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방황의 청년 시절과 창업
방황의 시절
신춘호 회장은 1930년 농부의 아들로 울산광역시 울주군 삼동면에서 10남매 중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롯데그룹의 신격호 회장이 집안의 맏형이다. 신춘호 회장이 12살 때(1941년) 맏형인 신격호 회장이 일본으로 건너갔고, 둘째 형마저 허약한 몸으로 교직에 종사하고 있어, 부모님께서는 내심 신춘호 회장을 집안의 기둥으로 여기고 있었다. 한국전쟁 혼란 속에서 의용경찰로 군 복무를 마친 신춘호회장은 23살(1952년)에야 동아고등학교를, 27살에 동아대학교에 진학했다. 신춘호 회장은 고등학교 진학하던 시절부터 학업과 함께 국제시장과 자갈치 시장에서 장사를 배우기 시작했다. 신춘호 회장은 쌀의 가격이 시기마다 다름을 발견하고 가을 추수기에 쌀을 구입한 후 이듬해 봄에 파는 장사를 처음 시도했으나 시간이 지나가면서 쌀의 품질이 변질되어 큰 손해를 보게 된다. 그러나 이를 계기로 품질관리의 중요성을 뼈저리게 느끼게 된다.
안정적인 사업의 기회
신춘호 회장은 대학을 졸업하면서 본격적인 사업을 시작할 수 있는 기회를 갖게 된다. 맏형 신격호 회장이 일본에서 시장기반을 확보한 후 한국에서의 사업기회를 모색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당시 한일 국교정상화가 이루어지기 전이라 일본회사가 공식으로 한국에 투자할 수 있는 여건이 조성되지 않았다. 그래서 한국에 있던 형제들이 참여하여 1959년 설립된 회사가 주식회사 롯데이다.
당시 신철호씨가 사장을 맡았고 신춘호 회장이 전무를 맡아 회사를 운영했는데 롯데가 생산한 껌은 꾸준히 매출이 증가했고, 1961년 5.16 이후 정부에서 국산품 장려운동을 전개하면서 큰 폭의 성장을 이루게 된다. 이 시기 신철호 사장과 신춘호 전무는 경영전략에 대한 의견이 갈리게 되는데, 신철호 사장은 수요가 늘어나고 있는 시기 생산 확대에 역량을 집중해 매출을 늘려야 한다고 판단하고 있었던 반면, 신춘호 전무는 이런 상황에서는 제품의 품질 수준을 높여 고객의 신용을 쌓아가야 한다고 생각했다.
“지금 우리가 호황을 누리는 것은 우리 제품이 최고여서가 아니라 수요가 공급보다 많기 때문에 얻어지는 프리미엄일 뿐이다. 앞으로 경쟁사들을 이기고 확고한 기반을 잡으려면 바로 지금 우리의 브랜드 이미지를 뚜렷하게 심어야 한다. 그 길은 품질향상을 통한 차별화밖에 없다.”
당시는 한국전쟁의 상흔이 남아있고, 5.16 사태 등 정치적인 격동의 시기였던 점, 나아가 기업 경영전략이라는 개념조차 생소했던 시절임을 감안하면 신춘호 회장의 청년시절의 이러한 판단은 기업가로서의 탁월한 안목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기도 하다.
불확실한 미지의 세계로
경영방침에 대한 신철호 사장과의 차이를 확인한 신춘호 회장은 결국 형과의 경영을 포기하고 1963년 독자적인 길을 가기로 결심하게 된다. 형과의 사업관계를 정리한 신춘호 회장은 소공동 삼화빌딩에 사무실을 얻어 무역업을 시작하는 한편, 분말주스 사업을 시작했다.
신춘호 회장은 경쟁제품과의 차별화를 위해 제품의 포장과 디자인은 물론 대리점 배포용 광고전단지에도 심혈을 기울였다. 광고카피에 대한 인식이 전무했고, 고상함과 엄숙한 표현을 선호했던 당시 “롯데주스가 키스보다 난 좋아”라는 파격적인 문구로 신춘호 회장의 주스 사업은 한동안 성공을 거두었다.
