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7년 진보진영에서 우고 차베스를 배우자는 붐이 일었다. 김상곤 경기교육감 예비후보가 공동위원장으로 있던 '한국사회포럼 2007’은 6월 항쟁 20주년을 기념한 토론회에서 차베스 영상을 틀고 그의 업적을 집중 조명했다. 조희연 서울시 교육감 예비후보는 성공회대 교수 시절 “노무현 대통령은 우고 차베스에게 배워야 한다”고 주장했다.
베네수엘라의 우고 차베스는 1999년 21세기 사회주의 혁명을 일으키고, 15년간 반시장, 반자유주의 정책을 고수해 왔다. 그 결과 국민들은 심각한 생필품 난에 시달리고 있다. 비누 하나를 사고 다음날 또 하나를 더 사면 투기죄로 징역형에 처해질 정도다. 참다못한 시민들은 살인적인 인플레이션율, 부정부패와 범죄를 해결해 달라고 거리로 뛰쳐나오고 있다.
이쯤 되면 '우고 차베스를 배우자’고 국민들을 호도하던 진보진영이 자신의 실수를 인정하는 것이 도리일 텐데 일언반구 말이 없다. 심지어 이들이 교육감, 도지사로 나서고 있으니 차베스의 주장이 정책에 적극 반영될까 우려될 지경이다. 이념 앞에서는 지식인으로서의 양심 따위는 없어 보인다.
이런 상황에서 쿠바의 사회주의 혁명을 지지하다 자신의 잘못된 선택을 인정하고 자유주의로 전향한 노벨상 수상자 마리오 바르가스 요사에 새삼 주목하게 된다. 그는 사회주의가 아닌 자유주의가 사회정의를 달성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라는 것을 깨닫고 양심선언을 했다.
좌파에서 우파로
마리오 바르가스 요사(78)는 1950~60년대 대부분의 라틴아메리카 지식인들이 그랬던 것처럼 쿠바 혁명을 지지하는 좌파 소설가였다. 그는 쿠바 혁명에 대해 “라틴 아메리카에 민주적 사회주의의 개념을 탄생시켰다”고 극찬했으며 1960년대 여러 지역을 순회하며 피델 카스트로를 옹호하는 열정적인 연설을 하고 다녔다. 쿠바의 문학상인 '카사 데 라스 아메리카스’ 심사위원으로 활동하기도 했다.
당시 바르가스 요사와 콜롬비아 소설가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 칠레 시인 파블로 네루다 등 저항정신이 강한 작가들은 라틴아메리카 전체에 쿠바와 같은 사회주의가 제대로 정착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이들은 문학작품과 대중활동을 통해 자신들의 주장을 적극적으로 대중에 알렸다. 이들의 작품은 '붐boom소설'이라고 불리며 전 세계 진보독자들의 큰 사랑을 받았다. 바르가스 요사의 '라 까떼드랄 주점에서의 대화 Conversation in the Cathedral'(1969)는 대표적인 붐소설로 페루의 우파 독재자 마누엘 오드리아 정부를 강하게 비판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피델 카스트로는 바르가스 요사를 비롯한 전 세계 지식인들을 실망시켰다. 쿠바 사회에서는 아주 기본적인 개인의 자유조차 보장되지 못했다. 의회가 존재하지 않았고, 법원이 정부로부터 독립적이지 못했으며, 언론의 자유가 없었다. 또한 국민들은 기본적인 교육과 의료 혜택조차 받기 어려운 상황이었다. 좌파 지식인을 이러한 광경을 지켜봤음에도 불구하고 공개적으로 자신들의 실망감을 드러내기를 꺼렸다. 지식인으로서의 양심보다 자신들의 이념을 우선시했기 때문이다.
