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도]이건희와 삼성신화①-외로운 성장기와 18년 혹독한 경영수업

자유경제원 / 2016-07-31 / 조회: 7,580       미디어펜
자유경제원은 2014년 하반기부터 기업가연구회를 통해 우리나라와 세계를 호령한 기업인들의 기업가정신을 연구하고 발표해왔다. 김인영 한림대 정치행정학과 교수는 지난 25일 자유경제원 리버티홀에서 열린 기업가연구회 5기에서 삼성을 세계적 기업집단으로 만든 이건희 회장에 관해 발표했다. 김인영 교수는 삼성의 과거와 현재에서 드러난 이건희 회장의 업적과 기업가정신을 밝혔다. 미디어펜은 김 교수의 발제문을 3차례에 걸쳐 연재한다. 아래 글은 첫번째 연재다. [편집자주]


  
▲ 김인영 한림대 정치행정학과 교수
삼성을 세계적 기업으로 만든 이건희
전자, 반도체, 스마트폰으로 세계를 매혹하다 [상]

1. 삼성의 과거와 현재 - 청과물·건어물 수출에서 반도체·스마트폰 수출로

이병철은 1938년 3월 1일 대구에서 '삼성상회’를 설립했다.1) '삼성상회’는 국내산 과일과 건어물을 수출하는 회사였다. 이후 삼성은 1940년대 무역업과 양조업에서, 1950년대 소비재 수입에서 설탕, 제분, 모직의 수입대체 산업으로, 1960년대에는 비료, 제지, 보험업을 거쳐서, 1960년대말에는 전자산업으로, 1970년대에 석유화학, 조선 등 중화학공업으로, 1980년대에는 반도체 등의 첨단 기술산업에, 90년대에 무선전화와 자동차에 진출하였다.2) 

이병철 시기의 삼성의 성장은 한국 대기업 성장의 한 전형(prototype)을 보여준다. 급속한 외형적 성장, 기업가 정신, 한 가족에의 소유와 경영의 집중, 정부 산업정책에의 호응과 추종, 국내·국제 시장 변화와 요구에 대한 신속한 대응을 위한 사업의 다각화로 요약될 수 있다. 시장이 성숙되지 않은 상태에서 고도의 기술 축적이나 수직 계열화 보다는 국내환경의 수요에 맞는 새로운 '좋은’ 사업 분야들로 확장해가는 것이 기업의 성적을 좌우했다. 

한국의 경제성장을 이끈 선도적 기업가로서 이병철은 새로운 사업 선정에 천부적인 재능을 보여주었다. 예를 들면 제일제당의 경우 초기에 제당업에 투자하여 사업 첫 몇 년 동안(2년간)은 시장을 거의 독점한다. 점차 제당업에 경쟁자가 생기고 설탕의 수요가 줄어들자, 제당업을 유지하면서 제분업에 뛰어들고 이후에는 제당업의 한계를 인식하고 생화학 기술을 계속 개발하여 1978년에는 유전공학(genetic engineering)과 제약업으로 다각화할 수 있는 기반을 마련한다. 정부의 유전공학산업진흥계획은 이보다 훨씬 늦은 1982년에 시작되므로 정부의 지원을 예상한 투자는 아니었다. 

  
▲ 삼성전자 이건희 회장. 이병철 창업주에 이어 대한민국에서 가장 성공을 거둔 2세대 기업인으로 꼽힌다.


창업자 이병철은 시장이 필요로 하는 새로운 산업 선점과 우수한 제품의 생산으로 삼성을 국내 제일의 기업집단으로 성장시켰다. 2대 세대라고 할 수 있는 이건희 회장은  삼성을 선친의 소망 “거니야, 니 삼성을 100배 큰 세계적 기업으로 키울 수 있나?"3)에 맞는 세계적 기업으로 키워냈다. 이건희 회장은 '탁월한’ 기업가 정신과 경영 능력으로 삼성그룹을 질적, 양적으로 성장시켰던 것이다.

오늘의 삼성은 1987년 12월 1일 이건희 회장에 취임 당시 연간 매출액이 13조5000억 원 정도에 불과했던 삼성그룹을 불과 20여 년 만에 세계 굴지의 대기업으로 성장시켰다. 취임 25년인 2012년에는 그룹 매출이 383조원으로 커져 취임 당시보다 28.3배 성장했으며, 그룹의 자산총액은 255.7조원으로 성장했다. 시가 총액으로 비교해 본다면 1987년 시가총액 1조원에서 2012년 303조2천억원으로 303배 커졌다고 삼성그룹은 평가했다.4) 따라서 오늘의 삼성은 모두 그의 업적이라고 과언이 아닐 것이다.

삼성그룹이 아니라 단일기업 삼성전자로만 평가하면 연 매출액 200조(2015년, 2010년 154조), 당기순이익 20조가 넘는 글로벌 기업으로 10여만 명의 종업원과 연관된 수십만 명의 관련기업 직원, 12만여 명의 주주들에게 혜택을 주고 있다.5) 스마트폰 판매가 애플에게 뒤지기는 하였지만 반도체는 아직도 세계 선두를 점하고 있다. 최근 2009년~2014년 삼성전자의 매출과 영업이익은 <표 1>과 같다.

