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경제원은 29일 원내 리버티홀에서 '조선 망국, 교훈을 얻자'를 주제로 토론회를 열었다.
이날 토론회에는 ▲이영훈 서울대 경제학부 교수 ▲김승욱 중앙대 경제학부 교수 ▲남정욱 숭실대 문예창작학과 교수 ▲배진영 월간조선 차장 ▲임종화 경기대 무역학과 교수가 참여했다.
자유경제원 관계자는 "8월 29일, 오늘은 1910년 조선이 망했던 '경술국치'일이다. 역사를 바로 보고 반성하며 미래를 준비하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일이다. 하지만 역사교과서를 비롯한 어디에서도 조선왕조가 망한 원인에 대한 제대로 된 설명이 없다"면서 "근대화를 준비하지 않고 사상과 제도를 정비하지 못했던 조선을 제대로 봐야 한다. 지금 대한민국이 조선 말기 모습을 닮아있는 것은 아닌지 경각심을 갖고 미래를 위한 방안을 모색해야 한다"고 이날 토론회 취지를 설명했다.
발제를 맡은 이영훈 서울대 경제학부 교수는 "조선 말기의 상황은 매우 안 좋았다. 환경파괴부터 시작해 농업생산성 저하, 경제체제와 국가재정의 전반적인 붕괴, 민심 이반, 국제정세의 급변, 저급한 리더십 등 여러 요인들이 서로 맞물려 결국 나라가 망했던 것"이라고 지적했다.
이영훈 교수는 "518년을 이어온 조선왕조와 대한제국은 1910년 세계사의 무대에서 사라졌다. 1863년에 등극해 44년을 치세한 고종은 그의 왕국을 살리기 위해 무엇을 해야 하는지 알지 못했다"면서 "특히 1905년 일제와의 보호조약이나 1910년 병합조약은 대한제국의 제도에 충실하게 규정됐다"면서 "두 조약은 황제가 그의 개인적 권리를 처분하는 형식과 내용으로 이루어졌고 조약을 검토하는 어떠한 대의 권력도 존재하지 않았다"고 설명했다.
이영훈 교수는 "당시 조선이 살아남기 위해서는 국가 체제를 근대적 입헌국가로 개편해야 했다. 그를 위해 국민을 근대적 주권의 주체로 만들어야 했고 주권을 대표하는 의회를 설치해야 했다. 또한 징병제를 실시해 국방을 공고히 할 필요가 있었다. 불행하게도 고종은 이런 역사적 책무를 감당할 만한 개명군주가 아니었다"고 지적했다.
이영훈 교수는 "고종은 국가 주권을 입헌제 형태로 재배치하려는 정치 세력의 모든 시도를 탄압했다. 그에게 있어서 왕업은 조상으로부터 물려받은 가산에 지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이영훈 교수는 "고종이 왕업을 지키기 위해 해왔던 노력이 완전히 실패하지는 않았다. 조선의 왕족은 일본의 황실에 충실히 편입됐고 그 덕분에 종묘사직의 제사는 일본의 황실이 해체되는 1945년까지 끊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 덕에 조선은 망했지만 조선 왕조는 그 형태를 보존할 수 있었던 것"이라고 설명했다.
첫 번째 토론자로 나선 김승욱 중앙대 경제학부 교수는 "조선 왕조의 해체는 산림의 황폐와 토지생산성 감소로 인한 미곡 생산 감소, 대일 무역의 축소, 농촌시장의 위축 등을 원인으로 꼽을 수 있다"고 주장했다.
김승욱 교수는 "환곡의 문란과 군포의 수탈에서 비롯된 민란도 그렇다. 이런 상태에서 제국주의가 조선에 도래했다. 운요호 사건과 강화도 조약, 임오군란과 조-영 조약, 갑신정변과 동학농민봉기, 청일전쟁, 갑오경장의 좌절과 대한제국 성립 등 긴 과정을 거쳤지만 결국 을사보호조약을 통해 조선은 일제와의 병탄의 길을 가게 됐다"고 요약했다.
김승욱 교수는 "조선후기 중앙정부 재정이 열악했던 사례를 보충하자면 '우리도 신식 군함을 갖춰야 겠다'는 생각을 한 고종이 서구 열강으로부터 군함을 도입하려 했던 것을 들 수 있다"면서 "고종이 독일, 영국 등에 군함 구입을 타진을 했지만 일본의 반대로 뜻을 이루지 못했다. 그러다가 일본으로부터 중고 기선을 구입해 대포를 장착하면 군함이 될 수 있다고 생각했다"고 관련 사례를 설명했다.
