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주의의 핵심은 재산권이다. 모든 개인은 타인에게 피해를 주지 않는 한 자신의 재산을 마음대로 활용할 권리가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재산 활용에서 필수적인 요소가 바로 계약이다. 자유주의 사회는 국가와 정부가 존재하지 않거나 대단히 미약한 형태로만 존재하게 될 것이기 때문에 현재 국가와 정부가 전담하는 사회적 기능의 상당부분이 민간계약을 통해 제공될 것이다.
혹자는 어떠한 계약이라도 그것이 완전히 자발적으로 체결되었다면 그 내용과 상관없이 자유주의 사회에서는 매우 합법적이고 따라서 무조건 이행되어야 한다고 주장하곤 한다. 심지어 일부 자유주의자들도 그러하다. 예컨대 자유주의 사회에서는 자발적 노예계약이나 자발적인 신체포기각서 등이 만연할 수 있다는 것이다.
2021년 10월 기준으로 큰 화제가 되고 있는 넷플릭스 드라마 '오징어게임'에서는 "참가자가 게임을 임의로 중단할 수 없다"는 동의서를 쓰고 많은 참가자가 거액의 상금을 위해 자신의 목숨을 걸고 게임에 참여한다. 게임에서 통과하지 못하면 죽는다. 그러나 한번 참가를 결정한 이상 계약의 내용에 따라 결코 게임을 중단할 수는 없다. (이 글을 쓴 사람은 오징어게임을 보지 않았고 볼 계획도 없기 때문에 정확하지 않을 수 있음) 이는 일종의 노예계약인데, 자신의 신체에 대한 통제권을 게임주최측에게 완전히 넘기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종류의 계약은 자유주의 사회에서 정당한 것으로 받아들여질 수 있는가? 자유주의의 비판자들은 아마 그렇다고 말할 것이다. 해당 계약내용을 구체적으로 언급한 것들은 아니지만 벌써부터 오징어게임과 자본주의를 엮어서 좌파적 반자본주의 선동을 전개하는 칼럼들을 인터넷에서 많이 찾아볼 수 있다.
안타깝게도 오징어게임에 나온 게임참가동의서는 자유주의 사회에서는 결코 정당화될 수 없다. 더 나아가 아무리 동의를 했다고 해도 드라마에서 연출된 살인행위 역시 결코 범죄적이지 않을 수 없다.
자유주의 윤리학에 따르면, 유일하게 합법적으로 강제할 수 있는 계약은 한 당사자가 계약을 준수하지 않는 것이 다른 당사자에게 재산의 절도를 의미하게 되는 계약뿐이다. 다시 말해, 계약이행의 실패가 재산의 암묵적 절도가 될 때 그 계약은 강제로 집행되어야 한다. 이러한 계약을 이행하지 않는 것은 다른 사람의 재산을 동의없이 갈취하는 것 혹은 채무를 불이행하는 것과 다름이 없다.
다르게 말하자면, 재산의 절도를 수반하지 않는 단순한 약속만 담고 있는 계약은 불이행해도 문제가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오히려 그러한 계약을 강제로 집행하는 측이 문제의 원인이다.
이러한 자유주의 계약이론은 '권리증서이전'(title-transfer) 이론으로 불린다. 예시를 통해 살펴보자. 스미스와 존스가 다음과 같은 계약을 한다고 가정한다. 그 계약이란, 지금부터 1년 후에 스미스에게 1,100 달러를 지불하기로 동의한 존스의 차용증서를 대가로 스미스가 현재 존스에게 1,000 달러를 지급하는 것이다. 이는 전형적인 채무계약이다. 그리고 1년 후 약속한 날이 도래했을 때, 존스가 지급하기를 거부한다고 가정하자. 애당초 스미스가 존스에게 1,000 달러를 지급한 이유는 단순한 양도가 아니라 조건부, 즉 1년 후에 존스로부터 1,100 달러를 상환받는다는 조건하에 이루어진 것이고, 따라서 존스가 1,100 달러의 지급을 거부하는 것은 스미스의 몫이 되어야 할 재산 1,100 달러를 도둑질한 것이다.
