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사회주의는 가정을 거부하는가?

Jonathan Newman / 2019-06-26 / 조회: 14,8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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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드비히 폰 미제스(Ludwig von Mises)의 가장 중요한 공헌 중 하나는 사회주의 하에서는 경제적 계산이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소비자의 요구 사항을 충족시키기 위해서는 생산 요소가 적시에 적정량의 생산 라인에 할당되어야하며, 소비자가 원하는 바를 생산하기 위한 올바른 의사결정으로 결합되어야한다. 기업가는 시장 경제에서 이러한 결정을 내리지만 그 결정을 내리는 데 있어 기준과 척도가 되는 것은 다름 아닌 생산 요소의 가격이다. 기업가들은 생산 계획의 이행에 대해 ‘예’ 또는 ‘아니오’라고 말할 수 있는데, 그 가부의 판단은 소비재의 예상 가격과 비용, 즉 생산요소의 가격을 비교하는 것에서 시작된다.


그러나 사회주의는 생산 요소에 대한 사적 소유가 폐지된다. 재산권이 보장되지 못하는 것이다. 재산권이 인정되지 못한다는 것은 곧 생산 요소의 교환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 교환이 없다는 것은 시장 경제에서 기업가에게 중요한 정보가 되는 가격이 부재함을 의미한다. 결국 사회주의 정권에서 생산 결정을 내리는 사람은 생산 요소에 대한 시장 가격을 사용하지 않고 의사결정을 내리는데, 이는 "어둡고 막막한 곳에서 열심히 일하기"를 종용하는 것과 다를 바 없다.


이것이 사회주의 실험이 항상 재앙으로 끝나는 이유이기도 하다. 소련의 사회주의 운동 이후 전 세계 곳곳에서 사회주의 실험이 일어났다. 각국의 빈곤, 기근 등 사회주의의 폐해에 따른 사망자 수는 가뿐히 1억 명을 넘어섰다. 식품, 의약품, 피난처, 에너지, 의복 및 기타 필수품을 만드는 데 사용되어야 할 자원이 비효율적으로 낭비되기 때문에 발생한 참사이다.


그런데 흥미롭게도, 사회주의는 생산 요소의 소유권을 폐지하는 것 외에도 다른 교리에 입각한 것인데, 다름 아니라 가족을 폐지하는 것이다. 이것은 통상적인 핵가족이 설득력 있는 사회주의 수사학을 양산하는 데에 이용될 수 있는 것처럼 보일 수도 있다. 이는 사유 재산, 가격 및 "자본주의 착취"가 없는 사회적 유대의 좋은 예시라고 할 수도 있다.


그러나 마르크스, 엥겔스와 많은 사회주의 추종자들은 반(反)가족주의를 고수한 인물들이다. 마르크스와 엥겔스의 공산당 선언에는 다음과 같은 구절이 있다.


“가족 폐지! (중략) 현재의 가정 곧 부르주아 가정은 어떤 점을 기반으로 하고 있습니까? 자본, 사적 이익이 완전히 발달된 형태로, 가족은 부르주아 중에만 존재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부르주아 가정의 존재는 프롤레타리아들의 가족 부재 그리고 만연한 매춘성매매라는 수고 덕분에 존재하는 것입니다.”


사회주의자들이 주창하는 것과 같이 부르주아 가정이 프롤레타리아에 대한 억압 덕분에 가능한 것이라고 하자. 그들이 주창하는 데로 부르주아 계급과 그 가정에 대한 보완을 없애면, 당연히 부르주아는 사라질 것이다. 그러나 한 가지 간과한 것은, 부르주아와 그들의 생산요소인 자본이 사라지게 되면 프롤레타리아 역시 사라질 수밖에 없다는 점이다.


