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은 사실 합리적이지 않다"
인간에 대한 대단한 깨달음이라도 누설하는 듯 담대해 보이는 이 어구는, 2000년대 초반 행동경제학이 부상하기 시작하면서 일반인들 사이에서도 회자하기 시작한 말이다. 몇몇은 인간이 합리적이지 않다는 사실이 혁명적인 발견이라도 되는 것처럼 치켜올리면서, '따라서 자본주의는 지속 불가능한 것'이라며 견강부회를 한다. 그도 그럴 것이, 애초에 '합리성'에 대한 깊이 있는 개념적 논의는 단 한 번도 경제학의 주요 주제가 되어본 적이 없다. 자연과학으로 환원되어버린 현대 주류 경제학의 세계에서는 새삼스럽지 않은 일이다. 하지만 그 '합리성’이라는 것이 무엇인지에 대해서 명료한 이해가 선행되지 않는다면 이 같은 담론은 말장난에 지나지 않게 될 것이다.
이 글에서는 먼저 논의의 범위를 어떻게 설정하느냐에 따라서 합리성에 대한 정의가 달라질 수밖에 없음을 보일 것이고, 그다음으로는 주류경제학의 합리성 가정과 그 실증적 방법론 간의 관계를 조명할 것이다.
합리성에 대한 다양한 이해
우리가 부정하기 힘든 한 가지 사실은, 수많은 지식인들이 "인간은 합리적인 동물이다"라는 명제를 자신의 입맛에 맞게 자의적으로 해석해왔다는 것이다. 이것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글이 있다. 한경 오피니언에 실렸던 복거일 선생님의 <경제인에 대한 성찰>이다. 이 글은 "인간은 모든 정보를 알고 판단할 수 있는 합리적인 존재가 아니다"라고 말한 행동경제학의 대부 리처드 세일러에 대한 비판이다. 복거일 선생님은 인간의 합리성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생명의 목표는 영속이므로 생명체들의 합리성은 자신의 생존에 적합한 선택을 지향하는 태도를 뜻한다. 40억 년 동안 환경에 적응해왔으므로 생명체들은 본질적으로 합리적이다. 비합리적 특질을 지녔다면 그 긴 세월에 경쟁에 져서 사라졌을 것이다."
선택에 필요한 정보와 시간의 제약 때문에 사람들은 '최적의 해결책 대신 만족스러운 해결책’을 따른다는 허버트 사이먼의 "제약된 합리성(bounded rationality)"이론에 대해서는 이렇게 말한다:
"[오히려] 그의 주장은 사람들의 궁극적 합리성을 보여준다. 사람은 생존하기 위해 끊임없이 결정을 내려야 하는데 그 일에 쓸 시간과 에너지는 제약됐다. 따라서 덜 중요한 일에서 최적의 선택을 고르느라 시간과 에너지를 쓰는 일은 비합리적이다. 개체의 생존이라는 맥락에서 보면 '만족스러운 해결책’이 바로 '최적의 해결책’이다."
'합리성'을 어떻게 정의하느냐에 따라서 얼마나 다양한 시각이 제시될 수 있는지를 잘 보여준다. 복 선생님의 비판은 분명 생각할 점이 많고, 유효하다. 하지만 세일러의 생각이 완전히 기각되는 것은 아니다. 이는 복 선생님의 '합리성'과 세일러의 '합리성'은 논의의 범위가 다르기 때문이다. 복 선생님은, 논의의 범위를 상대적으로 폭넓게 설정하고 있다. 반면 세일러는 주류 경제학의 인간상인 <호모 이코노미쿠스(homo economicus)>에서 정의된 "합리성"에 한정하여 논의의 범위를 설정한다. 여기서 말하는 "논의의 범위의 차이"는 크게 두 가지 조건에 의해 결정된다. 이 조건은 <호모 이코노미쿠스>의 개념적 논의에서 주류 경제학자들이 의도했든 안 했든, 분명히 실재하는 문제다.
합리성에 대한 논의의 범위를 결정하는 두 가지 조건
첫째, 개인의 주관성을 온전히 인정하는가?
<호모 이코노미쿠스>는 굉장히 객관주의적으로 사용되는 측면이 있다. 물론 그들이 가치의 객관성을 인정한다거나, 효용의 객관성을 인정한다는 이야기는 아니다. 예를 들어, "이용 가능한 정보를 모두 이용하여 이윤을 극대화한다"라는 정의에서, "이용 가능한 정보"란 무엇이고, "극대화된 이윤"은 무엇인가? 만약 경제학자들이 개인의 주관성을 온전히 인정한다면, 개개인들의 머릿속에 모두 들어가 보지 않고서는 이것들이 무엇인지 절대로 알지 못한다. 하지만 그들은 무엇인지 알아야 한다. 그래야만 각종 곡선을 그릴 수 있고, 경제인의 행동을 수리적으로 분석, 예측할 수 있다. 주류 경제학은 개인의 주관성을 어느 정도 희생시키면서 보편적 인간상이 아닌 "모형"을 필요로 하는 것이다.