이후 신회장은 다양한 사업을 구상하던 중, 정보 수집차 일본을 오가면서 눈여겨 보았던 라면이라는 제품을 운명처럼 떠올리게 된다. 일본에서는 1958년 닛신식품이 라면을 개발해 보급하기 시작했고 뒤이어 여러 식품업체들이 이 시장에 참여하고 있는 상황이었다. 당시 우리나라에서는 라면이라는 제품 자체가 매우 생소하고 맛도 익숙하지 않았다. 그때 국내엔 뉴라면이라는 제품이 제조되었으나 실패한 바 있고 삼양식품이 일본 묘조 제품과 합작으로 라면사업을 추진하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신춘호 회장은 국내에서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의 추진으로 농촌 인구의 도시 유입 속도가 빨라지고 그에 따라 라면과 같은 간편식의 수요가 확대될 것으로 예측하였다. 특히 농부 출신인 신춘호 회장은 국민들에게 하루 세끼 식사를 해결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를 몸소 체험해 왔고, 우리나라 쌀 생산량이 부족한 상황에서 쌀을 대체할 수 있는 식품의 개발은 국민에게도 바람직한 일이라고 판단하였다. 또한 당시 정부가 쌀 부족현상을 대처하기 위한 방안으로 혼식을 장려하고 쌀밥 중심의 식습관 변화를 유도하고 있었으며 라면 생산의 주원료인 밀가루를 안정적으로 확보할 수 있음도 확인했다.
이러한 제반 상황을 고려해 라면사업을 전개하기로 한 신춘호 회장은 당시 한국에서 본격적인 사업을 시작한 신격호 회장에게 이러한 사업구상을 논의한 바 있는데, 당시 신격호 회장은 우리나라의 경우 아직 간편식이 수용될 수 있는 경제적인 여유가 없다는 이유로 반대한 바 있다. 당시 신격호 회장은 한일 국교정상화를 앞두고 기간산업 분야의 진출을 적극적으로 모색하고 있었다. 그러나 한국시장을 둘러싸고 있는 제반 사정이 당장은 아니더라도 장기적으로 무한한 가능성을 갖고 있음을 확신한 신춘호 회장은 독자적으로 라면사업을 결심하게 된다. 결심을 하고 난 후 홀가분한 마음으로 신춘호 회장은 시계공장 사업을 위해 마련해 둔 부지에 라면공장을 세우고 본격적인 사업 준비에 착수했다. 그리고 1965년 지금 농심의 뿌리가 된 롯데공업(주)을 서울 대방동에 설립하게 된다.
교훈: “남들이 안 된다는 곳에 길이 있다.”
2. 국내 후발기업에서 글로벌 기업으로 가는 길
농심이 국내시장의 후발주자에서 글로벌 기업으로 성장하는 과정은 크게 5가지 단계로 구분될 수 있고 각 시기별 주요 내용은 아래 <표 1>에 정리되어 있다.
<표 1> 농심의 시기별 주요 경영전략
1기: 창업과 시련의 시기
신춘호 회장이 롯데공업주식회사로 창업한 당시엔 삼양식품이라는 강력한 리더가 존재하고 7-8개 라면회사의 경쟁이 난립하는 어려운 시기였다. 이러한 환경에서 농심은 유통망을 구축하고 경영상의 수익성을 확보하기 어려운 여건이었고 따라서 초기 전략은 푸쉬전략(유통상에게 제품을 밀어내기 위한 판촉 중심의 경영)을 선택하게 된다. 그러나 신춘호 회장은 후발주자의 이러한 전략은 시장에서의 입지를 더욱 위축시키게 됨을 간파하고 경영전략의 근본적인 방향전환을 구상하게 된다. 즉, 품질향상을 통한 차별화를 시도하기 시작했는데 이러한 전략은 도약을 위한 초석이 되었다.
2기: 도약을 위한 발판 구축기
롯데공업주식회사의 경쟁전략이 라면의 품질개선을 통한 소비자의 수요창출로 재설정되자 회사는 어려운 자금사정에서도 기술개발 및 설비확충에 투자를 아끼지 않았다. 이러한 투자와 함께 고객지향적인 신제품 개발에 박차를 가하게 되고 그 결과 두 개의 히트상품이 등장하게 된다. 70년에 짜장면의 인스턴트화라는 획기적인 발상으로 '짜장면'과, 소고기 국물 맛이 재현된 ’소고기라면'이 출시되었는데, 이 두 제품은 히트상품이 되면서 회사의 수익성을 개선해 주고 전국적인 유통망을 확보하게 해 주는 계기를 제공해 주었다. 그러나 같은 시기 롯데공업주식회사는 여러 가지 실패사례를 기록하기도 하는데, 이러한 사례들은 소비자의 기호에 맞는 신제품을 개발하는 지혜로 사용되었다. 회사 도약을 위한 발판 구축기의 중요한 경쟁전략은 다양한 신제품의 개발이었다.
