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70년 11월 13일 분신자살한 노동자 전태일의 어머니 이소선씨가 장례식에서 아들의 영정을 껴안고 오열하고 있다. |
1. 《전태일 평전》의 함정
조영래 변호사가 쓴 《전태일 평전》(2009 신판)을 읽으면 전태일, 그리고 당시 평화시장 근로자들이 겪은 삶의 조건에 독자들은 피가 거꾸로 솟지 않을 수 없다. 어린 전태일에게 주어진 삶의 무게는 너무나 버거운 데 반해 그를 도와주는 사회적 장치는 전혀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책은 전태일로 대표되는 당시 노동자들이 엄청난 ‘착취’를 당했다는 인식을 가슴 속 깊이 심어준다.
천신만고 끝에 전태일은 1964년 봄 그의 나이 16세에 평화시장의 ‘시다’라는 일자리를 겨우 구한다. 그러나 가족의 생계는 물론이고 심지어는 스스로조차도 돌보기 어려운 악조건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마침내 그는 일자리를 얻은 지 만 6년 반 만인 1970년 11월 13일 22세의 나이에 열악한 근로조건에 저항하는 최후의 수단으로 분신자살을 선택한다. 이러한 《전태일 평전》의 내용 으로 전태일은 당시 ‘착취’당하던 우리나라 노동자를 상징하는 인물로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그러나 《전태일 평전》을 찬찬히 비판적으로 분석해 보면 과연 이러한 평가가 정당한가에 대한 의구심을 갖게 하는 내용이 많다. 가장 중요한 문제로 지적되어야 할 내용은 책 전체에 숫자로 등장하는 돈의 가치다. 숫자는 객관적으로 보인다. 또한 모든 액수가 당시의 물가로 표시되어 46년이 지난 2016년 오늘날의 시점에서 읽으면 그 액수가 정말이지 터무니없이 작다는 느낌을 갖게 한다. 물론 이 문제는 《전태일 평전》이 처음 우리말로 출판된 1983년을 기준으로 생각하더라도 마찬가지다. 또한 물가가 우리보다 훨씬 비싼 일본에서 1978년 출판된 책에 한국 돈 ‘원’으로 표시된 숫자는 더욱더 그러한 효과를 가졌을 것이다.
만약 독자들이 2016년 오늘날의 기준과 전태일이 살았던 1960년대 후반의 기준을 오가며 돈의 가치를 따져보는 번거로움을 감수할 생각을 잠시라도 한다면 그나마 다행이다. 그러나 이 문제에 제대로 접근하기 위해서는 물가상승률과 GDP deflator를 조합할 수 있는 경제학 지식이 필요하다. 그렇기 때문에 평범한 독자에게 이 문제는 여전히 어려운 문제로 남을 수밖에 없다.
이 글에서는 우선 《평전》에 등장하는 당시 돈의 가치, 즉 월급을 전태일의 직장 경력이동, 그에 따른 임금상승과 교차시키며 분석하고자 한다. 조영래 변호사의 화려한 수사 때문에 대부분의 《평전》 독자는 전태일이 어린 나이에 엄청난 ‘착취’를 당하였고 또한 그것이 전태일의 경우에만 해당되는 일이 아니라 당시 노동자들 모두가 겪은 일이라고 생각하기 쉽다. 이 글은 바로 이 대목을 《평전》의 내용에 기초해 본격적으로 따져보는 글이다.
다음, 이 글은 전태일을 분신자살이라는 선택으로 몰고 갔던 당시의 상황을 입체적으로 접근해 보고자 한다. 혹시 조영래의 《평전》은 전태일의 노동운동 투신과 분신에 관해 있었던 사실을 의도적으로 왜곡 및 축소하고 있지는 않은가? 조영래의 《평전》을 청계천 평화시장의 노동운동을 증언하는 다른 기록과 교차시킬 때 앞뒤가 맞지 않는 부분은 없는가? 만약 그렇다면 조영래의 《평전》은 있는 그대로의 전태일을 그리기보다는 특정한 목적을 위해 사실을 왜곡한 글이라는 비판을 피할 수 없다.
마지막으로, 이 글은 전태일의 선택을 당시를 살았던 다른 사람들의 선택과 비교하여 그 의미를 객관적 혹은 상대적으로 조명해 보고자 한다. 그의 극단적인 선택, 즉 분신자살이 과연 조영래의 《평전》이 말하듯 정말 불가피한 선택이었는지를 재검토하기 위해서다. 물론 이 작업을 하기 위해서는 비교의 대상을 전태일과 비슷한 경우로 국한해야 함은 더 말할 필요도 없다.
2. 전태일의 평화시장 경력과 임금상승: ‘착취’라고?
여기서는 《평전》에 제시된 여러 가지 근로조건 문제 가운데 특히 전태일의 경력이동 및 임금상승 문제를 집중적으로 살펴본다. 물론 모든 자료는 《평전》에 제시된 숫자를 근거로 논의한다. 구체적인 사실의 확인이 필요한 내용은 2009년 신판 《전태일 평전》의 페이지 숫자를 괄호 속에 밝혀 독자들이 확인하기 쉽도록 구성했다.
《평전》에 따르면 전태일은 1964년 봄 ‘삼일사’의 ‘시다’로 취직하면서 월급을 1500원 받았다(85~87쪽). 또한 그는 1년 후 1965년 같은 회사의 ‘미싱보조’가 되면서 월급이 두 배로 뛰어 3000원이 되었다(88쪽). 그로부터 다시 1년 후인 1966년 가을 그는 회사를 ‘통일사’로 옮기며 ‘미싱사’로 승진하여 월급이 7000원으로 상승한다(109쪽).
이를 정리해 보면 전태일은 ‘시다미싱보조’ 승진 사다리를 1년 만에, 그리고 ‘미싱보조미싱사’라는 다음 단계의 승진 사다리를 다시 1년 만에 올라갔음을 알 수 있다. 또한 그러한 승진의 결과 월급이 만 2년 동안 무려 4.6배 상승하였음도 알 수 있다.
이와 같은 전태일의 경력 상승은 《평전》이 기술하고 있는 평화시장의 일반적 경력이동 패턴과 비교하여도 매우 빠른 경우다. 《평전》은 당시 평화시장에서 ‘시다’로 시작해 ‘미싱보조’로 승진하는 데 필요한 시간을 1.5년에서 2년, 그리고 ‘미싱보조’에서 ‘미싱사’로 승진하는 데 필요한 시간을 3~4년이라고 말하고 있다(82~83쪽). 다시 말해 《평전》은 당시 평화시장의 승진 사다리에서 ‘시다’에서 ‘미싱사’까지 올라가는 데 최소 4.5년 최대 6년이 필요하다고 기술하고 있다.
이 승진의 사다리를 《평전》에 따르면 전태일은 불과 2년 만에 모두 올라갔다. 그러나 전태일은 이에 만족하지 않는다. ‘미싱사’보다는 ‘재단사’가 훨씬 더 좋은 대우를 받는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그는 ‘재단사’가 되기 위한 노력을 바로 이어서 시도한다. ‘미싱사’가 되고 난 직후인 1966년 추석 대목 후 그는 회사를 ‘한미사’로 옮기며 ‘재단보조’가 된다(111쪽).
그는 ‘재단보조’가 ‘미싱사’보다 대우가 훨씬 나쁘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재단보조’를 거쳐야 ‘재단사’가 될 수 있다는 더 중요한 사실도 그는 물론 잘 알고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전태일은 그러한 선택을 주저 없이 감행할 수 있었다. ‘재단보조’가 된 그의 월급은 비록 3000원으로 줄었지만(110쪽), 그로부터 반 년 후인 1967년 2월 마침내 그는 같은 회사인 ‘한미사’에서 ‘재단사’로 승진한다(117쪽). 평화시장에 ‘시다’로 들어온 지 딱 3년 만의 일이다.
《평전》은 그가 재단사가 된 후 받은 월급이 얼마인지 분명히 밝히고 있지 않다. 그러나 《평전》은 여러 곳에서 당시 평화시장 ‘재단사’의 월급이 1만5000원부터 3만원까지의 범위 내에 있었음을 증언하고 있다(98쪽 및 261쪽). 그러므로 이 범위 안에서 전태일이 갓 재단사로 승진한 직후, 즉 1967년 3월에 받은 월급이 《평전》이 제시한 임금 범위의 하한가인 1만5000원이라고 추정하는 것은 전혀 무리가 없다.
이를 전제로 《평전》에 나타난 전태일의 경력이동과 임금상승을 종합적으로 정리해 보자. 전태일은 16세가 되던 1964년 봄 평화시장에서 ‘시다’로 일을 시작해 만 3년 만인 19세 되던 1967년 봄 ‘재단사’가 되었으며, 같은 기간 그의 월급은 1500원에서 1만5000원으로 정확히 10배 올랐다. 엄청난 임금상승이 아닐 수 없다. 같은 기간 소비자물가상승률이 매년 10%대 초반이었음을 감안해도 이러한 임금상승은 요즘 기준으로 상상할 수 없는 수준이다.
3년 만에 임금이 10배 상승한 전태일의 상황을 오늘날의 경우에 대입해 보면 이러한 임금상승이 얼마나 파격적인지 더욱 분명히 알 수 있다. 2016년 오늘날 16세에 비정규직으로 최저임금을 받는 사람이 있다고 치자. 그렇다면 그의 월급은 ‘시간당 최저임금 6000원 ×하루 8시간 × 주 5일 × 월 4주’의 계산으로 96만원 수준이다.
이 노동자가 3년이 지나 19세 되면서 정규직이 되고 또한 임금이 열 배로 상승했다고 치자. 그렇다면 그의 월급은 960만원으로 수직 상승한다. 이 정도의 임금상승이면 요즈음도 하루 8시간이 아니라 12시간, 주 5일이 아니라 7일, 그리고 한 달 내내 쉬지 않고 일할 사람이 얼마든지 있을 것이다. 전태일이 겪었던 열악한 노동조건은 둘째치고 그의 임금상승은 정말이지 파격적이었음에 틀림없다.
1964년 전태일이 받은 월급 1500원을 복지제도가 갖춰진 오늘날의 최저임금 월급 96만원과 동일하게 취급하는 것이 지나치게 낙관적인 방식의 추정이라고 비판할 수 있다. 그렇다면 당시 그가 받은 월급 1500원을 오늘날 시간당 받는 최저임금의 절반 수준이라고 가정해 보자. 그렇다면 시급이 3000원이고, 월급은 48만원이다. 이 임금이 3년 만에 10배로 오르면 월급 480만원이다. 당시 전태일의 임금을 오늘날 최저임금의 절반이라고 쳐도 여전히 ‘착취’라는 말을 할 수 없다. 3년 동안 임금이 10배나 올랐기 때문이다.
