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시와 20대 공정 담론

김영준 / 2019-08-28 / 조회: 11,186

고등학생이 논문을 썼다. 이 말에서 위화감이 얼마나 느껴지는가? 의과학연구소 인턴을 하면서 이 논문을 쓰게 되었다고 한다. 그리고 이 논문은 SCI급 학술지에 게재되었다고 한다. 이 말에서는 위화감이 어느 정도 느껴지는가? 다른 이야기를 해보자. 교수 아버지를 둔 학생이 대학교에서 장학금을 받았다고 한다. 박탈감이 얼마나 느껴지는가? 성적도 낮은데 한 번도 아니고 연속해서 받았다고 한다. 이제는 박탈감이 어느 정도로 느껴지는가?


최근 조국 후보자의 딸과 관련된 논란에 대해 20대가 평균적으로 갖게 되는 심정은 딱 이런 것이다. 위화감과 박탈감. 짧은 기간 동안 정말 많은 논란이 터져 나왔고, 조국 후보자는 나름대로 지금 돌고 있는 논란들을 하나씩 집어가며 해명도 했다. 그럼에도 조국 후보자의 해명에 납득하고 조국 후보자를 '지키려’하는 진보 기성세대들이 놓친 것이 있다. 그러한 위화감과 박탈감의 근원이 조국 후보자가 저지른 불법행위에 있지는 않다는 것이다.


정말로 조국 후보자 그 자신의 해명에 따르면, 조국 후보자의 딸은 불법을 저지른 바가 없다. 고등학생으로서 절대 쓸 수 없는 논문을 써 제1저자로서 학술지에 게재하는 그런 일이, 해당 학문에 대한 기만행위라는 것은 일단 미뤄두고 이야기 해보자. 많은 20대들이 이러한 측면의 부당함은 잘 와 닿아 하지도 않을 뿐더러, 학자의 탈을 쓴 지대추구자들이 '우리 연구실에서도 종종 그러곤 한다는’ 식의 되도 않는 변론을 늘어놓는 바람에 이 역시도 대한민국에서는 별로 불법적인 일이 아니게 되어버렸다.


그러면 20대는 왜 조국 후보자의 딸을 보며 좌절하고 분노하는 것일까? 그것이 그들 마음속의 공정 담론에 어긋나는 사례이기 때문이다. 20대는 공정함이라는 것에 대해서 서로 유사한 기준을 공유하고 있다. 20대 사이에서 하나의 정의처럼 굳어진 기준이 있다고 하는 것이 더 정확하겠다. 그리고 그 기준의 핵은 입시제도에 있다. 대부분 고등학교 때부터, 이르면 중학교 때부터, 그리고 넓게 보면 초등학교 때부터 자신들을 학원으로 내몰고, 자신들에게 단 하나의 미래만을 그려줬던 그 제도에서 공정 담론이 체득되는 것이다.


그 공정 담론이라는 것은 그래서, 바로 이런 것이다. 일단 모두가 같은 트랙 위에 있어야 한다. 누구는 마라톤을 달리는데, 또 철인3종을 하는데, 누구는 단거리 달리기를 하는 그런 트랙은 불공정한 것이다. 여기에 약간의 추론을 더해서, 트랙이 같아도 주행 수단이 다르면 그것 역시 불공정한 것이 된다. 이는 본질적으로 트랙이 다른 것과 다를 게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조국 후보자의 딸은 의과학연구소 2주 인턴을 하면서 트랙도 바꾸고, 집도 잘 살고 학점도 낮은 와중에 장학금을 받으면서 주행 수단도 바꿨다. 20대 공정 담론 속에서 보았을 때, 이 사람은 불공정의 상징과도 같은 삶을 살았던 것이다.


그런데 이런 공정 담론이 건전하다고 볼 수 있는가? 20대 공정 담론대로 공정성을 실현시키자면, 모두가 같은 신체조건에 같은 장비를 하고 같은 트랙을 달리는 게임이 구현되어야 한다. 공정성의 '완전무결한’ 실현이라는 것은 개성말살과 동의어가 되는 것이다. 실현될수록 잘못된 길로 빠지게 되는 그런 가치를 우리가 이상이라고 부를 수 있는 것인가? 그런 점에서 현재 20대의 공정 담론은 근본이 틀려먹었다. 하지만 이런 왜곡된 공정 담론을 형성하게 된 것이 20대 스스로의 잘못이라 볼 수는 없다.


초등학교에 입학할 때부터 고등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이어지는 공적 제도권 교육은, 오늘날의 20대를 노력주의 이데올로기에 익숙하게 만들었다. 노력하면 성공하리라는, 그래서 노력해야 성공하리라는. 학부모와 미디어, 그리고 사교육은 그것을 강화한다. 12년 동안 공적 제도권 교육을 따라가는 학생들은 온 세상에서 노력주의 이데올로기의 다양한 변용을 접하면서 그것을 체화한다. 노력주의 이데올로기는 대학 입시가 끝나갈 무렵 절정에 달하게 된다. 하지만 대학 입시가 끝나도 그것은 무너지지 않는다. 오히려 그것은 이제 절대적인 진리로서 현실의 탈을 쓰기도 하고, 정의 그 자체로서 이상의 탈을 쓰기도 한다.