  
▲ 표 1. 삼성전자의 매출과 영업이익(2009년~2014년). /자료출처: 박영래, “삼성전자 연간매출 9년래 첫 감소,” 『아이뉴스24』. 2015년 1월 8일. http://news.inews24.com/php/news_view.php?g_menu=022100&g_serial=875504 (접속일: 2016년 7월 19일)


2 삼성의 후계자 되기 - 에피소드들

이건희는 1942년 1월 9일 대구에서 태어났다.6) 위로는 형 맹희, 창희, 그리고 누나 인희, 숙희, 순희, 덕희가 있었고, 아래로는 여동생 명희가 생겼다. 당시 아버지 이병철은 '삼성상회’ 경영으로 매우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었고, 어머니(박두을)는 형님과 누나들을 돌보느라 이건희는 의령(宜寧)의 친가로 보내 자라게 했다. 이건희의 “혼자 지내기”의 시작이었다.7)

부산에서 초등학교를 다니던 중 1953년 5학년 때 아버지의 뜻에 따라 일본 유학의 길을 나서게 된다. 이후 중학교 2학년에 귀국하여 서울사대부고에서 레슬링 선수 생활을 하는 등 3년을 다니고,8) 1961년 연세대학교에 입학한다. 하지만 이건희는 이병철의 뜻에 따라 다시 와세다 대학(早稲田大学)으로 일본 유학을 떠나게 된다.9)

일본에서는 일본어가 되지 않아서, 귀국해서는 일본식 말투로 따돌림으로 외로운 생활을 해서인지 한 인터뷰에서 “혼자 자라서 가정교육을 1퍼센트도 받지 않았다”고 진지하게 대답했다.10)

이러한 일본에서의 경험은 이건희에게 천편 이상 영화 보기, (심심해서) 기계부품 분해·조립하기, 개 키우기, 혼자 생각하기, 신속한 선진문물 흡수, 선진국 사람들의 수준으로 세상 보기 능력을 키우게 한 조건으로 작용했다. 물론 이는 이건희를 '말이 없고’,11) 은둔의 동굴에 거주하는 것을 좋아하고, 너스레를 떨거나 호탕하게 웃는 것 없고 주로 듣는 경청(傾聽)하는 사람으로 만들었다고 할 수 있다,   

이건희는 일본 와세다 대학 상학부를 졸업(1965)하고 다시 미국 유학 길에 올라 미국 조지 워싱톤 대학에서 MBA 과정을 공부했다. MBA와 함께 신문방송학을 공부하였다. 미국 워싱턴 유학 기간에 당시의 최첨단 기술의 집적이라고 할 수 있는 자동차에 빠지게 된다. 1년 반 미국에 머무는 동안 여섯 번 차를 바꾸며 분해하고 조립하고 왁스를 먹여 되팔았다고 한다. 당시 미국에는 유럽의 페라리, 람보르기니 등 고성능 '슈퍼카’가 인기를 끌고 있었다. 

이러한 이건희의 자동차에 대한 관심이 무리하게 삼성을 자동차에 대한 투자로 이끌었다고 보는 시각이 있으나 지나친 단순화 논리다. 이건희가 훗날 자동차 산업을 시작한 이유는 첫째 과거 아버지 이병철이 전자와 반도체 가운데 먼저 전자를 택하여 투자하였던, 다시 말해 미래에 자동차 투자를 항상 생각하고 있었던 삼성의 미투자 분야였다라는 점, 둘째 이건희의 자동차에 대한 높은 관심과 이해도, 셋째, 미래 자동차 산업이 삼성의 전자 산업과 시너지를 이룰 것이라는 확신 등이 종합적으로 작용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이건희가 경영학을 공부하면서 신문방송학을 함께 공부한 이유는 아버지 이병철이 막내아들이 제조업 기업에는 맞지 않는다는 판단으로 매스컴을 공부하라고 했기 때문이었다. 이건희의 첫 직장은 중앙매스컴(훗날의 동양방송과 중앙일보)이었다. 제조업 경영은 아버지 이병철과 맏아들 이맹희, 둘째 이창희가 맡고, 막내 이건희는 중앙매스컴을 맡는 구도였다. 본격적인 회사 경영에서 떨어져 나와 이건희는 중앙매스컴 회장이자 장인인 홍진기에게 본격적인 경영수업을 받게 된다. 장인에게 헌법, 상법, 주식회사법, 판례, 역사, 정치, 상식 등을 18년 동안 매일 저녁 강의를 받게 된다.12) /김인영 한림대 정치행정학과 교수

  
▲ 이건희 삼성전자 회장(왼쪽)과 이재용 부회장.