보다 간단하게 생각해보자. 자식을 학대하는 부모가 있고 그것에 대한 판결을 내려야 할 때에 우리는 어떻게 판정할 것인가. 상식의 척도로 본다면 당연히 유죄를 인정해야 할 것이다. 같은 이치가 부르주아 그리고 프롤레타리아 가정의 관계에도 적용되는 것이다.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부르주아와 프롤레타리아 가정을 구별하지만 공산주의가 실현되면 그 구별과 무관하게 두 부류의 가정 모두 분명히 "사라질 것"이다. 마르크스에 따르면 부르주아 계급은 착취를 전제로 하고 있기 때문이다. 남자는 그들의 아내를 착취하고 부모는 "사적인 이득"을 위해 그들의 아이들을 착취한다.


엥겔스는 공산당 선언에서 다음과 같이 기술하였다.


“공산주의 사회가 가족에게 미치는 영향은 무엇인가? 그것은 남녀 간의 관계를 개입할 사람이 없는 순수한 사적인 문제로 전환시킬 것이다. 그것은 사적 재산을 배제하고 공동체 기반으로 아이들을 교육시키고, 이런 식으로 전통적 결혼의 두 가지 근원인 사유 재산에 뿌리를 둔 의존성, 남성에 대한 여성의 의존성이 사회주의에서 제거된다. 더불어 아이들에 대한 의존성도 제거된다.”


결국 공산주의 사회는 어린이의 공교육과 일부일처제, 가족의 책임, 그리고 어떤 개인의 의존에 대한 사회적 규범의 붕괴를 수반하는 것이다.


ReviseSociology.com에 따르면 다음과 같다.


“마르크스주의자들은 핵가족이 자본주의에 대한 이데올로기적 기능을 수행한다고 주장한다. 그들에 따르면 가족은 소비의 단위로 행동하고 계층 구조에 대한 수동적 수용을 가르친다. 사회주의자들은 부유층이 그들의 사유 재산을 자녀들에게 상속시켜 계급 불평등을 재현하기에, 가정은 양극화와 계층화를 심화시키는 기관이기도 하다.”


현대의 마르크스주의자들은 가족은 자본주의의 선전 창구일 뿐이라고 주장한다. 가정은 계층 구조의 수용을 심어주고 계승을 통해 부르주아에게 "계급 불평등을 재생산"하는 방법을 제공한다. 이를 위해 엥겔스는 마르크스를 ‘가족, 사유 재산 및 국가의 근원’지에서 인용하고 있다.


“현대 가족은 농업 서비스와 관련이 있기 때문에 기본적으로 노예 (servitus)뿐만 아니라 농노의 개념도 함축하고 있다. 가족은 추후 사회와 국가와 같이 보다 확장적인 공동체로 전파되는 모든 모순을 함축하고 있는 형태라고 할 수 있다.”


결국 마르크스에게 있어서 가족은 자본주의의 축소판을 대표한다. 그러나 왜 그는 사회주의가 가정 차원에서 실현 가능하다면 더 큰 규모로도 실현 될 수 있다고 주장하지 않았고, 가정이 곧 사회주의의 축소판이 되어야 한다고 주창하지 않았을까?


가족은 식량, 야드 작업, 계속되는 휴가, 진공청소기 놀이, 보드 게임, 교통수단의 이용 또는 가족 구성원들이 서로에게 요구하는 것과 관련된 정보를 전달하기 위해 가격이라는 개념을 이용하지 않는다. 한 가족이 다른 가족보다 더 자주 사용하는 물건과 집이 있다고 하여, 재판에 회부되어야 할 잘못된 “사유재산”의 개념이 적용되는 것이 아니다. 그 어떤 부모가 딸에게 음식을 제공할 때마다 차용 증서를 끊는가.


이 규범이나 이상에 대한 예외가 있는데 말 그대로 예외적인 것이다. 때로는 부모가 자녀들에게 집안일을 시키고 그에 따른 용돈을 주기도 한다. 그렇지만 그 돈을 곧 시장 가격에 의거하여 지급하는 경우는 거의 없다. 오히려 자녀와 그러한 관계를 맺는 것은 아이들의 책임감과 돈의 가치를 가르치는 등 교육 운동에 가깝다. 아무도 이 "가격"이 가계가 혼란에 빠지지 않도록 하기 위한 가족 경제의 한 기초라고 주장하지 않는다.


