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의 문은 비겁한 침묵으로 닫힌다

손경모 / 2020-02-07 / 조회: 13,217

실존주의 작가로 유명한 카프카의 ‘소송’중에는 ‘법 앞에서’라는 흥미로운 이야기가 있다. 이 이야기는 전체주의 사회의 출현방식을 알리는 바가 있어 대략의 줄거리를 소개하고자 한다.


한 시골남자가 '법' 안으로 들어가려고 하자 문 앞을 지키던 문지기가 그를 저지한다. 시골남자가 나중에는 문 안으로 들어갈 수 있는지 묻자 문지기는 가능하지만 지금은 안 된다고 대답한다. 문지기는 자신이 금지한 것을 어기고 문 안으로 들어가 볼 것을 권장하면서도 문을 통과 할수록 더욱 강한 문지기들이 있다고 위협한다. 결국 시골남자는 문 안으로 들어가는 것을 포기하고 허가를 얻기 위해 노력한다. 뇌물을 써 문지기를 매수하려고 시도하지만 문지기는 시골남자가 아무 노력도 안했다는 생각이 들지 않게 받아준다고 말한다. 끊임없이 이야기를 늘어놓으며 귀찮게 하는가 하면 심지어는 문지기의 옷깃에 붙어 있는 벼룩에게 도움을 청하기도 한다. 시골남자는 문 앞에서 긴 세월을 보낸 뒤 죽음을 맞이하게 되고 임종 직전 문 안에서 흘러나오는 강한 빛을 보게 된다. 시골남자는 마지막 순간에 문지기에게 왜 자신 외에는 아무도 찾아오지 않는지 물었고 문지기는 시골남자만을 위한 문이기 때문이라고 대답한다. 문지기는 시골남자의 죽음과 함께 문을 닫는다.


카프카는 이 이야기를 통해 전체주의 사회가 어떻게 도래하는 가에 관해 말한다. 먼저 한 시골남자는 법의 문제에 직면해보지 않은 평범한 소시민을 상징한다. 이 소시민은 어느 날 ‘법’의 문제에 직면하게 돼 ‘법’ 안으로 들어가고자 한다. 그런데 문지기가 안으로 들어가는 것은 가능하지만 지금은 안 된다고 가로 막는다. 이것은 정당한 법적 권리를 누리려고 하는 시민을 막는 행정권력을 상징한다. 행정권력은 권리를 누리는 것을 막을 아무 근거가 없음에도 ‘유예’를 통해 실질적인 권리 행사를 금지한다. 이는 근거 없는 비관세 장벽이나, 세금을 먼저 걷고 나중에 환급해주는 제도나, 일단 구속부터 하고 보는 행정행태가 그 예다.

 

문지기는 자신이 금지하지만 들어가 볼 것을 권장한다. 실제로 자신은 그것을 유예할 수 있을 뿐 금지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다만 그 금지에서 오는 이익을 누리기 위해서 ‘법’으로 들어가려는 소시민을 겁을 줘 혼란스럽게 할 뿐이다. 만일 소시민이 자신을 무시하고 법의 문으로 들어가더라도 더 강한 문지기들이 있어, ‘법’으로 들어가는 것이 소용없음을 강조한다.

 

결국 시골남자는 법의 문으로 들어가는 것을 포기하고 문지기의 허가를 얻기 위해 노력한다. 이는 정당한 법적권리를 힘들더라도 제대로 얻지 않고, 쉬워 보이고 간단해 보이는 방법으로 행사하려는 사람들의 심리를 상징한다. 어떤 인허가를 받기 위해 절차를 통하는 것이 아니라, 간단히 공무원을 매수해서 통과하려는 것이 그 예다.

 

하지만 문지기는 뇌물을 써도, 관련된 벼룩에게까지 부탁해 봐도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 공무원은 결국 자기 신분의 문제 때문에 지대추구를 하기는 하지만, 안 되는 일을 되게 하기는 어렵다. 이 시골남자는 평생을 ‘법’앞에서 전전긍긍하다가 결국 죽음을 맞이하게 된다.