16세라는 나이에 학교를 다닐 수 없는 가정형편 때문에 직장을 구하러 나온 젊은이에게 당시 사회는 일자리를 주었고, 그로부터 3년 만에 월급을 10배나 받게 해주었다. 또한 전태일은 이로부터 다시 3년 후인 1970년 재단사가 되면서 월급을 2만3000원 받았다고 스스로 밝히고 있다(256쪽). 그렇다면 전태일의 월급은 1964년부터 1970년까지 6년 동안 무려 15배 이상 상승한 셈이다. 이를 두고 과연 누가 착취라는 말을 꺼낼 수 있는가?
자유경제원이 전태일 분신 46주기를 맞이해 개최한 세미나 ‘전태일 생애 바로 보기: 누가 전태일을 이용하는가’에서 발표된 경제학자 박기성 교수의 글 〈근로기준법이 전태일을 죽음으로 몰고 갔다〉에 제시된 다음 인용문이 착취가 아니었음을 객관적으로 뒷받침한다. “전태일의 월급 2만3000원에 12달을 곱해 연봉으로 환산하면 27만6000원이 된다. 1970년 한국의 1인당 국내총생산은 8만7000원이었으므로 연봉 27만6000원은 당시 1인당 국내총생산의 3.2배였다.” 대한민국 평균 소득의 3배를 넘게 받던 사람이 착취를 당했다고?
3. 전태일의 노동운동 투신과 모범업체 구상, 그리고 분신: ‘대학생 친구’가 없었다고?
일자리에 비해 인력이 넘쳐나던 당시의 상황에서 평화시장에 취직이 되고 또한 앞에서 살펴본 바와 같은 엄청난 경력과 임금의 상승이동을 경험한 사실은 19세 전태일이 개천에서 용으로 비상하는 기회를 잡은 것과 다름없는 모습이다. 그러나 《평전》에 따르면 전태일의 고민은 재단사가 되고부터 오히려 깊어졌다고 한다. 자신에게 요구되는 감당할 수 없는 노동의 강도는 물론이고 주변 어린 여공들의 열악한 노동조건에 충격을 받았기 때문이라고 《평전》은 설명한다(117~126쪽 및 126~137쪽).
이러한 고민으로부터 ‘노동운동가’ 전태일의 탄생을 예고하면서 조영래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이렇게 괴로운 날들이 이어졌다. 이제 전태일의 머릿속은 기술자가 되어 돈을 더 벌겠다든지, 대학교를 가겠다든지 하는 생각보다 날마다 눈앞에 부딪히는 동료 직공들의 딱한 사정을 어떻게 해결해 주나 하는 생각으로 꽉 미어지게 되었다”(132쪽).
이후 재단사 전태일은 만 20세가 되던 1968년 봄부터 고용주와 갈등을 반복하면서 해고와 재취업이라는 불안정한 생활을 이어갔다. 동시에 그는 ‘근로기준법’ ‘노동조합’ 등 노동운동에 필요한 공부를 하며 “대학생 친구가 하나 있었으면 원이 없겠다”라는 말을 입버릇처럼 하게 되었다고 한다(166쪽).
전태일은 재단사가 된 지 만 2년 후인 21세, 즉 1969년 6월에 동료 재단사들을 모아 ‘바보회’라는 노동운동 단체를 결성한다. 그와 동시에 근로기준법을 준수하면서 종업원들에게 인간다운 대우를 해주는 ‘모범적인 피복업체’를 만들어 보겠다는 구상을 펼친다. 전태일은 모범업체의 목적을 “정당한 세금을 물고, 근로기준법을 준수하고도 제품 계통에서 성공을 할 수 있다는 것을 여러 경제인에게 입증시키고, 사회의 여러 악조건 속에 무성의하게 방치된 어린 동심들을 하루 한시라도 빨리 구출하자는 데 그 취지가 있다”고 밝히고 있다(223쪽).
그러나 이는 전태일 스스로도 인정하고 있듯이 “현실적으로 이루어지지 않을 실로 어처구니없는 공상”이었다(226쪽). 왜냐하면 《평전》에서 무려 10쪽이나 차지하고 있는 이 구상의 구체적인 내용 어디에도 기업은 이윤추구를 전제로 성립한다는 기본적인 조건에 대한 이해를 발견할 수 없기 때문이다(220~230쪽). 다시 말해 이 모범업체는 ‘기업’이라기보다는 ‘복지단체’에 가까운 모습이었다.
모범업체의 운영에 필요한 자본금 3000만원을 구하는 방안 또한 이러한 해석을 뒷받침한다. 《평전》에서 조영래는 전태일이 “자기의 눈알 하나를 빼서 실명자에게 기증하여 그 사실이 신문에 보도가 되면 그 신문을 본 독지가가 그의 사람됨을 믿고 투자를 할 거라는 생각”이었다고 설명한다(232쪽). 《평전》은 또한 전태일이 실제 이런 편지를 보냈으나 반송되었다고 증언하고 있다. 조영래는 모범업체 구상이 실현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깨달은 전태일이 마침내 죽음이라는 마지막 선택을 ‘스스로’ 결단하는 과정을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삶의 문제는 결국 죽음의 문제이며, 죽음의 문제는 결국 삶의 문제이다. 비인간의 삶에 미련을 갖는 자는 결코 인간으로 살 수 없다. 전태일이 죽음을 각오한 투쟁을 결단할 수 있었던 것은 그가 비인간의 삶에 대한 온갖 미련을 떨쳐버릴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가 이 사회의 밑바닥에서 겪고 보아온 비인간의 삶은 너무나도 ‘지긋지긋하고 답답한’ 것이었다. 그것을 철저히 인식하였을 때 그는 그것을 철저하게 증오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는 비인간적인 현실의 ‘덩어리에 뭉쳐지기’를 원하지 않는다고 외쳤다. 그는 ‘죽음 그 자체를 두려워하기 전에 (비인간의) 삶 그 자체에 환멸을 느낀다’고 고백하였다. 그러고는 아주 분명하게 ‘나를 버리고, 나를 죽이고 가마’라고 말하였다”(241~242쪽).
그러나 이 설명은 《평전》이 드러내고 싶어 하지 않는 매우 중요한 쟁점을 숨기고 있다. 다름 아닌 남정욱 교수가 ‘70년대 노동운동, 전태일 그리고 불편한 진실’에서 지적하고 있는 문제다(2016. 7. 5 세미나 발표). 남정욱 교수는 “전태일에게 대학생 친구는 물론 대학생 멘토까지 있었다”고 지적한다. 남정욱의 설명을 잠시 들어보자.
“솔 앨린스키(1909~1972)라는 인물이 있다. 버락 오바마와 힐러리 클린턴이 모두 존경하는 미국의 급진적 사회운동가로 1939년 시카고 빈민촌에서 주민들을 조직화하는 등 실천적 조직과 이론을 정립했다. 그의 이론 중에 ‘지역사회이론’이란 게 있다. ‘잠자는 민중을 깨워 리더를 양성시킨 뒤 그들 스스로 문제를 해결하도록 한다’는 내용이다. 이전까지는 활동가가 지역에 침투해서 직접 조직을 꾸리는 방식이었다. 그것이 현장에서 발굴한 리더를 통해 운동을 진행하는 방식으로 바뀐 것이다. 앨린스키는 절망에 빠져 있는 사람들의 옆에 앉아 조용한 말로 설득했다. ‘당신을 구할 사람은 당신뿐’이라고 부추기고 그 선동에 책임을 지는 것이 사회개혁의 근간이라고 앨린스키는 주장했다. 운동이 시작될 때 조직가는 그 바람을 타고 주인 행세를 해서는 안 되며 훈련된 조직가는 선택한 현장에서 3년 이내에 운동을 일으키고 운동이 일어나면 바로 그곳을 떠나라고 그는 가르쳤다.”
우리나라 운동권 역사에서 나름 중요한 위상을 차지하고 있는 예일대학 신학부 출신의 오재식(1938~2013)은 《기독교 사상》 1970년 12월호에 기고한 〈어떤 예수의 죽음〉이라는 글에서 자신이 누구보다 전태일의 분신 소식을 현장을 통해 가장 빨리 알았던 사람이라고 주장한다. 그 오재식이 솔 앨린스키(Saul Alinsky)의 영어책 《Rules for Radicals》를 번역해 아르케에서 2008년 출판한 책 《급진주의자를 위한 규칙》의 추천사에서 다음과 같은 증언을 하고 있다(앨린스키, 2008, 7쪽).
“나는 귀국 후 다시 기독학생운동으로 복귀하여 기독학생운동 단체들의 통합과정에서 한국학생사회개발단(학사단)을 결성할 것을 제안했다. 그리고 1967년에 출범한 학사단 운동에 사회문제에 대한 앨린스키의 접근방법을 풀어 넣었다. 훈련받은 학생들은 두세 명으로 팀을 구성하여 서민들의 수많은 삶의 현장에 투입되었고 신분을 밝히지 않은 채 현장의 목소리와 울음소리를 수록하였다. 현장의 상황을 정확하게 파악한 후, 선동하지 않고 차분하게 그들을 조직하는 것이 목적이었다. 이렇게 접근한 수많은 현장 가운데 하나가 1970년 전태일 분신사건이었다. 이 비극적인 사건은 노동운동자들의 운동을 활성화시키는 기폭제가 되었다. 기독학생운동이 노동운동과 손을 잡고 1970년대 ‘민주화운동’을 시작하게 된 것이다.”
같은 글에서 그는 앨린스키가 한국과도 짧지만 깊은 인연을 가지고 있음을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앨린스키, 2008, 15쪽).
“1968년에… 미국 장로교의 조지 타드 목사는 허버트 화이트(Herbert White)란 조직가를… 한국에 보냈다. 화이트는 연세대학교 도시문제연구소를 베이스로 하고 수도권선교협의회에 가담해서 서울 청계천의 빈민촌을 중심으로 조직가들을 훈련하기 시작했다.… 화이트는 앨린스키의 훈련을 받은 사람으로 미국 뉴욕 주의 로체스터에서 코닥(Kodak)을 상대로 한 주민조직을 성공시킨 조직가였다. 수도권선교협의회는 위원장 박형규 목사를 중심으로 화이트에게서 훈련받은 젊은 조직가들의 행동반경을 확대시켰다. 이 훈련계획은 2년간 계속되었고 15명에 가까운 사람들이 과정을 마쳤다. 이렇게 조직된 수도권 팀은 도시산업선교회 사람들과 연대하여 1970년대 한국 민주화운동의 근간을 만들었다.”
오재식의 글이 사실이라면 조영래의 《평전》은 청계천 평화시장을 둘러싼 노동운동의 전개에 외부의 훈련된 세력이 개입하고 있었던 사실을 의도적으로 숨기고 있는 셈이다. 공교롭게도 그 외부조직이 활동한 시기는 조영래의 《평전》이 후반부에서 기술하는 전태일의 노동운동 투신 과정과 정확히 시간적으로 겹친다.
