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양을 향해 돌을 던지다
나는, 지금 하려고 하는 이야기의 일부를 나의 딸과 아들이 20대였을 때 들려주고 싶었지만 기회를 얻지 못하고 어느덧 여든 살 문턱에 다다르고 말았습니다. 다행히도 자유경제원이 <원로에게 듣는다>라는 코너를 마련하여 소중한 기회를 얻게 되었습니다.
나는 어떤 사람들처럼 ‘굵은 선’은 긋지 못하고 ‘점 선’만 그으며 살아왔습니다. 그렇지만 돌이켜보면 몇 가닥 점 선이 눈에 띄기도 합니다.
일기를 쓰세요
“4292. 4. 6(맑음) 월요일. 오늘부터 나는 대학생이다. 인생수업의 최후의 단계! 최고학부! ….”
가정 형편상 대학 진학은 꿈도 꿀 수 없던 환경에서 대학생이 되었으니 그 감회 어떠했겠습니까? 나의 아버지는 꽤 인정받는 시골 한학자였지만 ‘청빈낙도(淸貧樂道)’를 즐기시는 분이어서 가정 형편은 말이 아니었습니다. 다행히 부모님 잘 만나 공부 좀 잘한 탓에 나는 4년간 등록금 전액을 면제받고 어느 대학에 들어갈 수 있었습니다.
대학생이 된 그 날부터 나는 일기를 쓰기 시작했습니다. 일기 제목은 머릿속에서 날마다 “태양을 향해 돌을 던지다”로 정해져 있었습니다. “태양을 향해 돌을 던지다”−어떤 뉴앙스가 풍기지요? 어떻든 나는 일기에서 날마다 태양을 향해 돌을 던졌습니다. 위에서 보았다시피, 나는 첫 날 일기에서 ‘단기 4292년’으로 썼습니다. 나는 ‘단기 4300년’에 내가 어떤 모습일까 늘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에 ‘서기’ 대신 ‘단기’를 썼습니다. 곧 ‘서기’로 바꾸기는 했지만.
나는 처음 들어간 대학에서 2년 마치고 퇴학당했습니다. 그 대학의 비리에 항의했다는 이유 때문이었습니다. 이제 대학을 더 이상 다닐 수 없으리라는 두려움이 나를 억눌렀습니다. 2년 휴학하고 극적으로 다른 대학에 편입하여 대학을 졸업했습니다. 대학을 졸업하는 데 6년이 걸린 셈입니다. 그 6년 동안 몸이 심하게 아픈 3일을 제외하고 나는 6년 내내 일기를 썼습니다. 바로 그 일기가 오늘의 나를 만들었습니다.
대학에서 학생들을 가르칠 때 나는 취업이 결정된 제자들을 불러 매일매일 세 가지 이슈를 선정하여 업무와 관련된 ‘일지(日誌)’를 쓰라고 권했습니다. 도움이 되었다고 알려온 제자가 몇 명 있었습니다.
시대 변화를 캐치하세요
지금은 지식경제시대입니다. 지식경제시대에는 누구나 새로운 전략과 법칙으로 무장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어떻게 될까요? 레스터 더우라는 경제학자가 쓴 글을 이야기합니다.
1900년 1월 1일 기준으로 미국에서 가장 큰 12개 기업은 알파벳 순으로 다음과 같습니다: America Cotton Oil Company, America Steel Company, America Sugar Refining Company, Continental Tobacco, Federal Steel, General Electric, National Lead, Pacific Mail, People's Gas, Tennessee Coal and Iron, US Leader, US Rubber.
1세기가 지나, 그러니까 2001년 1월에 이들 기업 명단을 살펴보면, 두 가지 흥미로운 점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첫째, 이들 기업 가운데 10개 회사는 천연자원을 이용한 기업으로, 사라져버렸다는 점입니다. 둘째, 대다수 기업들은 다른 기업에 흡수되었고, 오직 General Electric만 살아남았다는 점입니다. 이는 곧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지 못하는 기업들은 도태하고 만다는 것을 뜻합니다.
사람도 기업과 다르지 않습니다.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새로운 시대 흐름에 적응하지 못하고 실패한 사람과 기업을 주변에서 많이 보아왔습니다. 그래서 시대 변화를 캐치해야 합니다. 젊은이는 더욱 그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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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만일 미국이라는 나라가 없었다면 세계는 과연 오늘날처럼 자유를 누릴 수 있게 되었을까. '하나님 앞에서의 평등' 사상 위에 세워진 미국이라는 나라가 있었기에 세계는 오늘날처럼 개인의 자유를 누릴 수 있었다./사진=연합뉴스 |
젊음이 무기입니다
나는 영문학과를 졸업한 후 모교의 대학신문사 일을 맡게 되었습니다. 그 무렵 나는 한국현대사에 깊은 관심을 가졌습니다.
