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 내용은 아래 기사 및 칼럼 내용을 요약 번역한 내용임*
Murray N. Rothbard,
Conservation in the Free Market
4 January, 2020
이쯤 되면 지식인들이 변덕스러운 유행에 따라 여성의 치맛자락처럼 좌지우지된다는 것은 뉴스가 되지 않을 것이다. 지식인들은 분명히 군중심리의 희생양이 되는 경향이 있다. 이처럼 1958년 J.K 갈브레이드가 베스트셀러 <풍요로운 사회>를 출판했을 때, 그의 형제와 모든 지식인들은 미국을 과도하고 지나친 풍요로 고통받고 있다고 맹렬하게 비난하고 있었다. 그러나 불과 2~3년 후 유행이 갑자기 바뀌었고, 바로 같은 지식인들이 미국에는 빈곤이 만연하다고 불평했다. 백가쟁명 속에서, 자본주의는 그 시점에 초점이 맞춰진 문제가 어떤 문제이건 그것의 원인으로 지탄받는다. 1958년에 우리 모두를 재화의 범람 속에서 살게 한 책임이 있는 것으로 추정되는 자본주의는 1961년에 국가를 가난에 시달리게 한 것에 대해 똑같이 책임이 있다고 선고받았다.
또 다른 대표적인 사례는 30년대 말, 40년대 초반의 많은 경제학자들이 제기한 “스태그네이션 이론”이다. 스태그네이션 이론은 더 이상의 기술적 발명이 이루어질 여지가 없고, 따라서 자본 투자 또한 마찬가지이기 때문에 자본주의는 이제 막다른 골목에 이르렀다고 주장했다. 자본주의는 그러므로 영구적이며 증가하는 대량 실업의 운명에 처할 것이라고 하였다. 이런 개념이 사라진 후, 60년대 초반과 중반은 정확히 반대되는 자본주의 체제의 폐단을 낳았다. 스태그네이션 지지자들을 포함한 수많은 지식인들은 그 누구도 할 일이 없을 것이기 때문에, 임박한 자동화와 사이버화는 사실상 모두에게 적용되는 영구적이고 증가하는 대량 실업으로 빠르게 이어질 것이라고 주장했다. 다행히도, 자동화 히스테리는 최근 몇 년간 학계의 유행에서 사라졌다. 그러나 우리는 이 수많은 사례 속에, 만연한 모순을 통해 한 가지 중요한 사실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문제가 무엇이든, 시장경제가 그 주범으로 지목된다.
아주 짧은 시간에 높은 주목을 받은 최근 지적 열풍은 생태학 혹은 삶의 질로 알려진 환경이다. 지난 두 달 동안, 황폐해진 환경 문제의 공세 없이 볼 수 있는 신문이나 잡지를 집어 드는 것은 불가능했다. 그 문제의 차원이 어떻든 간에, 그것이 한두 달 내에 무시할 수 있는 수준에서 고질적인 수준으로 확대되었다는 것은 믿기 어렵다. 그리고, 그런데도 불구하고 이렇게 되었다.
좌파 측을 보면, 좌파와 학생 시위대가 이젠 환경과 깨끗한 공기를 위해 피켓을 들고 시위를 벌이면서, 병역과 베트남과 같이 몇 년 동안 그들을 뒤흔들던 매우 긴급한 문제들은 갑자기 마술처럼 사라졌다. 보수주의자들은 반대파의 뿌리를 뽑기 위해 이 쟁점을 기꺼이 장악했다. 어쨌든 중도든, 우파든, 좌파든 세상에 누가 추함, 쓰레기, 그리고 대기오염에 정면으로 찬성할 것인가? 기관들은 환경이 1970년대의 정치적 “쟁점”이 될 것이라고 흔쾌히 선언한다. 닉슨 대통령은 “삶의 질”을 자신의 국정연설의 주요 주제로 삼기 위해 열심히 재빠르게 움직였다.
