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도] 정주영, 영웅 따라 하기로는 영웅 될 수 없다

자유경제원 / 2016-03-22 / 조회: 6,365       미디어펜

‘이봐 해봤어’ :정주영의 자유주의적 인생철학


“영웅 따라 하기로 영웅이 될 수는 없다”


시작하는 말


정주영은 오직 ‘일’에 빠져 산 사람이다. 그에게 가장 큰 의미가 있는 것은 언제나 그가 쓸 수 있는 시간이었다. 그의 관심은 그에게 주어진 시간을 어떻게, 무슨 일에, 얼마만큼 알차게 활용해서, 어떤 ‘발전과 성장’에 집중할 것인가에 있었다. 그는 스스로 “시간 이라는 자본을 꽤 잘 요리한 사람이라고 자부하였다.”1) 언제나 남보다 빠른 시간에 새로운 일을 계획하고, 뛰어들고, 마무리하고, 남이 우물쭈물하는 시간에 돌진하였다. 


정주영은 보통 사람들이 불가능하다고 생각하는 것들을 가능한 것으로 바꾸어 놓은 사람이다. 그의 트레이드 마크가 된 ‘해 봤어’는 “우리는 해 보지도 않고 얼마나 많은 것들을 불가능하다고 생각했는가.” 또는 “우리는 해야 하기 때문에 할 수 있다”는 철학적 금언을 상식적인 언어로 표현한 것이다. 정주영의 ‘해 봤어’의 철학을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정주영의 인생에는 “다른 사람에게 영향을 주는 행위에 대해서만 사회가 간섭할 수 있다. 이에 반해 당사자에게만 영향을 미치는 행위에 대해서는 개인이 당연히 절대적인 자유를 누려야 한다. 자기 자신, 즉 자신의 몸이나 정신에 대해서는 각자가 주권자인 것이다.”2)라는 존 스튜어트 밀의 자유주의 철학이 녹아 있다.


정주영은 ‘해 봤어’의 철학을 무한 신뢰하여 정치에도 뛰어 들었다. 끊임없이 새로운 사업 영역을 개척하면서, 정주영은 정치가 문제라고 느꼈다. 그러나 그는 정치에 대해서는 ‘해 봤어’라고 말할 수 없었다. 정치에 대해 ‘해 봤어’라고 하려면 대통령이 되는 수밖에 없었다. 어떤 사람들은 그가 정치에 도전하여 실패했다고 하지만 그의 생각은 다르다. 


정주영이 대통령에 출마하여 낙선한 것을 두고 세상 사람들이 정주영 인생의 결정적인 실패라고 하였지만 그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쓰디쓴 고배를 들고 보복 차원의 시련과 수모도 받았지만 그는 실패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정주영은 “5년 전 내가 낙선한 것은 나의 실패가 아니라 YS를 선택했던 국민들의 실패이며, 나라를 이 지경으로 끌고 온 YS의 실패이다. 나는 그저 선거에 나가 뽑히지 못했을 뿐이다. 후회는 없다”3)라고 대통령에 대한 자신의 도전과 실패를 간명하게 정리했다.


   
▲ 올해로 서거 15주기인 故(고) 아산 정주영 명예회장./사진=현대자동차그룹


Stay Hungry 4)


이 글은 정주영의 일생을 지배한 일관된 신념이 무엇인가에 대한 호기심에서 시작되었다. 그는 1992년 대선에 출마하면서 『나의 삶 나의 이상, 시련은 있어도 실패는 없다』는 자서전을 출간하고 약 5년이 지난 뒤, 현대건설 창사 50주년에 맞추어 『이 땅에 태어나서: 나의 살아온 이야기』를 출간했다. 그의 나이 82세 때다. 그는 회고록을 출간하는 이유를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모두가 알다시피 국졸(國卒)이 내 학력의 전부이고, 나는 문장가도 아니며, 다른 사람의 귀감이 될 만한 훌륭한 인격을 갖춘 사람도 아니다. 또 평생 일만 쫓아다니느라 바빠서 사람들에게서 가슴 깊이 새겨질 어떤 고귀한 철학을 터득하지도 못했다. 그럼에도 이 책을 내는 것은, 이 나라를 책임질 젊은이들과 소년 소녀들에게 확고한 신념 위에 최선을 다한 노력만 보탠다면 성공의 기회는 누구나 공평하게 타고났다는 것을 다시 한 번 일깨워주고 싶어서이다.


‘시간(時間)은 누구에게나 평등하게 주어지는 자본금’이라는 말을 한 사람이 있다. 참으로 옳은 말이다. 나를 성공한 사람 가운데 하나라고 한다면, 나는 신념의 바탕 위에 최선을 다한 노력을 쏟아 부으며 이 ‘평등하게 주어진 자본금’을 열심히 잘 활용했던 사람 중의 한 사람일 뿐이다.”


