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0년대 말 혜성같이 나타난 한스-헤르만 호페(Hans-Hermann Hoppe) 교수는 자유주의(Libertarianism)를 송두리째 바꿔버린 일대의 지적 혁명을 일으킨 바 있다. 유명한 마르크스주의 철학자 위르겐 하버마스(Jurgen Habermas) 문하에서 수년간 철학 전반을 학습한 호페는, 칸트(Immanuel Kant)와 하버마스의 합리주의 철학에 기초하여 루트비히 폰 미제스(Ludwig von Mises)와 머레이 라스바드(Murray N. Rothbard)의 인간행동학(Praxeology) 이론체계를 대폭 확장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칼 멩거(Carl Menger)에 의해 창시된 오스트리아학파가 미제스의 인간행동학을 통해 완전한 선험적-연역적 이론체계로 탈바꿈했다면, -적어도 지금까지는- 최종적으로 호페가 미제스의 방법론을 경제학을 넘어 형이상학과 윤리학에도 적용함으로써, 인식론, 윤리학, 그리고 경제학을 아우르는, 일종의 모든 것의 이론(Theory of Everything)으로서의 오스트리아학파의 정체성이 완전히 확립되었다고 요약할 수 있을 터인데, 오스트리아학파가 자유주의에서 차지하는 비중을 고려한다면, 오늘날 살아있는 자유주의자 중에서 가장 중요한 인물이 곧 호페 교수라고 보아도 큰 문제는 없으리라 생각한다.
호페 교수의 다양한 업적 중 가장 큰 주목을 받는 것은 단연 그의 '논증윤리’(Argumentation Ethics)이다. 이는 사유재산권 및 자연권의 옹호 등을 포함한 자유주의의 윤리적 입장이 곧 논리적으로 반박 불가능한 절대적인 진리임을 증명하기 위하여 인간행동학을 하버마스와 칼-오토 아펠(Karl-Otto Apel)의 담론윤리(Diskursethik) 및 신칸트주의(Neu Kantianismus)적 맥락에서 윤리학적으로 응용한 결과물이다. 호페 교수의 의도가 상당히 급진적이고 비타협적인 만큼, 논증윤리가 정말로 타당한지는 더욱 많은 검증과 토론이 필요할 것으로 보이지만, 적어도 지금까지는 논증윤리가 자유주의 윤리학에서 가장 발전된 입장임은 사실이다. 논증윤리의 -그리고 호페의 사상체계 전반에서- 가장 핵심적인 개념은 '수행모순’(performative contradiction)이라는 논리학 용어이다. 이는 “반박주장이 반박대상을 암시적으로 인정하는 논리적 역설”을 의미한다.
호페 교수에게 있어 “인간은 목적을 가지고 수단을 이용해 행동한다.”라는 인간행동학의 기본공리는 정말로 자명하고, 모든 인식의 기초가 되는 절대적인 진리이다. 따라서 이 공리를 수행모순적으로 반박하는 모든 명제는 논리적 오류를 내포하고 있다. 즉 인간행동학에 명시적으로 반대하는 모든 주장은 자세히 따져보면 인간행동학의 절대적 타당성을 인정하는 자기모순을 가지고 있다는 말이다. 그리고 인간행동학의 기본공리와 수행모순관계를 맺지 않는 -적어도 지금까지 개발된 것 중에서는- 유일한 윤리학적 입장이 곧 라스바드와 자신의 자유주의 윤리뿐이라는 것이 호페의 주장이다.
안타깝게도 호페 교수가 비주류 학자인 관계로, 그 주장의 타당성을 검증하려는 학계 차원의 시도는 비교적 미진한 편이다. 더군다나 호페 교수는 극단적 합리주의를 지지하며 사회과학과 형이상학에서 경험주의를 전면적으로 부정하고 있기 때문에 매우 많은 적을 두고 있다. 사실상 현대 철학계와 사회과학계 전체를 홀로 상대하고 있다고 보아도 무방한 상황이다. 이런 점을 고려해본다면, 아무리 호페 교수에게 크게 공감하고 있다고 해도, 그의 사상이 정말로 시공간을 초월한 절대적 진리라고 당당히 주장하는 데에는 사실 많은 부담이 따른다.
호페 교수에 대한 찬반 토론은 차치하더라도, 필자는 여기서 '수행모순’을 피하는 것의 중요성을 강조한 그의 접근법이, 자유주의자라면 반드시 심각하게 받아들일 필요가 있다고 주장하고 싶다. 논리적 일관성을 철저하게 유지하고, 자기모순을 최대한 피해야 한다는 호페 교수의 견해에 대해서는 많은 사람이 큰 거부감 없이 받아들일 수 있을 것이다. 엄격한 기준에 입각한 일관된 견해는, 자신이 정치와 경제 등 민감한 분야에 대한 신념을 지니고 있다면 반드시 신경을 써야 할 문제이기도 하다. 여기에 더하여, 자유주의의 특수성을 참작한다면, 자유주의자를 자처하는 사람은 수행모순으로부터 더더욱 자유로워야 할 필요가 제기된다.
