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 보수정당(자유당~자유한국당)의 계보

권오중 / 2018-10-10 / 조회: 19,037

친일 지주 정당 한민당에서 출발한 더불어민주당에 대항하는 대한민국의 제1야당은 자유한국당이다. 현재는 더불어민주당이 진보세력이고, 자유한국당이 보수세력이라는 인식이 있지만, 사실은 이 양대 정당 모두 보수에 뿌리를 두고 있다. 한민당(민주당)계열이 진보세력으로 인식된 이유는, 이들이 이승만, 박정희, 전두환, 노태우 정권에 대항하여 민주화를 주장했기 때문이다.


대한민국에서 진보와 보수의 차이는 크게 이들의 대북정책과 경제정책에 기인한다. 원래 한민당은 친일 지주 세력이 주축(김성수, 김병로, 송진우, 이철승, 임영신, 유진산, 김준연, 장덕수, 이활, 윤보선, 윤치영, 김도연, 조병옥 장택상, 이인, 허정, 김약수, 이기붕 등)이었기 때문에, 반공과 친 자본가적 경제관 (일본이 남긴 산업자본의 국유, 국영화 이후 민영화) 그리고 자유민주주의 구현(영국식 내각제)을 당의 목표로 삼았다. 그러나 이승만, 박정희, 전두환, 노태우 대통령에 이르는 긴 야당생활을 했던 한민당(민주당) 계열(김영삼, 김대중 등)은 자신들과 이념이 다르지 않은 이들 정권과의 차별화를 두기 위하여 대북정책에서도 다른 입장을 취하기 시작했고, 내각제가 아닌 대통령제 하에서의 정권교체 그리고 자본가 세력에 대해 비우호적인 모습으로 방향을 바꾸면서 진보적 이미지를 만들어갔다.


현재 보수세력의 중심으로 인식되고 있는 자유한국당은 더불어민주당이 한민당에서 출발한 것과 같은 주체세력의 일관된 흐름이 없다. 자유당, 민주공화당, 민정당 그리고 신한국당에 이르기까지 당의 주류가 계속 바뀌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자유한국당은 한민당이 아닌 자유당에서 그 흔적을 찾아야 한다. 그 이유는 반공과 자유민주주의 그리고 시장경제라는 이념적 동질성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자유당은 이승만이 소속되어있던 독립촉성회(약칭 독촉)가 모태가 된 정당이다. 제헌국회에서 한민당과의 제휴로 당선된 이승만 대통령은 국회가 선출하는 대통령제에 불안감을 갖고, 1951년 11월 재집권을 위한 대통령직선제와 상하 양원제를 골자로 한 개헌안을 국회에 제출했다. 그러자 '독촉’내에서도 찬반양론의 대립 속에 원내파와 원외파로 분열되어, 하나의 이름으로 2개 정당이 만들어지는 기형적인 형태로 자유당은 창당되었다. 이승만을 당수로, 이범석을 부당수로 하여 직선제 개헌안 지지를 표명한 원외 자유당 세력은 이범석의 조선민족청년단(약칭 족청)과 5개 사회단체를 중심으로 결성되어 이후 자유당의 주류가 되었다. 즉 자유당은 이승만의 재집권을 위해 탄생한 정당이었다. 


1952년 9월 18일에 원내외 자유당이 합쳐짐으로써 이승만 중심의 반 족청계의 힘이 강해지는 가운데 9월 26일에 열린 전당대의원대회에서 이승만의 지시에 따라 당수·부당수제가 총재제로 바뀌었으며, 이튿날에 열린 중앙집행위원회에서 당 지도부가 중앙집행위원회체제에서 각 단체대표로 구성되는 중앙위원회체제로 개편할 것이 결정되었다. 이와 같은 공세에 족청계가 반격을 가하기도 했지만 결국 이승만의 지시로 1953년 12월에 이범석을 비롯한 족청계 인사들이 자유당에서 제명되었으며 새로 총무부장이자 수석중앙위원으로 선출된 이기붕이 자유당의 실권을 장악하게 되었다. 이후 1961년 4.19로 인하여 이승만 대통령이 하야할 때까지 자유당은 집권여당으로서 대한민국 정계의 주류로 존재했다.




