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도] 전통주의 혁신…국순당 설립자 배상면의 성공DNA

자유경제원 / 2016-04-03 / 조회: 6,405       미디어펜
 
▲ 김인영 한림대 정치행정학과 교수

전통주를 재현·혁신하여 성공하다, 국순당 배상면


1. 배상면의 성장과 국순당의 설립


국순당 설립자 배상면은 1924년 대구에서 태어났다.1) 어릴 때부터 허약했던 체질로  병치레를 자주했고 그 때문에 중학교 입시 3수에도 실패했다. 한국에서 입시를 치르기 어려워 일본에 가서 무시험으로 중학교에 입학하였다. 이후 마음을 잡고 공부에 정진하였으나 다시 결핵성 늑막염을 앓게 되어 고등학교 진학도 못하고 해방과 더불어 귀국했다.


배상면이 양조업에 발을 들인 계기는 1948년 대구농업전문학교(현 경북대학교 전신) 농예화학과에 입학한 것에서 찾을 수 있다. 배상면은 농업에는 뜻을 두지 않았고, 젓산균 배양 실험에 관심을 두었다. 균 배양을 매우 좋아하고 재미있어 했다. 친구들과 학교 서클인 '미생물반’을 조직하여 종국(種麴) 제조 실험을 했다. 대학시절 젖산균 제조에 도전하여 성공하였고, 대구 소재 청주 양조장 실습 도중 술통에 빠져 죽을 위기를 맞기도 했지만 주조 기술을 배우는 계기가 되었다.


6·25 전쟁이 끝나면서 제대하고 할 일이 없던 때 1952년 군대 시절 숙부에게 돈을 빌려 사두었던 기린주조장이 양조장 경영의 시작이다. 시작부터 '직접’ 양조를 시작하여 기린소주를 개발하였다. 기린소주는 당시 대성공을 하였지만 위스키 향 합성 브랜디라는 새로운 제품을 시도, 판매하여 실패했다. 합성한 브랜디의 향이 시간이 지나감에 따라 이상하게 변하는 등 품질이 문제가 되었다. 


완성도가 낮은 새로운 시도만으로 제품을 만들어 출시하였기에 실패할 수밖에 없었다. 위스키 브랜디에서 실패한 후 오미자(五味子), 육계(肉桂), 용안육(龍眼肉), 건강(乾薑) 등 한약재와 구연산(枸櫞酸), 전화당(轉化糖)을 섞어 만든 합성 매실주를 만들어 성공하였다. 하지만 합성 매실주 대신 진짜 매실주를 만들어 팔기 시작하였고 그 과정에서 저도수 싼 매실주와 가격 경쟁을 하다가 재고 과다와 매실 대량 구입으로 발생한 재정 압박으로 망하게 되고 양조사업을 접게 된다. 


이후 양조보다는 술과 누룩을 연구하는 것으로 생업(生業)을 삼았다.2) 1967년 순천에서 누룩공장을 인수하여 누룩 배양 사업을 시작하였다. 1970년에는 순천공장에 한국미생물공업연구소를 설립하여 누룩 연구에 전념하였다.


이후 누룩 제조를 넘어 다시 양조업, 즉 전통주(민족주) 개발에 몰두하였다. 세계에 내놓을만한 '민족주’를 만들어 보자는 신념으로 과거 우리 술 제조법 재현에 도전하였다. 오랜 수많은 시도 끝에 1982년 과거 선조들이 만들었던 '생쌀발효법’에 의한 전통술 제조방법을 재현하는데 성공하였고 바로 전통술 제조특허를 취득하였다. 전통주 제조 판매를 위하여 1983년 배한산업(배상면-처 한상은, 국순당(麴醇堂)3)의 전신)을 창립하였다. 1991년에는 백세주를 출시하여 민족주 시장을 석권하였다.(아래 그림 참조) 조선시대의 민족주인 '백하주(白霞酒)’ 제조방법을 연구하던 끝에 '생쌀발효법’을 재현하게 되었고,4) 풍미가 담긴 백세주(百歲酒)를 만들게 되었던 것이다.


