이 원고를 몰래 미국으로 가져갔고, 1910년에 로스앤젤레스에서 출간되었다. 이어 1917년에 호놀룰루에서 2판이 나왔다. 국내에선 1945년에야 처음 출간되었다.

1899년 왕정개혁 운동하다가 한성감옥에 수감된 종신죄수 이승만(24세).
▲ 1899년 왕정개혁 운동하다가 한성감옥에 수감된 종신죄수 이승만(24세).

따라서 <독립졍신>이 일본의 압제적 통치를 받던 시기에 조선 국내에 미친 영향은 사상적으로나 정치적으로나 컸다고 할 수 없다. 실제로, 개화기 조선 사회에 자유주의를 소개하는 일에선 서재필을 비롯한 계몽운동 1세대의 역할이 두드러졌다. 해외에 미친 영향도 일본군의 '펄 하버 기습' 뒤 널리 읽힌 그의 영문 저서 <일본내막기(Japan Inside Out)>에 비길 수 없다. 특히 <일본내막기>에서 전체주의의 속성을 명쾌하게 밝힌 대목은 높은 지적 성취였다. 당시 대다수 서구 지식인들이 공산주의에 매혹되어 그 실체를 눈치채지 못했었음을 생각하면, 그가 밝힌 자유주의에 대한 신념과 전체주의가 제기하는 위협에 대한 통찰은 경이롭다.

우남은 러시아도 거기서 꽃핀 공산주의도 경계했다. 그는 러시아가 한반도에 대해서 품은 영토적 야심을 처음부터 깊이 인식했고 자유주의에 가장 적대적인 "중세적 국가"[스탈린]를 혐오했다. 1930년대에 혹시나 독립 운동에 대한 도움을 받을까 해서 모스크바를 찾았다가 직접 보게 된 러시아의 실체는 그의 공산주의에 대한 생각을 확인해주었다.

그가 확고한 자유주의자였다는 사실은 독립 운동의 성격에, 특히 임시정부의 유지에, 결정적 영향을 미쳤다.

1917년에 러시아 혁명이 일어나고 길고 힘든 내전에서 소비에트 정권이 이기자, 중국과 러시아 연해주에서 활동한 독립운동가들은 대부분 공산주의자가 되거나 적어도 공산주의에 호감을 갖게 되었다.
1919년의 3.1독립운동에서 주도적 역할을 한 학생 지도자들 가운데 중국으로 망명한 사람들이
대부분 공산주의자들이 되었다는 사실에서 당시의 사상적 조류를 가늠할 수 있다.

공산주의 세력은 소비에트 러시아로부터 받은 풍부한 자금을 이용해서 임시정부를 장악하려 시도했고 그런 시도가 실패하자 임시정부를 무력화시키는 데 힘을 쏟았다. 그들은 우남을 임시정부 대통령에서 몰아내는 데 성공했고 민족주의 지도자들까지도 한때 임시정부에서 밀려났었다. 결정적 시기인 중일전쟁부터 해방까지의 기간에 임시정부가 공산주의자들에게 장악되지 않은 데엔 백범 김구의 역할이 결정적이었지만, 백범이 공산주의자들과 타협하지 않고 버틸 수 있도록 한 것은 미국에서 큰 영향력을 지녔던 우남의 충실한 지지였다. 백범과 우남의 '민족주의/자유주의 연합'이 김원봉과 한길수의 '러시아 중심 세계주의/공산주의 연합'에 맞서서 임시정부를 지킨 덕분에 임시정부가 온전히 민족주의와 자유주의의 보루로 남을 수 있었다. 그리고 임시정부가 민족주의와 자유주의의 보루였다는 사실은 해방 뒤의 혼란 속에서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를 구성 원리로 삼은 대한민국이 세워지는 데 큰 도움을 주었다.

   

독립원동 35년만에 돌아와 '뭉치면 살고 흩어지면 죽는다'고 연설하는 이승만(70세), 해방직후 소련의 전체주의 공산주의에 대항하는 국민단결을 줄창 부르짖었다.(자료사진)
▲ 독립원동 35년만에 돌아와 '뭉치면 살고 흩어지면 죽는다'고 연설하는 이승만(70세), 해방직후 소련의 전체주의 공산주의에 대항하는 국민단결을 줄창 부르짖었다.(자료사진)

해방 뒤에 우남이 민족주의/자유주의 진영을 이끌었음은 잘 알려졌다. 그러나 그가 당시 우리 사회에서 거의 유일한 경제적 자유주의자로서 시장경제 체제가 자리잡도록 했다는 사실은 제대로 알려지지 않았다. 시장경제에 대한 지식도 경험도 전혀 없는 사회에서 그것이 얼마나 힘든 일이었는가 우리로선 상상하기가 쉽지 않다. 당시엔 거의 모든 시민들이 공산주의의 실체를 모르고 막연히 공산주의를 동경했다. 민족주의를 내걸고 공산주의 세력과 맞섰던 임시정부까지 실질적으로 사회주의 경제체제를 강녕으로 내걸었었다. 그런 시대적 상황을 고려해야, 우남의 위대함과 업적이 드러나기 시작한다.

한 인물의 중요성을 판단하는 일은 '만일 그가 없었다면, 역사는 어떻게 바뀌었을까?'라는 물음에서 시작한다. 이런 물음에서 나온 상상 속의 역사는 철학적으로는 반사실(counterfactual)이라 하고 문학적으로는 대체역사(alternate history)라 불린다. 우남이 활약하지 않은 대체역사는 어떤 것이든 실재한 세상보다 훨씬 못하다. 아마도 그것이 우남에 대한 궁극적 평가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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