김승욱 교수는 "당시 왕실 재정으로 배를 구입하기 위해 왕실에서 전해 내려오는 비자금을 승려에게 주었으나 그의 암살로 실패했다. 결국 국방예산의 30%에 달하는 55만 엔을 들여 기선을 구입했다. 그것이 우리나라 최초의 신식군함인 양무호다. 이 배를 구입하는 것에 독립협회가 반대했지만 결국 무리해서 구입했다. 이 때문에 국방비가 부족해져 군에 보급되는 쌀에 모래를 섞어 지급했고 그 결과가 임오군란"이라고 풀이했다.
김승욱 교수는 "민란이 발생한 이유도 최소한의 빈민구제책마저 붕괴되었기 때문"이라며 "그런 의미에서 농업생산성의 하락이 민란의 근본 요인이라고도 볼 수 있다"고 주장했다.
두 번째 토론을 맡은 남정욱 숭실대 문예창작학과 교수는 "망할 듯 말 듯 버티던 조선은 결국 왜란 300년 후 전격적으로 일본의 차지가 된다. 조선의 왕은 지도를 보지 않았다. 자기가 왕으로 있는 나라가 어떤 운명으로 가게 될지 까맣게 몰랐다"면서 "당시 고종은 적이란 적은 다 불러 들여 그들의 입맛에 맞춰 조약을 체결해 줬다. 당시 왕실은 '왕실만 살면 된다'라는 생각으로 지냈다"고 비판했다.
남정욱 교수는 "이후 조선 정국은 갑신정변, 동학, 청일전쟁으로 이어졌다. 동아시아 패권을 장악하기 위한 준결승전이었던 '청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은 친일정권을 세우지만 허약한 일본 정권은 민비 시해로 민심을 잃었다"고 설명했다.
남정욱 교수는 "그래도 대세는 일본이었다. 결승전인 러일전쟁까지 승리한 일본은 마침내 미국, 영국, 러시아의 동의를 얻어 조선의 외교권을 박탈하고 1910년에는 병탄으로 통치권까지 빼앗았다"면서 "그 당시 고종은 어쩔 수 없는 조선의 왕이었다. 고종이 조선을 입헌 국가로 탈바꿈하면서 제대로 된 근대를 열었더라면 사정이 나아졌을까라는 생각을 한다. 사실 그 의견에 대해서는 비관적이다. 나라가 연명하는 기한이 조금 늘었을지는 몰라도 결국은 누군가에 손에 넘어갔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남정욱 교수는 "오랜 시간 동안 중국의 속국으로 살아온 조선은 자생력을 완전히 잃어버린 체질로 굳어진지 오래였다. 당연히 시야도 좁았다. 성리학이라는 안경은 유연성과 현실감각을 떨어뜨리는 데는 최적이었다"면서 "한 나라의 유연성과 생존능력은 어떻게든 살아남아야 하는 약육강식의 국제 체제 안에서 단련될 때만이 갖춰질 수 있다"고 지적했다.
남정욱 교수는 "임진왜란이 일어날 당시 유럽 대륙은 주요 5개국 사이의 전쟁으로 100년 간 단 한 해도 평화를 모르고 살았다. 하지만 그들 중 단 한 나라도 망하지 않았다. 망하지 않으려면 국가가 무엇을 해야 하는지 지도자도 백성들도 너무나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라고 주장했다.
세 번째 토론자로 나선 임종화 경기대 무역학과 교수는 "조선에 대해 간과하면 안 되는 사실은 정치 지도자들의 '외교적 오판' 문제"라면서 "당시 조선왕조는 세도정치의 질곡을 바꾸기는커녕 왕조를 유지하는 정책에만 몰두했으며, 국제사회의 변화와 태동을 전혀 감지하지 못했다. 이에 고종과 민자영은 민족의 자주적 근대화를 저해한 인물이라는 비판을 피할 수 없다"고 지적했다.
임종화 교수는 "고종은 국가의 내적역량 강화보다 외교적 방법으로 위기를 피하려 했다. 이러한 고종의 대외정책이 초래한 것은 갑신정변-청일전쟁-을미사변 등의 외환(外患)뿐이었다"면서 "동시에 고종은 외세(일본군)의 힘을 빌려 갑오농민운동(동학농민반란)을 탄압함으로써 민중들의 자주적 근대화를 소멸시킨 인물"이라고 지적했다.