   
▲ 사진은 백세주./사진=국순당 홈페이지, 자유경제원 한국의기업가 게시판


백세주의 성공은 문헌으로 남아 있지 않은 전통주 제조법을 수많은 실험으로 재현하여 맛있는 술을 만든 노력에 더하여 한방 약재 11가지를 추가하여 맛있는 술에 건강을 더한 약술(약주, 藥酒)을 만들어낸 창조적 혁신의 결과이다. 배상면은 본래 술을 잘 못 마시는데도 수없는 시음으로 강(江) 하나 정도 분량의 술을 마시게 되었다고 한다. 그리고 매일 같이 추운 실험실에서 누룩을 만들고 술 제조 과정을 지키느라 감기를 달고 산 인생이었다고 한다. 결국 백세주는 수많은 실패와 좌절을 극복하는 과정에서 만들어질 수밖에 없는 '성공’이었다라고 평가할 수 있다.  


2. 도전, 실패, 좌절, 재도전, 실패, 좌절, 다시 시작을 반복하여 성공한 백세주


백세주라는 전통주를 시작하게 된 계기는 술을 연구하는 사람으로 한국을 대표하는 전통 민족주가 없는 현실에 자괴감이 들었기 때문이다. 특히 1986년 아시안 게임과 1988년 하계올림픽에서 세계인들에게 내놓을만한 술이 없다는 자각이 부끄러움으로 작용했다. 중국에는 마오타이, 프랑스에는 코냑, 일본에는 청주처럼 나라를 대표하는 술이 있는데 우리나라는 일제 식민지 이후 전통주 제조가 거의 사라져 버린 상황이었다. 


나라를 대표하는 술을 만들고 말겠다는 의지와 집념이 작용했다고 배상면 본인도 술회하고 있다.5) 개인적인 계기로는 술을 잘 마시지 못하는 배상면이 당시 팔리던 약주를 마시고 머리가 깨질듯이 아프거나 맛이 좋지 않아 다시는 약주를 마시지 않아야겠다는 다짐을 하게 되었고 동시에 맛있는 약주를 만들어야 되겠다는 생각을 하게 된 점도 작용했다. 


하지만 과거부터 술을 만드는 사람에 대해 '술장이’로 천시하면서 술제조를 천업(賤業)으로 여겼으며 그로 인해 술제조 관련 기록이 체계적으로 되어 있지 않았다. 일부 종가집을 중심으로 가문의 술 제조방법이 구전(口傳)되어 올 뿐이지 다양한 술제조법이 체계적이고 구체적으로 기록되어 문헌으로 남아있지 않았다.


한국을 대표하는 전통주가 없다는 자괴감에 더하여 당시 전국의 유수한 탁주회사들이 배한산업이 제공하는 누룩으로 막걸리를 만들어 맛이 평준화 되어 막걸리에 대한 수요가 점차 감소하기에 누룩에 대한 수요가 떨어져 누룩제조업의 미래 전망이 어두워진 현실도 전통주 개발의 이유가 될 것이다.


배상면 국순당 설립자가 한약재를 첨가한 술을 만들기 시작한 것이 1953년이고, 백세주 공장 제조에 성공한 것이 1993년 전후로 본다면 전통주 만드는데 40년이 걸린 것이었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누룩의 제조와 전통주의 제조 및 판매는 다른 차원의 사업이었다. 전통주 백세주의 성공 요인을 몇 가지로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 사회의 변화된 음주 패러다임에 맞춘 제품을 출시하였다. 저도수, 여성 음주, 몸에 좋은 술에 대한 요구를 파악하고 이 모든 것을 하나로 어우러지는 술을 생산하여 사회 수요에 맞춘 것이 성공의 핵심 요인이라고 할 수 있다. 당시는 1987년 민주화 이후 사회가 안정되면서 “사회를 원망하면서 소주를 취할 때까지 마시는 분위기”가 가라앉고 88 올림픽 이후 1990년대 중반에는 소득 증가에 따라 낮은 도수의 고급주를 선호하는 분위기가 자리잡고 있었다. 바뀌고 있는 술 문화의 흐름을 탔던 것이 바로 '몸에 좋다’라는 이미지를 가진 13도 백세주였다. 음주 패러다임의 변화를 파악하고 당시 소주업체들도 알콜도수를 낮추기 시작했지만 '몸에 나쁜 술’의 이미지를 벗어나지 못했다.