1966년 6월경이라고 생각됩니다. 한자로도 이름이 같아 가까운 사이가 되어 필요할 때 자문을 해주시던 당시 한국일보 박동운 논설위원님과 얘기를 나눌 기회가 있었습니다. 그 분의 한 마디는 한 ‘찰라’에 역사학도를 꿈꾸던 나를 경제학도로 바꿔버렸습니다.
“박정희 대통령은 가정교사를 두고 쌔뮤엘슨의 『경제학 3판』을 공부하신다네.”
당시 세계적 화두는 ‘후진국 경제발전’이었습니다. 나는 ‘후진국 한국의 경제발전’에 몸을 바치기로 거창한 계획을 세웠습니다. 나는 전남대 대학원 경제학과에 입학했습니다. 대학원 졸업 전인 1969년 나는 미국연방정부가 재정 지원하는 ‘동서문화센터(East West Center)’ 장학생으로 뽑혀 하와이대에서 공부할 행운을 얻었습니다. 북으로 간 큰 형 관련 연좌제(連坐制)와 처음 들어간 대학에서의 비리 규탄 경력이 미국 유학을 앞둔 나를 무척이나 괴롭혔지만 행운의 여신은 끝내 나를 버리지 않았습니다.
나는 하와이대 대학원에서 경제학 석사·박사학위를 받았습니다. 경제학 기초가 없던 나는 참으로 힘든 시간을 보냈습니다. 그래도 나는 해냈습니다. “자네가 넘어지면 대한민국이 넘어지네”라는 은사님의 격려가 큰 버팀목이 되었습니다. 지금 생각해 보면 ‘내가 젊었기 때문에’ 그 힘든 과정을 견뎌낼 수 있었습니다. 젊음은 핵폭탄도 견뎌낼 수 있는 무기입니다.
자신의 능력을 개발하세요
나는 이런 여자를 알고 있습니다. 그는 2000년에 연세대 경제학과를 졸업했습니다. 그는 대학에 다닐 때 경제학 공부는 제쳐두고, 어느 지하실 방을 빌려 5인조 락그룹을 만들어 주말마다 연습에 몰두했습니다. 경연 때는 2등까지 한 적이 있습니다. 그는 대학 축제 때가 되면 기타를 들고 남의 대학 축제를 흥겹게 하고 다녔습니다. 학점이 부족해 졸업이 안 되자 조건부로 입사해 어느 컴퓨터 회사 기획부에서 큰 작품을 만들어 시장에 내놓기도 했습니다.
그는 부모가 미국에 가서 공부하라고 해도 듣는 척 하지 않았습니다. 그렇게 한 2년을 보낸 다음 그는 미국 갈 생각을 하고 아버지에게 인테리어 디자인을 공부하고 싶다고 말했습니다. 그의 아버지는 두 번 사는 인생 아니니까 하고 싶은 대로 하라고 승낙했습니다.
그는 인테리어 디자인학원에 8개월쯤 다녔습니다. 그는 작품집을 만들어 미국 대학에 지원했습니다. 열 곳을 지원했는데 아홉 곳에서 입학 허가서가 왔습니다. 그는 뉴욕에 있는 RISD(Rhode Island School of Design) 학부에서 인테리어 디자인 공부를 시작했습니다. 1년 반쯤 지나 뉴욕에 있는 프랫 인스티튜트(Pratt Institute) 총장이 전화를 걸어와 그는 프랫 인스티튜트 대학원 과정으로 옮겼습니다. 거기서 그는 all A를 받고 졸업했습니다. 졸업 때 학과 사무실 벽 세 곳은 온통 그의 작품으로 꾸며졌습니다. 그는 디자인 회사에 취직하여 잘 나가고 있었습니다.
어느 날 새로운 생각이 떠올랐습니다. 프랫 인스티튜트에서 부전공으로 공부했던 조명 디자인(Lighting Design)에 관심이 갔습니다. 장학금을 받고 뉴욕에 있는 Parson School에서 조명을 전공했습니다. 그는 지금 미국에서 가장 큰 Horton Lees Brogden Lighting Design 회사에서 시니어 디자이너로 일하고 있습니다. 그는 상도 여러 차례 받았습니다.
2016년 4월 영국의 한 조명 잡지가 ‘40세 미만으로 세계 조명디자인 분야를 이끌어 가고 있는 40인’을 선정했습니다. 그는 그 40인에 선정되었습니다. 그는 내 딸입니다. (자랑을 위한 글로 받아주시지 않길 바랍니다.) 내 딸은 끊임없이 자신의 능력을 계발해 왔습니다.
시대정신을 갖추세요1
나는 미국에서 공부를 마치고 전남대 상경대에서 가르치기 시작했습니다. 나는 어깨가 으쓱했습니다. 젊은이들에게 새로운 지식을 심어준다는 것이 얼마나 신나는 일인가!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나는 내 자신이 한낱 ‘지식 전수기(傳授機)’에 지나고 마는 것은 아닐까 걱정되었습니다. ‘어떻게 한 경제학 공부인데!’