바르가스 요사는 달랐다. 자신이 지지했던 쿠바가 전체주의 국가에 불과했으며, 사회주의라는 환상에 많은 문제점이 가려져있었다는 사실을 깨닫자마자 자신의 선택이 잘못됐음을 인정했다. 그는 1967년 '쿠바의 역사에 남긴다’라는 칼럼을 통해 "카스트로가 나라와 국민들의 이익을 위해 일한다는 신념에 공감했으나, 현재 쿠바에는 언론의 자유가 없고, 공산당만이 존재한다. 사회주의 혁명의 이익 보다 손실이 더 크다는 사실을 뒤늦게 깨달았다“고 후회한 바 있다. 그리고 그는 1968년 ’프라하의 봄' 사건으로 소련이 체코슬로바키아를 침공하고, 카스트로가 그러한 소련을 지원하자 이를 강하게 비판하기 시작했다.
그가 전향을 하게 된 결정적 계기는 1971년 '파디야 사건’이었다. 쿠바의 대표 시인 에베르토 파디야는 독재정권을 비판하는 시를 썼다가 반역시인이라는 죄목으로 체포되었다. 〈힘겨운 시기에〉라는 시에서 '힘겨운 시기 동안’, '그들’은 작가에게 대의를 위해 몸 바쳐 헌신하기를 강요하고 있다고 주장했기 때문이다. 쿠바 정부는 파디야에게 자아비판을 강요했고, 파디야는 대중 앞에서 자신의 반혁명적인 과오에 대해 고백해야 했다.
바르가스 요사는 파디야 사건에 항의하는 뜻으로 '카사 데 라스 아메리카스’ 심사위원 자리를 사임했으며, 사르트르와 사로트, 고이티솔로 등 다른 작가들과 함께 카스트로에게 두 번에 걸쳐 항의 편지를 썼다. 그리고 자유주의로 전향을 결심한다. 함께 사회주의 혁명을 꿈꾸던 동료들이 '혁명의 적’이라고 비난했으나, 그에게는 자유주의 사상에 대한 확신이 있었고 행동으로 보여줄 수 있는 용기가 있었다.
이후 자유주의와 시장경제 체제를 옹호하는 그의 행동에는 거침이 없었다. 라틴아메리카에 사회주의 독재가 가능했던 것은 “민주주의처럼 보이는 위장” 덕분이라고 지적하는가 하면, 멕시코에서 완벽한 '독재체제’라는 발언으로 추방을 당하기도 했다.
유럽 사회주의의 영향을 받다
1936년 3월 28일 페루 아레키파에서 출생한 바르가스 요사는 부모님의 별거로 외교관이었던 외할아버지를 따라 볼리비아 코차밤바에서 유년기를 보내게 된다. 10살이 되던 해 부모님이 재결합을 하게 되면서 바르가스 요사는 페루로 돌아올 수 있었다.
바르가스 요사의 아버지 에르네스토 바르가스는 아들이 시를 쓰는 것을 반대해 13살의 아들을 프라도 군사학교에 보냈다. 그는 군사학교에 적응을 하지 못해 중퇴를 했고, 1953년 산 마르코스 대학에 진학해 문학과 법학을 공부했다. 산 마르코스 대학은 페루의 노동자 계급이 많이 진학하는 학교였는데, 그는 이때부터 공산주의 사상에 심취하게 됐다. 특히 샤르트르를 무척 존경해서 그의 친구들은 “용감한 작은 샤르트르”라는 별명을 붙여줄 정도였다.
바르가스 요사는 “나를 마르크스주의로 이끈 것은 정의에 대한 분노였다”고 밝히며 스스로를 온건한 사회주의자라고 주장했다. 그는 형식적 민주주의를 비판하고, 부의 불평등이 있는 상태에서의 자유는 “미묘한 거짓말"에 불과하다고 주장했다. 1962년 쿠바의 미사일 위기 때 쿠바를 방문해 카스트로를 지지하는 발언을 했다.