‘수저계급론’을 앞세워 ‘노력하라’는 교훈이 꼰대의 잔소리로 나락한 우리의 현실에서도 그의 말은 강한 설득력을 지닌다. 발끝부터 머리끝까지 농부였던 정주영의 아버지, 농부로 살다 간 아버지를 둔 정주영은 ‘흙수저 출신’임이 분명하다. 그럼에도 정주영은 아버지로부터 물려받은 건강한 몸을 밑천으로 부지런함, 검약 정신, 포기를 모르는 끈기와 집념, 그리고 인간의 도리를 실천해야 한다는 가르침을 받아 세계적인 기업가로 살았다.


정주영, 드디어 가출에 성공하다 


정주영은 1915년에 태어났다. 1915년은 아인슈타인의 일반상대성이론이 발표되고, 시인 서정주가 태어난 해이기도 하다. 올 3월은 정주영 서거 15주년이 되는 해다. 서거 15주년을 맞이하여 정주영이 우리에게 준 새로운 지식은 무엇인가를 생각해 본다. 그는 일제 시대에 태어나 해방과 정부수립, 6.25와 근대화를 거치면서 한국 경제의 놀라운 성장의 한 축을 담당한 위대한 기업가로 남을 것이다.


정주영의 공식적인 학력은 송전소학교 졸업이다. 그는 소학교 공부가 쉬워 1학년에서 3학년으로 월반도 했지만, 차분하지 못한 성격으로 붓글씨 쓰기를 못하고 음치로 창가(노래)를 못해 졸업할 때까지 줄곧 2등을 했다. 그 앞에서 1등을 했던 친구는 나중에 형무소 간수직 시험을 쳐서 간수가 되었다고 한다.


정주영은 소학교에 들어가기 전 3년 동안 할아버지의 서당에서 『천자문』, 『동몽선습』, 『소학』, 『대학』, 『맹자』, 『논어』와 같은 경전을 배우고, 여러 형태의 시(詩)도 배웠다. 공부가 재미있어서 배운 것이 아니라, 회초리로 사정없이 종아리를 맞는 것이 무서워 암기하고 뜻을 익혔다고 한다. 그는 어릴 때 이미 『동아일보』 연재소설을 열심히 읽었고, 이광수 『흙』을 읽고 감동을 받아 고학으로 변호사 시험을 쳐 허숭 같은 훌륭한 변호사가 되어 보겠다는 꿈도 꾸었다. 실제로 그는 도회지로 나왔을 때 『법제통신』, 『육법전서』와 같은 책을 사서 공부해 보통고시까지 쳤지만 낙방했다. 그의 낙방은 미래의 한국 경제를 위해 다행스러운 일이었다.


   
▲ 아산 정주영의 탁월한 리더십은 불가능을 가능하게 했다. 그 결과로 현대는 오늘날 글로벌 기업으로 성장했다. 이처럼 불확실한 사업환경에서 혁신과 도전, 철저한 준비를 통해 성공을 거두는 것이 기업 활동의 정수다./사진=미디어펜


아버지는 소학교를 졸업한 정주영을 본격적인 농부로 키우려고 했다. 정주영은 상급학교에 진학하여 학교 선생님이 되고 싶었으나 가정 형편이 어려워 그것은 꿈으로 끝났다. “평생 허리 한번 제대로 못 펴고 죽도록 일해도 배불리 밥 한번 못 먹는 농부로, 그냥 그렇게 내 아버지처럼 고생만 하다가 내 일생이 끝나야 한다는 건가.”라고 가슴이 답답해진 어린 시절의 정주영에게 고향은 떠나야 할 곳이었다. 흉년이 들면 부부싸움을 하는 집안 광경을 목격하고는 서울로 가서 농사 아닌 다른 일로 성공하겠다고 결심했다.


어릴 때 정주영은 교사가 되는 것 말고는 무슨 특별한 꿈을 가지지는 않았다. 다만 고향을 떠나 도시로 진출하는 것이 그의 일차적 목표였다. 그는 1931년 7월 처음으로 집을 나와 원산의 고원 철도 공사판에서 일했다. 두 번째 가출 때에는 금화에서 일했다. 1932년에 세 번째 가출하여 경성실천부기학원에 등록하여 부기를 공부했다. 그러나 3차례의 가출은 그를 고향에 잡아두려는 아버지의 끈질긴 집념으로 모두 실패했다.


드디어 그는 1933년 가출에 성공한다. 가출하여 인천부두, 보성전문학교 신축 공사장에서 막노동을 하다 풍전 엿 공장에 취업했다. 1934년 쌀가게 ‘복흥상회’에 취업하고 주인의 신임을 얻어 1938년 1월 신당동 길가에 쌀가게 경일상회를 시작했다. 그러나 1939년 총독부의 전시체제령에 따른 쌀 배급제로 경일상회를 닫고 고향에 돌아가 16세의 변중석과 결혼했다.