4.19 이후 9개월여의 짧은 기간 동안 양원 내각제였던 민주당 정권(제2공화국)을 거친 이후 1961년 5월 16일에 군사정변이 발생했는데, 그 사이 야당으로 전락했던 자유당은 5.16 군사정변 이후인 5월 23일에 모든 정당, 사회단체의 해산을 명령한 국가재건최고회의 포고 제6호로 해산되었다. 5.16 세력이 집권하기 위해서 정당이 필요했는데, 이를 조직한 인물이 김종필이었다. 5.16 군부세력은 “모든 부패와 구악을 일소하고 청렴한 기풍을 진작시킨다.”(혁명공약 3항)이라고 했지만, 민주공화당의 창당(1963년 1월)에는 5.16을 주도했던 군부세력 외에 구 자유당 세력과 대한국민당 세력, 기타 정구영 등 학계와 시민사회단체 등이 참여했다. 반면 “양심적인 정치인에게 정권을 이양하고 군은 본연의 임무로 복귀한다”는 혁명공약 제6항을 주장했던 사람들은 군의 정치 참여에 반대했었고, 당연히 민주공화당에 참여하지 않았다. 그리고 김종필과 박정희에 의해 이들의 행적은 완전히 삭제되고 말았다.


민주공화당은 비록 이합집산의 정당이었지만, 대통령 중심제 개헌(1962년 11월)을 통해 결국 박정희를 5대 대통령에 당선시키며 합법적인 집권에 성공하였다(1963년 10월 15일). 이후 재선에 성공한 박정희 대통령은 1969년 10월 17일 야당인 신민당의 강력한 반발에도 불구하고 3선 개헌안을 국민투표를 통해 관철시키면서(총유권자의 77.1% 참여에 65.1% 찬성), 대통령 3선의 발판을 마련했다. 하지만 1971년 4월 27일, 3선에 성공했던 박정희 대통령은 신민당과 신민당의 대통령 후보였던 김대중의 도전에 불안감을 느끼고, 종신집권이 가능한 체제로의 개헌을 또다시 강행했다. 이것이 바로 “10월 유신(維新)”이라는 유신헌법으로의 개헌이다. 


10월 유신에 따른 유신헌법은 1) 통일주체국민회의가 대통령 선거 및 최고 의결기관으로 설치되었고, 2) 직선제이던 대통령선거가 통일주체국민회의 대의원들에 의한 간선제로 바뀌었으며, 3) 대통령 임기가 4년에서 6년으로 연장되었고, 4) 국회의원 정수(定數)의 1/3을 대통령의 추천으로 통일주체국민회의에서 일괄 선출하고(維新政友會), 5) 국회의원의 임기를 6년과 3년의 이원제(二元制)로 하여 통일주체국민회의에서 선출된 의원은 3년으로 하였으며, 6) 국회의 연간 개회일수를 150일 이내로 제한하고, 7) 국회의 국정감사권을 없앴으며, 8) 지방의회를 폐지하고, 9) 대통령이 제안한 헌법개정안은 국민투표로 확정되고, 국회의원의 발의로 된 헌법개정안은 국회의 의결을 거쳐 통일주체국민회의에서 다시 의결함으로써 확정되도록 이원화하였다. 그 밖에도 1972년 10월 17일의 비상조치와 그에 따른 대통령의 특별선언을 제소하거나 이의를 제기할 수 없도록 헌법에 규정했다.


1972년 12월 23일 통일주체국민회의를 통한 간접선거에 의한 제8대 대통령 선거에서 박정희 후보가 단독 출마하여 당선되었다(대의원 총수 2,359명중 2명 기권, 2,357명 찬성). 이로써 제 4공화국이 출범하였다. 제8대 대통령 임기만료(6년)에 따라 새로이 선출된 통일주체국민회의는 1978년 7월 6일 제9대 대통령선거에서 역시 단일후보였던 박정희를 제9대 대통령으로 선출하였다(대의원 총수 2,581명 중 무효 1표, 2577명 찬성). 제4공화국에서 민주공화당은 단지 박정희 대통령의 독재정치 하에서 거수기로 전락하였다. '부마항쟁’으로 표출되었던 국민적 저항과 1979년 10월 26일 중앙정보부장 김재규의 박정희 시해로 말미암아 제4공화국은 종말을 고하게 되었고, 민주공화당 역시 전두환이 중심인 '신군부”에 의해 적폐 집단으로 몰려 1980년 10월 27일 해산되고 말았다.