그의 사회주의적 성향은 이후의 유럽 체류 경험을 통해 더욱 강해진다. 그는 19살 때 이모뻘인 29살 훌리아 우르키디와 결혼했다. 그의 아버지는 그의 결혼 소식을 듣고 권총으로 위협하며 반대했고, 바르가스 요사는 아버지를 피해 유럽으로 도망쳤다. 프랑스 파리로 건너가 공부를 계속했고, 학비 마련을 위해 스페인어 교사, 방송인, 잡지 편집자 등 닥치는 대로 일을 하면서 틈틈이 소설을 썼다.
파리에서 가르시아 마르케스와 함께 라틴아메리카의 '붐(boom)’ 소설가 대열에 합류했다. 그는 영국에도 체류하며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에 대한 연구를 했고, 1971년 스페인 마드리드 콤플루텐세 대학에서 문학 박사학위를 받는다.
바르가스 요사는 1974년에 페루로 돌아갔다. 유럽으로 떠나올 때와 달리 그는 좌파와 동떨어진 자유주의자 투사가 되어 있었다. 그는 조국 페루가 자유주의와 시장경제를 받아들이기를 원했고, 자신이 페루를 변화시킬 수 있을 것이라고 확신했다. 요사의 오랜 친구이자 라틴 문학 전문가인 블랑카 발레라는 “요사는 효율성과 정직한 정부를 경험하지 못한 조국 페루를 변화시키려 노력한 인물”이라고 극찬하고 있다.
가르시아 마르케스 vs 바르가스 요사
가르시아 마르케스는 1928년 콜롬비아에서 태어났고 1982년 노벨상을 수상한 남미의 대표 소설가다. 바르가스 요사와 가르시아 마르케스는 유럽에서 만나 쿠바 혁명에서 라틴 아메리카의 미래를 발견했던 동지였다. 요사의 박사학위 논문 주제가 가르시아의 문학에 대한 연구였을 정도로 둘 사이에는 강한 교감이 형성되었다.
그러나 피데야 사건으로 바르가스 요사가 카스트로를 비판하면서 30년 우정에 금이 가기 시작했다. 바르가스 요사가 카스트로에게 보내는 항의 편지에 서명을 할 것을 요구했지만 가르시아 마르케스는 애매모호한 태도를 취하며 서명을 거부했다. 이후에도 마르케스는 카스트로를 지지했고, 이런 마르케스에 대해 바르가스 요사가 “카스트로의 매춘부"라고 비판하면서 사이가 벌어지기 시작했다. 마르케스는 “쿠바 정권에 부탁해서 쿠바 작가 3200명을 석방시켰다”며 자신을 변호했고, 이에 요사는 “카스트로는 부하와 친구를 위해 때때로 정치범들에게 자유를 선물로 준다. 그것으로 자신의 양심의 가책을 치유한다”며 빈정거렸다.
멕시코시티 영화관에서의 주먹다짐에 대한 일화는 매우 유명하다. 요사와 마르케스는 1976년 멕시코시티 영화관의 한 시사회에 참석했는데, 영화관 앞에서 마르케스가 “마리오”라고 부르며 크게 반겼으나 요사는 주먹으로 친구의 얼굴을 가격하며 화를 냈다. 두 사람이 이 사건에 대해 함구하고 있어 구체적인 정황은 알 수 없다. 소문에 따르면 두 사람이 아내와 함께 스페인 바르셀로나에 머물 때 요사가 스웨덴 여성과 바람을 피웠는데, 이를 두고 가르시아 부부가 요사의 아내에게 이혼을 권유했다는 것이다. 게다가 마르케스가 요사의 아내를 달래는 과정에서 추파를 던졌고, 곧 아내의 곁으로 돌아온 바르가스 요사는 이 소식을 듣고 크게 분노해 직접 응징한 것이라고 한다.
마침 80세 생일을 맞았던 마르케스는 한쪽 눈이 시커멓게 멍이 들고 말았다. 마르케스의 멍든 눈은 영국의 더 타임즈와 미국의 뉴욕타임즈에 실렸고 이 사건이 더욱 유명해지는 계기가 됐다. 바르가스 요사의 박사학위 논문 주제가 가르시아 마르케스였던 것을 두고 논문 저자가 논문 주제를 때린 최초의 사건이라는 우스개 소리가 있을 정도였다.