1940년에는 합자회사 ‘아도서비스’ 자동차 수리 공장을 아현동에서 시작했다. 그러다가 1946년 ‘현대자동차공업사’를 설립하고 1947년에는 ‘현대토건사’를 설립했다. 정주영의 나이 31세에 <현대>가 탄생한 것이다.


   
▲ 사진은 정주영 창업자 추모사를 낭독하는 최길선 현대중공업 회장./사진=현대중공업


사회가 학교다 : 몸으로 익힌 지식의 위력


배움은 학교에서만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다. 정주영은 6년밖에 정규 교육을 받지 못했지만 16세부터 세상이라는 큰 학교에서 배우기 시작했다. 교과서가 아니라 생활 현장에서 지식을 익힌 것이다. 그가 익힌 것은 ‘명시적 지식’이 아니라 ‘암묵적 지식’이었다. 그러나 따지고 보면 정주영이 ‘현장의 지식’, ‘암묵적 지식’을 쌓아갈 수 있었던 것은 자유민주주의 헌법을 우리가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해방과 건국, 6.25와 권위주의 정권의 지배 하에서도 북한과 달리 남한에서는 민영기업이 허용되어 ‘창조적 파괴’를 자신의 생존 전략으로 삼은 기업가가 탄생하고 성장할 수 있는 사회적 분위기가 형성되었다. 박정희 시대와 같은 권위주의 시대에도 권위주의를 정당화하고 국민들에게 먹을 것을 제공하고 경제를 개발하기 위해 시장을 허용하고 기업가의 이윤 동기를 자극해야 할 정치적 필요성이 존재했다.


이런 상황에서 정주영은 사회에서 수영을 배우듯이 사업 수완을 익혀갔다. 수영은 글이나 말로 배우는 것이 아니라 물에 들어가 허우적거리면서 몸으로 배운다. 기업가는 학자와 달리 매일 현장에서 의사 결정을 해야 하는 ‘현장의 인간’이다. 기업가의 의사 결정은 교과서적 지식이 아니라 명시적 언어로 표현할 수 없는, 몸소 체득한 암묵지(tacit knowing)에서 나온다.


기업가의 성공은 암묵지에 의존한다. ‘암묵적 지식’은 글이나 말로 표현할 수 있는 ‘명시적 지식’(explicit knowing)과는 다른 몸으로 아는 지식이다. 이것은 베르그송이 말한 직관(본능지)과 유사하다. 기업가들의 의사 결정을 주도하는 시장적 사고는 기예(技藝)의 수련과 같은 암묵지의 결정체이다.


정주영은 이러한 ‘암묵적 지식’을 자신의 몸속에 쌓아갔다. 그는 무엇이나 경험하면 그것을 자신의 지식으로 전환하여 몸속에 축적하였다. 정주영은 이러한 자신의 능력을 모르고 자신을 ‘불도저’라고 불렀던 세사에 대해 불만을 표현하기도 하였다5). 자신은 단순히 일에 대한 추진력만 가지고 매사를 밀어붙였던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정주영은 자신을 ‘불도저’라고 부른 사람들은 “학교 공부도 거의 없는 못 배운 사람이 무슨 일에든 덮어놓고 덤벼들어 곧장 땅 파고 기둥 박는 식으로 밀어붙이는 것처럼” 자신을 평가하여 이런 이름을 붙였다고 해석하였다.


그러나 정주영은 자신을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자신이 학식이 없는 사람임은 분명하지만, 생각도 머리도 지혜도 없는 사람은 아니라는 것이다. 한 인간이 가진 자질과 능력을 학교에서 배운 학식으로만 평가해서는 안 된다고 주장한다. 곧 명시적 지식으로만 평가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그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나는 어떤 일에도 결코 덮어놓고 덤벼든 적이 없다. 학식은 없지만 그 대신 남보다 더 열심히 생각하는 머리가 있고, 남보다 치밀한 계산 능력이 있으며, 남보다 적극적인 모험심과 용기와 신념이 나에게 있다. 어떤 일의 시작 전에 내가 나 혼자 얼마나 열심히 생각하고 분석하고 계획하는가를 모르는 이들에게는 내가 하는 모든 일이 전부 다 무계획적이고 무모한 것으로 보였겠지만, 무계획과 무모함으로 어떻게 오늘의 ‘현대그룹’이 존재할 수 있었겠는가.”