한편, 롯데공업주식회사는 78년 사명을 농심(農心)으로 변경하고 순박하고 정직한 농부의 마음을 제품개발에 반영하기 시작하였다.
3기: 시장점유율 1위 달성기
농심의 지속적인 품질개선(면발과 스프 맛)과 신제품 개발을 통해 농심만의 고유한 노하우를 축적하면서 85년 라면시장에서 처음으로 시장점유율 1위를 차지하게 된다. 농심이 선두자리를 차지하게 된 배경엔 두가지 중요한 요인이 있다. 첫째는 강력한 경쟁회사의 등장이다. 초기 경쟁회사 난립으로 여러 기업들이 시장에서 사라졌지만 라면시장의 고성장은 강력한 기업이 라면시장에 진입하는 계기가 되었다. 이 때 등장한 기업으로 한국야구르트, 청보식품 및 빙그레가 있는데 이들 기업들이 삼양라면의 점유율을 잠식하면서 라면 시장은 다사 경쟁체제로 전환되게 된 것이다. 둘째는 농심의 히트상품 등장이다. 농심은 그간의 투자를 바탕으로 너구리·육개장사발면(82년), 안성탕면(83년), 짜파게티(84년) 등의 신제품을 내 놓았는데 이들의 성공으로 시장점유율이 급상승하기 시작했고 그 결과 85년엔 드디어 농심이 삼양식품을 앞지르고 시장점유율 1위를 차지하게 되었다.
4기: 확고한 리더십 구축기
농심은 시장점유율 1위를 차지한 것에 만족하지 않고 다양한 신제품 개발(고급화 전략을 추구하기 시작함)에 더욱 박차를 가하면서 1990년대를 들어서면서 60%가 넘는 시장점유율을 차지하는 강력한 리더십을 확보하게 된다. 이러한 확고한 리더십 구축의 동기는 신라면의 등장, 브랜드관리시스템 구축과 신제품 개발과정의 체계화이다. 앞서 언급했듯이 농심은 적지 않은 실패사례를 기록해 왔지만 이 실패의 경험은 소비자의 기호를 더 잘 이해하는 계기가 되었고 이러한 소비자에 대한 깊은 이해는 신라면(86년)이라는 공전의 히트작을 내게 된다. 농심은 이미 이 시기 브랜드관리 시스템을 도입해 히트상품이 등장하면 이를 장수브랜드로 키워냈다. 신라면, 안성탕면, 짜파게티, 너구리는 현재까지도 소비자가 선호하는 브랜드들로 이들이 차지하는 시장점유율은 50%내외에 이른다. 또한, 농심은 이 시기 체계적인 신제품 개발과정을 정착시켰다. 회사의 모든 직원이 신제품 아이디어를 제안할 수 있고 제안된 아이디어는 체계적인 검증과정을 거쳐 상품화를 위한 팀이 구성되게 된다. 신제품 개발과정에서 주목되는 점은 직원은 실패의 책임에서 자유롭고 성공에 대한 보상은 보장된다는 것이다. 농심은 다양한 신제품을 끊임없이 개발하는 것을 핵심적인 경쟁우위요소로 인식하고 있기 때문에 설령 신제품이 실패하더라도 담당자에게 그 책임을 묻지 않는다. 다만, 실패경험은 다음 신제품 개발의 지혜로 활용된다. 실패의 자유가 있는 기업문화는 지금 농심 경쟁력의 핵심이라고 볼 수 있다.
5기: 글로벌 시장 구축기
신춘호 회장은 시장은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창조하는 것이라고 믿는다. 신춘호 회장은 이러한 철학을 바탕으로 국내시장에서의 압도적인 1위에 만족하지 않고 글로벌 식품회사가 되기 위한 경영시스템을 90년대 말부터 구축하기 시작했다.