이렇게 정치적인 문제와 개인적인 문제로 결별한 두 친구는 2007년 가르시아의 '백년 동안의 고독’ 출간 40주년을 맞아 화해하게 되었다. 요사는 “노벨상 수상자 중에 엉터리도 많은데, 가르시아는 노벨상을 탈 충분한 자격이 있다”고 극찬했다. 2014년 4월 가르시아의 부음을 듣고 요사는 “그의 작품 덕분에 문학은 폭넓은 독자와 위엄을 얻었다”고 애도했다. 이념적 갈등으로 멀어진 친구는 결국 문학으로 화해하게 되었다.
페루의 대처를 꿈꾸다
1980년 말 소련이 붕괴하던 때, 라틴아메리카 국가의 경제정책은 국가를 파산으로 몰고 있었다. 당시 페루의 알렌 가르시아 대통령도 사회주의 정책을 고수하고 있었다. 당시 인플레이션율이 1000%에 가까울 정도로 경제가 불안정한 상태였으며, 부패한 관료가 민간 기업을 지배해 국가는 사실상 파산 상태였다. 오죽하면 “페루에서 제대로 운영되는 것은 여자 배구 팀과 페루의 마오쩌둥주의 테러단체인 '빛나는 길’ 두 개 뿐”이라는 농담이 유행할 정도였을까. 당시 페루 여자 배구팀은 서울 올림픽에서 금메달을 땄다.
요사는 가르시아 대통령이 은행 국유화를 주장하자 1987년 그는 '전체주의로 향하는 페루’라는 칼럼을 통해 이를 강력하게 비판했다. 그는 은행 국유화가 전체주의의 첫 번째 단계라고 확신했다. 그리고 그는 자유Libertad 운동을 위해 세력을 모으며 정치적 움직임을 시작했다.
정치활동에 앞서 그는 리마 시내에서 집회를 열었는데, 그의 아내는 잘 차려입은 기업인들이 가득할 것이라는 그의 예상과는 달리 '자유에 목마른 가난한 사람들의 비명이 가득했다’고 회상했다. 바르가스 요사는 이날 집회에서 “모든 일에 생명을 불어 넣겠다”고 밝히며 페루를 부패와 가난에서 구해낼 것을 밝혔다. 그리고 그는 '대처리즘’을 내세우며 중도 우파 연합인 '민주전선'(프레데모)당의 후보로 1990년 대통령 선거에 출마했다.
그는 공약으로 정부의 긴축, 민영화와 자유무역을 중심으로 하는 자유주의 정책을 내놓았다. 바르가스 요사는 경제적 자유는 정치적 자유와 분리될 수 없다고 주장하며 페루가 가난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작은 부를 재분배 할 것이 아니라, 더 많은 부를 생산해야 한다고 밝혔다.
대통령 선거 직전 여론조사에서 요사는 다른 세 후보에 앞서고 있었지만 과반 득표로 당선되기 위해 그의 강력한 자유주의 정책을 완화시키기 시작했다. 이것이 패인으로 작용해 2차 경선에서 경쟁자인 알베르트 후지모리에게 패배했다. 결과적으로 후지모리는 페루 역사상 가장 잔인하고 부패한 독재정권이 되었다. 이후 페루의 실패는 많은 국가들의 본보기가 되었다.
바르가스 요사는 선거 패배 이후 정치입문을 후회하고, 자신은 고전적 의미의 자유주의자로 남겠다고 선언했다. 그러나 후지모리가 1992년 4월 국회와 대법원 등 주요 기관을 폐쇄하며 독재를 시작하자 정치적 침묵 선언을 번복하고 후지모리에 대한 비판을 시작했다. “야만으로 돌아가다”라는 칼럼을 통해 국민들에게 후지모리 정권에 대항해야 한다고 호소했다.