   
▲ 2015년 11월 18일 저녁 서울 서초구 예술의전당 콘서트홀에서 열린 고 정주영 탄생 100주년 기념음악회에서 한 관객이 고 정주영 회장의 사진 앞을 지나고 있다./사진=연합뉴스


정주영이 가진 기업가 정신의 원동력은 ‘명시적 지식’이 아니라 ‘암묵적 지식’이었다. 그는 엄청난 물량을 바지선에 실어 울산에서 주베일까지 해양으로 수송하였다. 정주영은, 상식 안에만 갇혀 생각하는 사람들은 이런 일을 무지의 소치에서 나온 황당한 일이라고 평가하였지만 그것은 모험을 감행하는 자신의 스타일에서 나온 것이라고 항변한다. 


정주영은 상식에 얽매이고 고정관념에 갇힌 사람에게서는 창의력이 나올 수 없다고 주장한다. 정주영은 자신이 믿은 것은 “‘하고자 하는 굳센 의지’를 가졌을 때 발휘되는 인간의 무한한 잠재적 능력과 창의성, 그리고 뜻을 모았을 때 분출되는 우리 민족의 엄청난 에너지”뿐이라고 말한다.


정주영은 ‘공기(工期) 단축’과 관련하여 고정관념에 사로잡힌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 돈과 시간을 낭비하는가에 대해 통탄한다. 그가 든 예는 주베일 산업항 건설 공사장에서 일어난 일이다. 그때 현대는 방파제와 호안 공사에 쓰는 스타비트 16만 개를 만들어야 했다. 하루 200개씩 16만 개를 만들려면 8백 일이 필요했다. 정주영은 현장 출동을 통해 믹서 트럭이 콘크리트를 직접 스타비트 거푸집에 쏟아 붓지 않고 크레인 버킷으로 일일이 퍼 넣고 있는 것을 발견했다. 왜 직접 믹서 트럭에서 쏟아 붓지 않느냐고 물었더니 믹서 트럭 콘크리트 출구와 스타비트 거푸집 높이가 맞지 않기 때문이라는 대답이 돌아왔다. 


이런 대답을 듣고 정주영은 화가 폭발했다. 믹서 트럭 콘크리트 출구 높이를 스타비트 거푸집 높이로 개조하면 간단히 해결되는 것을, 아무 생각 없이 복잡한 공정을 거치고 있었던 것이다. “생각하기 위해 존재하는 머리를 쓰지 않고 내버려둔 현실”이 한심했다고 말한다. 그렇게밖에 할 수 없었던 이유는 아무 생각 없이 믹서 트럭은 완제품이라는 고정 관념의 포로가 되어 감히 그것을 개조할 생각을 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믹서 트럭을 개조하자 하루 200개의 스타비트 생산량이 350개로 늘어났다.


정주영은 간단한 사고 전환으로 비용과 시간을 절약하여 공기를 단축하였다. 정주영은 이런 사례를 여럿 제시하였다. 이런 사례를 두고 그는 “고정 관념에 노예가 되어 있으면 순간순간 적응력이 우둔해질 수밖에 없다. 교과서적인 사고방식이 곧 고정 관념이며 그것이 우리를 바보로 만드는 함정이다.”라고 말했다. 정주영이 고정 관념을 깨고 새로운 방식으로 사고를 전환할 수 있었던 원동력은 그가 몸으로 익힌 암묵적 지식과 장애를 돌파하려는 의지였다고 할 수 있다. 


그는 “나는 내 ‘불도저’에 생각하고 계산하고 예측하는, 성능이 그다지 나쁘지 않은 머리라는 것을 달고 남보다 훨씬 더 많이, 더 열심히 생각하고, 궁리하고, 노력하면서 밀어붙였다.”라고 술회했다. 그의 이러한 능력은 끊임없이 현장에서 생각하고, 배우고, 문제를 해결해 온 ‘암묵적 지식’에서 나온 것이다. ‘암묵적 지식’은 머리가 아니라 몸에 저장되는 지식이고, ‘해봐야’ 생기는 지식이다. ‘해 봤어’는 바로 암묵적 지식과 몸으로 획득한 직관에 대한 신뢰에서  나온 것이다.


   
▲ 서산 천수만 간척지 사업은 정주영공법으로 시행된 최초의 공사로 공사기간은 3년이 줄었고 약 290억원의 비용이 절감됐다./사진=아산 정주영닷컴


이런 맥락에서 정주영은 우리의 경제 성장을 ‘한강의 기적’이라고 표현한 것을 달리 해석한다. 그는 정치와 경제에는 기적이 없다고 믿는다. 종교에는 기적이 있을 수 있지만, 정치와 경제에는 기적이 없다는 것이다. 경제학자들이 기적이라고 하는 것은 경제학 이론으로, 수치로 계량화할 수 없는 것을 인간의 정신이 실현한 것에 대한 궁색한 변명일 뿐이라는 것이다. 우리는 이론적으로나 학문적으로 불가능한 것을 해냈는데 이것은 우리 국민들의 진취적인 기상과 개척정신, 열정적인 노력의 결과일 뿐이라는 것이다. 


