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도] 백낙청·염무웅, 김수영 시 살해를 당장 멈춰라

김수영의 ‘詩’가 아닌 ‘태도로서의 좌파적 성향’에서 문화예술 패션좌파 모델을 선보인 예술가라는 단서를 끌어낸 이문원의 시각은 참신하고 발랄하다. 특히 그 증거로 논쟁이 본격화할 기미가 보였다하면 어김없이 말을 흐리는 김수영의 스타일을 이어령-김수영 논쟁에서 찾아낸 것도 탁월하다. 

물론 그 바닥에서 김수영은 중시조 쯤 될 것이고 시조는 식민지 경성에서 뛰놀던 맑스 보이, 레닌 걸들이겠다. 강남좌파가 ‘주소는 우파, 마음은 좌파’였다면 거기에서 가지치기를 한 패션 좌파는 ‘몸은 우파, 마음은 좌파’인 경우다. 그러나 이 부분에서 한 가지 유념해야 할 것은 정치적인 이유가 아닌 문학으로 김수영을 지지하는 평론가들이 가장 주목하는 것이 다음과 같이 김수영의 이 일치성 혹은 일치성을 위한 노력이라는 사실이다. 

김수영은 시와 산문, 그 어디서도 ‘유기적 전체성’이란 말을 직접 쓴 적이 없지만, 그의 글은, 그것이 시든 산문이든, 예외 없이 삶의 이 유기적 전체성을 의식하고 또 지향한다. 삶을 이루는 모든 요소들은 그에게 있어 분리 불가능하게 얽혀있다. - 문광훈/시의 희생자, 김수영 -

이 유기적 전체성은 혁명적인 세계관이나 거대 담론이 아닌 서민들의 일상의 삶이다. 구질구질함에 대한 부끄러움과 설움 그리고 그것을 기꺼이 받아들이는 자세다. 이 주장은 김수영을 어떻게든 확대해석하려는 논자들의 주장과 확연하게 대비된다. 가령, 한국 모더니즘의 위대한 비판자였으나 세련된 감각의 소시민이요, 외국 문학의 젖줄을 떼지 못한 도시적 지식인으로서의 그는 모더니즘을 청산하고 민중시학을 수립하는 데까지 나아가지 못하였다. 힘없고 모자란 대로나마 서로 뒤섞여 돕고 이끌며 역사를 만들어가는 군중성의 체험, 민중적 실천의 체험은 아직 그의 것이 아니었다. - 염무웅/김수영론 -

당성黨性의 점수에 대해 논하거나 김수영의 한계가 모더니즘의 이념 자체를 넘어서지 못했다기보다 그 극복의 실천에 우리 역사의 현장에 풍부히 주어진 민족과 민중의 잠재역량을 너무나 등한히 했다. - 백락청/‘참여시’와 민족문제 -

▲ 김수영은 일종의 살해를 당한 것으로, 염무웅은 '김수영론'에서 김수영의 당성黨性에 대해 논했고, 백낙청은 '참여시와 민족문제'에서 민중과 민족이라는 선동 내지 허구적 개념으로 김수영을 십자가에 매달았다./자료사진=SBS 스브스뉴스

민중과 민족이라는 선동 내지 허구적 개념으로 김수영을 십자가에 매다는 것보다는 100배 낫다는 얘기다. 그래서 새로운 표현을 통해서 삶의 알려지지 않은 영역을 드러낸다는 점에서 그는 이미 진보적이기  때문이다. - 문광훈/같은 글 -

나는 김수영 시의 윤리성이 지닌 유래와 지향이 시와 생활, 예술과 삶의 일치라고 생각한다. - 문광훈/같은 글 - 

같은 주장이 훨씬 타당하고 설득력이 있으며 실제 김수영 시에 가깝다는 얘기다. 그러나 발상과 자세만으로 예술이 나오지는 않는다. 어쨌거나 기법이 있어야 그때부터 예술이다. 평소 김수영의 시에 대해 딱히 좋지도 않고 특별히 나쁘지도 않으며 그래서 시간을 들여가며 캐봐야 할 광산의 일부라고 별로 생각해 보지 않은 입장이지만 의도가 어떻든 어쨌거나 본격적인 김수영 구하기(염모, 백모씨로부터)작전을 펼쳐보자면 일단 동의가 가능한 부분은 이 지점이다. 

모든 창조자에게 공통된 문제지만 실상 우리가 사용하는 언어, 그 언어 속에서 일시적으로 파악되는 의미라는 것, 즉 씌어진 시는 사실 ‘우주 로케트가 벗어버리는 투겁’에 지나지 않는 것일지도 모른다. 요컨대 중요한 것은 이 로케트의 투겁 자체도 아닐 것이고, 그것을 벗어놓고 날아가 버린 로케트도 아닐 것이다. 다만 투겁과 그것을 벗어버린 로케트 사이의 관계 속에 참다운 시가 읽혀질 수 있다. 우리 눈에 아름답게 보이는 것은 껍질도 알맹이도 아닌 그 ‘벗어버리다’ ‘날아간다’라는 동적인 힘 자체일 것이다. - 김화영/미지의 모험ㆍ기타 -