그래서 그런지 조영래의 《평전》은 후반부로 갈수록 내용이 치밀하지 못하다. 《평전》에 의거해서 사실적인 전태일의 삶을 전반부와 같이 재구성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평화시장 생활의 전반부, 즉 ‘시다’ 생활을 시작한 1964년 봄부터 ‘재단사’가 되는 1967년 봄까지 3년간의 시간은 《평전》에 의거해 전태일의 삶을 거의 완벽하게 재구성할 수 있다. 그만큼 전반부의 《평전》은 명확하다.
반면에 전태일이 노동운동에 본격적으로 관심을 가지게 되는 1968년 봄부터 분신하는 1970년 11월까지 2년 반 동안의 기간은 《평전》에 따라 전태일의 삶을 명쾌하게 복원하기 어렵다. 평화시장에서의 해고와 재취업이 두서없이 반복되고 또 그 사이사이에 공사장의 막노동 심지어는 삼각산 기슭의 임마뉴엘 수도원 신축공사 현장생활 5개월 등이 뒤엉켜 등장하며 전태일의 생각을 두서없이 나열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평전》이 분명하게 설명하지 못하는 이 기간이 바로 오재식이 언급한 외부세력과의 접촉이 진행된 시기가 아닐까? 그렇기 때문에 조영래의 《평전》은 1968년 이후의 전태일 삶을 파편적으로밖에 기술할 수 없었다는 추론이 가능하다. 다시 말해 후반부의 《평전》 내용은 전태일의 활동을 입체적으로 그리고 연속적으로 접근하기 어렵도록 상황 설정을 시공간적인 맥락에서 의도적으로 분절시키고 있다.
한편 조영래의 《평전》은 전태일 주변의 등장인물에 관한 서술에서도 조악한 모습을 보인다. 예컨대 가명인 김개남의 첫 등장을 《평전》은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 있다. “1968년 봄 평화시장 재단사인 김개남은 전태일을 알게 되었다”(145쪽). 《평전》의 주인공은 당연히 전태일이다. 그렇다면 이 부분의 기술은 당연히 “전태일은 김개남을 알게 되었다”로 표현해야 한다. 주어와 목적어의 순서를 뒤바꾼 이유는 무엇일까? 외부세력의 의도적 접근과 관찰을 무심코 드러낸 표현이 아닐까? 그렇다면 가명으로 등장하는 김개남이야말로 오재식이 증언하고 있는 현장조직에 침투한 활동가일 가능성이 높다.
《평전》이 제시하는 바보회의 활동 지침을 결정하는 과정도 석연치 않기는 매한가지다(160~162쪽). 그중 한 가지인 ‘모범업체’를 설립하는 구상이 얼마나 비현실적이었는지를 우리는 앞의 논의에서 확인할 수 있었다. 그런데 같은 지침 가운데 또 다른 하나인 근로자들의 ‘노동실태 조사’에 관한 발상은 당시로선 정말이지 매우 선진적이고 기발한 아이디어임에 틀림없다. 오늘날에는 흔히 사용되고 있지만, 당시에는 매우 획기적인 방식인 설문조사를 통해 실태조사를 했기 때문이다.
근로기준법의 조문조차 이해하지 못해 “대학생 친구 하나만 있으면 원이 없겠다”던 전태일과 그의 동료들이 그렇다면 어떻게 ‘설문조사’라는 참신하고도 과학적인 아이디어를 낼 수 있었을까? 오재식과 같은 인물로부터 교육받아 노동운동의 이론과 실재를 이미 알고 있는 활동가의 영향 없이 과연 전태일 스스로 생각하고 판단해서 ‘설문조사’라는 방식을 선택할 수 있었을까? 대학생 운동세력의 접근을 의심하지 않을 수 없는 대목이다.
우여곡절 끝에 전태일은 마침내 1970년 9월 죽음도 마다치 않겠다는 결심과 함께 평화시장으로 돌아온다. 그리고 월급 2만3000원을 받는 재단사로 ‘왕성사’에 취업한다(245쪽 및 256쪽). 다른 한편 그는 김개남과 연락하며 ‘바보회’를 계승할 ‘삼동회’를 조직하고, 평화시장 노동자 126명에 대한 설문조사를 실시하여 같은 해 10월 6일 노동청장에게 ‘평화시장 피복제품상 종업원 근로개선 진정서’를 제출한다. 다음날 10월 7일 신문은 그 진정서의 내용을 대서특필하여 전태일은 크게 고무된다.
그러나 언론보도 이후 말로만 이루어지는 형식적인 관심과 지원, 나아가서 그 배후에서 실질적으로는 노동운동에 대한 탄압을 겪으며 전태일은 시위와 저항의 악순환을 반복하면서 좌절한다. 전태일은 결국 1970년 11월 13일 만 22세의 나이에 “근로기준법을 준수하라” “우리는 기계가 아니다! 일요일은 쉬게 하라!” “노동자들을 혹사하지 말라”는 구호와 함께 시위가 예정된 광장으로 석유를 뿌리고 뛰쳐나오며 분신자살한다.
이 마지막 결정적 순간에 관해서도 《평전》은 불분명한 대목을 남긴다. 석유를 뒤집어쓴 전태일에게 불을 붙인 인물이 누구인지를 밝히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스스로인가? 다른 동료 운동가인가? 동료라면 누구인가? 《평전》은 “내 죽음을 헛되이 하지 말라”는 확인할 수 없는 전태일의 마지막 유언을 강조하며 끝을 맺는다. 2009년 신판으로 출판된 《전태일 평전》의 기록이다.
그러나 1983년 초판 《전태일 평전》은 이 부분의 내용이 전혀 다르다. 1983년 초판은 이 대목에서 김개남이 성냥불을 붙인 사실을 명확히 기술하고 있다. 그러므로 전태일은 김개남의 도움을 받아 분신하였다. 그렇다면 김개남은 누구인가? 《평전》이 말하듯 이 이름은 가명이다. 그리고 앞에서 추론하였듯 김개남이야말로 학생운동 출신으로 노동운동 현장에 투신한 활동가 조직원일 가능성이 높다.
이러한 추론을 뒷받침하는 기록은 또 있다. 〈학생운동권 대부에서 분쟁지역 돕기 나선 ‘양국주’의 탈레반 인생〉이라는 《조선일보》 2009년 10월 31일 기사다. 《조선일보》 주말판 연재물인 〈WHY〉는 당시 〈문갑식의 하드 보일드〉라는 제목을 달고 다음과 같은 인터뷰 기사를 내보냈다. 질문자는 문갑식 기자이고 응답자는 양국주다.
목사에서 운동권 투사(鬪士)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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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9년 전북 정읍에서 태어난 양국주의 삶에 딱 어울리는 영어 표현이 있다. ‘은(銀)수저를 입에 물고….’ 그의 아버지 양재열은 부호(富豪)였다. 그는 한국칼라인쇄와 주사기 관련 업체를 경영하고 있었다. 한국칼라인쇄는 대한민국 달력 전부를 인쇄한다는 말을 들을 정도였다. 정읍서국민학교 4학년을 마치고 서울 혜화국민학교로 전학 온 양국주의 집은 돈암장 터였다. 넓은 집만큼 돈이 많았고 각계에 걸친 인맥도 두터웠다. 그보다 더 굳건한 건 예수를 향한 믿음이었다. 양재열은 정읍과 서울 잠실에 대형 교회 2개를 지어 봉헌(奉獻)했다. 경신중고를 마치고 숭실대 3학년 진급을 앞둘 때 양국주는 아버지처럼 되고 싶어 했다. 꿈이 목사였다.
— 그 꿈이 왜 바뀐 겁니까.
“제가 연세대 철학과 2학년으로 편입했습니다. 그곳에서 기독학생회(SCA)라는 서클에 들어가면서 삶이 바뀌었지요. 연대 SCA 회장에 이어 한국기독학생연맹 의장이 되면서 자연스럽게 운동권이 된 겁니다.”
— 박정희 정권에 반대했나요.
“처음 한 일은 71년 대선(大選) 때 야당 후보였던 김대중의 개표 참관 감시활동을 했습니다. 전국에서 운동권 학생들이 참관단을 결성했는데 저는 200명을 열차에 태워 충북 제천, 단양으로 갔습니다. 물론 경찰 제지로 기차에서 내려보지도 못했지만요.”
— 그리고요.
“이후 교련(敎鍊) 반대 투쟁이 이어졌고 위수령(衛戍令)이 발동되면서 구속됐지요. 두 달간 교도소에 있다 전방 21사단으로 강제 징집됐습니다.”
— 운동권들을 왜 전방으로 보냈을까요. 혹시 휴전선을 넘어갈 수도 있을 텐데.
“당시 운동권은 지금 같은 종북반미(從北反美)가 아니었어요. 교련 반대했으니 고생 좀 해보라는 것이었겠죠. 정보가 샐 수 있는 행정병 같은 보직은 안 줬어요. 심지연(沈之淵·경남대 교수), 고(故) 최재현 서강대 사회과학대학장이 같은 부대에 있었습니다.”
— 당시 운동권은 어땠습니까.
“솔 앨린스키의 ‘지역사회이론’을 혹시 압니까? 그는 마틴 루서 킹 목사의 최측근입니다. 지역사회이론의 요체는 ‘잠자는 민중을 깨워 리더를 양성시킨 뒤 그들 스스로 문제를 해결하도록 한다’는 내용입니다. 예를 들면 전태일 같은 인물이 그렇지요.”
— 그를 압니까?
“분신(焚身)할 때 곁에 있었으니까요. 전태일은 지금 미국 샌디에이고에 있는 이승종 목사가 교육시켰지요.”
— 고 조영래 변호사가 《전태일 평전》을 썼지요.
“전태일은 과격하고 다혈질이었어요. 나중에 노동열사(烈士)가 됐지요. 박종철이나 이한열이 민주열사가 된 것처럼. 그건 시대의 아픔이 후일 하나의 상징으로 변할 수 있음을 보여줍니다. 조영래씨는 제 형(양창삼 전 한양대 대학원장)의 친굽니다. 나중엔 인권변호사가 됐지만 대학 시절엔 정치색이 강했어요. 경남 함양에 국회의원으로 출마하겠다며 열심히 작업했지요.”
— 그때 많은 인맥을 맺었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최열, 서경석, 박원순, 마광수…. 지금 부부가 된 이종호와 신필균은 그때 서울상대와 이화여대 기독학생회 간부였고요. 헤아릴 수 없이 많아요. 얘기 나온 김에 당시 운동권 사정 좀 알려드릴까? 당시 학생운동은 네트워킹이 약했어요. 정부에서 월남에 맹호(猛虎)부대를 파견했잖아요. 당시 전국 대학의 학생회장 100여 명을 수송선에 태워 월남에 위문 보냈어요. 정부는 애국심을 고취시키려 한 건데 오히려 운동권의 결속력을 다지는 자리가 됐습니다.”