70년대의 가장 큰 문제는 우리가 주변 환경에 항복할 것인가, 아니면 자연과 화해하고 공기와 땅과 물에 끼친 피해에 대한 보상을 시작할 것인가 하는 것이다. 자연을 자연 상태로 회복하는 것은 파벌을 넘어서는 목적이다. 이는 이 나라 국민 모두의 공동 목적이 되었다. 내가 의회에 제안할 프로그램은 이 분야에서 미국 역사상 가장 포괄적이고 비용이 많이 드는 프로그램이 될 것이다. 우리 각자는 매일 집, 소유지, 도시나 마을의 공공장소를 조금 더 깨끗하게 조금 더 낫게 유지할 것이라고 결심해야 한다. 나는 이 문제들이 불가해가 되기 전에 국가가 국가적인 성장 정책을 개발할 것을 제안한다. 우리는 미국의 삶의 질에 대한 우리의 우려를 농장과 교외, 마을과 도시로 옮길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 환경 문제에 대해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가? 우리가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제기된 다른 문제들을 격리하고 구별하는 것이다. 우리는 무엇보다도 환경 히스테리 환자들이 하나의 주머니 안에서 완전히 다른 수많은 문제들을 섞는 경고에 저항해야 한다. 우리는 간단히 말해서, 포춘지가 환경에 관한 특별 호 (1970년 2월)에서 우리에게 말하는 것과 정반대의 행동을 해야 한다.
하나하나 살펴보면 현재 우리의 많은 훼손 행위들은 비교적 교정하기 쉬워 보인다. 그러나 우리가 이 행위들을 일렬로 나열했을 때- 칙칙하고 투박한 도시, 광고판, 거품으로 가득 찬 호수, 소음, 오염된 물과 공기, 막힌 고속도로, 산더미처럼 쌓인 악취를 풍기는 쓰레기 더미-이것들이 누적된 영향은 우리를 어떤 하나의 고질적인 결점이라는 결론으로 몰고 간다.
좌파는 물론, 놀랍게도 자본주의라는 하나의 고질적인 결점, 이 경우에는 자원을 황폐화 시키고 파괴한 “자본주의적 탐욕”을 발견했다. 자본주의가 문제가 아니라는 것은 소련이 확실히 산업활동에 비례하여 미국보다 훨씬 더 “유린된” 환경을 조성했다는 사실에서 명백해진다. 유명한 소련 바이칼 호수의 오염은 이에 대한 분명한 예시다.
그러면 우리는 관련된 매우 다른 문제들을 구별해 보자. 우선, 미적인 문제가 있다. 무수한 “환경주의자”들은 미국에서의 삶의 “추함”, “보기 싫은” 도시들, “흉측한” 건물 등에 대해서 격렬히 불평해 왔다. 우선 미학은 다양한 개별적 가치와 취향의 바다 위에서 방향타 없이 표류하게 한다. 한 사람에게 “추함”은 다른 사람에겐 “미”이고 그 반대도 그렇다. 내가 직접 관찰한 바에 따르면 우리 도시가 추하다고 불평하는 대부분의 불평가들과 훼손되지 않은 황야를 찬미하는 가수들은 완고하게 이 도시 속에서 안락하게 자리를 잡고 있다. 왜 그들은 떠나지 않을까? 심지어 오늘날에도 그들이 살 수 있고 즐길 수 있는 많은 시골과 심지어 황무지들이 남아 있다. 왜 그들은 거기로 떠나 도시를 좋아하고 즐기는 우리들을 평화롭게 내버려 두지 않을까? 게다가, 만약 그들이 빠져나간다면, 이는 그들이 불평하는 도시 “인구 과밀”을 완화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둘째, 미적 의미에서의 빌딩과 풍경의 추함의 상당 부분은 도시 재개발과 같은 정부 계획에 따라 만들어졌으며, 도시의 주택, 상점, 지역사회에 대한 무분별한 파괴는 보조금과 수용권에 의한 몰수를 통해 막사스러운 개발로 대체되었다. 게다가, 펜타곤에서 당신의 지역 우체국까지 이 국가의 어떤 건물들이 정부 기관 건물들보다 더 전형적으로 볼품없는가? 아니면 풍경을 토막 내고 도로를 따라 주변을 훼손하는 고속도로를 빠르게 확산시키는 등의 정부 계획은 어떤가?