'마시고 나서 머리가 아프지 않는’ '건강에 좋은’이라는 틈새 자리를 메우고자 백세주는 12가지 한약 성분을 추가한 '몸에 좋은 약주’의 이미지를 시작부터 강하게 어필하였고 적극 홍보하는 전략을 채택하였다. 창업자 배상면 스스로 “한마디로 시대의 흐름을 미리 예측하고 만들어낸 백세주는 물을 만난 고기처럼 시장 기반을 확대해 나갔다.”고 회고했다.


둘째, 자신의 노력과 기술로 맛있는 전통주 만들기에 성공하였다. 배상면은 1967년 누룩 공장을 시작하였고, 1970년에는 '미생물공업연구소’를 설립하여 누룩을 연구하고 제조하였다. 당시 업계 최고의 누룩을 만드는 기술을 가지고 있었다. 이를 바탕으로 1973년부터는 탁·약주 연구소를 설립하여 전통주를 만들어 보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깨끗하고 풍미(風味) 있는 전통주(약주)를 만드는 뚜렷한 방법을 몇 년간 찾지 못하였다. 그러다가 1977년 유태종 박사가 쓴 『한국의 명주』에 간략하게 설명된 '백하주(白霞酒)’ 제조법을 따라하게 되었다.


'백하주’ 제조에 사용된 '생쌀 발효법’은 당시 주류제조업계에는 전혀 알려지지 않은 방법이었고 전혀 듣도 보도 못한 새로운 방법이었다. 생쌀 발효법은 쌀을 찌지 않고 생쌀 가루를 발효시켜 술을 빚는 방법으로 쌀을 찌지 않기 때문에 에너지를 절감하고, 술의 풍미를 가져오고, 쌀의 영양분이 보존되는 장점을 가졌다. 스스로도 못 믿는 방법이었지만 해보고 또 해보고 스스로 깨우쳐 방법을 찾게 된다. 본인은 “구도자와 같은 마음으로 백하주 재현에 노력했다”고 훗날 회고했다. 누룩의 문제도 수많은 실험으로 누룩의 효능을 결정하는 균이 거미줄곰팡이(리조푸스, Rhizopus)라는 사실을 알아내고 고소한 맛을 찾게 되었다. 술 하나를 만들기 위해 5년을 연구하였던 것이다.


백하주 제조법의 성공으로 1983년에는 배한산업을 설립하여 본격적으로 전통주 사업에 뛰어들어 전력을 집중했다. 이어서 1987년에는 강릉약주공장을 인수하여 대량생산 준비를 하였다. IMF 기간에도 우리 것에 대한 재인식 풍조가 고조되어 백세주는 날개 돋친 듯 팔렸다. '이만한 전통주가 있는 게 자랑스럽다“는 세간의 인식과 반응이 심어졌기 때문이었다. 이는 국순당에게도 ”고객에게 우수한 제품으로 신뢰감“을 주어야 성공할 것이고 그렇지 않으면 외면당할 것이라는 인식을 심어주게 되었다.6)


셋째, 광고 마케팅의 성공이다. 특히 음주 문화의 고급화라는 시대의 흐름을 반영한 광고 포스터가 크게 히트하였다. 젊은 청년이 늙은 노인을 회초리로 때리는 장면과 그 옆에 시동 하나를 데리고 말을 타고 가는 선비가 그려진 포스터인데 '백세주 이야기’라는 설명을 넣었다. '백세주 이야기’는 선비가 “너는 어린 것이 어찌 노인을 때리는가?”라고 꾸짖자 늙은 노인을 때린 청년이 대답하기를 “이 아이는 내가 여든 살에 본 자식인데 그 술을 먹지 않아서 나보다 먼저 늙었소.”라는 설명이 있었다. 마지막은 “그 술은 구기자와 여러 약초가 들어간 구기 백세주라 하였다.”였다.(아래 그림 참고)