한편 그는 후지모리 독재정치에 저항해 1993년 스페인 국적을 취득해 집필 활동에 몰입하고 있다. 여전히 각종 이슈에 대해 자유주의적 시각을 내놓고 있으며 국가의 양심으로 존경받고 있다.
자유주의 투사
그는 프리드리히 하이에크의 <노예의 길>과 칼 포퍼의 <열린사회와 그 적들>을 읽고 감명을 받았다. 특히 그는 칼 포퍼의 저서에 대해 '20세기 가장 위대한 철학서’라고 평했으며, “지난 20년 간 인생의 상당시간을 포퍼의 책을 읽는 데 소비했다” 밝힌 바 있다. 대통령 선거 운동 중에도 포퍼의 책을 읽는 일은 거르지 않았다는 일화는 유명하다.
포퍼의 자유주의는 보편적인 것이라는 주장과, 반증, 비판, 과학적 가설의 수용은 요사의 세계관에 큰 영향을 미쳤다. 포퍼가 말하는 열린사회는 영원한 진리가 없다는 가정 하에 비판을 허용하는 사회이다. 바르가스 요사는 포퍼가 말하는 '행위의 규범은 고정불변의 것이 아니라 필요에 따라 변경될 수 있는 약속체계에 불과하며, 우리가 보는 것은 우리의 다양성이라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는 주장을 자주 인용했다.
그는 이러한 사상을 바탕으로 카스트로와 베네수엘라의 우고 차베스를 비판했으며, 볼리비아의 모랄레스가 주장한 사회주의 혁명도 비판했다. 또 많은 젊은이들이 체게바라의 사상을 받아들이는 점을 우려했다. 강연과 글을 통해 체게바라의 사상이 정의로워 보이지만 본질은 전체주의적 군부 독재라는 것을 대중들에게 각인시키려 노력했다. 그는 체게바라가 '라틴아메리카의 정치적 근대화를 20년이나 지연시켰다’고 비난을 서슴지 않았다.
한편 그는 로널드 레이건과 마가렛 대처를 최고의 정치인으로 꼽았다. 대처에 열광해 런던으로 이사를 가기도 했으며, '자유 수호를 위해 일궈낸 그녀의 성과에 대해서는 사전에 나와 있는 어떠한 단어로도 감사의 의미를 충분히 표현할 수 없다’며 극찬하기도 했다. 그는 대처리즘을 받아들여 그의 선거 공약으로 적극 활용했다.
바르가스 요사는 국민들이 빈곤에서 탈출하기 위해 정치적, 제도적 변화가 필요하다고 주장해왔다. 미국 인디펜던트 연구소가 출판한 “빈민들이 주는 교훈: 기업가 정신의 승리”라는 책 서문에서 “기업가 정신과 에너지는 세계 어느 곳에나 존재한다. 그러나 아직도 경제적으로 낙후된 국가들의 경우, 제도적으로 기업가 정신과 에너지가 경제발전에 연결되는 것을 막고 있다”고 밝혔다.
2005년 그는 왕성한 자유주의 활동에 대한 공로를 인정받아 미국기업연구소(AEI)의 어빙 크리스톨상의 수상했다. 수상소감을 통해 자신이 주장하는 자유주의는 고전적 의미의 자유주의이며, 관용과 타인에 대한 존중을 기초로 하고 있음을 밝혔다. 또한 정치적 민주주의, 시장경제와 국가의 이익보다 개인의 이익에 우선하는 것을 기본요소로 하고 있다고 강조했다.
문학은 나를 자유롭게 한다
바르가스 요사의 문학적 관심은 가족으로부터 출발했다. 불화를 겪었던 가족과 권위주의적이었던 아버지의 모습을 상기하며 “나는 아버지에 대한 공포와 불안, 가족들로부터 느낀 엄격함에서 벗어나기 위해 책을 읽었다. 책에서 자유를 얻었다”고 밝힌 바 있다.