도시에 대한 또 다른 문제점은 도시들이 극심하게 “인구 과밀”이라는 것이다. 여기서 다시, 우리는 비평가들에 의해 지지받지 못한 가치판단을 가지고 있다. 얼마나 붐비는 것이 “인구 과밀”인가? 제인 제이콥스가 지적했듯이, 에이커당 주거단위의 높은 집중과 높은 토지 피복도는 대도시에서 일반적으로 가장 선호되는 지역의 다양성, 성장, 그리고 활력에 필수적이다. 그녀는 인구 밀도가 낮은 교외 지역에서는 상점과 사업체들이 다수의 경제적 수요에만 부응해야 하고 이는 지역과 생활의 단조로움으로 이어진다고 지적한다. 인구 고밀도 지역이 다양한 범위의 소수 취향에 맞는 넓은 스펙트럼의 상점 및 서비스를 수익성 있게 만든다. 그리고 다시 한번 말하지만, 비평가 무리가 황무지로 떠나는 것을 막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환경 비평가들 또한 슬프게도 역사적 지식이 부족하다. 그들은 한 세기와 수 세기 전의 도시들이 어느 누구의 미적 기준에서나 오늘날보다 훨씬 더 붐비고 불쾌했다는 것을 깨닫지 못하고 있다. 옛날에는 거리는 훨씬 좁았고, 자갈길 포장은 훨씬 시끄럽고, 현대식 하수도가 존재하지 않아 악취와 전염병이 횡행하고, 개와 때로는 가축이 거리를 배회하고, 에어컨이라는 피난처 없이 더위가 매우 심했다. 우리의 환경운동가들은 가장 큰 책임을 현대 기술에 돌리고 있지만, 현대기술이야말로 오늘날 대도시의 성장을 가능케 했으며 그 거주민들에게 훨씬 더 나은 건강, 편리함, 편안함을 주었다.
비평가들은 또한 인구 증가를 억제하기 위한 수단으로서 강제적인 산아제한에까지 도달하고 있는 것 같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인구 문제에 대해 너무 많은 대처가 이루어졌다. 남아메리카와 아프리카는 밀도의 어떤 기준으로 보더라도 인구밀도가 매우 낮지만, 그들은 대부분 가난에 허덕이고 겨우 생계를 유지하고 있다. 같은 기계적 기준으로 볼 때, 인도와 마찬가지로 일본은 매우 “인구 과잉”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도와는 달리 뛰어난 재주와 기업체들로 오늘날 세계에서 가장 높은 산업 성장률을 기록하고 있다.
환경 운동의 가장 불안한 특징 중 하나는 현대 기술에 대한 명백한 혐오와 자연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낭만주의적인 철학이다. 그들은 기술과 문명이 혼잡, 오염, 자원 파괴의 원인이기 때문에 우리는 오염되지 않은 자연으로, 월든 호수로, 돌아가 멀리 떨어진 작은 빈터에서 사색해야 한다고 한다. 이 현대 문화와 문명에 대한 비평가 중 어느 누구도 자연으로 돌아가는 길이 문명의 혜택을 버리는 것을 의미할 뿐만 아니라 현대 산업 시장 경제의 분업과 자본에 의지하고 있는 대부분의 인류에게 죽음과 기아를 의미한다는 것을 깨닫지 못하는 것 같다. 아니면 우리 현대의 낭만주의자들은 삶과 반대되는 죽음을 전제로 하는 것일까? 매우 그런 것 같다.
예를 들어, 현대 경제에 의한 천연자원의 “파괴”에 대한 정통 환경 보호론자들의 불만을 들어보자. 만약 아메리카 대륙에 아무도 이주하지 않고 정착하지 않았다면 수백만 제곱 마일의 숲은 그대로 남아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그것이 어땠다는 것인가? 사람과 나무 중 어떤 것이 더 중요한가? 만약 1600년대에 활발한 환경 보호론자가 로비하여 기존의 황무지가 온전했다면, 아메리카 대륙은 모피 사냥꾼들 몇 명 외에는 수용할 수 없었을 것이다. 만약 인간이 이 숲들을 이용하도록 허락되지 않았다면, 이 자원들은 사용될 수 없었기 때문에 정말 낭비되었을 것이다. 인간이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자원을 사용하는 것이 금지된다면 자원이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게다가, 발달하는 기술은 사용 가능한 천연자원을 소모할 뿐만 아니라 오히려 증가시킨다는 것도 잘 알려지지 않았다. 자동차와 현대 기계들의 발달 이전에는 지하에 묻혀 있는 막대한 양의 석유는 인간에게 전혀 가치가 없는, 그저 쓸모없는 검은 액체였다. 현대 기술과 산업의 발달로 석유는 갑자기 유용한 자원이 되었다.