22세에 분신한 전태일의 삶을 그린 조영래의 《평전》은 엄청나게 중요한 부분을 가리고 있다. 왜냐하면 외부세력이 “접근한 현장의 하나가 전태일의 분신사건”이라는 오재식의 공개적 증언이 《평전》 어디에도 등장하지 않기 때문이다. 또한 양국주의 증언 “분신할 때 곁에 있었고, 전태일은 지금 미국 샌디에이고에 있는 이승종 목사가 교육시켰다”는 내용도 《평전》에는 전혀 나오지 않는다.
김개남의 정체는 과연 무엇인가? 과연 그는 전태일을 상대로 무슨 일을 하였는가? 1990년대 초 ‘유서대필’ 사건을 시작으로 유행처럼 번지던 운동권 대학생들의 자살을 보고 “죽음의 굿판을 걷어치우라”고 일갈했던 시인 김지하, 그리고 “죽음을 선동하는 어둠의 세력”이 존재하고 있음을 고발한 당시 서강대 총장 박홍 신부의 발언을 연상하지 않을 수 없다. 이 쟁점은 앞으로 보다 심층적인 분석과 조명이 필요한 부분이다.
어찌 됐든 지금까지의 분석으로 이 대목에서 분명히 내릴 수 있는 결론은 다음과 같다. 다름 아닌 전태일의 “대학생 친구가 하나 있었으면 원이 없겠다”는 《평전》의 설명은 100% 거짓말이라는 사실이다. ‘설문조사’ 방식의 노동자 실태조사도 같은 결론으로 이끈다. 또한 다른 무엇보다 이 의구심은 《평전》이 보여주는 분신 장면에 대한 기술에서 1983년 초판에서 분명히 등장했던 김개남이 2009년 신판에서 사라진 사실로도 뒷받침된다.
4. 전태일의 선택: 다른 동시대인의 선택은?
전태일의 삶에 나타난 선택을 동시대를 살아간 다른 사람들의 선택과 비교하는 작업은 전태일의 삶은 물론 그의 죽음이 갖는 의미를 또 다른 각도에서 상대적으로 평가할 수 있는 근거를 제공한다. 그러나 이 작업을 설득력 있게 수행하기 위해서는 비교하는 사례의 선정이 엄격한 조건을 만족시켜야 한다. 전태일이 처했던 환경과 엇비슷한 환경을 헤쳐나온 인물이어야 하기 때문이다. 물론 엇비슷한 연령대이면 더욱 좋다. 그래야 거시적인 한국 사회의 구조를 똑같이 견디며 살아간 경험을 공유하기 때문이다.
이를 위해 여기서는 ‘노동부’와 ‘한국산업인력공단’이 공동으로 매년 펴내는 《기능한국인 수기집》에 등장하는 인물을 분석대상으로 삼았다. 이 책은 2007년부터 2015년 현재까지 매해에 달마다 1명씩 선정된 12명의 기능한국인의 삶에 관한 자전적 수기를 담아 매년 한 권씩 출판되고 있다. 2016년 현재까지 총 9권이 발행되었으며, 각 권당 12명의 삶의 발자취를 담고 있다. 그러므로 지금까지 출판된 책에는 도합 108명의 삶의 기록이 생생하게 담겨 있다.
이 책에는 전태일 못지않게 어려운 환경에서 기술을 익혀 오늘날 자신의 분야에서 각자 명장(마에스트로)의 경지에 오른 사람들에 관한 이야기가 서술되어 있다. 이들의 절대다수는 1950년대 농어촌에서 태어나 1970년대에 이루어진 중화학공업화와 더불어 어렵게 기술을 익혀 도시로 진출한 기능공들이다. 이들의 가정환경 또한 전태일의 상황과 크게 다르지 않다. 경제적 어려움 때문에 인문계 교육을 포기하고 공업고등학교나 직업훈련원 교육을 선택한 경우에서부터 심지어는 초등학교 중퇴나 졸업 정도의 교육 배경만을 가지고 산업현장에 뛰어들어 기술을 익힌 경우도 많다.
구체적인 분석을 위해 선택된 사례는 2008년 책 《하얀 고무신》에 등장하는 금형(金型)전문가 ‘서영범’이다. 그는 1947년생으로 앞서 설명한 108명의 인물 가운데 1948년에 태어난 전태일과 가장 나이가 가깝고 또한 자라온 환경도 비슷하다. 경기도 고랑포가 고향인 그는 1·4후퇴 때 부모님을 따라 서울로 내려왔다. 그의 나이 14세 때인 1961년 군인이던 아버지가 불의의 사고로 익사하고 나서부터 그는 어머니와 자신을 포함한 5남매를 돌보는 소년가장이 되지 않을 수 없었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해인 14세에 학업을 포기한 그는 곧바로 ‘신성금고’라는 금고 만드는 회사에 허드렛일을 하는, 즉 평화시장에서 16세 전태일이 하던 ‘시다’와 엇비슷한 조건으로 취업전선에 들어선다. 전태일보다 두 살이나 어린 나이에 그는 돈을 아끼기 위해 배를 굶으며 대흥동 집에서 회사가 있는 오장동까지 걸어서 출퇴근했다. 또한 그는 기술을 가르쳐주지 않는 선임들을 원망하며, 일과 후 쓰레기통을 뒤지면서 도면 읽는 공부를 하고 선반 돌리는 기술을 익혔다.
그렇게 각고의 노력을 기울인 결과 3년 후 나이 17세가 되던 1964년 그는 ‘오리엔탈’이라는 신수동에 위치한 릴낚싯대를 만드는 회사에 ‘선반기사’로 당당히 입사한다.
전태일이 ‘시다’에서 ‘재단사’가 되는 3년의 세월과 똑같은 기간에 그는 마침내 ‘선반기사’ 대우를 받으며 스카우트되어 직장을 옮길 수 있었다. 그러나 이 회사는 불행히도 자금 압박을 견디지 못하고 그가 입사한 지 2년 만인 1966년에 파산하고 만다.
그러나 기술을 가진 19세 서영범은 별 어려움 없이 용강동에 있던 또 다른 회사인 ‘대광다이캐스팅’으로 즉시 직장을 옮길 수 있었다. 전태일과 마찬가지로 그도 주변으로부터 성실성을 인정받았고 또한 이번에는 ‘금형기사’ 자격도 갖추었기 때문이다. 그는 이때 처음으로 월급다운 월급을 받았다고 기억한다. 전태일이 재단사가 되어 상당한 수준의 봉급을 받기 시작한 바로 그 나이와 같은 19세 때다.
2년 후 1968년, 즉 21세가 되면서 그는 육군에 징집되었다. 전태일이 어린 여공을 위해 분신자살한 22세의 나이에 그는 대한민국을 위해 최전방 비무장지대에서 국방의 의무를 다하고 있었다. 3년을 군에서 복무한 1971년 그는 만기 제대하고 다시 ‘대광다이캐스팅’으로 복직했다.
2년을 더 같은 회사에 재직하던 그는 1973년 그러니까 26세의 나이에 당시 최고로 잘나가던 ‘기아자동차 소하리 공장’으로 당당히 전직한다. 그리고 이듬해 그는 기아자동차에 근무하며 “나에게 특별히 선반기술을 가르쳐준 사람은 없었지만 지난 세월 동안 순전히 현장에서 갈고 닦은 기술 하나만으로” 선반기능사 국가자격증을 취득한다.
1976년 그러니까 나이 29세에 그는 마침내 월급쟁이 생활을 정리하고 독립하기 위해 기아자동차에 사표를 낸다. 퇴직과 동시에 그는 그동안 동생들 학비와 집안의 생활비를 대면서도 근근이 모은 돈으로 선반기계를 한 대 장만하고, 마포에 있는 친구 회사의 작업장에서 더부살이로 일을 시작한다. 그로부터 6년 동안 그러니까 35세가 되는 1982년 ‘용선정밀’이라는 회사를 창업할 때까지 그는 자신의 기계를 밤새워 돌리며 힘들지만 열심히 일했다. 그 과정에서 그의 나이 32세 1979년엔 결혼도 했다. 용선정밀은 그가 얻은 아들의 이름을 딴 회사였다.
창업한 1982년으로부터 26년이 지난 2008년 61세의 나이에 그는 마침내 ‘기능한국인’으로 선발되어 대한민국 최고의 경쟁력을 가진 금형업계의 선두주자 대한민국 명장으로 우뚝 섰다. 아들의 이름을 걸고 시작한 창업의 각오 덕분에 그는 금형 부문에서 온갖 종류의 특허를 낼 수 있었다. 2008년 현재 그의 회사는 문래동에 제1공장 및 김포에 제2공장을 두고 모두 12명의 종업원을 고용하며 연간 매출액 20억원을 자랑하고 있다.
그는 또한 회사일 외에도 불우이웃 돕기 등 각종 사회활동에도 적극적인 모습이다. 소외된 이웃들과의 나눔을 통해 많은 것을 배우고 있다고 그는 수기에서 수줍게 고백하고 있다. 22세의 나이로 어린 여공들의 근로조건을 개선시키기 위해 생을 마감한 전태일의 삶 혹은 죽음과 비교하여 과연 금형전문가 서영범의 삶은 의미가 없는 삶인지를 거꾸로 묻지 않을 수 없다.
이러한 평가는 비단 이 글에서 전태일과 비교하는 작업의 구체적 사례로 삼은 서영범의 경우에만 국한되는 일이 아니다. 수기집에 등장하는 108명 모두, 또한 나아가서 이들 108명으로 대표되는 60년대, 그리고 70년대 산업현장에서 땀흘리며 가족을 돌보고 미래를 개척한 200만 기능인력 노동자 모두에게 적용할 수 있는 평가다. 분야가 다르기는 하지만 18세가 되기까지 네 번의 가출을 하며 맨주먹으로 세계 굴지의 기업군을 일으켜 수많은 일자리를 창출한 정주영의 경우는 더 말할 필요도 없다.
스스로 목숨을 끓는 선택이 안타깝기는 하지만 우리가 보고 배워야 할 그리하여 후대의 본보기가 되어야 할 선택은 절대 아니다. 스스로 목숨을 버리는 행동은 그 자체만으로도 인륜을 저버리는 비도덕적 행동이다. 오히려 역경을 뚫고 살아남아 자신은 물론 가족과 공동체 그리고 나라를 위해 무언가를 성취한 이들이야말로 우리가 귀감으로 삼아야 할 본보기이다. 이들의 삶이 더욱 빛나고 아름답다. 죽는다는 선택은 오히려 비겁하고 손쉬운 선택일 뿐이다.
5. 전태일은 아름답지 않다
조영래의 《전태일 평전》은 젊은이들에게 우리나라 노동자들이 ‘착취’당하고 있으며 그들을 위해서는 노동운동을 적극적으로 전개해야 한다고 도덕적으로 호소하고 있다. 그러나 《평전》의 내용을 차근차근 따져보면 사실은 전혀 그럴 필요가 없음을 알 수 있다. 왜냐하면 전태일은 ‘착취’당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평전》은 전태일의 임금이 3년 동안 10배, 그리고 6년 동안 15배로 상승하였음을 기록하고 있다.
