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 내용은 아래 기사 및 칼럼 내용을 요약 번역한 내용임*
Murray N. Rothbard,
The Danger of "Public" Education
26 June, 2017
부모 혹은 국가 중 누가 아이를 감독해야 하는가? 여타 동물과 인간이 구별되는 본질적 특징 중 하나는, 인간의 아이는 수년 동안 상당히 무력하고, 자신을 스스로 책임질 능력이 느리게 성숙한다는 점이다. 그런 능력을 배양하기 전까지, 아이는 책임을 가진 개인으로서 완전히 행동할 수 없음이 사실이다. 우리는 분명 교육받아야 한다. 이러한 과정은 물론 복잡하고 어렵다. 우리는 유아기에서부터 점차 성장하여 독립적인 성인에 도달한다. 문제는 누가 그러한 작업을 수행하는지에 있다. 아이의 '소유권'은 부모에게 있는가, 국가에게 있는가? 이 문제에 있어 제3의, 혹은 중간의 입장은 있을 수 없다. 누군가는 반드시 아이를 관리해야만 한다. 어떤 제3자가 대리하여 아이를 양육할 권한이 있다고 말할 수는 없다.
물론 부모가 아이를 맡아야 한다. 부모는 말 그대로 아이를 생산했다. 아이와 부모의 관계보다 더 밀접한 것은 없다. 자유사회의 원칙이 각자가 자신과 자신의 재화를 소유한다는 것이라면, 부모의 가장 소중한 재화인 아이 역시 부모의 책임 하에 들어가야 한다.
아이의 부모소유권에 대한 유일한 논리적 대안은 국가가 부모로부터 아이를 빼앗고 양육하는 것이다. 자유를 믿는 모든 사람들에게 이것은 실로 기괴하게 들리는 제안이다. 이는 부모에 대한 권리 침해이며, 물론 아이에 대한 권리 침해이다. 아이는 자신의 개성을 세심하게 고려하지 않는 국가에 복종하며 성장하게 된다. 각 개인이 교육을 통해 자신의 능력을 최대한 개발하기 위해서는, 자유가 필요하다. 특히 폭력으로부터의 자유는 인간의 이성 및 인격 발달에 가장 필수적이다. 하지만 국가라는 존재는 폭력과 강제에만 의존하고 있다. 국가가 다른 개인들의 집합체와 구별되는 가장 큰 특징은, 국가가 폭력을 합법적으로 사용할 수 있는 유일한 집단이라는 점이다. 이러한 조건 아래에서 어떻게 아이가 평화적으로 성장하겠는가?
게다가, 국가의 기질이 아이들에게 주입될 것이다. 관료제적 획일성과 집단주의가 아이들의 성품으로 자리잡게 된다. 무엇보다도, 국가 자체에 대한 복종을 요구하는 교리가 심어지게 되어 사상적 통제가 행해지게 된다. 자발성, 다양성, 독립성 대신에, 수동적이고, 획일적이고, 순종적인 국가 추종자들이 양산된다.
미국은 원래 사립학교 혹은 자선학교를 중심으로 한 교육체계를 보유했지만, 19세기에 들어서 공교육이 확대되기 시작했으며, 모든 사람에게 공교육이 권장되었다. 사립학교는 곧 분열을 일으킨다는 비난을 받았다. 최종적으로, 국가는 모든 아이들에게 공교육을 강제하는 의무교육을 실시했다. 또 평등에 대한 잘못된 이해가 퍼지면서 교육의 국가주의화 경향은 점점 더 심화되었다. 모든 아이들이 법 앞에서 평등한 것 이상으로, 동등한 대우를 받을 자격이 있으며, 교육은 완전한 균일성을 바탕으로 해야 한다는 믿음이 생겨났다.
공교육의 경향은 최저 수준에 맞춘 강제 평등, 주체성의 퇴화, 그리고 모든 실질적 가르침의 포기와 국가복종에 대한 세뇌이다. 자기 발달이 아니라 집단에 대한 순종이 공교육의 목적이다. 모든 아이를 국가에서 책임진다는 '현대 교육'의 신화는 국가와 권력을 위해 봉사한다. 자유 사회에서의 개인의 발전과 인간 삶의 존엄성을 추구하는 사람이라면, 아이 교육 문제에 있어 국가에 반대해야 함이 당연하다.
혹자는 부모 자식간 관계에 국가가 완전히 간섭하지 않으면 더 큰 문제가 발생한다고 반박한다. 예컨대, 부모가 아이를 공격해서 불구로 만든다고 가정해보자. 우리는 이것을 묵과해야만 하는가? 물론 그렇지 않다. 그러나 그것이 공교육을 정당화하지는 않는다. 국가가 공격적 폭력으로부터 우리를 보호할 의무가 있다면, 아이들 역시 잠재적인 성인이고 미래의 자유인이기 때문에, 아이들을 보호해야 할 것이다. 허버트 스펜서는 이 사안에 대하여 뛰어난 통찰을 보여주었다: "아이들의 권리가 직접적으로 침해당하지 않는 한, 국가는 이에 대해 간섭할 권리가 없다."
번역: 김경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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