나는 왜 마르크스주의자들이 가족을 싫어하는 이유는 말할 수 없다. 다만 사회주의자들은 인간의 본성에 대해 오판하고 있으며, 그러한 오판에 기초하여 가족 제도에 대해 생각하는 것은 잘못된 것이고 위험한 것임은 단언할 수 있다. 한편으로는 거시경제의 존재를 위해서 필수 불가결한 요소인 ‘가격’의 개념이 가정에는 부재한데, 그럼에도 가정이 안정적이고 건실하게 유지될 수 있는 이유는 무엇인지 고민해볼 가치가 있다고 생각한다.


지식


말미의 질문에 대한 한 가지의 대답은 로빈슨 크루소의 일화에 기초해 대답할 수 있다. 일화에서 로빈슨 크루소는 자신의 욕구가 존재한다면, 해당 상품 또는 재화에 적용되어야 할 가격의 개념이 없이도 욕구 충족을 위한 적정 생산 요소를 할당할 수 있었다. 그는 코코넛과 열매의 생산을 위해 얼마나 많은 시간을 할애해야하는지 알고 있었다. 이는 다름 아니라 그가 한계적으로 생각할 여건이 되었기 때문이다. 그는 자신의 현 상태에서 한계 단위의 상품 소비에 따른 효용 증가분을 알았고, 그에 적합한 수준의 노동력을 할애했던 것이다.


가족 구성원도 이와 같다. 상호간에 오롯이 마음을 공유하지는 않지만 다른 구성원이 원하고 필요로 하는 것은 그 어떤 타인보다도 가족 구성원들이 더 잘 안다. 저녁 식사를 위해 무엇을 요리해야 할지를 결정할 때와 같이 때로는 직접적인 소통을 통해서 그러한 지식이 전달되기도 한다. 어떠한 지식은 시간이 지남에 따라 경험이 축적되어 배운 것이기도 하다. 누군가와 많은 시간을 보낸 후에, 우리는 타인의 선호도 예측할 수 있는 일종의 전문 기업가가 되는 것이다.


이러한 차원의 지식은 분명히 국가 차원까지 확대되지는 않는다. 나는 위스콘신 주에서 무작위로 추출한 개인이 앞으로 7개월 동안 먹고 싶어 하는 것에 대해 잘 알지 못한다. 이것은 기업가가 이전에 생산 중간 단계에서 자본재를 생산함으로써 무의식적으로 그리고 일상적으로 하는 일종의 기대라고 생각한다. 무작위로 추출된 위스콘신 주의 표본 역시 그가 배가 고프다는 것을 깨달을 것이고 그에 따른 재화의 생산이 요구될 것이다. 이전에 말했듯이, 그러한 관계에 있어서는 생산 요소에 대한 시장 가격의 도움을 받아서만 생산 결정을 할 수 있다.


돌봄


가족이 가격의 개념이 없어도 분열하지 않는 또 다른 이유는 가족 구성원이 실제로 서로의 행복에 대해 깊은 관심을 갖고 있으며 (때로는 동의하지 않는다 할지라도) 자신에게 가장 적합한 것이 무엇인지를 알기 때문이다. 어머니는 아이가 원하고 필요로 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아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으며, 아이를 위해 최선을 다해야 한다. 그 최선의 상호적 돌봄을 바탕으로 가족은 지식이 완벽하지 못하다는 문제와 인센티브 불안정성 문제를 극복한다.


나는 무작위로 뽑은 표본, 위스콘신 주의 한 사람이 7개월 후 배가 고픈 것은 원치 않지만, 그것이 나에게 고려해야 할 최우선 순위는 아니다. 나는 위스콘신에 있는 그 사람에 대해 어떤 유대적 관계를 맺고 있지 않다. 단지 많은 원인에 의거하여 일정한 관심을 가질 수도 있을 뿐이다. 그리고 근접도, 종교적 신념, 나 자신의 주관적 선호도를 종합적으로 포함하여 고려하면, 당연히 나의 가족이 그 혹자보다 더 중요한 것이다.


