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일 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은 1905년 이른바 “을사조약”(을사늑약)을 통해서 조선의 외교권을 강탈했고 조선을 일본의 보호국으로 전락시켰다. 이후 1910년 “한일합병조약”을 통해서 조선을 강제로 합병하고 식민통치를 시작했다. 그리고 “3.1 운동”은 그로부터 9년 후인 1919년 3월 1일에 발생했다.
3.1 운동의 발생 배경은 단순히 우리 민족의 독립정신의 결과물만은 아니었다. 제1차 세계대전(1914.7~1918.11)이 발발하고, 1917년 미국이 전쟁에 참여하게 되면서 당시 미국 대통령 윌슨은 우선 전쟁에서 승리하기 위한 목적으로 독일제국과 오스트리아의 지배를 받고 있는 지역의 슬라브 민족들을 자극하기 위해 “민족자결원칙”을 전쟁의 명분으로 내세웠다.
민족자결원칙은 1918년 1월 8일 윌슨이 미국의회에 보낸 연두교서에 평화원칙 14개항에서 구체적으로 제시되었고, 이것이 최초의 민족자결주의였다. 그 핵심내용은 “피지배민족에 자유롭고 공평하고 동등하게 자신들의 정치적 미래를 결정할 수 있는 자결권을 인정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후 “파리평화회의”(1919년 1월 18일 ~ 1920년 1월 21일)에서 윌슨 미국 대통령은 국제문제를 풀어나갈 원칙으로 “14개 조항”(The Fourteen Points)을 다시 제시했는데, 여기에서는 원칙적으로 식민지배를 받고 있는 모든 피지배 민족을 대상으로 확대했지만, 회담에 참가한 영국과 프랑스 등 연합국들의 반대로 민족자결원칙은 윌슨이 제안한 것보다 수정되어 선포되었다.
이 회의에서 미국은 민족자결원칙을 통해 독일제국과 오스트리아가 지배했던 동유럽 민족들뿐만 아니라 연합국들의 지배지역까지 해방시켜서 당시 모든 제국주의 국가들의 세력을 약화시키려 했지만, 자신들의 식민지를 상실하고 싶지 않았던 연합국들은 단지 독일과 오스트리아 그리고 터키 등 전쟁 상대방의 피지배 민족들만을 해방시켜서 이들의 세력을 약화시키고자 했다. 결국 미국은 승전국과 협의해, 민족자결주의 원칙을 “패전국의 피지배 민족”에 국한하여 결정하게 되었다. 그 결과 제1차 세계대전이 종전된 직후 패전국인 독일제국과 오스트리아 그리고 터키의 식민지들이 대다수 독립하게 되면서, 이들 패전국들은 영토를 상당수 잃게 되었다.
결국 윌슨이 주창했던 “민족자결주의”는 모든 피지배 민족에게 적용되지 못했고, 단지 패전국들에게 지배를 당했던 민족들에게만 적용되었던 것이다. 이것은 제1차 세계대전의 승전국들의 정치, 경제적 이해관계에 따른 것이었다. 연합국들(영국, 프랑스, 미국, 일본 등)의 식민지배는 지속되었기 때문에 민족자결주의가 보편적으로 실현된 것이라고 할 수 없다. 국제질서에서 연합국들의 기득권만을 더욱 강화시켰을 뿐이다. 하지만 민족자결주의는 피지배 민족의 독립에 대한 명분과 정당성에 합리적인 근거를 처음으로 남겨두었기 때문에, 향후 1920년대부터 제2차 세계대전 종전까지 피지배 민족 독립운동의 단초를 제공하였다.