임종화 교수는 "당시 갑오농민군은 조선 사회를 변화시키는데 필요한, 일정 부분의 역량을 보유한 집단이었지만 내부의 변화요구를 무참하게 탄압한 인물이 바로 고종이었다"면서 "그것도 청나라와 일본군의 힘을 빌려 내부 도전을 진압했지만 자신들의 정권도 제대로 지키지 못했다"고 비판했다.
임종화 교수는 "유럽 제국주의 국가들 중 식민지 정책의 모델로 영국형과 프랑스형이 있다. 영국은 세계 여러 지역에 식민지를 두고는 영국인 총독을 현지에 보냈지만 현지의 종교적 문화를 훼손하지는 않았다. 또한 실질적인 지배권을 토착 엘리트들에게 할당함으로써 정치, 문화까지 직접 지배하던 프랑스와는 상당히 대조적이었다"고 설명했다.
임종화 교수는 "프랑스는 북아프리카나 동남아시아 베트남 등을 식민지로 경영하며 식민지 대표를 프랑스 의회에 진출케 했고 프랑스의 언어와 풍속을 대입했다. 프랑스는 식민지를 자국에 동화시키는 것을 추구했다"고 설명했다.
임종화 교수는 "당시 조선 입장에서 일본형 식민 지배를 다시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면서 "당시 일본의 식민지배는 프랑스 모델과 비슷하다. 하지만 생산력이 거의 없었던 당시 조선의 입장에서 일본을 부정적 관계로만 바라보아야 하는지에 대해서는 재평가가 필요할 것"이라고 지적했다.
마지막 토론을 맡은 배진영 월간조선 차장은 "100여 년 전의 창피한 역사를 돌아보는 것은 자학하자는 뜻이 아니다. 역사를 직시하고 교훈을 얻자는 것"이라며 "흔히 역사의 교훈을 이야기하지만 지나간 역사로부터 '교훈'을 얻으려면 먼저 역사를 직시해야 한다. 역사를 직시하지 못하고 남의 탓만 한다면 우리는 역사로부터 아무런 교훈도 얻을 수 없다"고 지적했다.
배진영 기자는 "요즘 한국사회는 거의 병적일 정도로 역사를 분식(粉飾)하고 있다. 고종과 민비의 실정에 눈감고 그들을 미화하는 것으로도 모자라 평생 정신병을 앓았던 '행위 무능력자' 덕혜옹주를 민족 혼의 화신으로 그려내고 있다"면서 "경기도 여주군이 만든 명성황후 기념관의 선전문구는 '조선을 승리의 역사로 이끈 위대한 철의 여인 명성황후'다. 100여 년 전 망국의 역사 어느 구석에 '승리의 역사'가 있었느냐"고 비판했다.
배진영 기자는 "문제는 역사에 대한 분식이 단순히 지나간 역사에 대한 분칠을 하는 것으로 끝나지 않는다는데 있다. 어느 정치인은 8.15경축사에서 '1945년 8월 15일은 세계사의 중대 전환점이며 우리 민족이 전 세계 평화세력의 일원으로서 이처럼 중대한 역사적 전환을 만들어 낸 주역이었다. 광복절을 자랑스러운 '승리의 날'로 기념하자'고 말했다. 그의 연설은 박근혜 대통령의 8.15경축사와 비교돼 일부 세력의 박수를 받고 있다. 여기서 역사에 대한 분식이 현실정치에서의 선전선동 수단, 정치적 무기가 된다는 것을 알 수 있다"고 지적했다.
배진영 기자는 "구한말 조선의 역사는 '승리의 역사'가 아니었다. 1945년 8월 15일은 우리의 힘으로 만들어낸 승리의 날이 아니다. 그런 주장은 '정신승리'일 뿐이다. 아무리 못나고 부끄러운 역사일지라도 두 눈 부릅뜨고 역사와 대면해야 한다"면서 "그래야만 우리는 역사로부터 교훈을 얻어 더 나은 미래를 만들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배진영 기자는 "100여 년 전 망했던 나라에서 오늘날 대한민국으로 우뚝 설 수 있었던 것은 건국의 아버지들과 개발 연대의 주역들이 역사를 직시하는 용기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라고 역설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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