반면 복거일 선생님은 '합리성'을 <호모 이코노미쿠스>의 '합리성'보다 주관주의적으로 이해했기 때문에 논의의 범위가 더 넓어질 수밖에 없다. 복 선생님은 "만족스러운 해결책이 곧 최적의 해결책"이라고 말한다. 하지만, 주류 경제학에는 단지 "최적"이나 "균형"이 있을 뿐 "만족스러움"은 없다. "만족스러움"은 오직 주관주의적으로만 이해할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복 선생님의 광의의 '합리성'으로는 주류 경제학자들이 유의미한 수리적·계량적 분석을 내놓기는 힘들 것이다.
둘째, 물질적인 것만을 고려하는가?
<호모 이코노미쿠스>의 정의에서 "극대화된 이윤"은, 오직 물질적인 것으로 한정된다. 물론, 이 부분은 정의에 명시되어 있지 않은 경우도 있다. 오히려 몇몇 정의에서 보이는 "주관적인 효용"이라는 표현은 마치 물질적인 것 외에도, 정신적인 것, 혹은 심지어 영적인 것까지 포괄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실상 <호모 이코노미쿠스>를 기초로 한 모든 주류 경제학적 분석은 물질적인 것만을 고려한다. 사실 그럴 수밖에 없다. 오직 물질적인 것만이—예컨대 달러로—측정 가능한 요소이기 때문이고, 측정 가능한 요소여야만 수리적인 분석과 계량적인 예측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반면 복거일 선생님은 단순히 수치화, 계량화할 수 있는 요소들만을 고려하지 않는다. 복 선생님은 "개체의 생존"이라는 요소까지 논의의 범위를 확장시킨다. 하지만 개체의 생존과 관련한 그 어떤 것도 유의미하게 수치화, 계량화될 수 없다.
'경제적 인간’의 비현실성과 주류경제학의 방법론
상기한 두 가지 조건에서 추론할 수 있듯이, 주류경제학의 방법론과 <호모 이코노미쿠스>는 깊은 관련이 있다. 주류 경제학의 실증주의적, 계량주의적 방법론은 <호모 이코노미쿠스>에 대한 논의의 범위를 줄임으로써 학문적 정당성을 확보할 수 있다. 주관성과 같은 예측불가능한 요소가 개입되면 될수록 주류경제학은—각종 '모델'들, '곡선'들의—타당성에 타격을 입을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동시에 <호모 이코노미쿠스>는 실제 인간의 모습과 점점 더 동떨어지게 된다.
리처드 세일러가 작년 노벨경제학상을 받았을 때, 언론사 애틀랜틱(The Atlantic)은 <리처드 세일러, '호모 이코노미쿠스'를 죽인(killing Homo Economicus) 공로로 노벨경제학상 수상한다>라고 대서특필했다. 마치 리처드 세일러가 '호모 이코노미쿠스'를 반박하는 데 성공한 최초의 인물인 것처럼 말이다. 하지만, 호모 이코노미쿠스는 100여 년 전에 이미 오스트리아학파 경제학자 루트비히 폰 미제스에 의해 논파 되었다. 미제스는 호모 이코노미쿠스를 만족하는 인간은 그야말로 "완벽한 기업가"일 것이라고 했다. 그러면서 그는, "전통적인 고전 경제학은 실제 인간의 행동을 다루지 않고, [호모 이코노미쿠스라는] 허구의, 가상의 것을 다룬다"고 지적했다.1
오스트리아 학파는 "합리성"과 같이 가치중립적이지 않고 모호한 용어가 야기하는 혼란에 대한 해결책을 갖고 있다. 오스트리아 학파는 "합목적적"인 인간, 호모 아젠스(homo agens)를 가정하기 때문이다. 호모 아젠스는 "모형"이 아닌 "인간" 그 자체다. 미제스의 표현을 빌리자면 "실수를 하고, 전지하지 않으며, 가끔은 돈이 되는 사업을 운영하기보다 안락함을 추구하는” 인간 말이다. 이런 예측불가능한 인간, 즉 '실제 인간'을 가정한 경제학은 절대로 한낱 수학 기호들로 이론을 구성할 수 없다. 계량주의적, 실증주의적일 수 없다는 이야기다. 여기서, 경제학은 '실제 인간'을 다루어야 한다는 명제를 덧붙이면 "경제학은 계량주의적 학문일 수 없다"라는 결론이 나오기도 한다.
세일러, 사이먼의 '제약된 합리성', 그리고 복거일 선생님의 주관주의적 통찰은 모두 부분적으로 미제스의 통찰에 흡수된다. 다만 리처드 세일러는 그런 문제의식으로 호모 리시프로칸스(homo reciprocans)라는 또 다른 허수아비를 대안으로 제시했을 뿐이다. 미제스는 현대 인간행동학(praxeology)의 선구자다. 그는 인간 행동에 대해 심도있게 연구하고 분석한 최초의 경제학자이고, 때문에 행동경제학을 비롯한 수많은 신(新)학문들은 아주 높은 확률로 미제스의 인간행동학에 흡수된다.
1. 호모 이코노미쿠스에 대한 오스트리아학파의 비판이 궁금하다면 다음 두 글을 읽어보길 바란다.
Ryan McMaken, “The Homo Economicus Straw Man”, https://mises.org/wire/homo-economicus-straw-man
Doug French, “Mises Killed Homo Economicus Long before Thaler”, https://mises.org/wire/mises-killed-homo-economicus-long-thal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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