힘든 나날을 보냈습니다. 책 속에 빠져들기 시작했습니다. 1980년 가을로 기억됩니다. 한 해 전에 출간된 밀튼 프리드먼의 『선택의 자유』(Friedman, M.&R.(1979), Free to Choose)가 손에 들어왔습니다. 부리나케 읽어갔습니다.
어둠속에서 밝은 세상으로 뛰쳐나온 느낌이었습니다. 프리드먼의 구구절절 명쾌한 자유시장경제 지지 논리는 나를 감동의 세계로 빠뜨렸습니다. 이를 계기로, 밀튼 프리드먼의 논문과 책들을 대부분 다 읽어 치웠습니다. 그러는 사이 어느덧 나는 자유주의 시장경제 옹호자가 되어갔습니다. 사실 나는 자유주의 국가 미국에서 공부했지만 어느 누구에게서도 자유주의 시장경제를 배워본 적이 없습니다. 그래서 나는 내 자신이 ‘자생적(自生的) 자유주의자’임을 자처합니다.
『선택의 자유』로부터 나는 큰 선물을 받았습니다. 프리드먼은 개인의 자유가 얼마나 소중한 것이고, 개인의 자유는 자유시장경제에서만 보장된다는 것을 일깨워 주었습니다. 더군다나 나는 지식 전수기에서 벗어날 수 있게 되었습니다. 1980년 단국대로 자리를 옮긴 나는 계속해서 자유시장경제에 관한 글들을 써내려갔습니다. 내가 쓴 90여 편의 논문과 30여 권의 책들은 한 마디로, 모두가 자유시장경제에 관한 것들입니다. 나는 자유시장경제만이 우리를 잘살게 해준다는 확신을 가졌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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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남 이승만 대통령은 옳았다. 한미동맹 체결을 통해 지리적으로 멀고 먼 자유시장국가 미국과 한국을 한 편으로 묶어놓았기 때문이다. |
시대정신을 갖추세요2
세계역사는 자유를 얻기 위한 투쟁의 역사입니다. 한 세대를 30년으로 볼 때 세계역사를 통틀어 전쟁 없는 세대는 한 번도 없었다고 합니다. 세계역사는 오랜 투쟁의 과정을 거쳐 오늘날처럼 자유, 구체적으로 개인의 자유가 넘쳐흐르는 시대에 이르렀습니다.
그러면 개인의 자유는 왜 중요할까요? 개인의 자유는 인류 발전을 가져온 원동력입니다. 개인들은 자유의 토양 속에서만 자신들의 에너지를 마음껏 발휘할 수 있습니다. 개인들은 자유의 토양 속에서만 기업가정신을 발휘할 수 있습니다. 자유의 토양 속에서만 발휘될 수 있는 기업가정신은 경제 영역뿐만 아니라 다른 영역, 예를 들면 종교계, 언론계, 학문계 등에서도 발휘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역사는 발전할 수 있었습니다.
빌 게이츠를 봅시다. 그는 소프트웨어 ‘윈도우’를 개발하여 세계 사람들이 인터넷을 쉽게 사용할 수 있게 했고, 이 공로로 1994년 이후 사실상 세계 1등 부자 자리를 굳게 지켜오고 있고, 부부가 함께 ‘빌 & 멜린더 게이츠재단’을 세워 세계 역사상 가장 많이 베풀어 오고 있습니다. 빌 게이츠는 개인의 자유를 허용하는 미국 같은 나라에서만 태어날 수 있는 사람입니다. 따지고 보면, 미국의 힘은 개인의 자유에 바탕을 두고 있습니다.
나는 1990년 7월 구소련을 방문했습니다. 한 호텔에 숙소를 정한 우리 일행은 1시가 넘으면 점심을 놓친다는 가이드의 말을 되새기며 오후 1시 직전 식당으로 달려갔지만 셔터문은 내려지고 있었습니다. 우리는 점심을 굶어야 했습니다. 그래서 소련은 역사 속으로 사라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나는 2005년 7월 러시아 이르쿠츠크의 한 호텔에 숙소를 정한 후 저녁에 앙가라강 주변을 산책했습니다. 강 주변에는 산책을 즐기는 사람들로 가득 찼고, 스케이팅, 디스코텍, 맥주, 음료수, 보트, 낚시 등 세계 어디에서나 즐길 수 있는 시장들이 즐비하게 늘어서 있었습니다. 사회주의에서 시장경제로 바뀐 다음 이르쿠츠크는 어디에서나 개인의 자유가 넘쳐흐르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역사 속으로 사라진 구소련 바로 그 땅에 러시아가 들어서서 시장경제로 발전해 오고 있습니다.
자유주의 발전으로 세계 거의 모든 사람들은 경제적 자유를 누릴 수 있게 되었습니다. 경제적 자유의 확대는 세계 거의 모든 곳에서 경제력 분산과 정치력 분산을 가져왔습니다. 이제 세계의 거의 모든 곳에서 가난한 사람들도 기업가가 될 수 있고, 보통 사람들도 대통령이나 총리가 될 수 있습니다. 이 같은 변화를 아는 것이 곧 시대정신을 갖추는 일입니다.