일부 20대들 사이에서는 이런 공정 담론을 소위 '리버럴’ 정의관과 연결지어보려는 시도도 나타난다. 이들은 조국 후보자의 딸에 대한 분노와 좌절이, 특히 지금 명문대를 다니고 있어 (그들 말대로는) 실상 조국 후보자의 딸과 본질적으로는 다를 것이 없는 사람들의 분노와 좌절이, 왜곡된 것이라고 이야기한다. 그 이유인즉슨, 획일적 입시제도 아래의 공적 제도권 교육 속에서 순전히 자력으로 성공했다고 볼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는 것이다. 다들 어떻게든 자신이 가진 사회경제적 배경의 도움을, 심지어 유전적 요인의 도움까지도, 받게 된다고 이야기한다. 때문에 20대 공정 담론은 조국 후보자의 딸에 대한 부정적 감정표출이 아니라, 공정 담론의 재인식에서 출발하여 바로 선 사회정의의 형태가 무엇인지 고민해보는 계기로 이어져야 한다고 말한다.


하지만 사실 이런 시도를 선도하는 이들의 사회경제적 배경이야말로 대체로 '누리는 자’들의 그것이다. '그들 말대로라면 실상 조국 후보자의 딸과 본질적으로 다를 것이 없는’ 바로 그 자신들이, 자신들의 공정 담론과 어긋나는 사례에 좌절과 분노를 느끼는 사람들을 두고 그게 잘못된 것이라 지적하는 꼴인 셈이다. 조국 후보자의 딸과 같은 사례는 좌절과 분노를 느낄 만한 게 아닌, 우리들 경험에 따르면 꽤 통상적인 사례에 해당한다고 이야기한다는 점에서 이런 접근은 악질적이다. 자신들과 같은 특권층은 잘못하고 있던 바가 없다고 주장하는 동시에, 20대 공정 담론이라는 괴상한 세계관까지 정당화하기 때문이다. 불공정한 트랙을 만들어 달려왔던 자신들의 입으로, 자신들에게는 잘못이 없지만 공정한 트랙은 중요하다는 주장을 하는 것은 굉장한 위선이다. 조국 후보자가 지금 사회적으로 질타를 받고 있는 지점도 바로 이러한 부분 아닌가?


20대 공정 담론이라는 이상한 세계관이 탄생한 이유는, 또 그것이 20대 사이에서 나름대로의 정당화에 성공한 이유는, 지금의 20대가 획일적 입시제도가 지배하는 공적 제도권 교육에 완전히 종속된 삶을 살아온 세대이기 때문이다. 예전에는 타의 반으로 그런 구조에 종속된 삶을 피하게 되기 마련이었지만, 오늘날은 그렇지 않다. 과거와 비교했을 때 정말 많은 사람들이 획일적 입시제도의 영향 아래에 놓이게 되었다. 누구나 대학을 간다고 이야기할 정도로 종속적 삶의 비율이 높아진 것이다. 그런 상황에서 이런 입시제도 속에서 살아남기 위한 방법으로서의 노력주의 이데올로기는, 20대에게는 하나의 세계관과 같은 것으로 다가올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누구나 대학을 가는 사회에서는 입시제도가 제도권 교육을 지배할 수밖에 없다. 때문에 입시제도를 고치지 않으면 제도권 교육은 변화될 수 없다. 소위 '모 고등학교에 다니는 아무개 학생도 연구소 인턴 해서 논문 써볼 수 있게 해주자는’ 식의 해결책은 진정한 변화가 아니다. 그런 접근을 통해서는 획일적 입시제도라는 본질은 전혀 변하지 않는다. 이는 획일적 입시제도를 상수로 두고 상류 계층이 쓰던 주행 수단을 나머지 계층에게도 배분하자는 주장에 지나지 않는다. 그 결과는 당연히 경쟁 심화에 따른 노력주의 이데올로기의 확대와 강화다.


현재 대학수학능력시험이 딱 그런 상황에 빠져 있는 전형적인 예시다. 20대들 사이에서, 누구나 적절한 방법을 통해 열심히 공부하면 성공할 수 있다는 노력주의 이데올로기의 상징과도 같은 것이 수능이다. 실상은 수능 역시도 부모의 사회경제적 배경에 따라 그 결과가 달라지는 경향성이 나타난다. 조금 정교한 비유를 해보자면, 주행 수단을 똑같이 나누어줬더니 상류 계층이 자신들의 신체적 조건을 바꾸는 방향으로 거기에 대응한 셈이다. 누구들만 하던 경험을 다른 누구도 할 수 있게 하자는 식의 접근법은 그래서 본질적인 해결책이 될 수 없을 뿐더러 문제를 더 심화시킬 뿐이다.


그래서 이후의 세대가 지금의 20대와 같이 병적 담론을 답습 내지는 강화한 채로 사회에 나와 대한민국을 병들게 하는 일을 막으려면, 획일적 구조의 입시제도를 타파해야 한다. 현재의 입시제도는 대학 가는 관문을 정부가 정해주는 방식이다. 박근혜 정권의 대입 전형 간소화 정책 이후로는 관문을 정부가 '만들어주는’ 수준에까지 이르렀다고 볼 수 있을 정도가 됐다. 여기에서 입시제도의 지금과 같은 획일성이 나오는 것이다. 학생 선발권이 온전히 대학교에 넘어가야, 즉 학생 선발 과정이 완전히 자율화되어야 이러한 획일성이 사라질 수 있다. 그리고 그렇게 해야지만, 개성말살을 추구해야 한다는 주장과 논리적으로 동등한 기형적 공정 담론도 더 이상 나오지 않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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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준 / 2019-08-28
김영준 2019-08-2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