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차 세계대전은 ‘베르사이유 체제’라는 제1차 세계대전 이후의 국제질서를 무너뜨렸다. 사실 무조건 항복이 아닌 상태에서 이뤄진 베르사이유 조약은 연합국들에게 일방적으로 유리한 조약으로서 독일과 오스트리아 등 추축국들에게 전적으로 책임과 배상을 요구한 불평등한 조약이었다(실제로 연합국들은 독일을 비롯한 추축국 지역을 점령하지 않았다). 그래서 1920~1930년대 초반에 걸친 베르사이유 체제 속에서 추축국들은 무조건적인 희생을 강요당했다. 하지만 1929년 세계경제대공황이 발생하면서 독일(나치독일)의 동맹국들이 더 이상 베르사이유 조약을 이행하기 어려운 상황에 놓이면서, 독일(바이마르 공화국)과 오스트리아 그리고 제1차 세계대전 당시 연합국이었지만 베르사이유 체제 속에서 이익을 얻지 못했던 이탈리아 등의 국민들은 반 베르사이유 체제 정서가 팽배해 갔다.
베르사이유 체제를 무너뜨리는 방법은 연합국들과 독일의 동맹국들이 합의하에 조약의 내용을 개정하거나 아니면 전쟁을 통해 조약을 깨는 방법 외에는 존재하지 않았다. 그리고 연합국들은(특히 프랑스) 조약을 개정할 의사가 전혀 없었기 때문에, 이 체제는 전쟁을 통해 무효화가 될 수밖에 없었다.
영국과 프랑스 등 전통적인 제국주의 국가들은 국제사회에서 자국의 기득권을 지키려 했고, 독일과 이탈리아 일본 등은 이 국가들의 기득권에 도전했던 것이 바로 제2차 세계대전이었다. 여기서 제1차 세계대전에서 연합국이었지만, 종전이후 별다른 이익을 얻지 못했던 미국도 역시 베르사이유 체제에 불만이 있었고, 1939년 9월 1일 유럽에서 전쟁이 발발하자 2년여를 관망하면서 중립적 태도를 취했다. 미국으로선 어느 쪽에 가담해야 최대의 이익을 얻을 것인지를 계산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다가 1941년 8월 대서양 헌장을 발표하며 연합국의 편에서 전쟁에 참여하게 되었다. 미국은 대서양 헌장을 통해 참전의 조건을 제시했는데, 그것은 바로 “피지배 민족과 지역을 모두 해방시킨다”라는 것이었다. 다시 말해 제1차 대전 이후 영국과 프랑스 등이 자국의 식민지들을 그대로 유지했던 전례를 따르지 않고, 국제질서에서 영국과 프랑스 등 제국주의 국가들의 기득권을 모두 빼앗고, 그 기득권을 미국이 차지하려는 것이 미국의 전략이었다. 그리고 이를 위한 과도기적 수단으로 ‘신탁통치’라는 방법을 제시했다.
하지만 이러한 미국의 전략은 공산주의 세력의 등장으로 인하여 궤도를 수정할 수밖에 없었다. 사실 전쟁 중에 미국의 F. 루즈벨트 대통령은 공산주의 세력을 경쟁이 아닌 협력관계가 될 수 있다고 여겼었다. 하지만 제2차 세계대전 종전 당시까지 유일한 공산주의 국가였던 소련은 전쟁 중에 획득한 동유럽 지역에 대한 “사회주의적 기득권”을 요구하면서, 미국의 계산은 어긋나기 시작했고, 루즈벨트의 사망이후 대통령 직을 승계했던 H. 트루먼은 1947년 공산주의의 팽창에 대한 봉쇄정책(Containment Policy)을 발표하며 국제질서에서 세력균형을 통해 공산주의 세력의 팽창을 막고 자유민주주의 지역을 지키는 것으로 미국의 전략을 수정했다.