또한 《평전》은 전태일에게 접근했던 대학 출신 노동운동 활동가들의 존재를 전혀 언급하지 않고 있다. 오히려 “대학생 친구가 하나 있었으면 원이 없겠다”는 거짓 문구로 젊은이들의 감성을 선동할 뿐이다. 앨린스키의 운동노선을 따라 “외부세력이 접근한 현장의 하나가 전태일 분신사건”이라는 증언이나 “분신할 때 곁에 있었다”, 그리고 “전태일은 지금 미국 샌디에이고에 있는 이승종 목사가 교육시켰다”는 증언이 《평전》 어디에도 등장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조영래의 《평전》은 있는 그대로의 전태일이 아니라 선동을 위해 사실을 왜곡한 전태일에 관한 글일 뿐이다.
마지막으로, 당시를 살았던 다른 사람들의 선택과 비교해 볼 때 전태일이 선택한 삶 혹은 죽음이 도덕적으로 바람직하고 나아가서 아름다운 것이었다고 말할 수 없다. 왜냐하면 너무도 많은 사람이 전태일과 엇비슷한 조건에서 출발하여 온갖 어려움을 헤치고 오늘날 자수성가하여 국가와 사회에 기여하며 자신의 역할을 다하고 있기 때문이다. 전태일의 극단적인 선택은 불가피하지 않았으며, 따라서 아름답지도 않다. 다만 불행했을 뿐이다.⊙
조영래 변호사가 쓴 《전태일 평전》(2009 신판)을 읽으면 전태일, 그리고 당시 평화시장 근로자들이 겪은 삶의 조건에 독자들은 피가 거꾸로 솟지 않을 수 없다. 어린 전태일에게 주어진 삶의 무게는 너무나 버거운 데 반해 그를 도와주는 사회적 장치는 전혀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책은 전태일로 대표되는 당시 노동자들이 엄청난 ‘착취’를 당했다는 인식을 가슴 속 깊이 심어준다.
천신만고 끝에 전태일은 1964년 봄 그의 나이 16세에 평화시장의 ‘시다’라는 일자리를 겨우 구한다. 그러나 가족의 생계는 물론이고 심지어는 스스로조차도 돌보기 어려운 악조건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마침내 그는 일자리를 얻은 지 만 6년 반 만인 1970년 11월 13일 22세의 나이에 열악한 근로조건에 저항하는 최후의 수단으로 분신자살을 선택한다. 이러한 《전태일 평전》의 내용 으로 전태일은 당시 ‘착취’당하던 우리나라 노동자를 상징하는 인물로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그러나 《전태일 평전》을 찬찬히 비판적으로 분석해 보면 과연 이러한 평가가 정당한가에 대한 의구심을 갖게 하는 내용이 많다. 가장 중요한 문제로 지적되어야 할 내용은 책 전체에 숫자로 등장하는 돈의 가치다. 숫자는 객관적으로 보인다. 또한 모든 액수가 당시의 물가로 표시되어 46년이 지난 2016년 오늘날의 시점에서 읽으면 그 액수가 정말이지 터무니없이 작다는 느낌을 갖게 한다. 물론 이 문제는 《전태일 평전》이 처음 우리말로 출판된 1983년을 기준으로 생각하더라도 마찬가지다. 또한 물가가 우리보다 훨씬 비싼 일본에서 1978년 출판된 책에 한국 돈 ‘원’으로 표시된 숫자는 더욱더 그러한 효과를 가졌을 것이다.
1983년 나온 《전태일 평전》의 초판. 저자 조영래 변호사의 이름조차 밝히지 못했다. |
이 글에서는 우선 《평전》에 등장하는 당시 돈의 가치, 즉 월급을 전태일의 직장 경력이동, 그에 따른 임금상승과 교차시키며 분석하고자 한다. 조영래 변호사의 화려한 수사 때문에 대부분의 《평전》 독자는 전태일이 어린 나이에 엄청난 ‘착취’를 당하였고 또한 그것이 전태일의 경우에만 해당되는 일이 아니라 당시 노동자들 모두가 겪은 일이라고 생각하기 쉽다. 이 글은 바로 이 대목을 《평전》의 내용에 기초해 본격적으로 따져보는 글이다.
다음, 이 글은 전태일을 분신자살이라는 선택으로 몰고 갔던 당시의 상황을 입체적으로 접근해 보고자 한다. 혹시 조영래의 《평전》은 전태일의 노동운동 투신과 분신에 관해 있었던 사실을 의도적으로 왜곡 및 축소하고 있지는 않은가? 조영래의 《평전》을 청계천 평화시장의 노동운동을 증언하는 다른 기록과 교차시킬 때 앞뒤가 맞지 않는 부분은 없는가? 만약 그렇다면 조영래의 《평전》은 있는 그대로의 전태일을 그리기보다는 특정한 목적을 위해 사실을 왜곡한 글이라는 비판을 피할 수 없다.
마지막으로, 이 글은 전태일의 선택을 당시를 살았던 다른 사람들의 선택과 비교하여 그 의미를 객관적 혹은 상대적으로 조명해 보고자 한다. 그의 극단적인 선택, 즉 분신자살이 과연 조영래의 《평전》이 말하듯 정말 불가피한 선택이었는지를 재검토하기 위해서다. 물론 이 작업을 하기 위해서는 비교의 대상을 전태일과 비슷한 경우로 국한해야 함은 더 말할 필요도 없다.
2. 전태일의 평화시장 경력과 임금상승: ‘착취’라고?
여기서는 《평전》에 제시된 여러 가지 근로조건 문제 가운데 특히 전태일의 경력이동 및 임금상승 문제를 집중적으로 살펴본다. 물론 모든 자료는 《평전》에 제시된 숫자를 근거로 논의한다. 구체적인 사실의 확인이 필요한 내용은 2009년 신판 《전태일 평전》의 페이지 숫자를 괄호 속에 밝혀 독자들이 확인하기 쉽도록 구성했다.
《평전》에 따르면 전태일은 1964년 봄 ‘삼일사’의 ‘시다’로 취직하면서 월급을 1500원 받았다(85~87쪽). 또한 그는 1년 후 1965년 같은 회사의 ‘미싱보조’가 되면서 월급이 두 배로 뛰어 3000원이 되었다(88쪽). 그로부터 다시 1년 후인 1966년 가을 그는 회사를 ‘통일사’로 옮기며 ‘미싱사’로 승진하여 월급이 7000원으로 상승한다(109쪽).
이를 정리해 보면 전태일은 ‘시다미싱보조’ 승진 사다리를 1년 만에, 그리고 ‘미싱보조미싱사’라는 다음 단계의 승진 사다리를 다시 1년 만에 올라갔음을 알 수 있다. 또한 그러한 승진의 결과 월급이 만 2년 동안 무려 4.6배 상승하였음도 알 수 있다.
이와 같은 전태일의 경력 상승은 《평전》이 기술하고 있는 평화시장의 일반적 경력이동 패턴과 비교하여도 매우 빠른 경우다. 《평전》은 당시 평화시장에서 ‘시다’로 시작해 ‘미싱보조’로 승진하는 데 필요한 시간을 1.5년에서 2년, 그리고 ‘미싱보조’에서 ‘미싱사’로 승진하는 데 필요한 시간을 3~4년이라고 말하고 있다(82~83쪽). 다시 말해 《평전》은 당시 평화시장의 승진 사다리에서 ‘시다’에서 ‘미싱사’까지 올라가는 데 최소 4.5년 최대 6년이 필요하다고 기술하고 있다.
이 승진의 사다리를 《평전》에 따르면 전태일은 불과 2년 만에 모두 올라갔다. 그러나 전태일은 이에 만족하지 않는다. ‘미싱사’보다는 ‘재단사’가 훨씬 더 좋은 대우를 받는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그는 ‘재단사’가 되기 위한 노력을 바로 이어서 시도한다. ‘미싱사’가 되고 난 직후인 1966년 추석 대목 후 그는 회사를 ‘한미사’로 옮기며 ‘재단보조’가 된다(111쪽).
그는 ‘재단보조’가 ‘미싱사’보다 대우가 훨씬 나쁘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재단보조’를 거쳐야 ‘재단사’가 될 수 있다는 더 중요한 사실도 그는 물론 잘 알고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전태일은 그러한 선택을 주저 없이 감행할 수 있었다. ‘재단보조’가 된 그의 월급은 비록 3000원으로 줄었지만(110쪽), 그로부터 반 년 후인 1967년 2월 마침내 그는 같은 회사인 ‘한미사’에서 ‘재단사’로 승진한다(117쪽). 평화시장에 ‘시다’로 들어온 지 딱 3년 만의 일이다.
《평전》은 그가 재단사가 된 후 받은 월급이 얼마인지 분명히 밝히고 있지 않다. 그러나 《평전》은 여러 곳에서 당시 평화시장 ‘재단사’의 월급이 1만5000원부터 3만원까지의 범위 내에 있었음을 증언하고 있다(98쪽 및 261쪽). 그러므로 이 범위 안에서 전태일이 갓 재단사로 승진한 직후, 즉 1967년 3월에 받은 월급이 《평전》이 제시한 임금 범위의 하한가인 1만5000원이라고 추정하는 것은 전혀 무리가 없다.
전태일 분신 직후 《주간조선》은 그의 일기를 입수, 보도했다. |
3년 만에 임금이 10배 상승한 전태일의 상황을 오늘날의 경우에 대입해 보면 이러한 임금상승이 얼마나 파격적인지 더욱 분명히 알 수 있다. 2016년 오늘날 16세에 비정규직으로 최저임금을 받는 사람이 있다고 치자. 그렇다면 그의 월급은 ‘시간당 최저임금 6000원 ×하루 8시간 × 주 5일 × 월 4주’의 계산으로 96만원 수준이다.
이 노동자가 3년이 지나 19세 되면서 정규직이 되고 또한 임금이 열 배로 상승했다고 치자. 그렇다면 그의 월급은 960만원으로 수직 상승한다. 이 정도의 임금상승이면 요즈음도 하루 8시간이 아니라 12시간, 주 5일이 아니라 7일, 그리고 한 달 내내 쉬지 않고 일할 사람이 얼마든지 있을 것이다. 전태일이 겪었던 열악한 노동조건은 둘째치고 그의 임금상승은 정말이지 파격적이었음에 틀림없다.