자유주의 계약이론에서 법적 강제력을 가질 수 없는 계약 중 대표적인 것이 약혼이다. A와 B가 결혼하기로 약속했다고 가정하자. B는 결혼 계획을 세우고 결혼식을 준비하는 데 비용을 지불한다. 최후의 순간에, A는 마음을 바꾸고 그로 인해 소위 이 약혼 '계약'을 위반한다. 자유주의 사회의 법 집행 기관은 A에게 강제로 결혼할 것을 명령할 수 있는가? 만약 그러하다면 자유주의 사회는 A에게 B의 노예가 될 것을 지시하는 것이다. 강제 결혼은 명백하고 분명한 형태의 비자발적 노예이다. 만약 A가 강제로 결혼할 수 없다면, 적어도 A는 B에게 결혼 준비 비용을 배상해야만 하는가? 만약 그러하다면, A는 B가 기대하던 결혼에 대한 기대를 꺾어버렸기 때문에 보상을 해야하는 것이다.
이것은 비자발적 노예라고 말할 수는 없지만 자유주의 사회에서는 여전히 법적 강제력이 없다. 왜냐하면 단순한 약속 또는 기대를 저버리는 것에는 재산 침해가 없기 때문이다. 단순히 결혼하겠다고 약속하거나 결혼을 할 수도 있다는 기대를 주입하는 것은 암묵적 절도를 의미하지 않는다.
왜 단순한 약속이나 기대는 법적 강제력을 가질 수 없는가? 그 이유는 자유주의 윤리학에서 사유재산 소유권의 권리증서가 유일하게 타당하고 적법하게 양도될 수 있는 사례는 오직 인간에 의해 양도가능한 사물에 국한되기 때문이다. 어떤 사람에 의해 소유된 모든 유형의 재산은 양도가능하다. 즉, 신발, 집, 차, 돈 등등을 다른 사람에게 팔거나 줄 수 있다. 그런데 이러한 재산과 별개로 심지어 자발적이라 할지라도 사실상 양도가 불가능한 것이 있는데, 바로 인간의 의지이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자신의 마음과 신체에 대한 통제는 양도가 불가능하다. 자신의 마음과 신체는 자신의 의지에 부착되어 있는 것이기 때문에 양도가 논리적으로 불가능하다. 따라서 자신의 마음과 신체를 통제할 수 있는 권리를 타인에게 양도하는 것도 불가능한 것이다.
이러한 이유로 자유주의 사회에서는 자발적 노예 계약이 가능하지 않다. 스미스가 존스 회사와 다음과 같은 합의를 했다고 가정하자. 스미스는 여생 동안 어떤 조건 아래서도 존스 회사가 규정하기를 바라는 모든 명령을 수행할 것이다. 만약 그러한 명령이 스미스의 목숨을 위협하는 경우에도 그러하다. 만약 스미스가 완전히 자발적으로 합의했다면 자유주의 사회는 존스 회사가 스미스에게 무한히 명령하고 스미스가 무한히 복종하는 것을 방지할 방도가 없는가? 일단 스미스가 완전히 자발적으로 복종하기를 바란다면 그러하다. 문제는 스미스가 마음을 바꾸었을 때 발생한다. 스미스가 계약을 체결하고 10년, 20년, 혹은 심지어 다음 날에 바로 마음을 바꾸어서 떠나기를 원한다고 가정해보자. 그는 이전의 자발적 노예계약을 지켜야만 하는가? 물론 그렇지 않다. 스미스는 존스에게 어떤 사유재산 소유권 권리증서를 양도한 것이 아니고 단순히 노예가 되기로 약속만 했을 뿐이다. 마음과 신체의 통제권을 양도한다는 것은 논리적으로 불가능하기 떄문에 애초에 자발적 노예 계약이라는 것이 법적으로 유효한 계약이 아니었고, 존스에 대한 스미스의 순전히 자발적인 호의에서만 유지가능한 것이었다. 따라서 스미스는 존스 회사의 노예가 되기로 결정했음에도 불구하고 원하는 언제든지 떠날 수 있다.
