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학에는 청중비용이라는 개념이 있다. 정치인이 어떤 정치적 선택을 할 때는 그에 관련된 청중이 존재하기 마련이고, 그 청중들의 선호에 따라서 정치인이 자신의 선택에 따라 지게 되는 비용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가령 어떤 정치인이 FTA를 확대하겠다고 이야기할 경우 그 정치인은 청중비용을 감수해야 한다. FTA에 부정적이었던 지지층을 잃는 계기가 될 수 있는 것이다. FTA를 확대하지 않겠다고 이야기하는 경우에도 마찬가지이다. FTA에 부정적인 사람들의 주의를 끌 수는 있겠지만, FTA 확대를 바랬던 지지층을 잃는 계기가 될 수 있어 청중비용이 수반된다.
이처럼 모든 정치적 선택에는, 특히 민심으로부터 정치권력이 형성되는 민주주의 체제 하의 정치인이 내리는 선택에는 더더욱, 청중비용이 수반된다. 그리고 청중비용을 고려하지 않는 정치적 행보는 결코 지속될 수 없다. 커다란 청중비용이라는 것이 의미하는 바가 특히 민주주의 체제 하에서는 곧 많은 표의 상실이고, 선거에서의 패배로 직결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정치인들은, 민심의 적어도 일부를 자신의 정치적 행동에 반영하지 않을 수 없다.
대한민국의 정치지형을 좌와 우로 양분해서 보았을 때, ‘좌’에 해당하는 진영에는 현재 청중비용이 어느 정도 관리될 수 있는 구조가 존재한다. 이념 중심의 소규모 정당들은 이상을 이야기하며 좌파 진영에 대해 긍정적 이미지를 주고, 대중 전반의 지지를 기반으로 하는 대규모 정당은 시의적절하면서도 좋아 보이는 이야기들을 적당히 제시하는 방식이다. 이를 통해 서로가 자신의 정치적 행보에 수반되는 청중비용을 최소화 하면서도 좌파 진영으로 표를 결집시켰고, 선거에 승리했다. 정의당이 그랬고, 더불어민주당이 그랬다. 정의당의 지지기반은 진보주의적 이상을 추구하는 사람들이고, 더불어민주당의 지지기반은 중도에 걸쳐 있는 보다 폭 넓은 범위의 사람들이기 때문에 가능했던 일이다.
하지만 ‘우’에 해당하는 진영에는 이러한 구조가 없었다. 민주화 이후 운동권이라는 말로 상징되는 진보주의 정치세력이 정당을 만들고 국회 안에서도 점차 영향력을 행사하게 되면서, 좌파 진영은 선거 승리를 위해 통합과 분열을 거듭했고 더불어민주당과 함께 오늘날의 청중비용 분담 구조를 이루게 되었다. 우파 진영은 그러지 못했다. 물론 분열과 통합의 과정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어떤 이념적 이상 아래 뭉쳐 정당을 결성해본 역사가 민주화 이후 없었다.
오늘날 제1야당이자 우파 진영 내 가장 큰 정당에 해당하는 자유한국당은 그 뿌리가 3당 합당으로 탄생한 민주자유당에 있다. 그리고 그 본질은 신한국당, 한나라당, 새누리당을 지나 자유한국당까지 오면서 변하지 않았다. 물론 자유한국당 내부에 고전적 자유주의 내지는 자유지선주의라는 이상을 갖고 정치 활동을 하는 사람이 단 한명도 없으리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적어도 자유주의가 중요하다는 것을 아는, 그래서 자유한국당을 지지하는 사람들이 꽤 있는 것도 사실이다. 그럼에도 자유한국당의 본질이 자유주의에 있다고 보기는 어렵다. 과거 민주자유당을 지지했던, 조금 더 거슬러 올라가면 박정희나 전두환의 독재정권을 지지했던 바로 그 지지기반이 자유한국당에 그대로 남아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바른미래당이나 우리공화당, 혹은 창당을 앞둔 새로운보수당 등이 대안이 될 수는 없다. 이들 정당 중 그 어느 정당도 자유주의 세력을 주축으로 하는 정당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들은 모두 탄핵 이후 새누리당이 분열되면서 오늘날까지 이루어진 이합집산의 결과 탄생한 보수주의 정당들이다. 특히 새로운보수당은 자유한국당의 보수주의적 가치를, 우리공화당은 자유한국당의 지지기반을 상당부분 이어가고 있다.
현재 대한민국의 우파 진영 내에는 현실적으로 자유주의적 가치를 최우선시해줄 정당이 없다. 때문에 자유주의 정치세력의 원내 진입과 존속이 아직은 요원한 일이다. 하지만 좌파 진영에서 진보주의 정치세력이 결국 원내정당을 만들어내는 데에 성공했듯이, 우파 진영에서도 자유주의 정치세력이 자유한국당과 같은 대규모 정당과 청중비용을 최소화하는 구조를 안착시킬 수 있다면, 원내 진입 역시 꾀해볼 수 있을 것이다. 뿐만 아니라 자유주의가 진보와 보수라는 이분법에 구애받지 않는 가치를 추구한다는 점에서 더불어민주당과 같은 좌파 정당과의 연대도 꾀해볼 수 있고, 그 점에서는 오히려 오늘날의 정의당이 과거에 놓였을 환경보다는 더욱 유연한 조건 하에 있다고 볼 수도 있다.