백세주 매출이 급격히 늘어난 것은 1997년부터 인데 술의 비수기인 여름에 “백세주, 보신탕에 적격인 여름철의 건강주!”라고 한 캐치프레이즈가 동물단체의 항의와 “국순당 개고기집 납품 금지청원 서명운동”으로 비난의 표적이 되기는 하였지만 노이즈 마케팅과 백세주가 고단백 성분의 강장 음식인 보신탕에 잘 어울린다는 상식을 소비자들에게 심어 주어 대 히트를 치게 되었다.(아래 그림 참고)


   
▲ [좌] 백세주 선비광고 [우] 백세주-보신탕 광고./사진=자유경제원 한국의기업가 게시판

 

백세주가 날개 돋친 듯이 팔리면서 백세주와 소주를 1대 1로 섞은 '오십세주’가 유행하게 되었다. 이러한 '오십세주’ 만들어 먹기 유행은 “백세주 성공의 중추적인 역할”을 했다.7) 유행을 타는 것은 운(運)일 수도 있으나, 이 역시 마케팅의 성공이었다.


넷째, 정부 규제를 정공법으로 풀었다. 백세주를 대량으로 만들어 팔고자 했으나 “시(市)·도(道) 단위로 되어 있는 약주 공급 구역 조항” 규제에 막혀 면허받은 지역 이외의 지역에서는 팔 수 없는 상황이었다.8) 이를 극복하고자 배상면은 1990년 재무부에 민족주 개발 및 발전을 저해하는 규제 조항들을 철폐해 달라는 건의서를 제출하였다. 즉 전국을 단일 시장으로 해달라는 건의서를 제출하고 국회에 법률 개정안이 제출되었으나 탁주업계의 반발로 국회 재무위원회에 상정되지도 못하고 폐기되어 버렸다. 약주의 공급 제한이 풀리면 이어서 탁주를 개방해야하기에 탁주업계가 국회 로비에 총력을 기울여 반대에 성공한 것이었다. 나아가 1992년에는 또 다른 규제였던 탁주와 양주에 각종 첨가물 금지 조항과 주정도수 제한 규제를 풀기에 성공하였다. 그 이후로 약주류에 생약을 첨가할 수 있게 되었다. 한약 성분 약주, 전통주가 가능하게 된 것이었다.

 

한 때는 판매구역 규제 제한을 풀 수 없어 미국에 양조장을 만들어 제조한 술을 국내에 역수입하는 방법까지 모색하였다. 수입 주류는 법규상 제한 없이 전국에 판매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그러는 중에 1993년 약주 공급 구역 제한이 폐지되었고, 1995년에는 탁주 공급 구역 제한 폐지를 이루어냈다.


하지만 종합주류 도매면허를 가진 사람만이 독점적으로 술을 판매할 수 있었기에 공급은 할 수 있어도 자체적으로 판매할 수가 없었다. 도매상들이 기존 거래처의 압력으로 '국순당’이라는 신생기업의 새로운 술을 팔겠다고 나서지 않은 것이었다. 이 또한 정공법으로 규제 철폐를 시도하여 이후 특정 주류 도매 면허제도가 신설되게 되었지만 그 이전까지는 시음회라는 '게릴라 마케팅’으로 인지도를 높이고 판매를 성공시켰다.


'게릴라 마케팅’이란 백세주를 알리기 위한 전략으로 유원지나 등산로 입구 등 사람이 모이는 곳이라면 가서 즉석 백세주 시음회를 가지고, 원하는 사람에게는 술을 판매하는 방법이었다. 시음회는 대성공이었지만 성공할수록 주류 도매업자들이 시음 장소로 찾아와 행패, 훼방, 물리력 행사를 하였으므로 철통 보안과 신속한 행동으로 (떳다방 스타일!) 추적을 따돌렸다. 이러한 '게릴라 마케팅’에 식당 벽면에 백세주 사진을 넣은 차림표 부착하기, 백세주 광고 메뉴판 증정, 객실 청소, 주방설거지 대행, 신발 정리, 화장실 청소까지 해주는 '맞춤형 마케팅’으로 백세주 알리기에 노력하였다.  