그동안 우리가 이룩한 경제적 성취는 모두 정신의 힘의 산물이라는 것이 정주영의 믿음이다. ‘한강의 기적’은 신념, 진취적 정신, 한계에 대한 도전, 불굴의 노력의 결과라고 단언한다. 그는 자신에 대해 다음과 같이 기술한다.6) 


“나는 나에게 주어진 잠재력을 열심히 활용해서 가능성을 가능으로 이루었던 것이지 결코 특별한 사람이 아니다. 단 누구에게든 무엇이든, 필요한 것은 모두 다 배워 내 것으로 만든다는 적극적인 생각, 진취적인 자세로 작은 경험을 확대해 큰 현실로 만들어 내는 것에 평생 주저해 본 일이 없을 뿐이다. 목표에 대한 신념이 투철하고 이에 상응한 노력만 쏟아 부으면 누구라도 무슨 일이든 할 수 있다. 누구라도 다 할 수 있다.”


그리고 정주영은 자신을 ‘세계 수준의 경영자’라는 평가에 대해 “나 자신은 나를 자본가로 생각해 본 적이 없다. 나는 그저 꽤 부유한 노동자일 뿐이며, 노동으로 재화를 생산해 내는 사람일 뿐이다.”7)라고 말함으로써 자신의 정체성을 스스로 규정하였다. 


정주영은 한국을 가난에서 탈출하여 중진국의 반열에 올려놓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지만 ‘명시적 지식’으로 머릿속을 가득 채운 지식인을 신뢰하지 않았다. 정주영은 필요하면 지식인과 학자들의 도움을 받기는 하였지만 그들의 합리적 정신의 위력을 믿지 않았다. 학자의 합리적 정신이라는 것은 기존의 지식을 토대로, 기존의 성공 사례를 근거로 삼아 정책이나 사업의 미래 타당성을 판단하고 평가하기 때문에 새로운 세계를 열어가는 통찰력과 추진력은 약하다. 이미 있는 길을 설명하고 그 길을 확장하는 데는 도움이 되지만, 길이 없는 곳에 길을 열어가는 데는 취약하다. 기업가나 정치가의 성공은 길이 없는 허공을 향해 과감하게 한 발을 내딛는 도전과 창의에 기초하기 때문이다. 


   
▲ 1971년 정주영 회장은 황량한 바닷가에 소나무 몇 그루와 초가 몇 채가 선 초라한 백사장을 찍은 사진 한 장 달랑 들고 일본으로, 영국으로 배를 수주하러 돌아다녔다. 그로부터 현대중공업의 신화가 시작됐다. 사진은 현대그룹 故정주영 회장(1915~2001)./사진=현대그룹 홈페이지


‘정치노동자’로의 꿈 


“이봐 해봤어”에 투절한 정주영은 학자들뿐만 아니라 정치가와 정치에도 환멸을 느꼈다.8) 그의 정치에 대한 환멸은 6.25 전쟁 중에 시작되었다. 어느 날 그는 ‘정치가들을 만나면 무슨 신통한 새 소식이라도 들을 수 있겠지.’하고 민주당 사무실에 들렀다. 사무실에서 그는 놀라운 광경을 목도하였다. 전쟁터에서 하루에도 무수히 많은 젊은이들이 쓰러져가고 있는데, 정치를 한다는 사람들은 웃통을 벗고 맥주를 마시며 바둑을 두고 있었다고 한다. 이 광경을 보는 순간 그는 “피가 거꾸로 도는 것 같았다.”고 하였다. 정치인들에 대한 불신과 환멸이 시작된 것이다.


그가 정치에 대한 환멸과 불신을 표시한 이유는 정치가 기업가들이 체득한 ‘현장지’ 곧 암묵적 지식을 자유롭게 사용하는 것을 방해하기 때문이다. 정치가 경제 활동에 개입하면 기업가들의 사업 의욕은 감퇴한다. 정치가들은 아담 스미스의 다음과 같은 말을 신뢰하지 않아 기업가들과 갈등을 유발한다.