그리고 여기에 천연자원이 사용될 때마다, 나무가 잘려 나갈 때마다, 우리는 미래 세대의 자원 이용을 박탈한다는 대표적인 주장이 있다. 하지만 이 주장은 너무 지나치다는 것을 증명할 수 있다. 만약 우리가 나무를 벰으로써 미래 세대의 기회를 박탈하기 때문에 나무를 베는 것을 금지한다면 이 미래 세대가 “현재 세대”가 되었을 때도 그들의 미래 세대를 위한 걱정 때문에 쓰지 못할 것이고 이것이 계속 지속된다면 이 자원은 인간에 의해 결코 사용될 수 없을 것이다. 이는 인간이 영원히 쓸 수 없는 자원에 메여 있기 때문에 완전히 ‘인간에 반하는’ 논지이다. 게다가, 미래 세대가 자원을 사용할 수 있도록 허용되더라도, 우리의 생활 수준이 보통 한 세대에서 다음 세대로 넘어갈 때 더 나아진다고 생각하면, 이것은 우리보다 더 풍요로울 미래 세대를 위해 우리 자신을 휘청거리게 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하지만 상대적으로 가난한 사람들이 부유한 사람들의 이익을 위해 자신을 희생해야 한다는 생각은 그 누구의 윤리적 기준에서도 확실하게 기이한 윤리적 명제다.
그렇다면, 모든 현세대가 자원을 적절하게 사용할 수 있다면, 우리는 이 보존 문제를 훨씬 더 진지하고 덜 히스테리적인 차원으로 낮출 수 있다. 그러면 어떤 자원이 어떤 주어진 세대에 얼마나 사용되어야 하고 후세를 위해 얼마나 보존되어야 하는가? 환경 보존론자들과 환경 운동가들은 자유 시장 경제는 내부적으로 적절한 보존 정도를 결정하는 자동적인 원칙을 포함하고 있다는 것을 전혀 깨닫지 못하고 있다.
예를 들어, 일반적인 구리 광산을 생각해보자. 우리는 구리 광부들이 광맥을 찾았을 때 급하게 모든 매장된 구리를 채굴하려고 서두르는 것을 볼 수 없다. 대신, 구리 광산은 보존되고 매년 점차 채굴된다. 왜 이런 것일까? 왜냐하면 광산 소유자들은 그들이 예를 들어 올해 구리 생산량을 세배로 늘린다면 그해의 수익을 세배로 늘릴 수 있다는 것을 알지만, 이는 광산을 고갈시키고 광산 전체의 화폐가치를 낮추리라는 것 또한 알고 있기 때문이다. 광산의 화폐가치는 구리 생산으로 벌어들일 것으로 예상되는 미래 소득을 기준으로 하며, 광산이 과도하게 고갈되면 광산의 가치와 더불어 광산 주식의 판매가가 떨어질 것이다. 그렇다면 모든 광산 소유자들은 광산 전체의 자본 가치의 상실과 비교하여 구리 생산에 따른 즉각적인 수입의 이점을 따져보아야 한다. 그들의 결정은 구리에 대한 미래 수요와 수익, 그리고 현재와 미래의 이자율 등에 의해 결정된다. 예를 들어 구리가 몇 년 안에 새로운 합성 금속에 의해 쓸모없게 될 것으로 예상되면, 그들은 더 높은 가치가 있는 현재에 서둘러서 생산하여 가치가 거의 없을 미래를 위해 훨씬 덜 남겨놓을 것이고, 따라서 이는 소비자와 경제 전반에 이익이 될 것이다. 반면에, 만약 세계 전체적으로 구리 광맥이 곧 고갈될 것으로 예상되어 구리가 미래에 더 높은 가치를 지니게 될 것으로 예상된다면, 현재 생산되는 양을 줄고, 미래 채굴을 위해 더 많은 양이 남겨질 것이며, 이 또한 소비자와 경제 전체에게 이익이 될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시장 경제가 미래 생산에 따른 자원 소유자의 현재 결정이 그들의 수입과 재산뿐만 아니라 소비자 다수와 국가 및 세계 경제의 이익에도 도움이 되는 놀라운 메커니즘을 내재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사실, 자본주의가 구리나 철 자원을 “유린”하는 것에 대해 불평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렇다면 숲의 경우에는 무엇이 문제일까? 왜 숲이나 어장은 “유린”당했지만 광물은 그렇지 않은가? 문제는 과잉생산이 존재하는 영역에서는 정부의 힘으로 시장 메커니즘의 작동이 금지되었다는 점이다. 구체적으로는 자원 자체의 사적 소유권은 허용되지 않고 일용이나 연용으로만 허용된 영역이다.
