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세기 초반 영국. 아직 도로에는 마차들만 다니고 있을 무렵, 증기자동차가 새로운 교통수단으로 부상한다. 런던에서는 개인 소유 마차와 대여 마차가 마주쳤을 때 대여 마차가 양보해야 한다는 법이 따로 있을 정도로 마차 소유가 '신사들의 규범'처럼 여겨지던 때다. 그만큼 일반 서민들은 마차 소유가 힘들었다. 마차 자체의 가격보다도, 말들을 수용할 공간을 마련하고 먹이를 주는 데 드는 유지비용이 문제였다. 하지만 '말이 없는 마차(horseless carriage)', 증기자동차는 이동수단에 소요되는 비용을 많게는 1/3 에서 1/2 수준까지 낮춰놓았다. 뿐만 아니라 속도나 수용 인원, 안전 측면에서도 마차를 능가했다.1 서민들의 생활 수준을 획기적으로 끌어올린 파괴적 혁신이었다.
하지만 혁신의 열기는 오래가지 못했다. 19세기 중후반부터 도입된 일련의 '기관차량조례(The Locomotive Acts)'가 증기 자동차의 운행을 숨막히게 규제해 혁신을 질식시켰기 때문이다. 증기 자동차에 마차의 6배에 달하는 통행료를 부과했고, 특히 1865년의 조례에서는 증기 자동차가 도심에서 시속 3km 이상으로 다니지 못하도록 규제했다. 또한 증기 자동차 한 대는 반드시 운전수와 기관원, 기수(旗手)로 운영되도록 했다. 게다가 차량은 앞에서 붉은 깃발을 들고 걸어가고 있는 기수의 꽁무니만 쫓아가야 했다. 이 법이 '적기(赤旗)조례'라고 불리게 된 사연이다.
빤히 보이듯 이 엽기적인 규제는 증기 자동차의 부상으로 기득권에 타격을 입은 마차 관련업 종사자들의 정치적 로비로 탄생했다. 이들은 마차가 증기자동차보다 3배는 족히 더 도로를 훼손시킨다는 기술자들의 의견 일치에도 불구하고 '증기자동차가 도로를 망가뜨린다'는 선전을 펼치기도 했다. 산업혁명을 주도한 영국이 가질 수도 있었던 세계 자동차 산업의 주도권은 그렇게 독일로, 미국으로 넘어갔다.
한국에서 '적기조례'라는 표현은 권위주의적인 과잉 산업 규제의 대명사가 되었다. 이제는 정치인의 입에서도, 언론에서도 심심찮게 등장한다. 문재인 대통령도 임기 초에 혁신성장을 위해 '적기조례 철폐'가 필요하다고 말했고, 박영선 중기부 장관도 취임사에서 "영국의 '적기조례'와 같은 사례가 21세기 대한민국에는 없는지 꼼꼼히 살펴봐야" 한다고 발언한 바 있다. 하지만 검찰이 여객운수사업법상 허용되지 않는 유상운송을 했다는 죄목으로 '타다'의 이재웅 쏘카 대표를 불구속 기소하면서, 또 하나의 사업이 붉은 깃발 앞에 멈춰서게 되었다.
현 정부는 입으로만 '혁신 성장'을 운운해왔고 정작 규제 철폐나 완화 조치에는 일관되게 소극적이었다. 박영선 중기부 장관이나 김현미 국토부 장관 등은 검찰의 기소가 구체화되기까지 충분한 시간이 있었음에도 어떠한 적극적인 노력도 하지 않았다. 법령 해석은 물론이고 당내 쟁점화나 공론화에도 일절 나서지 않았다. 그러곤 검찰이 기소를 단행하자 "아쉽다", "유감이다"라고 말하며 뒤늦은 넋두리를 하고 있는 실정이다.
박영선 장관은 타다와 택시업계의 분쟁을 제대로 "중재하지 못한 것이 아쉽다"고 말하며 검찰의 타다 기소가 적기조례를 떠올리게 한다고 발언했다. 하지만 박영선 장관이 적극적으로 '중재'에 나섰어도 결과는 택시업계의 승리였을 것이다. 국토부나 중기부가 소위 "상생안", "상생의 가치"를 거론하면서 택시업계와 타다 사이의 '타협'이 해결책인 양 이야기해온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박 장관은 그가 그토록 비판해 마지않는 영국의 적기조례도 마차 업계와 증기자동차 업계를 타협시키는 나름의 '상생안'이었음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
적기조례의 교훈은 공급자에 대한 배타적인 보호가 부당하다는 점이고, 정부의 역할은 '경쟁'을 보호하는 것이지 '경쟁자'를 보호하는게 아니라는 점이다. 정부가 여객운송사업을 자유로운 경쟁의 장에 온전히 내놓지않고 계속 그를 총괄하는 한, 모든 해결책은 미봉책이고 적기조례의 또 다른 변종일 뿐이다.
자유롭고 공정한 경쟁이 보장된다면 시장은 자연히 소비자의 후생을 향상시킨다. 당장 대학가의 수많은 맛집들만 봐도 그렇다. 곳곳에서 최저시급 인상 등으로 인한 정부 개입의 흔적이 발견되지만, 우리는 기본적으로 음식점이 치열하게 경쟁하는 과정을 통해서 맛좋은 점심을 값싸게 먹을 수 있다. 스마트폰 사업부터 각종 의류사업까지, 정부가 특정 경쟁자에 대해 배타적인 보호를 하지 않는 사업은 역사가 증명하듯 혁신에 혁신을 거듭해왔고, 소비자의 생활수준을 끌어올려왔다.
하지만 우리는 담배연기니 정치 이야기니, 택시에서 겪은 안좋은 일들을 친구들과 이야기하고 서로 공감하면서도 정작 그러한 불편의 이면에 이 같은 정부 개입이 존재한다는 사실은 알아차리지 못한다. “우리에게 충분히 다른 대안이 있을 수 있을텐데, 왜 그러한 선택이 주어지지 않지?”라고 묻지 않는다는 것이다. 부분적으로 이는 규제를 통한 이익이 소수의 공급자들에게 돌아가는 반면 손해는 수많은 소비자들에게 분산되기 때문이기도 하다. 소비자들이 상대적으로 손해에 둔감하게 되는 것이다. 맨슈어 올슨이 <집단행동의 논리>에서 지적한 내용과 일맥상통한다.
정치인들도 이 사실을 잘 알고 있다. 때문에 특수한 이익으로 잘 집결되어 있는 택시업계의 코털을 함부로 건들지 않는다. 그들을 보호한다고 일반 소비자들의 표를 잃는 것은 아니지만, 그들을 보호하는 규제를 걷어낸다면 그 순간 정치인들은 택시업계의 표를 잃게 된다. 당명에 '자유'를 내걸고 있는 제 1야당의 원내대표 마저도 택시업계 집회의 연단에 올라 "택시 생존권을 말살하는 문재인 정부의 정책을 그대로 둬선 안된다는게 당의 입장"이라며 "상생할 수 있는 카풀제도를 같이 고민하겠다"고 발언한 연유다. 이런 모습을 보면, 수많은 규제의 '붉은 깃발’들을 거둘 때 이왕이면 제 1야당의 붉은 깃발도 함께 거둬야 하는 것은 아닌가 고민하게 된다. 생산자가 소비자와 상생하지 않고 다른 경쟁자와 상생할 때 그 산업은 퇴보한다.
1. Benson, B. L. (2015). Regulation As a Barrier to Market Provision and to Innovation: The Case of Toll Roads and Steam Carriages in England. The Journal of Private Enterprise 30(1), 73-74,7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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