결론적으로 백세주의 성공은 배상면이라는 사업가가 평범 이하, 실수 연발, 지속되는 역경 속에서 좌절하면서 달리 잘하는 것 또는 달리 할 것이 없어 “이것 아니면 안된다”는 절박함으로 누룩 만들기와 술 제조에 전념하였던 결과라고 할 수 있다. 단, 창업자 배상면이 새로운 방식, 새로운 방식으로 술 만드는 실험 정신이 많았던 것이 중요한 장점이 될 것이었다. 술 만드는 실험 역시 한 번에 단기간에 된 것은 없고 적어도 5년 이상의 오랜 실험과 실패, 그리고 규제를 철폐하는 과감하고 공격적인 마케팅 끝에 이루어진 진 것이 '백세주 신화(神話)’라고 하겠다.


배상면의 자서전에는 누룩과 백세주 성공에 이르기까지 겪은 수많은 실패와 좌절의 이야기로 가득하다. 누구나 경험하는 수 있는 평범한 실수들이 대부분이었다. 예를 들어 술 몇 동이의 세금을 적게 내려했다가 세금 폭탄을 맞아 좌절한 일, 큰 도가와 무리하게 가격 경쟁을 하다 져서 무일푼이 된 일 등 인생의 크고 작은 일들로 실패와 좌절을 경험한 뒤 맷집이 생기고 더 큰 도전이 가능했던 사례이다.


한마디로 “이대로 주저앉을 순 없다.”라는 마음으로 다시 일으켜 세운 사업이 전통주 백세주 사업이었다. 따라서 백세주 성공 신화는 신화(神話)가 아니고 필연(必然)에 가깝다고 평가할 수 있다. '누룩장이’, '누룩박사’, '누룩의 대가’, '술 빚는 방법에 밝은 사람’이라는 평가에 필적하는 백세주를 만들었지만, 기존 주조 대기업의 블로킹과 방해에도 그저 제품을 알려 팔고 그리고 궁극적으로 시장에서 살아남기 위하여 남들보다 좀 더 열심히 한 것이 백세주 신화의 본질이라고 하겠다.


3. 백세주, 전과 후(before and after)


첫째, 백세주는 품격 있는 전통주의 등장을 의미한다. 백세주의 등장으로 전통주 없는 시대와 전통주 있는 시대로 나뉜다고 할 수 잇을 것이다. 과거 막걸리나 약주 등 전통주는 고리타분하고 옛날 노인들이나 마시는 것이라는 인식이 자리 잡고 있었는데 백세주의 등장으로 '전통주는 노인술’이라는 등식이 깨졌다. 이는 86 아시안 게임, 88 올림픽을 계기로 우리 것과 전통에 대한 관심이 높아진 탓 때문이기도 하다.

 

둘째, 백세주는 건강주의 술에 개념을 도입하였다. 과거부터 술을 마시고 나면 머리가 아프고 오래도록 깨지 않았다. 잘못 빚은 술을 마신 때문이었다. 그래서 술은 '독’으로 여겼는데, 백세주의 등장으로 술은 '약술’의 개념이 생겨났다. 맛, 건강, 기능성을 함께 갖춘 백세주의 등장으로 마시고도 머리 아픈 일이 없고 갈증이 생기지 않으며 가볍게 깨어나는 고급술이 등장하게 된 것이다.