예를 들어, 정부가 철이나 구리 채굴 시작부터 광산 자체의 사적 소유권은 허용되지 않는다고 결정하고 대신에 정부나 “공공”이 광산에 대한 소유권을 보유하고 민간 사업자는 오직 광산을 임대하여 다달이 사용할 수 있다고 가정하자. 이는 광산 자체의 자본 가치를 소유할 수 없는 민간 사업체가 현재에만 소득을 벌 수 있고 미래에는 소득을 얻지 못할 것이기 때문에 가능한 한 빨리 이런 광산들을 채굴하려 하리라는 것을 명백하게 의미한다. 민간 광산 소유주들은 그렇지 않으면 다른 광부들이 미래 구리 광석의 혜택을 얻을 것이기 때문에 광산을 빨리 채굴하려고 할 것이다. 민간 구리 광부들이 가능한 많은 구리를 즉시 생산하기 위해 서두르자, 좌파들은 우리의 귀중한 구리 공급에 대한 “탐욕스러운” 자본주의의 비양심적인 파괴를 지적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 잘못은 시장경제에 있는 것이 아니라 정확히 말해서 정부가 시장, 그리고 사유재산권이 구리 자원 전체에서 작동하는 것을 막았다는 사실에 있을 것이다.
숲, 어장, 석유와 같이 과잉 생산과 자원 낭비가 실제로 발생한 지역에서 정확히 위와 같은 일들이 발생했다. 미국의 숲 대부분은 연방 정부의 소유로 남겨져 있고 민간 기업들은 현재 사용을 위해서만 숲을 임대할 수 있다. 이는 물론, 사업체들이 숲을 가능한 한 빨리 이용하여 미래 사용을 위해 아무것도 보존하지 않으려는 것에 충분한 동기가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게다가, 만약 숲 전체가 민간 기업들에 의해 소유되었다면, 자원 양을 증가시키고 장기 생산성을 향상시키기 위한 기술을 개발하여 현재 연간 생산량과 자원 전체, 둘 모두를 동시에 증가시키려고 하는 것에-현재에는 없는-충분한 동기를 보유했을 것이다. 현재 상태로는 자원을 증가시키고 유지하는 기술을 개발할 동기가 없다.
해양 어장의 경우에는 같은 상황이 더욱 심각하게 존재한다. 정부는 바다의 어떤 해역에서도 사유재산권을 허용한 적이 없다. 민간인과 기업들에 물고기를 잡고 포획함으로써 어자원을 이용할 수 있도록 허용했을 뿐, 결코 어자원과 바다 그 자체를 허용한 적은 없다. 어장이 고갈될 중대한 위험이 있다는 것이 과연 놀라운가?