 

시골남자가 죽기 직전에 본 문에서의 강한 빛은 만민에게 평등하게 열려있는 보편적인 법의 정신이었고, 그제서야 이 남자는 왜 자신 이외에는 아무도 이곳에 찾아오지 않았는지 의문을 갖게 된다. 그러자 문지기는 이 문이 ‘시골남자’ 만을 위한 문이었기 때문이라고 답하며 그의 죽음과 함께 문을 닫는다. 통과가 가능하지만 지금은 안 되는 문이 언젠가부터 왜 시골남자를 위한 문으로 변해버린 것일까. 정답은 바로 시골남자가 진정한 문지기였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법적 권리를 행사할 때 법조문을 보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이 어떻게 행동하는지를 본다. 신호등을 건널 때, 차가 설 때 우리는 도로교통법을 보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의 행동을 통해 구체적인 법의 성질을 이해한다. 마지막에 닫힌 법의 문이 어느 순간 시골남자를 위한 문으로 변해버린 것은 그가 ‘법’으로 걸어 들어가지 않고, 문지기의 꽁무니만 보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니 다른 사람들이 보기에는 시골남자가 평생 저 문 앞에 서있어도 들어가지 못하는 것을 보니 이미 다른 사람들에게 저 문은 닫힌 문이 돼 버린 것이다. (여전히 문을 들어가려는 시골남자만 제외하고)

  

국민들이 법 앞에 서서 법의 문으로 들어가지 못하고 있다. 어떤 사람들이 법 앞에 서서 법의 문을 들어갈 생각은 하지 않고 문지기의 비위만 맞추려하기 때문이다. 아무 죄가 없음에도 죄를 시인하면 집행유예가 된다하니, 사람들은 없는 죄를 자수한다. 괜히 다투다가 유죄판결을 받으면 실형을 살기 때문이다. 근거도 없는 이중, 삼중, 사중 과세가 되도 법의 문으로 들어가지 않고 문지기에게 어떻게든 잘 보여 문을 통과하려고 한다. 괜히 다투다가 세무조사나 세금 폭탄을 맞으면 자기만 손해기 때문이다.

 

누구에게나 열려있고 언제든지 통과 가능한 법이 ‘지금은 안 된다’는 말 때문에 실은 영원히 통과할 수 없는 법이 되고 있다. 이런 사정이니 우리는 아무도 법을 통과하지 못하고 누구나 ‘문지기(정치인)’이 되기를 꿈꾸고 있다. 문지기가 아니면 아무도 법으로 들어갈 수 없기 때문이다.

 

법의 문은 지금도 계속 닫히고 있다. 내가 통과하지 않으면 만인에게 닫힌 문이 되고야 만다. 문지기도 실은 법을 모른다. 그냥 그 자리에 서 있을 뿐이다. 내게만 위험하다고, 손해라고 지나가지 않으면 법은 나만 보호하지 않는다. 그 앞의 사람들은 모두 지나갔고, 내 뒤의 사람들은 다른 법을 찾을 것이다. 위험하지만 용기를 내서 법으로 들어가야 한다. 그런 시골남자와 법의 소통만이 전체주의 사회를 막는다.

 

사회를 질식 시키는 건 법의 침묵이 아니라, 부당함에 대한 시민들의 침묵이다. 법의 문은 침묵으로 닫힌다. 그것도 비겁한 침묵으로 닫힌다. 악이 승리하는 유일한 조건은 선한자들의 침묵이라지 않던가? 전체주의 사회의 도래는 정치인들의 무능과 부덕 때문이 아니다. 그야말로 비겁한 변명이다. 법의 질식은 곧 자유의 질식이다. 만일 진정한 전체주의 사회가 도래하고 있다면, 그건 문지기 때문이 아니라 한 시골남자, 비겁한 침묵으로 일관한 ‘나’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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