“10.26”을 기점으로 민주공화당은 강제로 해산되고 그 자리를 신군부가 주도하는 민주정의당(약칭 민정당)이 차지하였다. 민정당은 1979년 12.12 군사반란을 통해 국정의 실권을 장악한 전두환이 집권하기 위해 만든 정당이었다(1981년 1월 15일). 당의 주류는 전두환을 중심으로 하는 신군부였고, 검찰출신(이한동, 박희태 등), 민주공화당과 유신정우회 출신들(김윤환, 박준규 등), 그리고 야당이었던 신민당 출신들(이재형, 진의종, 채문식, 김정례 등)이 참여했다. 전두환은 1980년 8월 27일 통일주체국민회의를 의해 실시된 간선제 선거에서 무소속으로 출마하여 제11대 대통령에 당선되었다(대의원 총수 2,540명 중 2,524명 찬성). 그리고 10월 27일에는 임기 7년의 단임제 대통령제 등을 골자로 하는 제5공화국 헌법이 제정됐으며, 1981년 2월 25일 대통령 선거인단에 의한 간선제로 선출되어(총 대의원 수 5,277명 중 4,755명 찬성) 제5공화국의 12대 대통령으로서 3월 3일 전두환이 취임함으로써 제5공화국이 시작되었다.


전두환 대통령 시절의 민정당은 1981년의 제11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과반수 의석을 획득하였고, 1985년 제12대 국회의원 선거에서도 신생 야당인 신한민주당의 약진에도 불구하고 지역구 제1당에 전국구 2/3(61석)을 배분하는 선거법 덕에 과반수 의석을 확보했다. 하지만 민정당은 전두환의 독재정치와 인권유린으로 국민들의 반감을 샀고, 1987년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 등에서 시작한 6월 항쟁을 통해 당시 노태우 대통령 후보가 대통령 직선제를 수용하는 “6.29 선언”을 하면서 최대의 위기를 맞게 되었다. 민정당은 그해 12월 직선제 대통령 선거에서 노태우 후보를 당선시켰지만, 민정당은 결국 1988년 4월 제13대 국회의원 총선거에서 야당에 패하여 과반수에 못 미치는 의석에 그치면서 정기승 대법원장 임명안이 부결되는 등 국정운영에 어려움을 겪었고, 독자적인 국정운영이 불가능하게 되자 1990년 2월 9일에 통일민주당(김영삼), 신민주공화당(김종필)과 민주자유당으로 합당하였다.


민주자유당은 신군부와 민주당의 상도동계 그리고 구 공화당계가 이합집산한 정당으로서 당의 주류가 민정계에서 1992년 12월 18일) 대선을 통해 민주(상도동)계 이동하면서, 정권의 재창출에는 성공했지만(14대 대통령 김영삼), 당내 계파 분열과 투쟁은 점점 노골화되었다. 결국 1995년 6월 27일 제1회 지방선거를 앞두고 김종필을 중심으로 하는 구 공화계가 탈당하고, 민자당은 지방선거에서 참패하게 되었다.


결국 1995년 12월 6일, 김영삼 대통령은 1996년 4월에 치러지는 총선을 앞두고 신군부의 흔적이 강한 민주자유당이라는 당명을 버리고 신한국당을 창당하였다. 신한국당은 민주자유당에서 민정계와 구 공화계 등의 세력을 몰아내었고, 이회창·박찬종·이재오·김문수·이우재·홍준표·맹형규·정의화 등을 영입하였다. 신한국당은 이들 외에도 신인 인사들을 대거 내세워 42%의 현역 교체율을 기록하면서 대대적인 물갈이를 단행했다. 이후 김영삼의 당 장악력은 강화됐다.


제15대 대통령선거를 약 1개월 앞둔 1997년 11월 21일 합당 전당대회에서 신한국당은 이회창 신한국당 총재를 대통령 후보 겸 명예총재로, 조순 민주당 총재를 초대 총재로 선출했고, 이를 통해 민주당과 합당을 하게 되면서 당명을 한나라당으로 변경했다. 하지만 한나라당은 이회창 후보가 15대(1997년 12월), 16대(2002년 12월) 대통령 선거에서 잇달아 패배하면서, 10년간의 야당을 경험하게 되었다. 그런데 총선과 지방선거에서 공천 물갈이를 통하여 한나라당은 2000년의 제16대 총선에서 승리하여 일거에 여소야대로 만들어 놓았으며, 이어 2002년 지방자치제 선거에서도 승리를 거두며, 정국의 주도권을 잡았다.