미국과 소련을 중심으로 하는 국제질서의 재편과정에서 가장 결정적인 역할을 했던 사건이 6.25 전쟁이었다. 이는 양 진영이 팽팽한 긴장감 속에서 세력 확장을 도모했던 시기에, 특히 1949년 중국의 공산화이후 공산주의의 팽창이 극에 달했던 시점에 발생했던 최초의 전면전이었기 때문이다. 이 전쟁을 유럽에서 다시 수행하기에는 위험부담이 너무 컸다. 그래서 해외의 학계에서는 6.25 전쟁을 “탐색전”, “시험전쟁”, “대리전” 그리고 “제한된 범위에서 제한된 시간 내에 진행된 세계대전”이라고 정의한다. 공산주의 진영과 미국(UN)은 일본이나 중국으로의 확전을 전혀 원치 않았고, 전쟁을 철저히 한반도 내로 국한하였다. 다시 말해 6.25 전쟁은 우리 민족 간의 내전, 즉 민족 통일전쟁이 전혀 아니었다.
냉전의 정점이었던 6.25 전쟁 이후 50년대는 유럽과 아시아에서 대규모 전면전은 발생하지 않았고, 대신 이념적 선전선동과 국지적인 도발을 통해서 각기 차지한 지역에서 굳히기를 시도했다. 1955년 제네바 정상회담과 외무장관 회담에서 베를린 문제와 전 독일 문제를 분리하기 시작했고, 1956년 헝가리-수에즈 위기 그리고 1958년 베를린 봉쇄를 통해서 동-서 양 진영의 세력권은 점차 분명해져 갔다. 동시에 양 진영은 다자간 동맹(NATO, SEATO, 바그다드 조약기구, ANZUS, 바르샤바조약기구)을 통해서 각각의 영향권 지역에서 체제 결속력을 다지기 시작했다.
또한 1959년 제네바 외무장관 회담에서는 독일문제와 관련해서 “1민족 2국가 체제”가 점점 공식화 되어갔다. 1961년 미국 대통령에 당선된 J. F. 케네디는 베를린 장벽이 건설된 이후(1961년 8월) 세계 각 지역을 대상으로 동일했던 미국의 국제전략을 포기하고, 지역별 상황에 맞춘 대응(flexible reaction)으로 전환하면서 당시까지 양분된 동-서 진영의 현상(Status quo)을 인정하기 시작했다.
이로써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자유민주주의와 공산주의 간의 세력균형과 국제질서의 재편과정이 마무리되어갔다. 1960년대에 진입하면서 양 진영은 더 이상의 팽창이 무의미하다는 것을 인식하고 당시까지 진행된 동-서 진영의 분할이라는 현상을 유지하는 기조로 전략을 바꾸면서 양 진연간의 ‘긴장완화’가 점차 무르익어갔다. 1969년 7월, 미국의 닉슨 대통령은 ‘닉슨 독트린’을 발표하며, 국제질서에서의 “현상유지”를 목표로 공산주의와의 화해를 본격화했고, 소련과의 이해관계가 일치하게 되자 1971년 4월부터 이른바 “핑퐁외교”를 통해 중국과의 접촉에 나서기 시작했다.
그런데 당시에 동-서 진영 간의 긴장완화와 공존에서 가장 걸림돌이 되는 문제가 한반도 분단과 독일분단이었다. 한반도와 독일의 분단이라는 “현상”을 상호 인정하지 않는다면, 동-서 진영의 데탕트는 무위로 끝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동-서독과 남-북한이 상호 인정은 필수적이었다. 동-서독이 상호 인정하고 교류하게 하기 위해 양 진영은 동-서독을 포함한 동-서 유럽국가들 모두가 참여하는 기구를 창설하면서 자연스럽게 동-서독이 상호 인정하게 하려는 작업을 시작했다. 그리고 한반도에서는 남-북한 양자 간의 화해와 공존 그리고 상호 인정을 위해 남-북한이 6.25전쟁 이후 최초로 직접 접촉했다.
동-서 데탕트의 원인은 이념적, 군사적 세력균형의 완성과 경제논리였다. 더 이상 대립과 갈등을 할 이유가 없어졌기 때문에 “평화공존”이라는 새로운 패러다임이 등장했던 것이다. 1960~1970년대에 유럽에서는 이것이 실현되었고, 같은 시기 한반도에서는 실현되지 못했다.