1) 이병철은 1936년 이미 사업가로서의 첫발을 내디뎠다. 그의 첫 투자는 '협동정미소’였다. 이병철이 정미업을 시작한 이유는 쌀이 일본으로 수출되는 주요 품목이고, 당시 정미소는 농부에게서 소비자(국내, 일본)로 미곡이 이동하는 흐름의 중심에 위치했기 때문이었다. 이후 1936년 6월에는 운송회사를 인수하여 운송업에 뛰어들었고, 일본 식민지 말기 연료 공급 부족이라는 사태를 예측하지 못하였기 때문에 실패한다. 그 뒤 마산에 위치한 조선식산은행에서 빌린 자금으로 토지에 상당히 투자하지만 '중일전쟁’이라는 상황의 변화를 예측하고 한국 거주 일본인 대규모 토지소유자들이 낮은 가격으로 토지를 매매한 것에 이병철이 속아 실패하게 된다. 삼성은 이병철의 초기 실패한 사업은 제외하고, 지금의 삼성과 긴밀히 연관된 '삼성상회’의 설립연도인 1938년을 창업 원년으로 계산한다.

2) 김인영, 『한국의 경제성장』, 서울: 자유기업원, 1998, p.136.

3) 위 말은 확인되지는 않지만 이병철 회장이 한국비료 사건 이후 맏아들 이맹희에게 넘기면서 던진 말로 알려져 있다. 본 글에서는 '맹이’를 '거니’로 바꾸었다.

4) 김현석, “이건희 회장 25년…"애플의 유일한 경쟁자" 삼성 매출 39배 커졌다,” 『한국경제신문』, 2012년 11월 20일. 2012년 그룹은 이건희 회장에 취임 25주년을 맞아 경영성과를 “취임 당시 9조9000억원이던 매출은 올해 384조원(예상)으로 39배, 임직원은 10만명에서 42만명으로 증가, 수출은 63억달러에서 1,567억달러로 25배 성장, 이익은 당시 2700억원에서 올해 30조원 이상으로 110배 넘게 증가”했다고 공개했다. 당시 뉴욕타임즈는 “애플의 유일한 경쟁자”는 삼성이라고 평가했다. 공정거래위원회는 『2013년 공정거래백서』에서 2012년 삼성 그룹의 계열사는 81개, 자산총액은 255.7조라고 공식 발표했다. 공정거래위원회, 『2013년 공정거래백서』, 서울: 공정거래위원회, 2013년, p.604. 참고로 최근 이재용 부회장의 계열사 정리로 2016년 삼성의 소속회사는 59개로 축소되었다.

5) 삼성전자는 3개의 주요사업 부문으로 구성되어 있다. CE부문(TV, 냉장고 등)과 IM부문(스마트폰 등 HHP, 네트워크시스템 등), DS부문(DRAM, 모바일 AP, LCD 패널 등)으로 나뉜다. 삼성전자의 전체 매출의 50~60%, 영업이익의 60~70%는 IT모바일사업에서 나오고 있다. 앞의 내용은 자료는 네이버 증권에서 가져옴.

6) 이건희 회장은 2014년 5월 10일 자택에서 쓰러진 이후 의식을 회복하지 못하고 현재까지 삼성서울병원에 입원 중에 있다.

7) 할머니가 어머니인 줄 알았고, 1945년 해방이 되고 집에 가서 형제들을 만났을 때 둘째 누나가 “늬 엄마는 누구냐”고 해서 “의령에 있다”고 대답하고, 도리어 여동생에게 “늬 엄마는 누구냐?”고 물었다고 한다. 이경식, 『이건희 스토리』, 서울: Human&Books, 2010, p. 19.

8) 이건희의 서울사대부고 레슬링부에서의 별명은 '백곰’이었다고 한다. 큰 덩치와 흰 피부 때문으로 추측된다. 웰터급으로 전국대회 입상을 했고, 연습 중 눈썹 부근이 찢어지는 부상을 당하자 “어머니가 그걸 보시더니 깜짝 놀라가지고 형제, 누나를 총동원해서 교장한테 찾아가 빼달라고 해서 다음 날 제가 레슬링부에서 쫓겨났습니다.”라고 회고했다. 이경식, 『이건희 스토리』, 서울: Human&Books, 2010, pp. 35, 40. 이러한 레슬링 선수생활의 인연으로 이건희 회장은 훗날 IOC위원에 임명된다.

9) 『호암자전』에 따르면 이병철은 1930년 4월. 와세다대학 전문부 정경과 입학하여 “모처럼 공부에도 열중하고 내 나름으로는 충실한 나날을 보내”다가 심한 각기병(脚氣病)에 걸려 휴학하게 된다. 이병철, 『호암자전』, 서울: 중앙일보사, 1986, pp. 12-17. 

10) 이건희는 인터뷰에서 "가장 민감한 때에 배고픔, 인정차별, 분노, 객지에서의 외로움, 부모에 대한 그리움, 이런 모든 걸 다 느꼈습니다.“라고 했다. 이경식, 『이건희 스토리』, p. 23.

11) 이건희는 한 인터뷰에서 “집에서 제 별명이 '말 없는 사람’입니다. 무재미한 사람으로 되어 있습니다.(...) 20년 동안 우리 가족기리 외식한 게 두세 번이나 될까요.”라고 했다. 이경식, 『이건희 스토리』, p. 29.

12) 이경식, 『이건희 스토리』, p. 109.
[김인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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