셋째, 국순당은 백세주의 제조 및 판매를 위하여 “시·도 단위로 되어 있는 약주 공급 구역 조항 규제”를 철폐하였고, “약주, 그리고 탁주와 양주에 각종 첨가물 금지 조항과 주정도수 제한 규제”를 푸는데 성공한다. 나아가 “특정 주류 도매 면허제도가 신설”로 도매상들의 독점권을 허물었다. 술을 한정 지역에만 팔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전국에 팔 수 있게 된 것, 약주에 한약 등 첨가물을 넣어 제조할 수 있게 된 것, 술을 종합주류 도매상만 팔 수 있는 것이 아니라 특정 주류의 제조사가 자신의 매장을 통해 팔수 있게 된 것은 모두 국순당이 백세주를 만들어 팔기 위하여 철폐한 규제와 새로운 면허제도 덕분이다.   


4. 새로운 도전의 시기


국순당은 1998년 주류업계 최초로 벤처기업에 지정되었고, 한 동안 약주시장 점유율 70%를 차지하였다. 하지만 2000년 657억, 2001년 960억, 2002년 1천 4000억, 2003년 1,311억원 매출이 2014년에는 919억원으로 떨어졌다. 전통주에 대한 관심의 저하, 소주의 저도수 트랜드, 과일 소주 열풍, 그리고 소주와의 가격 경쟁 때문에 2014년 백세주 매출은 180억원으로 추락하였다.(아래 표 참조) 지난해에는 막걸리 판매 부진으로 매출이 15.6% 감소하였고, 81억원의 영업 적자를 기록했다.9)


   
▲ 표. 백세주-과일 소주 도수 및 출고가격 비교./자료=자유경제원 한국의기업가 게시판


백세주의 경우 술집에서 8,000~10,000원, 소주는 보통 3,000원을 지불하기에 가격 경쟁력에서 뒤진다. 하지만 이러한 가격 차이는 과거 백세주 출시 때부터 있었던 것이다. 가장 중요한 변화는 소비자가 8,000원을 지급하고 백세주를 마실 이유가 사라져 버린 것이다.


이에 더하여 2015년 5월에는 국순당이 가진 백세주의 백수오 원료에 이엽우피소가 검출된 사건이 발생하였다. '가짜 백수오’ 사건의 여파를 받은 것이다. 국순당은 백세주에는 오미자, 감초 등 12가지의 한방 약재가 들어가기 때문에 극히 미량의 이엽우피소가 들어갔다고 해명하고 전국에서 약100억 원 상당의 백세주를 회수하였다. 환불해간 액수는 100만원을 넘지 않았다고 하지만 건강 백세주에 대한 신뢰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친 것은 사실이다.


이는 “누군가는 전통주를 지킨다”는 국순당의 신념이 흔들릴 수 있는 위기이다. 이러한 위기에 대하여 국순당(사장 배중호)은 “전통주 산업이 쇠퇴한 데에는 소비자 입맛을 따라가지 못한 업체의 책임이 크다”고 밝혔다. 새로운 제품으로 백수오를 빼고 인삼과 오미자 등의 비중을 높여 한방풍미가 강화된 백세주를 출시하여 대응하고 있다. 그 동안 국순당은 젊은 여성층을 대상으로 제품을 다변화하여 알콜도수 4도의 아이싱(월 50만캔)을 판매하였다. 지금도 전통주 백세주에 대한 인식은 계속되어 다보스 포럼 '2016 한국의 밤(2016 Korea Night)’ 행사주로 '백세주’와 '강장백세주’가 채택 되었다.


5. 우리 술로 경쟁하는 2세들과 사회공헌


국순당은 창업자 배상면 생존 시부터 국순당(장남 배중호)과 별도로 배혜정도가(장녀 배혜정), 배상면주가(2남 배영호)가 설립되면서 전통주 분야에서 경쟁하고 있다.(아래 그림 참조)


   
▲ 배상면 회장 가계도10)