이회창이 물러난 한나라당은 노무현 대통령에 대한 탄핵소추안을 가결시키고, 대통령의 직무를 정지시켰는데, 이는 2004년 4월 15일 총선에서 가장 큰 쟁점이 되었고, 한나라당에게는 부메랑이 되었다. 탄핵사태로 민심을 잃은 한나라당은 총선에서 여당인 열린우리당에 패배했고, 탄핵소추안도 2004년 5월 14일 헌법재판소에서 기각되면서, 최대의 위기에 봉착했다. 이에 한나라당은 2004년 7월, 박근혜를 당 대표로 선출하고, 천막당사 생활을 하며 당을 쇄신한 결과, 2006년 5월 지방선거에서 광역단체장 12명, 기초단체장 155명, 광역의원 557명, 기초의원 1,162명이 당선되는 성공을 거두었고, 2007년 12월 제17대 대통령선거에서 이명박 후보를 당선시킴으로써 10년 만에 집권 여당의 자리를 회복하였다. 한나라당은 이어서 2008년 4월 제18대 국회의원선거에서는 153석으로 과반수를 차지했다. 그러나 이후 이명박 정권의 지지율 하락으로 인하여 2012년 제19대 총선과 제18대 대통령선거에 대한 위기의식이 고조되자 당의 전면적 쇄신을 위해 2011년 12월 19일 박근혜를 비상대책위원회 위원장으로 선출하고, 2012년 2월 13일 새누리당으로 당명을 개정했다.


새누리당은 2012년 12월 대선에서 박근혜 후보를 당선시킴으로써 정권 재창출에 성공하였다. 하지만 국정농단 사태로 인하여 2017년 3월 10일 박근혜 대통령에 대한 탄핵이 헌법 재판소로부터 인용되면서, 새누리당은 분열하기 시작했다. 당 내부적으로 이른바 “보수논쟁”이 점화되면서, 2016년 12월 27일 비박계 29명이 탈당해 또 다른 보수 정당인 바른정당을 창당했다. 당에 남아있는 국회의원들도 친박, 비박, 친이 등으로 사분오열되었고, 새누리당은 2017년 2월 13일 자유한국당으로 당명을 변경했다. 2017년 3월 10일 박근혜 대통령의 최종 파면으로 명목상 여당 지위를 잃었다. 자유한국당은 3월 31일 홍준표를 대통령 후보로 선출했지만, 2017년 5월에 치러진 19대 대통령 선거에서 당의 대선 후보였던 홍준표는 더불어 민주당의 문재인 후보에게 참패하고 말았다.


이승만의 자유당에서부터 현재 자유한국당까지 이르는 동안 보수 정당의 주류세력은 계속해서 변화되었다. 현재 보수정당으로 인식되는 자유한국당은 자유당(이승만)계에서부터 군부(박정희)와 신군부(전두환), 민주계(김영삼), 법조계, 노동계, 경제계 그리고 민주화세력 인사들이 가세하며 서로 상이한 세력의 이합집산이 되어버렸다. 그리고 당내에서 각 세력의 리더가 중심이 되는 인물 중심의 계파 투쟁이 심화되었고, 결국 이것이 당을 위기로 몰아갔다. 현재 자유한국당에서 이념적으로나 도덕적으로 그리고 정책적으로도 보수정치는 실종되었다.


자유당에서 자유한국당으로 이어지는 보수정당들은 대한민국의 경제발전 그리고 국가안보에 지대한 공헌을 해왔다는 것을 부인할 수 없다. 하지만 이들은 지역주의를 이용하여 장기집권했으며, 지역주의 정치를 보수정치로 포장해왔다. 현재 대한민국의 보수정당에 필요한 것은 정책적으로나 도덕적으로 국민에게 인정받는 보수정치의 가치를 구현하는 것이다. 이들에게 정권을 주기도 하고 다시 뺏기도 했던 당사자는 바로 우리 국민이다. 자유한국당의 미래는 스스로의 노력에 달려있고, 보수정당으로서 자유한국당의 쇄신과 변화를 우리 국민이 이끌어가고 있다.


권오중 / 외교국방연구소 연구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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