김화영의 로케트론論은 ‘사이’를 채우고 있는 긴장으로 작가로서의 김수영을 제대로 파악하고 있다. 김화영의 요약본이자 ‘사이’에 대한 좀 더 치밀한 시각을 보자면 김수영을 읽은 후 받은 가장 강한 느낌은 속도 같은 것이 있겠다. 그런데 이쯤에서 멈추면 딱 좋은 데 꼭 ‘오바’하는 인간들이 있다. 시의 속도는 양심에서 오며 행동이자 정신의 움직임이며 말과 시인의 힘겨운 일치를 주장하며 이것은 설움으로부터 온다. - 정현종/시와 행동. 추억과 역사 -

기껏 말 잘해놓고 사족을 달아 자기가 자기 말을 잡아먹는 경우가 있는가 하면 김수영은 어두운 시대의 위대한 증인이었다. 그는 말장난을 미워했다. 말장난은 부패한 소비성 문화위에 기생하는 기생벌레라고 생각했다. - 신동엽/지맥 속의 분수 -

▲ 정치적인 이유가 아닌 문학으로 김수영을 지지하는 평론가들이 가장 주목했던 것은 김수영의 일치성 혹은 일치성을 위한 노력이었다./자료사진=SBS 스브스뉴스

또 다시 왜곡으로 김수영을 몰아가는 경우도 있다. 실제 김수영이 말장난을 미워했는지 어쨌는지는 모르겠지만 그의 시와 산문의 주요 기법이 말장난이라는 사실을 신동엽은 정말 모르는 것일까. 그래도 이런 식의 외면은 황당보다는 낫다. 인간을 가난하게 하는 모든 것으로부터 인간을 지키려는 노력 속에 시작의 본질을 보았고 그런 한에서 그에게 있어서 무엇보다 소중하게 여겨진 것이 ‘사랑’이었다. - 김종철/시적 진리와 시적 성취 -

염모, 백모의 주장이 뻔뻔하고 이기적이라면 위의 주장은 다소 정신분열적이다. 인간을 가난하게 하는 모든 것에 대해 사랑으로 반격한다? 그리고 그 정신으로 시를 쓴다? 김수영이 들으면 어떤 반응을 보일지 정말 궁금하다. 이 이기적인 주장과 ‘황당’을 김수영의 말로 반격해 보자. 세계의 일환으로서 한국인이 아니라 우물 속에 빠진 한국인 같다. - 김수영/출처 기억 미상 -

마치 자신의 사후 문단에서 벌어질 민중 논쟁의 폐해를 예언한 듯한 글이다. 세계에서 한국으로, 한국에서 다시 민중으로, 갈수록 작아지는 축소 지향적 세계관을 지닌 염모, 백모씨는 김수영의 이런 발언을 어떻게 해석할지 모르겠다. 스스로 밝힌 시작의 본질은 꽤 유명한 글이다. 그래서 일부만 인용한다. 

다음 시를 쓰기 위해서는 여직까지의 시에 대한 사변 思辨을 모조리 파산시켜야 한다. 혹은 파산을 시켰다고 생각해야 한다. 말을 바꾸어 하자면, 시작詩作은 ‘머리’로 하느 것이 아니고, ‘심장’으로 하는 것이 아니고, ‘몸’으로 하는 것이다. ‘온몸’으로 밀고 나가는 것이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온몸으로 동시에 밀고 나가는 것이다. - 김수영/시에 침을 뱉어라 -

▲ 김수영은 자신의 사후 문단에서 벌어질 민중 논쟁의 폐해를 예언한 듯한 글을 남기기도 했다. 세계에서 한국으로, 한국에서 다시 민중으로 갈수록 작아지는 축소 지향적 세계관으론 김수영의 발언을 해석하기 어렵다./자료사진=SBS 스브스뉴스

사실 온 몸으로 밀고 나간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 잘 몰랐다. 그런데 십 수 년 흐릿하던 머릿속이 화끈하게 개는 경우가 가끔 있다. 이 노래(시의 본질은 노래다. 노래의 본질도 시다)를 들었을 때 그랬다.  

싸구려 커피를 마신다

미지근해 적잖이 속이 쓰려온다

눅눅한 비닐 장판에 발바닥이

쩍 달라 붙었다 떨어진다

이제는 아무렇지 않어

바퀴벌레 한마리쯤 쓱 지나가도

무거운 내일 아침엔

다만 그저 약간에 기침이 멈출 생각을 않는다

축축한 이불을 갠다

삐걱대는 문을 열고 밖에 나가 본다

아직 덜갠 하늘이 너무 가까워 숨쉬기가

쉽지를 않다 수만 번 본 것만 같다

어지러워 쓰러질 정도로 익숙하기만 하다

남은 것도 없이 텅빈 나를 잠근다

싸구려 커피를 마신다

미지근해 적잖이 속이 쓰려온다

눅눅한 비닐장판에 발바닥이

쩍하고 달라 붙었다가 떨어진다

- 장기하/싸구려 커피 -

본인에게 수상授賞의 기회가 있었다면 김수영 문학상의 한 해 정도는 이 이름에게 내주지 않았을까. /남정욱 숭실대 문예창작학과 겸임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