동-서 데탕트의 결과는 남-북한 간의 “7.4 공동성명”(1972년)과 유럽에서의 “헬싱키 조약”(1975년)이었다. 1972년 7월에 이뤄진 남-북한의 접촉은 “7.4 남북공동성명”이라는 남-북한 최초의 합의를 도출했다. 그러나 그 내용을 보면 향후 남-북 간의 지속적인 접촉의 길을 열어놓기는 했지만, “통일을 외세의 간섭 없이 자주적으로 해결 한다”라는 등 국제법적으로 전혀 가능하지 않은 형식적인 합의들만 이뤄냈다. 당시의 남북회담은 동-서 데탕트 분위기를 압박하는 미국과 소련, 중국의 의지에 의해서 이루어졌던 것이지, 박정희와 김일성의 의지에 의한 것이 아닌 마지못한 형식적인 진정성 없는 접촉이었다. 그래서 “7.4 공동성명”이후 남-북한의 접촉이 지속되지도 않았고, 이후 7개의 세부적 합의 내용이 전혀 지켜지지도 않았다는 점을 보아도, 박정희와 김일성은 이 공동성명에 큰 의미를 두지 않았고, 실행의지도 없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반면에 유럽에서는 1975년 헬싱키 조약을 통해서 “유럽안보협력회의”(Conference on Security and Cooperation in Europe = CSCE)를 발족시켰다. 헬싱키 조약에는 소련을 포함한 동-서 유럽의 33개국과 미국과 캐나다가 서명했고, 이들이 곧 CSCE의 회원국이 되면서 유럽에서의 냉전은 형태적으로 종결되었다. 헬싱키 조약은 실질적인 동-서 진영 간의 평화조약의 성격을 갖고 있었다. 유럽에서 평화조성은 양 진영 간의 이해관계가 일치했기 때문에 가능했다. 즉 세계 각 지역에서 미국과 소련의 이념적 팽창과 봉쇄 작업이 거의 마무리 되면서 이념적인 세력균형이 완성되었고 더 이상의 긴장과 갈등이 무의미해졌기 때문이다. 이 상황에서 서독을 비롯한 서유럽 국가들은 상대적으로 저렴한 노동력과 판매시장을 제공할 수 있는 동유럽과의 교류를 강력하게 추진했고, 동유럽 국가들 역시 외자유치가 국가 경제에 필요했다. 이렇듯 헬싱키 조약과 CSCE 결성은 유럽에서 양 진영 모두에게 이익이 발생시켰기 때문에, 공동의 안보기구를 통한 지속적인 평화유지가 가능했다.
하지만 남-북한 간에는 유럽과 같은 상호 이해관계의 일치가 발생하지 못했다. 동아시아에서 유럽과 같은 평화조약과 경제교류가 성사되려면 동-서독과 마찬가지로 남-북한 간의 이해관계가 우선 일치해야 했다. 그런데 산업화 성장기에 있던 대한민국에서는 노동비가 저렴했기 때문에, 대한민국의 자본과 기업들은 국내에서 생산하는 것이 유리했고, 북한도 70년대 초반까지는 경제상황이 오히려 대한민국보다 우위에 있었기 때문에, 경제논리를 앞세운 남-북한 간의 교류나 공동의 이익을 추구하기 어려웠다. 1970년대 초반까지는 대한민국이 북한에 대해서 방어적 입장이었기 때문에 대북 접촉에 소극적이었다. 또한 평화공존의 분위기 속에서도 남-북한은 서로 상대방을 국가로 인정하지 않았다는 점도 남-북간의 화해와 교류에 장애요인이었다. 따라서 1972년의 남-북한 간의 직접 접촉은 일회성 이벤트에 그쳤을 뿐, 관계가 지속될 수 없었다. 결국 1970년대에 본격화되었던 동-서 데탕트와 평화공존이 유럽과는 달리 한반도에서는 실현될 수 없었다.
그러나 1980년대에 접어들면서 남-북한의 경제력은 역전이 되고 그 차이가 점점 더 심해지면서, 대한민국의 수세적 입장은 공세적으로 바뀌었고, 북한이 수세적, 방어적으로 변해갔다. 체제경쟁은 곧 국가 경제의 우열로 결정되는데, 실제로 2017년 대한민국의 GNI(국민총소득)는 약 1,730조 5천억 원으로 북한의 47배이고, 1인당 GNI는 3,364만 원으로 북한의 23배이다. 그래서 대한민국이 - 1970년대에 서독과 서유럽이 동독과 동유럽에 접근했던 것처럼 - 1990년대 이후로 북한과의 대화와 교류에 공세적으로 나서고 있지만, 체제경쟁에서 패배한 북한이 북핵을 무기로 체제보장을 요구하고 있어서 가시적인 성과를 내지 못하고 있다.
권오중 / 외교국방연구소 연구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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