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의 주요 이슈 중 사회보장제도는 꾸준히 언급되는 주제다. 그렇다면 최초의 근대적 사회보장제도를 마련한 사람은 누굴까? 놀랍게도 사회주의자는 절대 아니다. 다름 아닌 철혈 재상으로 알려진 독일 제국의 수상 오토 폰 비스마르크였다. 그는 융커(Junker) 출신의 상당히 보수적인 인물이었다.
당시 19세기 독일은 사회 기반이 낙후된 상황에서 프랑스로부터 받아낸 보불전쟁(普佛戰爭) 배상금을 기반으로 다른 열강들보다는 비교적 뒤늦게 산업화에 성공했고, 또한 자유주의적 체제로 놀라운 경제 성장을 이뤄냈다.
한편, 1875년 사회주의 세력이 정당을 결성해 독일 제국에 등장했다. 이에 비스마르크 수상은 사회주의자들과 타협하지 않고 오히려 '사회주의자 탄압법’(1878년)을 제정하여 독일 내 사회주의자를 비롯한 체제부정세력을 억눌렀다.
그런데 얼마 지나지 않아 독일에 불황이 찾아왔다. 당시 비스마르크 수상과 독일 정부는 폭증하는 실업자에 당황했다. 사회주의 세력은 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독일 내에서 점차 영향력을 키워나갔다.
결국 비스마르크 수상은 고심 끝에 소위 채찍(Peitsche)과 사탕과자(Zuckerbrot)라는 두 가지 상반된 정책을 고안하기에 이른다. 사회주의 정당에 가입하지 않은 근로자들을 대상으로 '의료보험법’(1883년), '산업재해보험법’(1884년), 그리고 '노령 및 폐질보험법’(1889년) 제정을 통해 건강보험과 재해보험, 그리고 노령보험이라는 3대 사회보장제도를 실시한 것이었다.
이것이 바로 최초의 근대적 사회보장제도의 기원이며 오늘날 복지 정책에도 적잖은 영향을 미쳤다. 이 때문에 비스마르크의 복지 정책은 가끔씩 '복지 정책은 사회주의 성향의 좌파가 아닌 보수 우파가 최초로 시행했다’고 주장하는 근거로 쓰이기도 했다.
하지만 당시 비스마르크 수상의 의도는 달랐다. 앞서 언급한 복지 정책을 통해 사회주의의 투쟁 동력을 약화시키고자 했던 것이다. 특히 “노인들은 돈을 준다고 하면 쉽게 설득할 수 있다”는 비스마르크 수상의 유명한 발언은 그가 포퓰리즘에 빠졌다는 사실을 잘 보여주고 있다. 그래서 일각에서는 비스마르크의 복지 정책에 대해 “통치 권력이 일정한 지지를 확보하기 위해 국민들에게 일종의 뇌물을 준 것”이라고 정의했다.
그러나 이러한 복지 정책으로 비스마르크 수상은 뜻한 바를 전혀 이루지 못했다. 오히려 1890년 '사회주의자 탄압법’은 폐지됐고 독일 내 사회주의 정당은 마르크스 노선을 공식화했다. 복지 수혜를 입은 근로자들은 대부분 '사회주의 체제 하에서는 이보다 더 많은 혜택을 누릴 수 있다’는 유혹에 빠져들었다. 그리고 비스마르크 수상은 새로 즉위한 황제 빌헬름 2세에 의해 해임되고 말았다.
초창기 자유주의와도 연대했던 비스마르크 수상은 후기로 갈수록 보호 관세 정책을 취하는 등 오히려 자유주의를 억압하는 모습을 보였으며, 심지어 교회를 박해하기도 했다. 결국 그는 사회주의와의 이념 전쟁에서 패했고 기업가와 교회, 주류 세력으로부터도 배척됐다. 이후 비스마르크의 복지 정책은 포퓰리즘이라는 비판을 넘어 사회권으로 포장되기도 했다. 어찌 됐든 비스마르크 수상이 비참한 최후를 맞이했다는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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