1964년 전태일이 받은 월급 1500원을 복지제도가 갖춰진 오늘날의 최저임금 월급 96만원과 동일하게 취급하는 것이 지나치게 낙관적인 방식의 추정이라고 비판할 수 있다. 그렇다면 당시 그가 받은 월급 1500원을 오늘날 시간당 받는 최저임금의 절반 수준이라고 가정해 보자. 그렇다면 시급이 3000원이고, 월급은 48만원이다. 이 임금이 3년 만에 10배로 오르면 월급 480만원이다. 당시 전태일의 임금을 오늘날 최저임금의 절반이라고 쳐도 여전히 ‘착취’라는 말을 할 수 없다. 3년 동안 임금이 10배나 올랐기 때문이다.
16세라는 나이에 학교를 다닐 수 없는 가정형편 때문에 직장을 구하러 나온 젊은이에게 당시 사회는 일자리를 주었고, 그로부터 3년 만에 월급을 10배나 받게 해주었다. 또한 전태일은 이로부터 다시 3년 후인 1970년 재단사가 되면서 월급을 2만3000원 받았다고 스스로 밝히고 있다(256쪽). 그렇다면 전태일의 월급은 1964년부터 1970년까지 6년 동안 무려 15배 이상 상승한 셈이다. 이를 두고 과연 누가 착취라는 말을 꺼낼 수 있는가?
자유경제원이 전태일 분신 46주기를 맞이해 개최한 세미나 ‘전태일 생애 바로 보기: 누가 전태일을 이용하는가’에서 발표된 경제학자 박기성 교수의 글 〈근로기준법이 전태일을 죽음으로 몰고 갔다〉에 제시된 다음 인용문이 착취가 아니었음을 객관적으로 뒷받침한다. “전태일의 월급 2만3000원에 12달을 곱해 연봉으로 환산하면 27만6000원이 된다. 1970년 한국의 1인당 국내총생산은 8만7000원이었으므로 연봉 27만6000원은 당시 1인당 국내총생산의 3.2배였다.” 대한민국 평균 소득의 3배를 넘게 받던 사람이 착취를 당했다고?
3. 전태일의 노동운동 투신과 모범업체 구상, 그리고 분신: ‘대학생 친구’가 없었다고?
1980년 임금인상을 요구하며 농성을 벌이는 평화시장 노동자들. |
이러한 고민으로부터 ‘노동운동가’ 전태일의 탄생을 예고하면서 조영래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이렇게 괴로운 날들이 이어졌다. 이제 전태일의 머릿속은 기술자가 되어 돈을 더 벌겠다든지, 대학교를 가겠다든지 하는 생각보다 날마다 눈앞에 부딪히는 동료 직공들의 딱한 사정을 어떻게 해결해 주나 하는 생각으로 꽉 미어지게 되었다”(132쪽).
이후 재단사 전태일은 만 20세가 되던 1968년 봄부터 고용주와 갈등을 반복하면서 해고와 재취업이라는 불안정한 생활을 이어갔다. 동시에 그는 ‘근로기준법’ ‘노동조합’ 등 노동운동에 필요한 공부를 하며 “대학생 친구가 하나 있었으면 원이 없겠다”라는 말을 입버릇처럼 하게 되었다고 한다(166쪽).
전태일은 재단사가 된 지 만 2년 후인 21세, 즉 1969년 6월에 동료 재단사들을 모아 ‘바보회’라는 노동운동 단체를 결성한다. 그와 동시에 근로기준법을 준수하면서 종업원들에게 인간다운 대우를 해주는 ‘모범적인 피복업체’를 만들어 보겠다는 구상을 펼친다. 전태일은 모범업체의 목적을 “정당한 세금을 물고, 근로기준법을 준수하고도 제품 계통에서 성공을 할 수 있다는 것을 여러 경제인에게 입증시키고, 사회의 여러 악조건 속에 무성의하게 방치된 어린 동심들을 하루 한시라도 빨리 구출하자는 데 그 취지가 있다”고 밝히고 있다(223쪽).
그러나 이는 전태일 스스로도 인정하고 있듯이 “현실적으로 이루어지지 않을 실로 어처구니없는 공상”이었다(226쪽). 왜냐하면 《평전》에서 무려 10쪽이나 차지하고 있는 이 구상의 구체적인 내용 어디에도 기업은 이윤추구를 전제로 성립한다는 기본적인 조건에 대한 이해를 발견할 수 없기 때문이다(220~230쪽). 다시 말해 이 모범업체는 ‘기업’이라기보다는 ‘복지단체’에 가까운 모습이었다.
모범업체의 운영에 필요한 자본금 3000만원을 구하는 방안 또한 이러한 해석을 뒷받침한다. 《평전》에서 조영래는 전태일이 “자기의 눈알 하나를 빼서 실명자에게 기증하여 그 사실이 신문에 보도가 되면 그 신문을 본 독지가가 그의 사람됨을 믿고 투자를 할 거라는 생각”이었다고 설명한다(232쪽). 《평전》은 또한 전태일이 실제 이런 편지를 보냈으나 반송되었다고 증언하고 있다. 조영래는 모범업체 구상이 실현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깨달은 전태일이 마침내 죽음이라는 마지막 선택을 ‘스스로’ 결단하는 과정을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삶의 문제는 결국 죽음의 문제이며, 죽음의 문제는 결국 삶의 문제이다. 비인간의 삶에 미련을 갖는 자는 결코 인간으로 살 수 없다. 전태일이 죽음을 각오한 투쟁을 결단할 수 있었던 것은 그가 비인간의 삶에 대한 온갖 미련을 떨쳐버릴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가 이 사회의 밑바닥에서 겪고 보아온 비인간의 삶은 너무나도 ‘지긋지긋하고 답답한’ 것이었다. 그것을 철저히 인식하였을 때 그는 그것을 철저하게 증오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는 비인간적인 현실의 ‘덩어리에 뭉쳐지기’를 원하지 않는다고 외쳤다. 그는 ‘죽음 그 자체를 두려워하기 전에 (비인간의) 삶 그 자체에 환멸을 느낀다’고 고백하였다. 그러고는 아주 분명하게 ‘나를 버리고, 나를 죽이고 가마’라고 말하였다”(241~242쪽).
그러나 이 설명은 《평전》이 드러내고 싶어 하지 않는 매우 중요한 쟁점을 숨기고 있다. 다름 아닌 남정욱 교수가 ‘70년대 노동운동, 전태일 그리고 불편한 진실’에서 지적하고 있는 문제다(2016. 7. 5 세미나 발표). 남정욱 교수는 “전태일에게 대학생 친구는 물론 대학생 멘토까지 있었다”고 지적한다. 남정욱의 설명을 잠시 들어보자.
미국의 급진적 사회운동가 솔 앨린스키. |
우리나라 운동권 역사에서 나름 중요한 위상을 차지하고 있는 예일대학 신학부 출신의 오재식(1938~2013)은 《기독교 사상》 1970년 12월호에 기고한 〈어떤 예수의 죽음〉이라는 글에서 자신이 누구보다 전태일의 분신 소식을 현장을 통해 가장 빨리 알았던 사람이라고 주장한다. 그 오재식이 솔 앨린스키(Saul Alinsky)의 영어책 《Rules for Radicals》를 번역해 아르케에서 2008년 출판한 책 《급진주의자를 위한 규칙》의 추천사에서 다음과 같은 증언을 하고 있다(앨린스키, 2008, 7쪽).
“나는 귀국 후 다시 기독학생운동으로 복귀하여 기독학생운동 단체들의 통합과정에서 한국학생사회개발단(학사단)을 결성할 것을 제안했다. 그리고 1967년에 출범한 학사단 운동에 사회문제에 대한 앨린스키의 접근방법을 풀어 넣었다. 훈련받은 학생들은 두세 명으로 팀을 구성하여 서민들의 수많은 삶의 현장에 투입되었고 신분을 밝히지 않은 채 현장의 목소리와 울음소리를 수록하였다. 현장의 상황을 정확하게 파악한 후, 선동하지 않고 차분하게 그들을 조직하는 것이 목적이었다. 이렇게 접근한 수많은 현장 가운데 하나가 1970년 전태일 분신사건이었다. 이 비극적인 사건은 노동운동자들의 운동을 활성화시키는 기폭제가 되었다. 기독학생운동이 노동운동과 손을 잡고 1970년대 ‘민주화운동’을 시작하게 된 것이다.”
같은 글에서 그는 앨린스키가 한국과도 짧지만 깊은 인연을 가지고 있음을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앨린스키, 2008, 15쪽).
“1968년에… 미국 장로교의 조지 타드 목사는 허버트 화이트(Herbert White)란 조직가를… 한국에 보냈다. 화이트는 연세대학교 도시문제연구소를 베이스로 하고 수도권선교협의회에 가담해서 서울 청계천의 빈민촌을 중심으로 조직가들을 훈련하기 시작했다.… 화이트는 앨린스키의 훈련을 받은 사람으로 미국 뉴욕 주의 로체스터에서 코닥(Kodak)을 상대로 한 주민조직을 성공시킨 조직가였다. 수도권선교협의회는 위원장 박형규 목사를 중심으로 화이트에게서 훈련받은 젊은 조직가들의 행동반경을 확대시켰다. 이 훈련계획은 2년간 계속되었고 15명에 가까운 사람들이 과정을 마쳤다. 이렇게 조직된 수도권 팀은 도시산업선교회 사람들과 연대하여 1970년대 한국 민주화운동의 근간을 만들었다.”
오재식의 글이 사실이라면 조영래의 《평전》은 청계천 평화시장을 둘러싼 노동운동의 전개에 외부의 훈련된 세력이 개입하고 있었던 사실을 의도적으로 숨기고 있는 셈이다. 공교롭게도 그 외부조직이 활동한 시기는 조영래의 《평전》이 후반부에서 기술하는 전태일의 노동운동 투신 과정과 정확히 시간적으로 겹친다.
그래서 그런지 조영래의 《평전》은 후반부로 갈수록 내용이 치밀하지 못하다. 《평전》에 의거해서 사실적인 전태일의 삶을 전반부와 같이 재구성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평화시장 생활의 전반부, 즉 ‘시다’ 생활을 시작한 1964년 봄부터 ‘재단사’가 되는 1967년 봄까지 3년간의 시간은 《평전》에 의거해 전태일의 삶을 거의 완벽하게 재구성할 수 있다. 그만큼 전반부의 《평전》은 명확하다.
반면에 전태일이 노동운동에 본격적으로 관심을 가지게 되는 1968년 봄부터 분신하는 1970년 11월까지 2년 반 동안의 기간은 《평전》에 따라 전태일의 삶을 명쾌하게 복원하기 어렵다. 평화시장에서의 해고와 재취업이 두서없이 반복되고 또 그 사이사이에 공사장의 막노동 심지어는 삼각산 기슭의 임마뉴엘 수도원 신축공사 현장생활 5개월 등이 뒤엉켜 등장하며 전태일의 생각을 두서없이 나열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평전》이 분명하게 설명하지 못하는 이 기간이 바로 오재식이 언급한 외부세력과의 접촉이 진행된 시기가 아닐까? 그렇기 때문에 조영래의 《평전》은 1968년 이후의 전태일 삶을 파편적으로밖에 기술할 수 없었다는 추론이 가능하다. 다시 말해 후반부의 《평전》 내용은 전태일의 활동을 입체적으로 그리고 연속적으로 접근하기 어렵도록 상황 설정을 시공간적인 맥락에서 의도적으로 분절시키고 있다.