이승만 대통령이 옳았습니다
나는 가끔 내 자신에게 이런 질문을 던집니다. ‘만일 내가 남쪽에서 태어나지 않고 북쪽에서 태어났더라면 오늘날과 같은 내가 과연 존재할 수 있을까?’ 이 질문은 나의 성장 과정과 관련됩니다.
나는 시골 한학자의 5남매 가운데 넷째로 태어났습니다. 내가 초등학교 1학년이던 1947년, 나의 큰 형은 20살의 나이에 혁명가의 꿈을 품고 북으로 갔습니다. 큰 형은 이미 18세 나이에 만주 벌판을 휘젓고 다니기도 했습니다. 내가 20살이 되던 해 어머니는 아들을 그리워하는 마음으로 가슴에 못이 박힌 채 돌아가셨습니다.
어머니의 아픈 마음을 줄곧 곁에서 지켜본 나는 이념이 무엇이란 걸 어렴풋이 깨달을 때까지 형은 왜 북으로 가야만 했을까 오랫동안 의문을 달고 살았습니다. 내가 20대 초반 문학도를 꿈꾸며 헤밍웨이, 바이런 등을 읽고 나서야 나의 큰 형도 1940년대의 세계적 사회주의 열병을 앓았을 것이라는 생각을 어렴풋이 갖게 되었습니다.
오랜 시간이 흘러, 나는 큰 형의 핏줄을 제3국에서 만났습니다. 큰 형의 핏줄들은 북에서 참으로 비참하게 살아가고 있었습니다. 조카들의 비참한 삶을 통해 나는 남쪽에서 태어난 것이 얼마나 다행인가를 한 번 더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우리들의 선배들이 잘못하여 반쪽 낸 나라의 반쪽 하나를 지리적으로는 멀고 먼 자유시장국가 미국 편에 남겨둔 것이 얼마나 다행인가를 다시 한 번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이승만 대통령이 옳았습니다.
미국이 없었다면 세계는 과연 자유를 누릴 수 있게 되었을까요?
개인의 자유의 중요성, 나의 가족사와 관련하여 미국 이야기를 빼놓을 수 없습니다. 만일 미국이라는 나라가 없었다면 세계는 과연 오늘날처럼 자유를 누릴 수 있게 되었을까요? 미국은 1620년에 영국에서 메이플라워(Mayflower)호를 타고 건너간 102명의 청교도들이 ‘만든’ 나라입니다.
미국은 이민 초기에는 사람이 적어 공동체인 타운제도(town system)를 실시했습니다. 그러다가 인구가 증가하자 1624년에 공동체 구성원들에게 경작지 1에이커씩이 분배되었습니다. 이어 1626년에는 각 호마다 20에이커씩이 분배되었습니다. 이런 식으로 토지는 계속 분배되어 갔고, 결국 미국은 토지의 사적소유 확대를 통해 시장경제의 핵심 원리인 사적소유제도의 기초가 마련되었습니다. 이처럼 만들어진 나라 미국은 시작부터 자유시장경제로 출발했습니다.
미국은 1776년에 13개 주(州)가 연합하여 독립한 나라입니다. 건국 초기에 미국을 지배한 사상은 ‘하나님 앞에서의 평등’이었습니다. 미국은 청교도들이 세운 나라여서 ‘하나님 앞에서의 평등’ 사상이 쉽게 뿌리 내릴 수 있었습니다. 이 사상은 토머스 제퍼슨이 작성한 미국 독립선언문의 첫 문장에 잘 나타나 있습니다―“사람은 평등하게 태어났다(man is born equal.).”
그 후 ‘하나님 앞에서의 평등’ 사상은 ‘기회의 평등’ 사상으로 발전해 갔습니다. 이를 계기로 미국은 ‘자유, 자유기업, 경쟁, 자유방임, 시장경제’ 등을 강조하는 나라로 발전해 갔습니다. 이 결과 미국은 현재 세계에서 대표적인 자유시장국가로 자리 잡았고, 19세기부터 현재까지 자유시장경제에서만 찾아볼 수 있는 수많은 자선활동이 쏟아져 나왔습니다. 카네기재단, 록펠러재단, 포드재단, 빌게이츠재단 등이 그 예입니다.
미국의 35대 대통령 존 에프 케네디의 취임사는 명문으로 유명한데, 그 내용은 인간의 자유를 강조한 것입니다. 필자가 그의 묘비에서 메모한 구절을 인용합니다.
“나의 전 세계 친구들이여,
미국이 그대를 위해 무엇을 할 것인가를 묻지 말고
우리가 다 함께 인간의 자유를 위해 무엇을 할 수 있는가를
물어보십시오.”