각 개인은 그가 가용할 수 있는 자본을 가장 유리한 방법으로 사용하려고 힘쓴다. 그의 관심사는 사실 자기 자신의 이익이지 사회의 이익이 아니다. 그러나 자기 자신의 이익을 추구하는 것이 자연스럽게 또는 오히려 필연적으로 그로 하여금 (사회에 유익한) 투자를 선호하게 한다.9)


자기의 자본을 국내 산업의 어떤 분야에 투자하면 좋은가, 그리고 가장 큰 가치를 가진 생산물을 생산하는 산업분야는 무엇인가에 대해, 각 개인은 자신의 지역적 상황에서 어떠한 정치가나 입법자보다 훨씬 더 잘 판단할 수 있다는 것은 명백하다. 민간인들에게 그들의 자본을 어떻게 사용하라고 지시하려는 정치가는 스스로 불필요한 수고를 부담할 뿐 아니라 〔어떤 한 개인에게는 물론 위원회나 상원에게도 완전히 위임할 수 없는 권력을, 또 어리석게도 자신만이 이와 같은 권력을 행사하기에 가장 적합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의 수중에 있을 때 가장 위험스러운〕 권력을 자신이 인수하려고 하는 것이다.10)

 

그렇다고 정주영이 한국의 모든 정치가를 불신한 것은 아니다. 그는 박정희 대통령을 높이 평가했다. 정주영은 포항제철과 관련하여 박정희를 언급하였다. 정주영은 포항제철은 통치권자의 진취적인 사고와 확고한 신념의 소산으로 평가한다. 포항제철이 있었기 때문에 싼 값으로 철을 공급받아 조선도 자동차도 세계적인 경쟁력을 갖게 되었다는 것이다. 포항제철을 시작할 때 선진국은 세계의 철 생산량이 과잉이라며 반대하였지만, 통치권자의 신념으로 훌륭하게 성공해서 세계 제철 공업의 표본이 되었다고 평가한다.11)


정주영은 1979년 박정희가 서거했을 때 그때의 마음을 다음과 같이 피력했다.


“충격이 컸다. 피차 가난한 농사꾼의 아들로 태어나 우리 후손들에게 절대로 가난을 물려주지 말자는 염원과 무슨 일이든 ‘하면 된다’는 소신으로 공통점이 있었던 그 분과 나 사이에는 말로 표현하지 않으면서도 서로 인정하고 신뢰하는 부분이 많았다. 개인적으로 혜택을 받은 것은 없으나 나는 현대의 성장 자체를, 경제 발전에 역점을 두고 강력하게 추진한 박정희 대통령의 덕분으로 생각한다. 우리의 경제를 이 정도까지 끌어올린 것은 누가 무슨 말을 하든 그분의 업적이며 그 업적에 경의를 표하지 않을 수 없다.”12)


정주영은 박정희와 자신의 공통점을 진취적 사고, 확고한 신념, 염원, ‘하면 된다’는 정신에서 찾는다. 이런 정신을 가지고 자신은 경제 부분에서, 박정희는 정치 부분에서 한국을 발전시켰다고 믿는다. 정주영과 박정희는 서로가 서로를 인정함으로써 상호 굳건한 신뢰 관계를 유지하였다.


   
▲ 대한민국 건국이후 최대의 외화를 벌어들인 사우디아라비아 주베일 산업항 공사현장. 사진은 현장을 방문한 (사진왼쪽) 아산 정주영 명예회장./사진=아산정주영닷컴


정주영은 박정희 대통령의 서거와 함께 등장한 전두환의 ‘국보위 시대’에 대해 대단히 부정적인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국보위 시대를 “새로운 권력에 편승해서 손쉽게 커보려는 기업이 천방지축으로 날뛰었던 경제계의 혼란한 시대였고, 건실하고 진실한 기업에게는 암흑의 시대였다.”고 회고하였다.13)


이때 정주영은 ‘경제안정화종합시책’에 의해 현대중공업, 현대양행, 대우중공업, 삼성중공업으로 4원화되어 있던 발전 설비 분야를 통폐합하는 과정에서 현대를 잃게 된다. 자동차와 발전설비를 ‘현대’의 주력 산업으로 키우고 있던 현대가 졸지에 한 축을 잃은 것이다. 정주영은 국보위의 결정에 대해 끝까지 반대했지만 결국 그 뜻을 이루지는 못했다. 정주영은 국보위 사람들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다.


“나는 어떤 사업이든 땅을 준비하는 데서부터, 말뚝을 박고 길 닦아서 그 위에 내 공장을 내가 지어서 시작하지 않은 것이 없다. 또 그렇게 만든 사업체를 어렵다거나 이득이 많이 난다고 해서 누구한테 넘겨본 적도 없는 사람이다. 그렇게 만든 것들은 하나하나 전부가 다 자식이나 마찬가지의 애착과 정성으로 키워서 성공시켰고, 실패한 것은 하나도 없다. 누구처럼 수단을 부려 경쟁 입찰이 아닌 수의 계약으로 남의 기업을 차지한 적도 없다. 그런 식의 기업 경영을 나는 증오한다.”