그는 9살부터 글을 쓰기 시작했으며 16살이 되던 1952년 문단에 데뷔를 했다. 1963년 중퇴한 군사학교 시절의 부패와 폭력에 대해 묘사한 <도시의 개들>로 문단의 주목을 받게 됐다. 그는 독재와 권위주의 정부가 모든 사회를 망치는 것에 대해 설명하고자 했다. 이에 분노한 군사학교 측에서 그의 소설 1000부를 불태우는 의식을 갖기도 했으나, 훗날 요사가 대통령 후보가 된 후 군사학교 동문과 선생님들의 지지를 받으며 화해했다.
그는 1962년부터 유럽에 머무르면서 19세기 유럽문학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이 때문에 그의 소설은 페루뿐만 아니라 라틴아메리카 전체 혹은 세계 전체를 배경으로, 실화를 바탕으로 하는 것이 많다. <녹색의 집>, <라 까떼드랄 주점에서의 대화>는 사회주의 성향을 보이는 초기 작품이다. 칠레 군부를 비판한 <판탈레온과 특별봉사대>, 자신의 결혼담을 그린 <나는 훌리아 아주머니랑 결혼했다> 등의 소설은 사회주의의 문제를 인식하던 전환기적 작품으로 손꼽힌다.
브라질 건국 과정을 그린 <세상 종말 전쟁>(1981)를 기점으로 그의 소설에 자유주의 사상이 녹아들기 시작한다. 브라질 북동부의 농민 봉기를 그린 <마이타의 이야기>(1984), 도미니카의 독재자를 비판한 <염소의 축제>(2000), 아일랜드 독립운동가 로저 케이스먼트가 주인공인 <켈트인의 꿈>(2010) 등이 대표적이다. 로저 케이스먼트는 영국의 반제국주의와 인권을 위해 싸우는 평범한 우파 사상을 가진 인물로 그려진다. 한편 대통령 선거에 출마한 경험에 대한 (2005)를 쓰기도 했다.
바르가스 요사는 청년 시절 사회주의 사상을 신봉했지만 그의 소설을 보면 그가 언젠가는 쿠바 혁명을 비판하고 자유주의 작가가 될 것이라는 것이 예상 가능하다. 그의 소설 속 인물들은 부유하고, 다양한 세계 속에 권력이 있는 남자가 위험을 맞이하고 그것을 극복한다. 요사는 작가는 결핍을 느껴야 소설이 나온다고 늘 말해왔는데 사회주의 사회에 만족하지 않았기 때문에 소설 속에서 가상현실을 만들 수밖에 없었던 것이 아닐까?
요사는 1994년 스페인어권의 가장 권위 있는 문학상인 세르반테스상을 받았으며, 사회비판적 문학활동의 공로를 인정받아 2010년 노벨상을 수상했다. 그의 수상은 스페인어권 문학에서 자유주의 전통이 여전히 살아 숨쉬고 있다는 것을 의미하며, 이러한 점을 스웨덴 아카데미가 높이 샀다고 볼 수 있다.
사상보다는 지식인으로서의 양심이 우선
한때 사회주의 운동가였다 전향한 안병직 교수는 사회주의 사상에 문제가 있다고 깨달은 후 정신적으로 많은 방황을 했다. 오죽하면 '어제 옳다고 생각했던 것이 오늘은 옳지 않았고, 오늘 옳다고 생각했던 것이 내일은 옳지 않았다’는 표현했을까. 바르가스 요사도 이와 같은 심리적 방황을 겪었을 것이다. 쉽지 않은 결정이었지만 국가를 바로잡아야 한다는 지식으로서의 사명감은 그가 올바른 결정을 하도록 도왔다.
칼 포퍼는 “젊어서 마르크스에 빠지지 않는 사람은 바보지만, 그 후로도 마르스크주의자로 남아있으면 더욱 바보”라고 했다. 문제점을 발견하고 신념을 바꾸는 것은 '변절’이 아니라 지식인으로서의 양심적 행동이다. 아직도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지 않고 사상적 지조에 집착하는 지식인들의 용기 있는 결단을 기대해 본다.
곽은경 / 자유경제원 시장경제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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