배중호 1남은 '국순당’을 맡고, 배혜정 1녀는 '배혜정도가’의 설립으로 건강 기능성 고급 탁주('부자’ 시리즈)를 만들고 있으며, 2남 배영호는 1996년 '배상면주가’를 설립하여 '산사춘’과 '느린마을 (생)막걸리’를 히트시켰다.(아래 그림 참고) 국순당이 젊은 남자 장년층을 대상으로한 '백세주’를 만들고, 배상면주가는 산사나무 중심으로 한약재를 첨가한 젊은 여성을 대상으로 '산사춘’을 만들어 성공하였다. 그리고 최근에는 쌀로 만든 맥주인 'R4’를 출시하였다. 기존 맥주가 보리맥아와 홉으로 만들지만 R4는 홉에 쌀과 누룩을 넣어 발효시킨 라이스 라거로서 세계의 맥주에 대항한 한국 고유의 술(맥주)를 만든다는 생각으로 처음부터 수출을 염두에 둔 것이다.11) 국순당이 '백세주 마을’로 펍(Pub)을 확산해 나가는 대신 배상면주가는 생막걸리를 중심으로 한 '느린마을 양조장 술펍’으로 펍 직영 매장을 확산하고 있다.


   
▲ 배혜정도가의 '부자'와 '탁테일'./사진=배혜정도가 홈페이지,자유경제원 한국의기업가 게시판


   
▲ 배상면주가의 산사춘, 느린마을 막걸리, R4./사진=배상면주가 홈페이지,자유경제원 한국의기업가 게시판


국순당 배상면은 평소 쌀포도주 재배로 농촌에 희망을 주고 싶어 했다. 고구마로 소주 만드는 법, 고추와 마늘로 술 담그는 법 등을 소책자로 알려 농가 소득에 도움이 되거나 지역주로 성장하였으면 하는 바램을 실천에 옮겼다. 작황이 좋아 배가 풍년이었던 2008년 10월 배상면 회장은 풍년으로 가격이 폭락해 들녘에 산더미처럼 쌓여 뒹굴고 있는 배를 뉴스에서 보고 배영호 배상면주가 사장을 불러 배로 술을 빚어 볼 것을 제안했다. 


배영호 사장은 배 100t을 수매해 '맛있는 배로 빚은 술'을 만들어 내놓았다.12) 이러한 술 주조 사업을 통한 지역주민과의 나눔은 특히 배상면주가의 사업에 이어진다. '느린마을 막거리’라는 생막걸리를 지역경제와 연계하는 방법을 만들어 실천하였다. 일본 청주가 지역마다 맛이 다르듯이 또는 와인이 지역마다 특성이 있듯이 지역의 특산물과 연계시켜 지역 막걸리로 소득 증대를 도우려 노력하였다. 이를 위해서 아스파탐을 첨가하지 않은 생막걸리 생산 제조에 집중하였다. 지역의 폐학교 건물을 빌려 생막걸리 제조 기술과 생산 시스템 전체를 대여해주고 감, 인삼, 복분자 등 지역 특산물을 막걸리에 첨가하는 방식으로 지역 특산 생막걸리를 만드는 방안을 실천에 옮겼다(느린마을 지도 참조). /김인영 한림대 정치행정학과 교수


   
▲ 느린마을 지도: 대전·충청·강원/영남·호남13)./사진=배상면주가 공식블로그,자유경제원 한국의기업가 게시판


1) 2013년 사망함.


2) 배상면은 우리나라 소주의 80%를 2000년 전후까지 자신이 개발한 누룩으로 만든다고 자신 있게 말했다. 『도전 없는 삶은 향기 없는 술이다』, 서울: 랜덤하우스중앙, 2004.


3) 국순당이라는 이름은 고려 후기 임춘의 소설 『국순전(麴醇傳)』에서 따온 것으로 “좋은 누룩으로 빚은 맛있는 술을 만드는 집”이라는 뜻이다. 배상면, 『도전 없는 삶은 향기 없는 술이다』, 서울: 랜덤하우스중앙, 2004, pp. 53-54.


4) 백하주는 술 빛깔이 '흰 노을’과 같다하여 붙여진 이름. 고려시대부터 빚었진 것으로 전하나 조선시대에 유행한 대표적인 청주이며, 약주의 대명사로 지칭되던 술이다.