자유를 강조하는 나라 미국은 대통령 취임식 때 대통령이 성경 위에 손을 얹고 취임 선서를 합니다. 미국의 16대 대통령 에이브러햄 링컨은 1863년에 흑인 노예를 해방시켰고, 마틴 루터 킹 목사는 흑인의 인권을 주장하다가 1964년에 흉탄에 쓰러졌고, 버락 오바마는 미국 최초의 흑인 대통령으로 2009년에 취임했습니다. 만일 ‘하나님 앞에서의 평등’ 사상 위에 세워진 미국이라는 나라가 없었다면 세계는 과연 오늘날처럼 자유, 구체적으로 개인의 자유를 누릴 수 있고, 자유시장경제로 발전할 수 있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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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수출만이 살 길이다. 팔 수 있는 것은 뭐든지 다 팔아라'고 강조한 박정희의 수출진흥정책은 개방정책이었다. 개방은 시장경제의 핵심 키워드다. 박정희는 1960년대에 개방정책을 실시하여 한국을 잘살게 한 시장경제 전도사다. 박정희 대통령이 우리를 잘 살게 했다. |
박정희 대통령이 우리를 잘 살게 했습니다
우리나라는 1961년에 1인당 국민소득이 89달러로 세계 125개국 가운데 101번째로 가난한 나라였습니다. 당시 북한은 320달러로 세계 50위 안에 든 잘사는 나라였습니다. 그 무렵 한국은 ‘보릿고개’를 넘지 못하고 굶어죽는 사람이 적지 않았습니다.
육군 소장 박정희는 1961년 5월 16일에 쿠데타로 정권을 잡고, 1963년에 민정 이양하면서 5대 대통령에 취임했습니다. 그는 1963년부터 1979년 10월 26일에 시해(弑害)될 때까지 다섯 차례에 걸쳐 5개년 경제계획을 추진하여 고도성장을 이룩했습니다. 그는 수출주도형 개방경제정책을 추진하여 한국이 경제대국으로 가는 길을 닦았습니다.
한국이 ‘보릿고개’를 넘지 못하고 굶어죽는 사람이 그치지 않던 시절에 미국 원조가 보릿고개를 도왔습니다. 미국 원조가 들어오면 한국정부는 동일한 액수의 화폐를 특별계정에 적립했습니다(이는 대충자금(對充資金)이라고 불렸음). 대충자금은 한미 합의에 따라 10∼20%는 한국 내 미국기관이 사용하고, 나머지 80∼90%는 한국정부가 사용했습니다. 한국정부는 이 돈의 대부분을 생필품 수입을 위해, 나머지는 미국산 무기 구입을 위해 사용했습니다. 미국 원조는 1954년에 시작하여 1970년에 끝났습니다. 미국 원조는 PL480에 따라 2억 264만8천 달러, 여기에다 국제개발처(AID) 차관을 포함하면 20억 8834만 달러에 이르렀습니다.
미국 원조는 양면성 때문에 논쟁의 대상이 되어왔지만 중요한 것은 한국이 미국 원조 덕분에 보릿고개를 넘고, 정부가 재정파탄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는 점입니다.
박정희는 쿠데타를 일으키면서 5개항의 혁명공약을 발표했습니다. 네 번째 공약은 이렇습니다―“절망과 기아에 허덕이는 민생고를 시급히 해결하고 국가 자주경제 재건에 총력을 경주한다.”
그는 군정 시절인 1962년에 1차 5개년 경제개발계획을 세웠는데, 문제는 돈이었습니다. 1961년 11월에 정래혁 상공부장관이 이끈 한국 대표단이 서독과 협상을 벌인 끝에 1억 4000만 마르크의 차관을 제공받기로 합의했습니다. 한국 정부는 독일에 인력을 수출하고, 이들의 월급을 3년간 독일 은행에 예치한다는 조건으로 서독 차관의 지불 보증을 받았습니다. 이렇게 해서 1차 5개년계획이 실행에 들어갔습니다. 한국은 서독 파견 광부를 모집했습니다. 고운 손이 결격 사유가 될까 봐 연탄에다 손을 비벼 일부러 거칠게 만든 지원자도 있었습니다. 광부 1진 123명이 1963년 12월에 독일에 도착했습니다.
일 년 후 박정희는 서독을 방문했습니다. 그는 광부들 앞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여러분, 나는 지금 몹시 부끄럽고 가슴 아픕니다. 대한민국 대통령으로서 무엇을 했나 가슴에 손을 얹고 반성합니다. (중략). 나에게 시간을 주십시오. 우리 후손만큼은 결코 이렇게 타국에 팔려 나오지 않도록 하겠습니다. 반드시…, 정말 반드시….”
이 날 이 자리는 박정희 대통령과 참석한 광부들이 한 데 엉켜 온통 눈물바다가 되었습니다.