토지의 사용과 사유재산의 유사점을 고려해보자. 원시시대에는 인간은 땅 자체를 변형시키지 않았다. 원시 사냥과 채집 경제에서 인간은 식량을 위해 야생동물을 사냥하고 야생 과일과 씨앗을 채집하는 등 자연 그대로의 토양과 땅의 결실물만 이용했다. 이 사냥과 채집 단계에서는 자원과 비례해서 인구가 적었기 때문에 토지 자체가 부족하지 않았고 따라서 땅에 대한 사유재산의 개념은 생기지 않았다. 인간이 땅을 변형(농업)하기 시작한 후에야 비로소 그 토지에 있는 사유재산에 대한 개념과 제도가 생겨났다. 그러나 이제 인간의 물고기 이용은 이 자원을 부족하게 만들기 시작했고 해역 자체에서 사유재산이 허용되지 않는 이상 계속 더 부족해질 것이다. 아무도 바다의 어떤 영역도 소유할 수 없기 때문에 아무도 바다를 보존할 동기를 얻지 못할 것이다. 게다가 지금은 미개발된 거대한 양식업을 발달시킬 경제적 인센티브가 없다. 만약 사유재산권이 바다에 존재한다면, 해양의 막대한 미개발 자원을 사용할 뿐만 아니라 인공 비료와 같은 기술로 자원을 매우 증가시키고 바다의 일부 영역을 “울타리” 치는 양식업의 환상적인 번영이 있을 것이다. 따라서 물고기의 공급은 단순한 비료 기술로 인해 엄청나게 증가할 수 있을 것이다. (비료가 농식품의 공급을 엄청나게 증가시켰듯이) 그러나 첫 번째 사람의 재산권을 존중하지 않아도 되는 경쟁적인 어부들이 이 투자의 결실을 가져갈 수 있을 때, 그 어떤 사람이나 회사도 바다의 일부분을 개간하지 않을 것이다. 양식업 기술의 원시적인 단계인 지금도 물고기를 크기에 따라 분리한 어떤 해역의 전자 울타리는 간단하게 큰 물고기가 작은 물고기를 먹는 것을 막음으로써 물고기 공급을 많이 증가시킬 수 있었다. 그리고 만약 바다에서 사유재산이 허용된다면, 우리가 현재 예측조차 할 수 없는 수많은 방법으로 바다의 당장과 장기적인 생산성을 증가시킬 수 있는 진보된 양식업 기술이 곧 개발될 것이다.
그러므로 올바른 길은 바다와 물고기 자원의 문제에 있어서 이윤의 동기, 기술, 그리고 경제 성장에 더 많은 족쇄를 채우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 반대다. 사유 재산권의 확대를 통해 해양의 방대한 미개발 자원들을 사용하고 증식하고 개발하기 위한 인간의 에너지를 자유롭게 하는 것이다.
이는 우리를 환경 운동가들이 가장 강하게 주장하는 영역, 그러나 그들이 진정으로 이해하지 못하는 공기, 물, 음식(농약), 그리고 소음 같은 전체적인 오염의 영역으로 데려간다. 무론, 우리의 공기와 수자원이 더럽혀지는 것은 심각한 문제이다. 그러나 문제의 근원은 자본주의적 탐욕, 현대 기술, 또는 사유재산과 자유 시장에 있는 것이 아니다. 반대로, 정부가 사유재산의 권리를 적용하거나 보호하지 못했다는 사실에 있다. 강은 본질적으로 아무도 소유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당연히 산업계, 농부, 그리고 정부도 마찬가지로 그 강에 폐수를 퍼부었다. 깨끗한 물과 깨끗한 공기는 부족한 자원이 되었지만, 어장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여전히 개인의 소유가 될 수 없다. 예를 들어, 강을 대상으로 한 완전한 사유재산권이 있다면, 소유주들은 오염을 허용하지 않을 것이다. 불가해로 보이는 공기에 대한 문제는 공중에 독소를 퍼붓는 공장, 자동차, 소각장이 농민의 과수원과 부동산 소유자의 건물뿐만 아니라 우리 모두의 폐와 몸을 해치고 있다는 사실을 인식할 필요가 있다. 확실히 자신 몸에 대한 사유재산권이 모든 사람 각자에게 가장 소중한 자원이다. 대기 오염 물질이 이 사유 재산에 해를 끼친다는 사실은 우리가 그 오염 발생을 방지하는 법원의 명령을 받아내기에 충분하다.