시장 경제는 이것을 가격으로 극복한다. 다양한 재화와 용역을 제공함으로써 필자에게 타인의 처지를 고려할 인센티브가 생기는 것이다. 이것은 노동의 분업에서도 마찬가지로 적용되는 것이다. 분업을 통한 타인에 대한 돌봄은 아주 아름답게 작동한다. 아담 스미스 (Adam Smith)의 국부론의 가장 유명한 구절이 그 현상을 명확하게 보여준다. “우리가 저녁 식사에 일용할 것들을 만들어주는 푸줏간 주인, 양조자 그리고 제빵사는 우리를 위한 자비심이 아닌 자신의 이익에 부합하기에 그렇게 행동하는 것이다.”


사회주의 체제에서 흔하게 등장하는 독재자, 중앙의 기획위원회 그리고 사회주의 노동자 집단은 우리가 가족을 돌보는 것처럼 개개인을 돌보지 못한다. 뿐만 아니라 자본주의 시장 경제에서 활동하는 기업가와 같이 각 개인의 특별한 욕구와 수요를 충족시킬 수도 없다. 이익을 얻으려는 동기가 충만하고 욕심이 가득한 자본가가 선량한 사회주의자보다 나의 배를 채워줄 가능성이 높다. 중앙의 계획자들은 무료로 식량을 배급하지만 남는 것은 기아와 굶주림뿐이지 않던가.


외부 정보


마지막으로, 가족은 가격의 바다로 비유하자면 가격이 거의 들지 않는 섬이라고 할 수 있겠다. 우리는 시장 가격을 쉽게 참조하여 가족 구성원으로서 가정 내에서 결정을 내릴 수 있다. 가정 내에 가격은 없지만 가정 외부의 가격을 통하여 자원을 절약할 수 있다. 이것은 사회주의 국가들이 본래 취약한 수명보다도 오래 지속될 수 있는 방법이다. 사회주의 국가들은 다른 나라의 다양한 재화와 서비스에 적용되는 가격에 의존한다. 기업도 이익과 손실을 적절히 고려하고 투자 결정을 내릴 수 있는 요인에 있어 외부 시장을 적용한다.


이런 맥락에서 마르크스주의자들은 가족을 소비 단위로 언급하는 것이 옳다. 필자의 아내와 딸의 행복은 필자의 행복이다. 한 가족 구성원들은 동일한 예산의 제약을 받기 때문에, 한 개인의 지출이 다른 개인의 지출 의사 결정에 영향을 준다. 대규모 구매는 컨센서스를 통해서만 이루어진다. 그러므로 가족의 단합은 긍정적인 것이지 마르크스주의자들이 제안한 것과 같이 부정적인 것이 아니다.


우리가 보아왔듯이 이것은 국가 차원에서 적용될 수 없는 것이다. 그것이 효과가 있을 수도 있지만 단기간으로만 적용될 수 있으며, 국내외 시장 가격을 갖는 것에 대한 심각한 단점이 있다. 국가는 하나의 예산에 기초하여 자원을 공통적으로 소유하고, 선호가 밀접한 가족과 같은 소비 단위가 아니다.


결론


가족이 경제적 계산 문제를 어떻게 극복하였는지 이해하는 것은 어떤 가족이 번성할 수 있는지 교훈을 일러준다. 강하고 번성하는 가족은 구성원 간 상호 많은 것을 알고, 돌보며 의사 결정에 있어서 합치되는 가족이다. 상호간에 대한 지식은 많은 경험을 공유하고 솔직하며 정직한 의사결정을 통해서 축적된다. 보살핌은 공동의 믿음 그리고 그 믿음에 기초한 의무와 애정에 뿌리를 두고 있다. 이 요소에 부합이 되면 가족의 일치단결은 자연스럽게 달성되는 것이다.


본 내용은 https://mises.org/wire/why-do-socialists-hate-families를 번역한 내용입니다.


이 글은 경제지식네트워크(FEN) 해외 정보 번역 코너 https://fenkorea.kr/bbs/bbsDetail.php?cid=global_info&pn=3&idx=8453에서도 보실 수 있습니다.


번역: 박성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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