박정희의 업적을 봅시다. 첫째, 박정희는 경제개발계획으로 고도성장을 이룩했습니다. 박정희는 1963년부터 1차 5개년계획 실행에 들어갔지만 돈이 문제였습니다. 한국 정부는 1963년에 서독에 광부를 파견하고, 서독으로부터 차관을 제공받게 되었습니다. 1966년에는 서독과 정식으로 특별 고용계약을 맺고 광부 3천 명, 간호사 3천 명을 더 파견했습니다. 1977년까지 독일로 간 광부는 7천932명, 간호사는 1만226명에 이르렀습니다. 이들은 기본생활비를 제외하고 월급의 70~90%를 한국으로 송금했습니다. 그 돈은 연간 약 5천만 달러로, 한국 국민총생산의 2% 정도에 이르렀습니다. 이 돈이 제1차 5개년계획을 실행하는 데 밑거름이 되었습니다.
둘째, 박정희는 한일국교 정상화로 경제발전의 불씨를 당겼습니다. 1948년에 한국 정부가 수립된 후 일본과의 국교정상화는 역대 지도자들에게 ‘뜨거운 감자’였습니다. 뜨거운 감자는 박정희에게 굴러왔습니다. 박정희는 한일국교 정상화가 국익에 도움이 된다고 믿었습니다. 군정시절인 1961년에 박정희는 미국 방문 길에 일본에 들렀습니다. 그는 일본에서 국민의 여론과는 달리 한일국교 정상화 의지를 밝혔습니다. 이로 인해 나라 안팎이 떠들썩해졌습니다. 정부는 학생과 시민의 시위를 막기 위해 비상계엄령까지 선포했습니다. 1965년 6월 22일 마침내 ‘대한민국과 일본 간의 기본관계에 관한 조약’과 이에 부속된 협정 4개 및 문서 25개가 서명되었습니다. 이로써 한국은 무상공여 3억 달러, 10년에 걸쳐 균등 분할되는 유상 재정 차관 2억 달러, 양해 사항으로 민간 차관 3억 달러를 받기로 했습니다.
한일국교정상화가 이루어진 1965년 나는 대학교 4학년이었습니다. 나는 학생들과 함께 당시 전남 도청 앞까지 진출하여 투석전을 벌였습니다. 심지어 다른 대학 캠퍼스까지 달려가 한일국교정상화에 반대하자고 선동했습니다. 그러나 내 생각이 옳지 않았다는 것을 나는 1971년(?) 미국 유학 중에 깨달았습니다. 당시 박정희 대통령은 미국에 대해 자립할 생각이었습니다. 이를 감지한 미국이 즉각 쌀 원조를 중단한다고 발표했습니다. 그 다음날 서울에서 공부하던 지방 학생들은 귀향하고 말았습니다. 하숙집이 문을 닫아야 했기 때문입니다. 당시 우리 경제는 그토록 취약했습니다. 이 사건으로 나는 지금까지 애국자가 되어 왔습니다.
한일국교 정상화의 결과 한국은 일본에서 들어온 돈으로 1966년에 무려 12.2%의 성장률을 달성했고, 제1차 5개년계획을 연평균 8.5%로 초과 달성했고, 제2차 5개년계획 목표를 2년 앞당겨 1969년에 초과 달성할 수 있었습니다. 박정희의 선택은 옳았습니다.
셋째, 박정희는 1965년 베트남 파병으로 ‘한강의 기적’을 이루는 데 기여했습니다. 2005년에 공개된 베트남전 관련 외교 문서에 따르면, 베트남 파병은 박정희의 제안으로 이루어졌다고 합니다. 베트남전 참전으로 한국이 얻게 된 경제적 이익은 미국의 군사 원조 증가분 10억 달러, 미국의 한국군 파월 경비 10억 달러, 베트남 특수 10억 달러, 기술 이전 및 수출 진흥 지원 20억 달러 등 모두 50억 달러였습니다.
베트남 파병은 한국의 과학기술 발전에도 기여했습니다. 1965년 5월에 박정희는 워싱턴에서 존슨 대통령과 정상회담을 가졌습니다. 이 회담은 미국이 한국의 베트남 파병에 감사를 나타내기 위해 마련된 자리였습니다. 존슨 대통령은 한국 지원에 감사하면서 공과대학을 하나 지어 주겠다고 제안했습니다. 이렇게 해서 최형섭 원자력연구소장이 주역이 되어 한국과학기술연구소(KIST)와 뒤이어 대전의 대덕연구단지가 설립되었습니다.
넷째, 박정희는 ‘수출만이 살 길이다’며 ‘팔 수 있는 것은 뭐든지 다 팔아라’고 수출을 독려했습니다. 1963년에 수출액은 겨우 8,680달러였는데 박정희의 독려에 힘입어 1964년 11월 30일에 1억 달러를 넘어섰습니다. 이 날이 ‘수출의 날’(지금은 ‘무역의 날’로 부름)로 지정되어 지금까지 이어져 오고 있습니다. 박정희는 15년 동안 이 회의를 매달 주재했습니다. 박정희의 수출진흥정책에 힘입어 한국은 현재 경제규모 세계 11위, 무역규모 세계 6위의 경제대국으로 발전했습니다.