1918년 11월에 제1차 세계대전이 종전되면서, 동유럽과 발칸지역 등에서 피지배 민족의 독립이 실현되자, 이에 영향을 받은 한국에서도 곧바로 민족의 독립을 요구하는 구체적인 행동이 발생했다. 그것이 바로 3.1 운동이었다. 하지만 1918년 1월 21일 “파리평화회의”의 결정에 따라, 연합국의 일원이었던 일본의 식민지배를 받았던 한국은 독립시킬 대상국이 아니었다. 3.1 운동 당시에 무자비한 일본의 탄압이 있었음에도 승전국 주도의 국제사회가 이를 외면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다. 당시 국제사회에서 한국의 독립을 그 누구도 원하지 않았다. 한국의 독립은 승전국들이 지배하는 지역의 식민질서를 위협할 수 있기 때문이다. 제1차 대전 종전 이후 국제질서는 “베르사이유 조약”(1919년 6월)을 통해 승전국 주도의 “베르사이유 체제”로 확정되었고, 여기서 한국의 일본지배는 불변의 상황으로 고착되었다.
결국 3.1운동은 연합국들의 이해관계를 이해하지 못해서 발생했던 해프닝이 되었다고 보는 시각도 있다. 하지만 민족자결원칙에 자극을 받아 발생했던 3.1운동은 일본의 식민지배의 부당함과 우리 민족의 독립의지를 국제사회에 널리 알렸으며, 이후 우리 민족의 독립운동의 출발점이 되었다.
사실 3.1운동 이전까지는 조직적인 독립운동이 미약했었다. 그러나 3.1운동 이후 일본이 독일운동가들에 대한 대대적인 탄압과 체포가 시작되자, 이들은 한국을 떠나 중국과 연해주 등지로 활동지역을 옮기게 되었고, 곧이어 조직적인 항일운동을 전개하기 시작했다. 여기서 탄생한 것이 상해 임시정부(1919년 4월 21일)였다. 하지만 항일운동의 노선에서 무력투쟁(좌파)이냐 외교활동(우파)이냐의 노선차이로 인하여 좌파는 1921년 임시정부에서 이탈하여 독자적인 활동을 이어나갔다. 이들은 중국 공산당보다도 1년 앞선 1921년 아시아 최초의 “조선 공산당”을 만들었지만, 이내 분열하여 3 그룹으로 활동하였다. 이들은 1) 1917년 10월, 러시아 공산주의 혁명이후 시베리아로 이주해서 러시아 시민권을 갖고 있었던 그룹, 2) 중국 윈난성을 중심으로 활동했던 그룹, 3) 만주와 연해주에서 게릴라전으로 항일 운동을 전개했던 그룹 등이다. 그리고 임시정부는 독립운동 세력 중에서 우파들이 중심이 되어 대통령 이승만(1919~1925), 박은식(1925~26), 국무령 김구(1927~45)의 시대를 거치면서 중국 국민당 정부와 함께 본거지를 상해, 중경, 남경 등으로 이동하며 활동했었다.
물론 임시정부 내에서 좌-우파의 분열, 또한 좌파와 우파 내부적으로도 계속된 분열로 인하여 항일운동이라는 대의 앞에서 이념과 노선의 차이 때문에 단일 대오를 형성하지 못했었다는 아쉬움이 있다. 1945년 8월 15일 제2차 대전 종전 당시에 미국과 연합국들로부터 임시정부나 좌파 독립운동 세력이 전혀 인정받지 못했다. 결국 우리 민족의 독립이 여전히 연합국들에 의해 좌우되는 상황에 빠지게 되었던 것이다. 그래서 남-북 분단과 각각의 단독정부 수립에서 임시정부나 좌파 항일 무력투쟁 세력이 배제되었고, 포츠담 체제의 주체였던 미국이나 소련과 긴밀한 관계가 있는 이승만과 김일성이 주도권을 잡을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윌슨의 민족자결주의가 단초를 제공했던 3.1운동은 투쟁노선에서 좌-우파의 이견은 있었지만, 우리 민족의 항일 독립운동이 다양하게 조직화되고 본격화 될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 또한 당시 사람들에게 자유와 평등에 기초한 독립에 대한 당위성을 각성시켜주었다. 그래서 3.1운동은 한국식 자유주의 운동이었고, 우리 역사에서 새 시대로 나아가는 전환점이 되는 사건이었다.
권오중 / 외교국방연구소 연구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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