한편 조영래의 《평전》은 전태일 주변의 등장인물에 관한 서술에서도 조악한 모습을 보인다. 예컨대 가명인 김개남의 첫 등장을 《평전》은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 있다. “1968년 봄 평화시장 재단사인 김개남은 전태일을 알게 되었다”(145쪽). 《평전》의 주인공은 당연히 전태일이다. 그렇다면 이 부분의 기술은 당연히 “전태일은 김개남을 알게 되었다”로 표현해야 한다. 주어와 목적어의 순서를 뒤바꾼 이유는 무엇일까? 외부세력의 의도적 접근과 관찰을 무심코 드러낸 표현이 아닐까? 그렇다면 가명으로 등장하는 김개남이야말로 오재식이 증언하고 있는 현장조직에 침투한 활동가일 가능성이 높다.
《평전》이 제시하는 바보회의 활동 지침을 결정하는 과정도 석연치 않기는 매한가지다(160~162쪽). 그중 한 가지인 ‘모범업체’를 설립하는 구상이 얼마나 비현실적이었는지를 우리는 앞의 논의에서 확인할 수 있었다. 그런데 같은 지침 가운데 또 다른 하나인 근로자들의 ‘노동실태 조사’에 관한 발상은 당시로선 정말이지 매우 선진적이고 기발한 아이디어임에 틀림없다. 오늘날에는 흔히 사용되고 있지만, 당시에는 매우 획기적인 방식인 설문조사를 통해 실태조사를 했기 때문이다.
근로기준법의 조문조차 이해하지 못해 “대학생 친구 하나만 있으면 원이 없겠다”던 전태일과 그의 동료들이 그렇다면 어떻게 ‘설문조사’라는 참신하고도 과학적인 아이디어를 낼 수 있었을까? 오재식과 같은 인물로부터 교육받아 노동운동의 이론과 실재를 이미 알고 있는 활동가의 영향 없이 과연 전태일 스스로 생각하고 판단해서 ‘설문조사’라는 방식을 선택할 수 있었을까? 대학생 운동세력의 접근을 의심하지 않을 수 없는 대목이다.
우여곡절 끝에 전태일은 마침내 1970년 9월 죽음도 마다치 않겠다는 결심과 함께 평화시장으로 돌아온다. 그리고 월급 2만3000원을 받는 재단사로 ‘왕성사’에 취업한다(245쪽 및 256쪽). 다른 한편 그는 김개남과 연락하며 ‘바보회’를 계승할 ‘삼동회’를 조직하고, 평화시장 노동자 126명에 대한 설문조사를 실시하여 같은 해 10월 6일 노동청장에게 ‘평화시장 피복제품상 종업원 근로개선 진정서’를 제출한다. 다음날 10월 7일 신문은 그 진정서의 내용을 대서특필하여 전태일은 크게 고무된다.
그러나 언론보도 이후 말로만 이루어지는 형식적인 관심과 지원, 나아가서 그 배후에서 실질적으로는 노동운동에 대한 탄압을 겪으며 전태일은 시위와 저항의 악순환을 반복하면서 좌절한다. 전태일은 결국 1970년 11월 13일 만 22세의 나이에 “근로기준법을 준수하라” “우리는 기계가 아니다! 일요일은 쉬게 하라!” “노동자들을 혹사하지 말라”는 구호와 함께 시위가 예정된 광장으로 석유를 뿌리고 뛰쳐나오며 분신자살한다.
이 마지막 결정적 순간에 관해서도 《평전》은 불분명한 대목을 남긴다. 석유를 뒤집어쓴 전태일에게 불을 붙인 인물이 누구인지를 밝히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스스로인가? 다른 동료 운동가인가? 동료라면 누구인가? 《평전》은 “내 죽음을 헛되이 하지 말라”는 확인할 수 없는 전태일의 마지막 유언을 강조하며 끝을 맺는다. 2009년 신판으로 출판된 《전태일 평전》의 기록이다.
그러나 1983년 초판 《전태일 평전》은 이 부분의 내용이 전혀 다르다. 1983년 초판은 이 대목에서 김개남이 성냥불을 붙인 사실을 명확히 기술하고 있다. 그러므로 전태일은 김개남의 도움을 받아 분신하였다. 그렇다면 김개남은 누구인가? 《평전》이 말하듯 이 이름은 가명이다. 그리고 앞에서 추론하였듯 김개남이야말로 학생운동 출신으로 노동운동 현장에 투신한 활동가 조직원일 가능성이 높다.
이러한 추론을 뒷받침하는 기록은 또 있다. 〈학생운동권 대부에서 분쟁지역 돕기 나선 ‘양국주’의 탈레반 인생〉이라는 《조선일보》 2009년 10월 31일 기사다. 《조선일보》 주말판 연재물인 〈WHY〉는 당시 〈문갑식의 하드 보일드〉라는 제목을 달고 다음과 같은 인터뷰 기사를 내보냈다. 질문자는 문갑식 기자이고 응답자는 양국주다.
목사에서 운동권 투사(鬪士)로
전태일 주위의 운동권 활동가들에 대해 증언한 양국주씨. |
1949년 전북 정읍에서 태어난 양국주의 삶에 딱 어울리는 영어 표현이 있다. ‘은(銀)수저를 입에 물고….’ 그의 아버지 양재열은 부호(富豪)였다. 그는 한국칼라인쇄와 주사기 관련 업체를 경영하고 있었다. 한국칼라인쇄는 대한민국 달력 전부를 인쇄한다는 말을 들을 정도였다. 정읍서국민학교 4학년을 마치고 서울 혜화국민학교로 전학 온 양국주의 집은 돈암장 터였다. 넓은 집만큼 돈이 많았고 각계에 걸친 인맥도 두터웠다. 그보다 더 굳건한 건 예수를 향한 믿음이었다. 양재열은 정읍과 서울 잠실에 대형 교회 2개를 지어 봉헌(奉獻)했다. 경신중고를 마치고 숭실대 3학년 진급을 앞둘 때 양국주는 아버지처럼 되고 싶어 했다. 꿈이 목사였다.
— 그 꿈이 왜 바뀐 겁니까.
“제가 연세대 철학과 2학년으로 편입했습니다. 그곳에서 기독학생회(SCA)라는 서클에 들어가면서 삶이 바뀌었지요. 연대 SCA 회장에 이어 한국기독학생연맹 의장이 되면서 자연스럽게 운동권이 된 겁니다.”
— 박정희 정권에 반대했나요.
“처음 한 일은 71년 대선(大選) 때 야당 후보였던 김대중의 개표 참관 감시활동을 했습니다. 전국에서 운동권 학생들이 참관단을 결성했는데 저는 200명을 열차에 태워 충북 제천, 단양으로 갔습니다. 물론 경찰 제지로 기차에서 내려보지도 못했지만요.”
— 그리고요.
“이후 교련(敎鍊) 반대 투쟁이 이어졌고 위수령(衛戍令)이 발동되면서 구속됐지요. 두 달간 교도소에 있다 전방 21사단으로 강제 징집됐습니다.”
— 운동권들을 왜 전방으로 보냈을까요. 혹시 휴전선을 넘어갈 수도 있을 텐데.
“당시 운동권은 지금 같은 종북반미(從北反美)가 아니었어요. 교련 반대했으니 고생 좀 해보라는 것이었겠죠. 정보가 샐 수 있는 행정병 같은 보직은 안 줬어요. 심지연(沈之淵·경남대 교수), 고(故) 최재현 서강대 사회과학대학장이 같은 부대에 있었습니다.”
— 당시 운동권은 어땠습니까.
“솔 앨린스키의 ‘지역사회이론’을 혹시 압니까? 그는 마틴 루서 킹 목사의 최측근입니다. 지역사회이론의 요체는 ‘잠자는 민중을 깨워 리더를 양성시킨 뒤 그들 스스로 문제를 해결하도록 한다’는 내용입니다. 예를 들면 전태일 같은 인물이 그렇지요.”
— 그를 압니까?
“분신(焚身)할 때 곁에 있었으니까요. 전태일은 지금 미국 샌디에이고에 있는 이승종 목사가 교육시켰지요.”
— 고 조영래 변호사가 《전태일 평전》을 썼지요.
“전태일은 과격하고 다혈질이었어요. 나중에 노동열사(烈士)가 됐지요. 박종철이나 이한열이 민주열사가 된 것처럼. 그건 시대의 아픔이 후일 하나의 상징으로 변할 수 있음을 보여줍니다. 조영래씨는 제 형(양창삼 전 한양대 대학원장)의 친굽니다. 나중엔 인권변호사가 됐지만 대학 시절엔 정치색이 강했어요. 경남 함양에 국회의원으로 출마하겠다며 열심히 작업했지요.”
— 그때 많은 인맥을 맺었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최열, 서경석, 박원순, 마광수…. 지금 부부가 된 이종호와 신필균은 그때 서울상대와 이화여대 기독학생회 간부였고요. 헤아릴 수 없이 많아요. 얘기 나온 김에 당시 운동권 사정 좀 알려드릴까? 당시 학생운동은 네트워킹이 약했어요. 정부에서 월남에 맹호(猛虎)부대를 파견했잖아요. 당시 전국 대학의 학생회장 100여 명을 수송선에 태워 월남에 위문 보냈어요. 정부는 애국심을 고취시키려 한 건데 오히려 운동권의 결속력을 다지는 자리가 됐습니다.”
22세에 분신한 전태일의 삶을 그린 조영래의 《평전》은 엄청나게 중요한 부분을 가리고 있다. 왜냐하면 외부세력이 “접근한 현장의 하나가 전태일의 분신사건”이라는 오재식의 공개적 증언이 《평전》 어디에도 등장하지 않기 때문이다. 또한 양국주의 증언 “분신할 때 곁에 있었고, 전태일은 지금 미국 샌디에이고에 있는 이승종 목사가 교육시켰다”는 내용도 《평전》에는 전혀 나오지 않는다.
김개남의 정체는 과연 무엇인가? 과연 그는 전태일을 상대로 무슨 일을 하였는가? 1990년대 초 ‘유서대필’ 사건을 시작으로 유행처럼 번지던 운동권 대학생들의 자살을 보고 “죽음의 굿판을 걷어치우라”고 일갈했던 시인 김지하, 그리고 “죽음을 선동하는 어둠의 세력”이 존재하고 있음을 고발한 당시 서강대 총장 박홍 신부의 발언을 연상하지 않을 수 없다. 이 쟁점은 앞으로 보다 심층적인 분석과 조명이 필요한 부분이다.