다섯째, 박정희는 ‘새마을운동’의 원조입니다. 그는 도농(都農) 격차에 따른 농촌개혁운동으로서 새마을운동을 추진했습니다. 박정희가 1970년 4월 22일에 지방행정기관장 회의에서 한 연설을 계기로 ‘새마을운동’이 전개되었다고 합니다. 새마을운동은 급속한 산업화와 공업화로 도시와 농촌 간 불균형이 심화되어 갈 때 완충지대 역할을 했고, 농촌 환경 개선과 소득 증대에도 크게 기여했습니다. 새마을운동은 중국이 수입하여 농촌에 보급했습니다. 아프리카 여러 나라의 농촌 지도자들이 한국에서 연수를 마치고 돌아가 한국말로 “우리도 한 번 잘 살아보세” 하고 외치는 모습을 TV를 통해 볼 때마다 콧잔등이 찡해지곤 합니다.
박정희의 업적은 ‘굶어죽는 나라 한국을 가난으로부터 탈출시켜 경제대국으로 가도록 이끌었다’고 표현할 수 있습니다. 이 공로로 박정희는 산업화 세력에게는 ‘국가를 구한 영웅’으로 칭송받고, 일반 국민으로부터는 ‘국민이 존경하는 지도자 1위’로 평가받습니다. 반면에 그는 민주화 세력에게는 ‘민주화를 막은 독재자’로 평가받습니다. 이처럼 상반된 평가는 시간이 지나면 조정되리라고 기대됩니다. 여기에서는 한 때 민주화 세력의 대표 격이었던 두 사람의 평가를 소개합니다.
1970년대 대표적 마르크스주의 경제학자였다가 전향한 안병직 전 서울대 교수는 박정희를 이렇게 평가했습니다―“과거에 그를 타도해야 할 독재자로 봤지만 이젠 한국 근대화를 이끈 지도자로 본다. 박정희 식 군부 독재가 아니었다면 경제발전은 어려웠을 것이다.”
‘급진 좌파의 주역으로 학생운동을 주도했고, 위장취업 1세대였고,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두 번이나 감옥에 갔다’고 자신을 밝힌 김문수 전 경기도 지사는 시장경제 예찬가로 잘 알려져 있습니다. 그는 박정희를 이렇게 평가했습니다―“대한민국은 ‘수출입국(輸出立國)’을 통해서 발전했다. …. 이는 중국의 경제발전이 잘 보여주고 있다. 모택동 시대에는 자립경제가 있었는지 몰라도, 인민은 빈곤 속에서 허덕일 수밖에 없었다. 등소평 시대에는 개혁개방정책을 도입함으로써, 폭발적으로 성장하는 지금의 중국경제를 만들었다. 김일성의 주체사상은 북한 인민을 굶기고 있다. 박정희의 수출입국은 대한민국 국민이 웰빙하고, 다이어트할 수 있도록 만들었다.” 자기를 감옥에 가둔 박정희에 대한 김문수의 평가는 우리를 숙연케 합니다.
‘수출만이 살 길이다. 팔 수 있는 것은 뭐든지 다 팔아라’고 강조한 박정희의 ‘수출진흥정책’을 요즘 말로 바꿔 쓰면 ‘개방정책’입니다. ‘개방’은 시장경제의 핵심 키워드입니다. ‘개방’으로 성공한 나라는 리콴유의 싱가포르, 덩샤오핑의 중국, 아일랜드 등입니다. 박정희는 이미 1960년대에 개방정책을 실시하여 한국을 잘살게 한 시장경제 전도자입니다. 박정희 대통령이 우리를 잘 살게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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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세상은 빛의 속도로 변하고 있다. 빛의 속도로 변하는 세상에서 기회는 준비된 사람에게만 온다./자료사진=미디어펜 |
자유시장경제가 우리를 잘살게 합니다
인류의 사상 가운데 핵심적 가치를 개인의 자유에 두고 발전해 온 사상이 자유주의입니다. 자유주의는 르네상스, 종교개혁, 과학혁명, 자본주의 발달에 힘입어 중세적 사회 특성을 근대적인 것으로 변혁시킴으로써 개인의 자유를 확대하는 데 기여했습니다. 그 후 미국의 독립혁명과 프랑스의 대혁명은 개인의 자유 보장에 필요한 제도 도입의 기반을 마련했고, 영국을 중심으로 일어난 산업혁명은 자유주의 발전과 개인의 자유 확대에 기여했습니다. 이 과정에서 사회주의가 등장하여 지구의 약 3분의 1 지역에서 70여 년 동안 실험했지만 개인의 자유를 억압한 탓에 역사 속으로 사라지고 말았습니다. 그 후 개인의 자유를 허용하는 자유주의는 지속적으로 발전하여 오늘에 이르렀습니다.