보수 진영의 힘을 빌려 자유주의를 실현하려는 그간의 시도는 안타깝지만 실패했다고 보아야 한다. 보수주의적 가치를 최우선시하는, 자유주의 그 자체를 추구하지는 않는 지지기반을 둔 정당이 자유주의의 목소리를 낼 때 그것이 대중들에게 어떻게 전달될지는 이제와 돌이켜보면 너무도 뻔했다. 자유주의는 그간 보수 진영 안에서 왜곡되기도 했고, 보수 진영 밖에서 오도되기도 했다. 이제 더 이상 보수 진영이 대중들에게 자유주의를 설득하고, 또 실현할 수 있으리라 기대할 수 없다. 자유의 탈을 쓴 보수주의자는 가능할 수 있지만, 자유주의를 져버리지 않으면서 보수주의를 추구하기란 불가능하다.
자유주의 정당이라면, 자유주의를 단기적으로는 선거 승리의 도구로, 장기적으로는 부국강병의 수단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추구해야 할 최우선의 목적 그 자체로 두고 있는 정당이라면, 정파나 진영을 가리지 않고 자유주의적 가치를 져버리면서 저질러진 역사적 과오들에 대해 강한 비판을 내놓을 수 있어야 한다. 그간 대한민국의 보수 진영이 일제의 잔혹행위나 독재정권의 반자유적 탄압이라는 역사에 대해서 얼마나 강하게 이야기할 수 있었나? 개입주의적 경제정책이나 과도한 정부지출과 복지정책, 확장적 통화정책 등 시장 질서를 교란하여 민생을 도탄에 빠트릴 수 있는 것들에도, 자유주의 정당이라면 내 편 네 편을 떠나 비판할 것은 비판할 수 있어야 한다. 그렇게 말할 수 있는, 그렇게 이야기해도 청중비용을 걱정할 필요가 없는 그런 건강한 자유주의 정당이, 적어도 분열된 우파 진영에 비해 안정적인 청중비용 관리 구조를 통해 우위를 점하게 된 좌파 진영을 견제하기 위해서라도 진정 필요하다.
여성, 성소수자, 청년, 청소년, 외국인, 그리고 다른 마이너리티들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자유한국당을 비롯한 보수주의 정치세력들은 그간 마이너리티들을 크게 고려하는 정치를 해오지 않았다. 오히려 자유한국당의 경우 특히 성소수자, 청소년, 외국인 등의 계층을 정치적으로 배제하는 모습을 보여 왔다. 표가 안 될 뿐만 아니라 이들을 포용하는 행보가 자유한국당에게 있어서 이제는 청중비용을 야기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자유주의는 이들 계층 중 그 누구도 원천적으로 배제하는 바가 없다. 이들을 위해 목소리를 내는 자유주의 나름의 방식이 분명 존재한다. 그럼에도 그동안 대한민국의 우파 진영은 그러한 화법을 이용해본 바가 드물다. 마이너리티들 자신이 생각하는 나름대로의 고충의 가치를 다른 것과 비교하거나 폄하하지 않는, 그러면서도 그러한 고충에서 해방될 수 있는 세상을 향한 자유주의적 길이 어떤 것인지 명료하게 제시해주는, 때로는 그러한 고충으로 곪아 온 상처를 어루만져주는 그런 모습이 또한 우파 진영에 필요했던 것이다.
좌파 진영에서는 정의당을 비롯한 진보정당들이 더불어민주당에 쓴소리를 하는 모습도 볼 수 있다. 때문에 더불어민주당의 정신은 항상 조금이나마 쇄신을 거듭한다. 좌파 진영을 지지해왔던 사람들은, 혹은 우파 진영에 염증을 느낀 중도들은 이러한 모습을 통해 좌파 진영에서 희망을 본다. 하지만 우파 진영에서는 그간 보수주의 정치세력이 절대다수의 주류를 차지했던 탓에 정신적 쇄신이 없었다. 아직도 개발독재를 미화하며 그리워하고, 종북 사회주의자 몰이를 위해서만 자유주의를 이용한다. 우파 진영 내에 자유주의 이념 정당이 있었다면 보수주의 정치세력이 적어도 식민지배나 개발독재를 미화하거나 자유주의를 취사선택하는 모습은 보여주지 않았을 것이다. 우파 진영도 이제 보수정당을 향한 쓴소리를 통해 희망을 보여줄 수 있어야 한다.
문재인 정부의 실정에서 자유주의의 필요성을 직감적으로 깨닫고 자유주의를 이해해보려는 사람들이 늘고 있다. 미제스의 ‘자유를 위한 계획이란 없다’와 하이에크의 ‘노예의 길’ 등의, 좀처럼 인기가 있기 어려운 읽기 힘든 고전서가 국내 유명 서점의 정치/사회 부문의 상위권에 머무르고 있다. 이러한 사람들에게 희망을 보여줄 수 있는 것이 바로 자유주의 정치세력 아닐까? 지금이 바로 자유주의 정치세력이 그야말로 ‘자생적’으로 일어날 수 있는 절호의 기회를 앞두고 있는 때일지 모른다. 이런 기회를 두고도 언제까지고 보수 진영의 힘에만 기대어 자유주의가 전파되길 기대할 수는 없다. 대한민국 자유주의의 미래는 보수 진영의 품 밖에서 비로소 선명해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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