어찌 됐든 지금까지의 분석으로 이 대목에서 분명히 내릴 수 있는 결론은 다음과 같다. 다름 아닌 전태일의 “대학생 친구가 하나 있었으면 원이 없겠다”는 《평전》의 설명은 100% 거짓말이라는 사실이다. ‘설문조사’ 방식의 노동자 실태조사도 같은 결론으로 이끈다. 또한 다른 무엇보다 이 의구심은 《평전》이 보여주는 분신 장면에 대한 기술에서 1983년 초판에서 분명히 등장했던 김개남이 2009년 신판에서 사라진 사실로도 뒷받침된다.
4. 전태일의 선택: 다른 동시대인의 선택은?
전태일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착취’에 항거한 노동자의 상징으로 남아 있다. 사진은 2012년 11월 13일, 서울 청계천에 있는 전태일 동상에 문재인 민주당 대선 후보가 헌화하는 모습. |
이를 위해 여기서는 ‘노동부’와 ‘한국산업인력공단’이 공동으로 매년 펴내는 《기능한국인 수기집》에 등장하는 인물을 분석대상으로 삼았다. 이 책은 2007년부터 2015년 현재까지 매해에 달마다 1명씩 선정된 12명의 기능한국인의 삶에 관한 자전적 수기를 담아 매년 한 권씩 출판되고 있다. 2016년 현재까지 총 9권이 발행되었으며, 각 권당 12명의 삶의 발자취를 담고 있다. 그러므로 지금까지 출판된 책에는 도합 108명의 삶의 기록이 생생하게 담겨 있다.
이 책에는 전태일 못지않게 어려운 환경에서 기술을 익혀 오늘날 자신의 분야에서 각자 명장(마에스트로)의 경지에 오른 사람들에 관한 이야기가 서술되어 있다. 이들의 절대다수는 1950년대 농어촌에서 태어나 1970년대에 이루어진 중화학공업화와 더불어 어렵게 기술을 익혀 도시로 진출한 기능공들이다. 이들의 가정환경 또한 전태일의 상황과 크게 다르지 않다. 경제적 어려움 때문에 인문계 교육을 포기하고 공업고등학교나 직업훈련원 교육을 선택한 경우에서부터 심지어는 초등학교 중퇴나 졸업 정도의 교육 배경만을 가지고 산업현장에 뛰어들어 기술을 익힌 경우도 많다.
구체적인 분석을 위해 선택된 사례는 2008년 책 《하얀 고무신》에 등장하는 금형(金型)전문가 ‘서영범’이다. 그는 1947년생으로 앞서 설명한 108명의 인물 가운데 1948년에 태어난 전태일과 가장 나이가 가깝고 또한 자라온 환경도 비슷하다. 경기도 고랑포가 고향인 그는 1·4후퇴 때 부모님을 따라 서울로 내려왔다. 그의 나이 14세 때인 1961년 군인이던 아버지가 불의의 사고로 익사하고 나서부터 그는 어머니와 자신을 포함한 5남매를 돌보는 소년가장이 되지 않을 수 없었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해인 14세에 학업을 포기한 그는 곧바로 ‘신성금고’라는 금고 만드는 회사에 허드렛일을 하는, 즉 평화시장에서 16세 전태일이 하던 ‘시다’와 엇비슷한 조건으로 취업전선에 들어선다. 전태일보다 두 살이나 어린 나이에 그는 돈을 아끼기 위해 배를 굶으며 대흥동 집에서 회사가 있는 오장동까지 걸어서 출퇴근했다. 또한 그는 기술을 가르쳐주지 않는 선임들을 원망하며, 일과 후 쓰레기통을 뒤지면서 도면 읽는 공부를 하고 선반 돌리는 기술을 익혔다.
그렇게 각고의 노력을 기울인 결과 3년 후 나이 17세가 되던 1964년 그는 ‘오리엔탈’이라는 신수동에 위치한 릴낚싯대를 만드는 회사에 ‘선반기사’로 당당히 입사한다.
전태일이 ‘시다’에서 ‘재단사’가 되는 3년의 세월과 똑같은 기간에 그는 마침내 ‘선반기사’ 대우를 받으며 스카우트되어 직장을 옮길 수 있었다. 그러나 이 회사는 불행히도 자금 압박을 견디지 못하고 그가 입사한 지 2년 만인 1966년에 파산하고 만다.
그러나 기술을 가진 19세 서영범은 별 어려움 없이 용강동에 있던 또 다른 회사인 ‘대광다이캐스팅’으로 즉시 직장을 옮길 수 있었다. 전태일과 마찬가지로 그도 주변으로부터 성실성을 인정받았고 또한 이번에는 ‘금형기사’ 자격도 갖추었기 때문이다. 그는 이때 처음으로 월급다운 월급을 받았다고 기억한다. 전태일이 재단사가 되어 상당한 수준의 봉급을 받기 시작한 바로 그 나이와 같은 19세 때다.
2년 후 1968년, 즉 21세가 되면서 그는 육군에 징집되었다. 전태일이 어린 여공을 위해 분신자살한 22세의 나이에 그는 대한민국을 위해 최전방 비무장지대에서 국방의 의무를 다하고 있었다. 3년을 군에서 복무한 1971년 그는 만기 제대하고 다시 ‘대광다이캐스팅’으로 복직했다.
2년을 더 같은 회사에 재직하던 그는 1973년 그러니까 26세의 나이에 당시 최고로 잘나가던 ‘기아자동차 소하리 공장’으로 당당히 전직한다. 그리고 이듬해 그는 기아자동차에 근무하며 “나에게 특별히 선반기술을 가르쳐준 사람은 없었지만 지난 세월 동안 순전히 현장에서 갈고 닦은 기술 하나만으로” 선반기능사 국가자격증을 취득한다.
1976년 그러니까 나이 29세에 그는 마침내 월급쟁이 생활을 정리하고 독립하기 위해 기아자동차에 사표를 낸다. 퇴직과 동시에 그는 그동안 동생들 학비와 집안의 생활비를 대면서도 근근이 모은 돈으로 선반기계를 한 대 장만하고, 마포에 있는 친구 회사의 작업장에서 더부살이로 일을 시작한다. 그로부터 6년 동안 그러니까 35세가 되는 1982년 ‘용선정밀’이라는 회사를 창업할 때까지 그는 자신의 기계를 밤새워 돌리며 힘들지만 열심히 일했다. 그 과정에서 그의 나이 32세 1979년엔 결혼도 했다. 용선정밀은 그가 얻은 아들의 이름을 딴 회사였다.
창업한 1982년으로부터 26년이 지난 2008년 61세의 나이에 그는 마침내 ‘기능한국인’으로 선발되어 대한민국 최고의 경쟁력을 가진 금형업계의 선두주자 대한민국 명장으로 우뚝 섰다. 아들의 이름을 걸고 시작한 창업의 각오 덕분에 그는 금형 부문에서 온갖 종류의 특허를 낼 수 있었다. 2008년 현재 그의 회사는 문래동에 제1공장 및 김포에 제2공장을 두고 모두 12명의 종업원을 고용하며 연간 매출액 20억원을 자랑하고 있다.
그는 또한 회사일 외에도 불우이웃 돕기 등 각종 사회활동에도 적극적인 모습이다. 소외된 이웃들과의 나눔을 통해 많은 것을 배우고 있다고 그는 수기에서 수줍게 고백하고 있다. 22세의 나이로 어린 여공들의 근로조건을 개선시키기 위해 생을 마감한 전태일의 삶 혹은 죽음과 비교하여 과연 금형전문가 서영범의 삶은 의미가 없는 삶인지를 거꾸로 묻지 않을 수 없다.
이러한 평가는 비단 이 글에서 전태일과 비교하는 작업의 구체적 사례로 삼은 서영범의 경우에만 국한되는 일이 아니다. 수기집에 등장하는 108명 모두, 또한 나아가서 이들 108명으로 대표되는 60년대, 그리고 70년대 산업현장에서 땀흘리며 가족을 돌보고 미래를 개척한 200만 기능인력 노동자 모두에게 적용할 수 있는 평가다. 분야가 다르기는 하지만 18세가 되기까지 네 번의 가출을 하며 맨주먹으로 세계 굴지의 기업군을 일으켜 수많은 일자리를 창출한 정주영의 경우는 더 말할 필요도 없다.
스스로 목숨을 끓는 선택이 안타깝기는 하지만 우리가 보고 배워야 할 그리하여 후대의 본보기가 되어야 할 선택은 절대 아니다. 스스로 목숨을 버리는 행동은 그 자체만으로도 인륜을 저버리는 비도덕적 행동이다. 오히려 역경을 뚫고 살아남아 자신은 물론 가족과 공동체 그리고 나라를 위해 무언가를 성취한 이들이야말로 우리가 귀감으로 삼아야 할 본보기이다. 이들의 삶이 더욱 빛나고 아름답다. 죽는다는 선택은 오히려 비겁하고 손쉬운 선택일 뿐이다.
5. 전태일은 아름답지 않다
조영래의 《전태일 평전》은 젊은이들에게 우리나라 노동자들이 ‘착취’당하고 있으며 그들을 위해서는 노동운동을 적극적으로 전개해야 한다고 도덕적으로 호소하고 있다. 그러나 《평전》의 내용을 차근차근 따져보면 사실은 전혀 그럴 필요가 없음을 알 수 있다. 왜냐하면 전태일은 ‘착취’당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평전》은 전태일의 임금이 3년 동안 10배, 그리고 6년 동안 15배로 상승하였음을 기록하고 있다.
또한 《평전》은 전태일에게 접근했던 대학 출신 노동운동 활동가들의 존재를 전혀 언급하지 않고 있다. 오히려 “대학생 친구가 하나 있었으면 원이 없겠다”는 거짓 문구로 젊은이들의 감성을 선동할 뿐이다. 앨린스키의 운동노선을 따라 “외부세력이 접근한 현장의 하나가 전태일 분신사건”이라는 증언이나 “분신할 때 곁에 있었다”, 그리고 “전태일은 지금 미국 샌디에이고에 있는 이승종 목사가 교육시켰다”는 증언이 《평전》 어디에도 등장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조영래의 《평전》은 있는 그대로의 전태일이 아니라 선동을 위해 사실을 왜곡한 전태일에 관한 글일 뿐이다.
마지막으로, 당시를 살았던 다른 사람들의 선택과 비교해 볼 때 전태일이 선택한 삶 혹은 죽음이 도덕적으로 바람직하고 나아가서 아름다운 것이었다고 말할 수 없다. 왜냐하면 너무도 많은 사람이 전태일과 엇비슷한 조건에서 출발하여 온갖 어려움을 헤치고 오늘날 자수성가하여 국가와 사회에 기여하며 자신의 역할을 다하고 있기 때문이다. 전태일의 극단적인 선택은 불가피하지 않았으며, 따라서 아름답지도 않다. 다만 불행했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