정주영이 신군부의 ‘중화학 투자 조정’에 대해 반대한 이유는 그가 일관적으로 견지해온 자유경쟁에 대한 철학과 어긋나기 때문이다. 정주영은 자유 경쟁 아래에서는 경쟁력을 상실한 기업은 자연히 도태되기 때문에 ‘과잉이다, 중복이다’가 존재할 수 없기 때문에 ‘인위적 조정’이 불필요하다고 믿는다. 그는 5공화국에서 발생한 창원중공업 공장 강탈을 끝까지 잊지 못했다. 뿐만 아니라 대한체육회 회장, 전국경제인 연합회 회장, 일해 재단을 두고 5공화국과 갈등관계를 유지하였다. 


그렇다고 6공으로 넘어가서 상황이 호전된 것은 아니다. 사회가 혼란스러워지고 성금이라는 명목으로 정치 자금을 요구하였다. 6공에서는 3백억 원의 돈을 바치고도 1990년도에 불공평한 세무 조사를 당한 이후 정주영은 정부와 완전히 등을 돌렸다. 정주영이 정치 헌금을 중단하자 6공은 ‘현대그룹’에 대한 세무 조사로 감정 풀이를 했고, 노대통령은 3최고위원과 회동할 때마다 정주영을 강도 높게 비판했다고 한다. 뿐만 아니라 6공은 경제에 과도하게 개입하여 재계 개편을 시도했을 뿐만 아니라 기업의 자연스러운 확대 재생산 활동까지도 제약했다. 


정주영은 5공과 6공을 거치면서 자신의 ‘자존감’이 철저하게 짓밟혔다고 생각했다. 박정희는 정주영을 인정했지만 이들은 그를 인정하지 않았다. 이때가  바로 정주영이 ‘열패감과 모욕감을 이를 악물고 견뎌내야 했던’14) 시기이다. 정주영은 ‘인정에의 욕구(티모스)’가 충족되지 않아 분노한 것이다. 정주영은 자신의 ‘암묵적 지식’을 부정하고 잘못된 명시적 지식으로 기업의 구조를 조정하려고 한 신군부의 오만에 절망하고 분노하고 자괴감을 느꼈다. 그러나 진정으로 ‘티모스’를 가진 사람은 역경에 굴복하지 않는다.


정주영은 5ㆍ6공을 거치면서 새로운 결심을 한다. 그는 직접 정치에 참여하여 정치권의 경제 개입을 단절하기로 마음먹은 것이다. 정주영은 “나는 새롭게 도전할 새 일감으로 정치 참여를 결심했다. 기업 경영이나 국가 경영이나 경영이기는 마찬가지다. 나한테 기회만 주어진다면 5년 동안 나라를 위해서 반드시 해결해야만 할 모든 일을 깨끗이 해결할 자신이 있었다.”


   
▲ 아시아 2번째, 세계적으로 16번째로 독자 자동차 모델 생산국에 이름을 올린 포니 개발성공이후 1985년 첫 전륜구동 자동차인 포니엑셀의 신차발표회장에 참석한 아산 정주영 명예회장./사진=아산정주영닷컴


Stay Foolish


드디어 정주영은 1992년 1월 1일 새해 차례를 지내기 위해 모인 가족들에게 정치 참여를 통고했다. 단 한 사람도 동의하는 사람이 없었다. 하던 기업이나 계속하지 늦게 시궁창 같은 정치판에는 왜 뛰어들려고 하느냐고 만류했다. 이에 대해 정주영은 “경제만 잘 되고 있다면 누가 정치판에 끌어들이려고 해도 끌려 들어갈 내가 아니었다.”15)라고 하며, 정치 참여의 명분을 ‘경제’에서 찾았다.


정주영의 아우들은 정주영이 만에 하나 실패했을 때 ‘현대’가 감수해야 할 불이익을 두려워했다. 그것은 우리 정치 수준으로 볼 때 당연한 두려움이었다고 생각하면서 정주영은 그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옛날에 짚신 한 켤레 신고 맨몸으로 고향을 떠난 사람인데, 우리가 망한다고 해도 구두는 신고 살 수 있을 것이다. 나라 꼴이 이 모양인데 그냥 앉아서 정치 욕이나 하며 내 안전만 도모하는 것이 소위 사회 지도층이라는 사람들이 할 일이냐? 시궁창을 시궁창인 채로 내버려두면 언제까지나 시궁창일 수밖에 없다. 누군가 소매를 걷어붙이고 나서서 청소할 사람이 필요하고, 그걸 내가 해보겠다는 것이다. 우거짓국 먹고 살 각오를 해둬라. 죽으면 맨몸으로 가는 게 인생인데 망한다고 해도 아까울 것이 없다.”