5) 배상면은 '좋은 제품 만들기 위한 4대 원칙’을 자식들과 임직원들에게 당부했다. 네 가지 원칙은 다음과 같다. 첫째, 원료는 최고만을 선택한다. 둘째, 가공 단계에서 문제가 될 만한 첨가물은 완전 배제 한다. 셋째, 소비자와 약속한 품질은 엄수한다. 넷째, 제품이 가진 가치 이상의 값은 받지 않는다. 배상면, 『도전 없는 삶은 향기 없는 술이다』, 서울: 랜덤하우스중앙, 2004, p.25, p.38.


6) 배상면, 『도전 없는 삶은 향기 없는 술이다』, 서울: 랜덤하우스중앙, 2004, p.85.


7) 배상면, 『도전 없는 삶은 향기 없는 술이다』, 서울: 랜덤하우스중앙, 2004, p.68.


8) 배상면주가의 배영호 사장은 전통주 성공의 과정에서 정부의 규제 풀기가 가장 어렵고 긴 시간이 소요되었다고 술회하였다. 배영호 사장은 다음과 같이 국순당 배상면 회장의 규제 풀기 노력을 평가하고 있다. “저희 아버님(국순당 창업자 배상면)이 약주, 탁주의 판매지역제안 제도, 제조방법제한(누룩 등 발효제, 주정도수, 원료규제 등) 규제에 대한 개정을 최초로 지속적으로 개정될 때까지 정부에 건의하여 규제 개정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습니다. 주류업계 사람들은 대부분 반대했고 정부도 미온적인 것을 자료와 당위성 제시를 통해 지속적으로 수년간 건의했습니다. 그 일을 제가 함께 해서 잘 알고 있습니다. 다만 규제철폐의 주체가 정부기관이므로 개인 배상면이 그 일을 했다고 말하는 것은 무리가 있다고 할 수 있지만 그렇다고 정부기관이 자발적으로 규제철폐를 한 것은 아닙니다. 국세청과 당시 재경부의 담당공무원의이해와 호응이 큰 힘이 되었습니다. 폅(Pub) 설립의 경우는 아버님(배상면)께서 독일 맥주 펍 사례를 들어 전통주 펍도 허용해 달라는 건의를 최초로 하였고 그것이 계기가 되어 먼저 맥주펍이 풀리게 되었습니다. 막걸리 펍은 그런 규제완화의 과정에서 양조장 설비규모 하한을 축소하면서 2010년 경에 배상면주가가 실제 막걸리 펍을 설립하면서 현실화 된 것입니다. (배상면 국순당 창업자가) 전통술과 관련된 것의 모든 아젠다(판매제한 제조제한 철폐와 쌀 등 국산원료 장려제도와 농민주 제도 신설 등 현행 시행되는 거의 모든)를 최초로 들고 나왔으며 대안을 제시한 것은 분명합니다. 이는 배상면이라는 개인의 집념과 경험, 기술, 아이디어, 철학이 이룬 결과라고 생각합니다.” 


9) 강진규, “막걸리 침체 속 고급제품 선전,” 『한국경제신문』, 2016년 3월 1일.


10) 학성산, “전통주 운명을 뒤바꾼 국순당의 비밀,” http://m.blog.daum.net/_blog/_m/articleView. do?blogid=0At10&articleno=16517855. 접속일: 2016년 2월 21일.


11) 서진우, “한국형 쌀맥주 'R4'의 진격 배상면주가, 亞 이어 남미 진출 추진…"개발에 쌀 1000가마 써," 『매일경제신문』, 2015년 12월 30일.  


12) 김영주, “배상면주가의 새로운 실험 - 9개 지자체와 함께 나주배 등 특산물로 만든 전통주 개발,” 『매일경제신문』, 2009년 10월 26일.  http://news.mk.co.kr/newsRead.php?no=552305&year =2009. 접속일: 2016년 3월 3일.


13) 배상면주가 공식블로그, “느린마을 막걸리 지도 – 지방,” http://bsmbrewery.co.kr/220119935946. 접속일: 2016년 3월 1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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