그렇다면 질문해야 할 문제는 왜 법원이 물질적 재산과 사람들 모두를 해치는 대기 오염에 대해 재산권 보호에 대한 관습법을 적용하지 않았는가 하는 것이다. 그 이유는 근대 대기오염 초기부터 법원이 인근 공장이나 기관차의 매연으로부터 예를 들어 농민들의 과수원을 보호하지 않기로 의도적인 결정을 내렸기 때문이다. 법원은 사실상 농민들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다. “맞다, 당신의 사유 재산은 이 매연에 의해 침범되고 있지만 우리는 “공공 정책”이 사유 재산보다 더 중요하다는 입장을 견지하고 있고, “공공 정책”은 공장과 기관차를 유익한 것으로 규정하고 있다.” 이것들은 사유재산권 보호보다 우선되도록 허용되었고 이는 오염으로 인한 재해를 초래했다. 해결법은 “급진적”이고 명백하며 문제를 진짜로 해결하지도 못하는, 납세자들의 희생을 바탕으로 한 수십억 달러의 임시방편 프로그램과 아무런 관련이 없다. 해결법은 단순하게 사람들의 권리와 재산권을 침해하는 공기에 오염 물질을 배출하는 행위를 금하는 것이다. 이런 금지령으로 인해 공산품의 원가가 증가할 것이라는 주장은 남북전쟁 이전에 노예제 폐지가 목화 재배에 드는 비용을 가중시킬 것이라는 주장처럼 비난받아 마땅하며, 따라서 일어나서는 안 된다. 이것은 오염유발자들이 오염 대한 높은 비용을 처벌 없이 그들에 의해 침해받는 것이 허용되었던 사유재산권을 가진 사람들에게 부과하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게다가, 비용 논쟁은 대기 오염을 처벌 없이 저지르는 것을 허용한다면 대기 오염을 예방하거나 해소할 수 있는 기술을 개발할 경제적인 인센티브가 없다는 결정적인 사실을 간과하고 있다. 그러나, 만약 산업계와 정부가 오염 배출을 금지당한다면, 그들은 곧 공기를 오염시키지 않고 생산할 수 있는 기술을 개발할 것이다. 오염방지기술의 원시적 단계에 있는 지금도 공기 오염을 방지할 수 있는 폐기물의 재활용을 위한 기술이 존재한다. 이처럼, 주요 오염물질 중 하나인 이산화황은 지금도 경제적으로 가치 있는 황산을 생산하기 위해 포집하여 재활용할 수 있다. 오염도가 높은 스파크 점화 자동차 엔진은 디젤, 가스 터빈, 증기 엔진, 또는 전기 자동차로 대체될 수 있으며, 특히 기존 엔진을 대체하는 기술을 개발하기 위한 경제적 인센티브가 존재할 경우 더욱더 그렇다.
소음 역시 사유재산에 대한 침해이다. 소음은 타인의 재산과 몸에 침범하고 폭격하는 음파의 생성물이기 때문이다. 이 경우에도 과도한 소음을 금지하기 위한 명령은 머플러, 음향재료, 심지어 반대되는 소리를 발생 시켜 소음 공해 기계의 음파를 제거하는 장비와 같은 소음방지 기계의 설치와 개발을 촉진할 것이다.
이와 같이, 우리가 히스테리, 혼란, 환경 운동가들의 오류 있는 철학을 벗겨낼 때, 우리는 기존의 시스템에 대항하는 중요한 기반 사례를 발견하게 된다. 그러나 이 사례는 자유주의, 사유재산, 또는 현대기술에 반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 밝혀진다. 이 사례는 사유재산을 허용하고 침해에 맞서 보호하는 것에 대한 정부실패 사례이다. 자원의 오염과 남용은 정부의 사유재산권 보호 실패에서 직접적으로 기인한다. 만약 재산권이 적절하게 보호된다면, 우리 경제와 사회의 어떤 분야에서나 마찬가지로, 여기서 민간기업과 현대기술은 인류에 대한 저주가 아니라 구원으로 다가오리라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번역: 이선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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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15 | 더 많은 생산은 위험하지 않다 David Gordon / 2020-02-0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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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자유시장 내에서의 환경 보존주의 Murray N. Rothbard / 2020-02-0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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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13 | 자유경제와 칠레의 불평등 José Niño / 2020-02-0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