자유주의의 구체적 정의를 학문적으로 파고 들어간다면 다양한 이견이 있을 수 있겠지만, 일상언어의 차원에서보다 단순하게 표현한다면 아마 “자유를 추구하는 사상”으로 정리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는 대단히 모호하고 혼란스러운 개념이다. 이 세상의 정치적 이데올로기 중에서 자유를 명시적으로 반대하는 사상은 없다. 심지어 파시즘과 공산주의도 자기 나름대로 자유를 추구하고 있다. 또 자유라는 개념 자체도 확실하지 않다. 사람들이 자유를 말할 때 그 구체적 의미 혹은 뉘앙스는 다를 소지가 다분하다. 혹자는 정치적 자유를, 다른 사람은 경제적 압박감으로부터의 자유를, 또 다른 사람은 형이상학적 자유를 이야기한다. 심지어 자유주의 자체도 liberalism 혹은 libertarianism 중에서 어떤 것이 더욱 정확한 표현인지에 대하여 해석상의 차이가 존재한다.
자유주의의 이러한 모호성을 고려한다면, 사실상 모든 사람이 자신을 자유주의자라고 자처할 수 있다고 볼 수 있다. 가장 단적인 예를 하나만 들어보자면, 지난 3년간 우리나라에서 발생했던 개인의 자유를 심각하게 침해하는 여러 사건에서, 자신을 자유주의자라고 자처하는 많은 사람이 개인의 자유가 아니라 국가권력의 손을 들어주었다. 3~40년 전에 있었던, 무고한 시민에게 큰 손해를 끼치고 국가권력의 시장개입을 적극 주도했던 권위주의 정권 역시 자칭 자유주의자들에게서 높은 평가를 받곤 한다.
상식적 관점에서, 이러한 부류의 자유주의는 혼란스럽고 모순적이다. 어떤 영역에서는 개인의 자유와 사유재산권을 강하게 주장하면서, 또 다른 영역에서는 국가와 공동체의 권위를 보다 우선시하곤 한다. 개별 분야에서 이러한 모순이 중첩됨으로써, 결국 하나의 거대한 용광로 사상으로서의 자유주의가 형성되어, 자유주의자임을 자처하는 사람이 사회주의자나 전체주의자와 별다른 견해차를 보이지 않는 이상한 결말에 도달하게 된다. 우리는 그런 사람을 진정으로 자유주의자라고 인정해줄 수 있는가?
자유주의를 “사유재산권을 필두로 하는 개인의 자유와 권리를 추구하는 사상”이라고 보다 깊게 정의한다고 해도, 사실 그런 부류의 사람이 자유주의자인지, 아닌지를 명확하게 가를 방도는 없다. 공리주의(Utilitarianism)의 측면에서 보면 그는 자유주의자가 될 수 있다. 그러나 자연법(Natural law theory) 사상은 그가 결코 자유주의자가 아님을 말해준다. 그리고 자연주의의 오류(naturalistic fallacy)를 고려한다면, 우리가 이 두 입장 중 무엇이 더 타당한지를 단언할 수는 없다.
상술한 딜레마를 고려하여 필자는 “자유를 추구하는 데 있어 수행모순을 저지르지 않는 사람”을 자유주의자라고 정의하는 것이 가장 합당하리라 생각한다. 즉 자유주의자를 자처하는 사람의 논리만을 이용하여 그의 주장을 반박할 수 있다면, 그가 정말로 '자유를 추구’하고 있는지는 의심할 여지가 있다는 말이다. 아마 상술한 예시에서는, 자유주의자보다는 자유지향적 보수주의자가 더욱 적절한 서술어가 될 것이다.
“자유를 추구함에서 자기모순이 없는 사람”이라는 정의가 그다지 가혹한 요구인 것은 아니다. 그저 자유주의와 자유주의자라는, 모호하고 혼란스럽게 사용되는 용어의 의미를 확실하게 정해둘 필요가 있음을 말할 뿐이다. 이는 더 나은 논리적 사고와 원활한 의사소통을 위해서는 반드시 필요한 작업이다. 자기모순의 유무라는 진단기준을 통해서 우리는 누가 자유주의자이고, 아닌지 판단할 객관적 기준을 얻을 수 있다. 더욱이 자유주의자 자신이 가진 문제점 및 오류를 스스로 검토하고 개선할 기회를 발견할 수도 있을 것이다.
여러 가지 논리적 오류 중에서 가장 심각한 문제를 일으키는 것은 곧 자기모순이다. 자기모순으로 가득 찬 논리는 절대 신뢰받을 수 없다. 이는 곧 “A라는 주제에서 개인의 자유를 주장한다면, B라는 주제에서도 개인의 자유를 여전히 주장하는 사람, 자유를 추구함에서 'if 조건문’을 추가하지 않는 사람”이 바로 진정한 자유주의자의 자격을 충족시킨다는 주장이 우리의 상식과 이성적 추론과 합치함을 보여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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