정주영은 1992년 1월 10일 창당준비위원회를 결성하고 통일국민당을 출범시켰다. 3월 24일 총선에서 국민당은 31석을 차지하였다. 그리고 5월 15일 임시전당대회에서 대통령 후보로 선출되었다. 많은 사람들은 정주영의 정치 참여 결심을 돌출 행위로 치부하거나 과욕 또는 노망으로까지 매도했다.  우리나라의 경제 발전에 누구보다 큰 기여를 했다고 자부해온 정주영은 나라의 경제 기틀이 흔들리고 민족 번영의 길이 암담해지고 있는 상황을 그대로 둘 수 없어 자신이 나섰다는 것을 알아주는 사람이 없는 것을 안타까워했다.


1970년대 초 조선 사업, 올림픽 유치에 대해 많은 사람들이 성공할 수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정주영은 성공했다. 자신의 평생은 불가능에의 도전, 그것을 가능으로 뒤집은 기록의 점철이라고 믿었던 정주영은 정치 개혁도 선진 경제도 통일 한국도 자신이 있었지만 국민은 그를 선택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자신이 실패한 것이 아니라 자신을 선택하지 않은 국민이 실패한 것이고, 국민의 선택을 받은 YS가 실패한 것이라고 믿었다. 그는 끝까지 ‘Stay Foolish’한 것이다.


   
▲ 서울올림픽 유치가 확정되던 순간, 정주영 회장이 함께 노력해온 이들과 모두 함께 기뻐하고 있는 모습이다./사진=아산정주영닷컴


젊은이들에게 희망을


정주영은 가난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나 끊임없는 도전과 노력으로 현대라는 거대한 기업을 일으키고, 한국의 산업화에 기여함으로써 우리 국민이 가난에서 해방되는 데 결정적인 공헌을 했다. 이러한 정주영의 일생을 지배한 가치는 모든 인간은 ‘자신이 바로 자기 인생의 주권자’라는 자유주의 철학이다. 그는 자신의 믿음을 이렇게 말했다.


“인간은 다 비슷한 조건에서 출발한다고 생각한다. 그런데도 어떤 이는 잘 되고 어떤 이는 잘  안 되기도 하는데, 대개의 사람들은 비슷한 출발에서, 과정의 능력과 노력에 차이가 있었다는 것은 생각하지 않고, 결과의 불균형에 대해서만 불평을 품는다. 자유 기업 사회에서 그 불균형은 정부도, 제삼자 누구도 해결할 수가 없다. …… 더구나 개개인의 자유가 구속되고 타의에 의해 직업이 주어지고, 사는 곳이 고정되어 있는 그 사회에서 사는 것만큼 큰 불행은 없다. 때문에 다소 불균형이 문제가 되더라도 기본적인 자유가 보장된 민주주의 체제가 나는 이 지구상에서 가장 좋은 제도라고 생각한다.”16)


“막노동에서 풍전 엿 공장으로 고정된 직장을 잡게 된 것이 한걸음 나아가 발전이었고, 엿 공장에서 쌀가게로 직장을 옮긴 것이 또 한걸음 발전이었다. 엿 공장에 취직이 되었을 때에도 기뻤지만 쌀가게에 들어갔을 때 정말 행복했다. 전차삯 5전을 아끼느라 구두에 징을 박아 신고 출퇴근하면서도 신이 났고, 생활이 조금 나아져 5전짜리 음식 대신 10전짜리 음식을 먹을 수 있게 됐을 때의 흐뭇함도 아직 기억한다.”17)


“어떤 환경에서 태어나 어떤 위치에서 무슨 일을 하고 있든지, 최선을 다해 자기한테 맡겨진 일을 전심전력으로 이루어내며 현재를 충실히 살 줄 아는 사람은 우선 행복한 사람이다.


현재에 충실하면서 자신의 보다 나은 미래에 대한 꿈을 꾸므로 언제나 일하는 것이 즐겁고 작은 일에도 행복하게 생각할 줄 아는 사람은 누구든 나름대로 성공을 거둘 것이다. 그런 사람이 인생을 잘 사는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중급 기술자든 고급 기술자들, 중국집 배달원이든, 학생이든, 관리든 마찬가지다.


우리는 성장하면서 사회를 알고 배우고 체득해가면서 자기 형성을 하는데, 사물을 보는 관점이나 사고의 방향, 마음 자세에 따라서 일생이 크게 달라진다.”18)


정주영의 이러한 인생철학은 ‘수저계급론’과 ‘사회책임론’이 팽배한 우리 사회에서 젊은이들에게 용기와 희망을 줄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정주영 따라 하기로 정주영과 같은 인간이 될 수는 없다. 모든 인생은 고유하고 일회적이다. 인생은 따라 하기가 아니라 스스로 적응하고 창조하는 과정이다. 영웅 따라 하기로 영웅이 될 수는 없다. /신중섭 강원대 윤리교육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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