그렇다면, 적어도 스미스는 존스 회사가 요구했던 평생 동안의 노예 서비스에 대한 기대로 측정되는 피해를 존스 회사에게 보상해야만 하는가? 물론 아니다. 스미스는 존스로부터 그 무엇도 도둑질하지 않았다. 그는 존스 회사의 그 어떤 정당한 재산도 탈취하지 않았다. 그가 존스 회사에 공급한 마음과 신체를 활용한 노동력과 다른 가치들은 항상 그 자신의 호의에만 의존하는 것이었지 존스에게 무언가 빚을 진거이 아니었다.
만약 존스 회사가 스미스가 평생 동안 공급할 것으로 예상되었던 노예 서비스에 기초하여 모든 향후 사업을 구상하고, 스미스가 이탈하기로 결정함에 따라 모든 계획이 물거품이 되어 파산을 하게 되었다면 어떻게 될까? 그렇다고 해도 변하는 것은 없다. 그는 약혼이 파기된 결혼당사자와 마찬가지의 신세일 뿐이다. 삶은 항상 불확실하고 리스크를 가지는 것이고, 특히 기업가는 불확실성이 가득찬 세계의 최전선에서 행동하는 존재자이다. 존스가 전혀 법적 구속력이 없는 자발적 노예 계약을 통해 사업을 구상하고 그 결과 파산했다면 그것은 존스가 열등한 기업가임을 의미할 뿐이다.
자발적 노예 계약이라는 극단적 사례가 아니라 실생활에서 접할 수 있는 의무적인 근로계약을 살펴보자. 자유주의 윤리학이 징병제를 허용하지 않는다는 점은 너무도 당연한 사실이기에 논할 필요도 없다. 그러나 만약 모병제 혹은 민영화된 국방체제 하에서 군대가 지원해서 입대한 사람에게 몇 년간의 의무복무기간을 요구한다면 어떻게 될까? 만약 의무복무기간 중에 군에서 이탈한 군인이 있다면 그를 탈영병으로 간주하고 군대로 강제로 귀환시켜서 처벌한 후 의무복무기간을 채우도록 강요해야 할까? 자유주의사회에서는 그렇지 않다. 몇 년간 의무복무를 하겠다는 것은 지원병이 군대에 어떤 재산을 증여한 것이 아니라 단순한 약속일 뿐이다. 모든 사람은 자신의 마음과 신체의 처분에 대해 언제든지 생각을 바꿀 권리가 있기 때문에 그는 그만두고 싶다면 당장 그만둘 수 있어야 한다. 군대에 복무하는 동안 병사의 마음과 신체는 나라의 것이라는 레토릭은 징병제에서는 당연히 잘못된 것이지만 모병제에서도 잘못된 것이다.
군대와 같은 특수한 환경이 아니라 민간회사도 그러하다. 만약 스미스가 존스 회사에 5년 동안 기술자로 근무하기로 서명했지만 5년을 채우지 못하고 그만둔다면 어떠한가? 자유주의 사회에서 존스 회사는 스미스에게 어떤 법적인 제약을 걸 수가 없다. 의무복무 자체가 정당화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존스 회사가 스미스에게 불이익을 부여할 방법이 아예 없는 것은 아니다. 존스 회사는 스미스를 블랙리스트로 올려 동종업계에서 정보를 공유하여 스미스의 취업을 막을 수 있다. 이는 존스 회사의 완전한 권리이다. 그리고 만약 스미스가 존스 회사에서 5년 혹은 평생 근무하는 대가로 100만 달러를 선지급받았다고 가정하자. 그렇다며 분명 존스 회사는 스미스에게 백만 달러를 돌려받아야 한다. 스미스는 자신의 마음을 언제든지 바꿀 수 있지만 그렇게 한다면 100만 달러를 간직할 권리는 더 이상 보유하지 않는다. 더 나아가 그는 선지급받은 100만 달러에 대한 이자 역시 포함하여 되돌려주어야 한다.
결론적으로, 자유주의 사회에서는 자발적 노예가 정당화될 가능성이 전무하다. 동시에 계약이행 보증증서가 일종의 민영화된 자발적 처벌 혹은 구속적 형벌로 기능하여 각종 사회적 분쟁을 방지하는 메커니즘으로 작동하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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