이렇게 발전해온 자유주의의 실천적 측면인 자유시장경제가 우리를 잘살게 해준다는 확신을 나는 갖고 있습니다. 그래서 나는 자유주의자, 자유시장주의자가 된 것입니다.
기회는 준비된 사람에게만 옵니다
세상은 빛의 속도로 변하고 있습니다. 한 때 한국의 대표적 기업가로 이야기된 이병철·정주영 회장은 어느 날 살며시 우리 곁을 떠난 것 같습니다.
김정호 교수는 최근 『대한민국 기업의 탄생』(2016, 북오션)이라는 책을 썼습니다. 이 책 본문의 첫 문장은 <기업가, 산업혁명을 이끌다>로 시작하고, 그 첫 문장은 “지금 우리 시대에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기업가를 꼽으라면 누구인가요?”로 시작합니다.
김정호 교수의 대답입니다. ‘축산의 기업화에 성공한 하림그룹의 김흥국 회장, 제빵 분야에서 프렌차이즈 혁명을 일으킨 SPC그룹의 허영인 회장, 한국인의 금융투자 방식을 혁명적으로 변화시킨 미래에셋의 박현주 회장, 주먹구구식이던 대중가요계를 치밀한 예측과 계획과 훈련이 지배하는 산업으로 바꾸어낸 이수만 SM엔터테인먼트 프로듀서.’ (나는 이 책이 이 시대 젊은 세대의 필독서라 믿고 내 아들에게 사다 줬습니다.)
김 교수의 자문자답에 동의하십니까? 나는 동의합니다. 세상이 빛의 속도로 변하고 있다는 것을 믿기 때문입니다. 빛의 속도로 변하는 세상에서 기회는 준비된 사람에게만 옵니다. 그래서 나는 빌 게이츠 이야기를 즐겨 씁니다. 다음은 그가 쓴 책에서 인용한 대목입니다.
“1975년 폴과 나는, 헛간에서 뮤지컬 연습을 하면서 스타의 꿈을 키우는 영화 속의 주인공처럼, 젊은 패기 하나만으로 회사를 차렸습니다. 우리에게는 꾸물거릴 시간이 없었습니다. 작은 컴퓨터를 위한 베이식 프로그램을 개발하는 것이 우리의 첫 사업이었습니다. 우리는 컴퓨터의 작은 기억장치에 많은 능력을 우겨넣어야 했습니다.
좋은 소프트웨어를 만들려면 상당한 집중력이 필요합니다. 알테어를 위한 베이식을 짜는 동안 내 몸은 파김치가 되었습니다. 생각에 집중할 때 나는 방안을 왔다 갔다 하는 버릇이 있습니다. 그렇게 하면 잡념 없이 하나의 문제를 파고드는 데 도움이 됩니다.
1975년 겨울 나는 기숙사 방안을 수없이 맴돌았습니다. 우리는 밤낮을 잊고 살았습니다. 책상에 앉아 있거나 바닥에 엎드려 있다가 그대로 잠이 들기 일쑤였습니다. 어떤 때는 하루 종일 아무것도 먹지 않았고, 온종일 아무도 만나지 않았습니다. 베이식은 5주 만에 완성되었습니다. 드디어 세계 최초의 중형 컴퓨터 소프트웨어 회사가 탄생했습니다. 이번에는 회사이름을 ‘마이크로소프트’로 지었습니다.
회사를 세우려면 많은 걸 희생해야 합니다. 그러나 지금 뛰어들지 않으면 장래의 소형 컴퓨터를 위한 소프트웨어 세계에 진출할 수 있는 기회도 영원히 놓치게 된다는 것이 우리의 판단이었습니다. 1975년 폴은 프로그래머 일을 그만두었고, 나는 대학에 휴학원을 제출했습니다.”
빌 게이츠는 이어서 다음과 같이 썼습니다.
“나는 열아홉 살의 나이에 나름대로 앞날의 세계를 점치고 내가 옳다고 여긴 방향에 나의 미래를 걸었습니다. 결과적으로 나의 판단은 옳았습니다.”(Gates Ⅲ, William, H.(1995), The Road Ahead 중에서)
젊은이 여러분들. “일기를 쓰세요, 시대 변화를 캐치하세요, 자신의 능력을 계발하세요, 시대정신을 갖추세요, 이승만 대통령이 옳았습니다, 미국이 없었다면 세계는 자유를 누릴 수 없었을 것입니다, 박정희 대통령이 우리를 잘 살게 했습니다, 자유시장경제가 우리를 잘살게 합니다, 기회는 준비된 사람에게만 옵니다.” 태양을 향해 쉬지 말고 돌을 던지세요. /박동운 단국대 경제학과 명예교수
(이 글은 지난 달 30일 자유경제원이 리버티홀에서 개최한 '원로학자가 들려주는 인생이야기 시리즈 제1차 세미나-박동운 교수가 젊은이들에게 들려주는 인생 이야기'에서 박동운 단국대 명예교수가 발표한 발제문 전문이다.)
[박동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