농심은 1990년대 말부터 중국시장에 진출했고 2000년대 초엔 LA 공장을 건설하면서 전 세계시장에서 농심라면의 고유한 맛을 전하고 있다. 신춘호 회장의 글로벌 경영의 핵심은 “농심의 브랜드(맛)를 그대로 심는다“다. 예를 들어 신라면의 매운 맛이 다른 나라 소비자들에 의해 선호되지 않더라도 그 맛을 변화시키기 보다는 해외 소비자들에게 신라면의 고유한 맛이 소구될 때까지 지속적으로 노력하고 기다린다는 것이다. 이러한 전략은 음식문화가 다른 중국 시장에서도 통하고 있는 것으로 확인되고 있다. 이러한 신춘호 회장의 글로벌 경영에 대한 확고한 의지는 “고객과 함께 건강과 행복을 추구하는 글로벌 식품기업”이라는 비전에 잘 표현되어 있다.
3. 신춘호 회장의 기업가정신
농심의 기여
신춘호 회장이 농심을 키우면서 회사만 성장한 것이 아니라 국민 생활의 질도 함께 높아졌다. 과거 전후시절 먹을 것이 충분하지 않았던 상황에서 라면의 등장은 국민들에게 간편한 한 끼 식사를 제공했고 농심의 끊임없는 제품 개발은 소비자들에게 맛있는 기호식품 또는 편리한 간편 식품이라는 가치를 제공해 주었다. 우리나라 국민 중 일주일에 한번 정도 라면을 먹지 않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현재에도 시장에는 무수히 많은 식품들이 경쟁하고 있지만 라면만큼 그리고 농심라면만큼 국민들 일상생활에 자리 잡고 있는 제품은 흔치 않다.
많은 전문가들이 미래의 경영패러다임으로 기업과 사회가 공유하는 가치를 혁신적으로 개발하는 것을 제시하고 있고 기업은 혁신적인 모델을 통해 고객들에게 완성된 가치를 제공함으로써 이윤을 창출하고 그 결과로 지속가능한 경영을 실현할 수 있다고 말한다. 어쩌면 농심은 회사를 설립한 초기부터 고객과의 가치공유라는 현대적 경영모델을 가지고 있었던 것처럼 보인다. 이러한 경영모델은 아래와 같은 신춘호 회장의 경영철학으로 구체적으로 구현되었다.
고유한 경영철학
신춘호 회장은 회사가 성장을 거듭하는 동안 시장 환경에 맞는 경영방침을 세우면서 시장에 적응해 왔고 이것이 농심이 글로벌 기업으로 성장하게 된 주춧돌이다. 신춘호 회장이 제시한 경영철학을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실패할 수 있는 자유: 기업이 차별화된 제품을 시장에 선보이기 위해서는 다양한 신제품 아이디어를 확보해야 하고 담당자는 이를 과감하게 시도할 수 있는 기회를 가져야 한다. 그래서 신춘호 회장은 사원들에게 “실패의 책임을 묻지 않는다.”는 경영방침을 선포해 왔다. 이러한 실패의 경험이 지혜가 되어 농심은 글로벌 기업으로 성장할 수 있었다.
“실패는 손실만 안겨주고 끝나는 것이 아니라. 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게 하는 지혜와 또 다른 실패에 대처할 수 있는 힘을 키워주고, 그래서 성공에 보다 가까운 지름길을 안내해 준다.”
일상에서 얻는 지혜: 신춘호 회장이 동해 근방에 휴가를 하던 중 횟집을 찾은 적이 있다. 이 때 여러 횟집 중에서 관심을 끈 간판이 '부산처녀횟집’이었다. 그래서 이 식당을 들르게 되었고 식당주인에게 식당이름의 배경을 전해 듣게 되었다. 당시 주인이 이 식당을 처음으로 개장했을 때 처녀였다는 것이다. 당시 고향이 부산인 주인이 처음으로 떠오른 이름이 '부산횟집’이었는데, 무언가 부족해 보여 그 사이에 처녀를 넣는 것이 고객들의 관심을 끌 수 있고 정감을 줄 수 있을 것으로 판단했다는 것이다. 이때 신춘호 회장은 소비자들에게 제품 이름이 얼마나 중요하고, 그 이름에 두 글자가 더 들어감으로 인해 그 이름을 기억하기 쉽고 이름에서 소비자들로부터 다양한 감정적 반응을 얻을 수 있음을 깨달았다고 한다. 휴가 중의 일상에서도 지혜를 얻는 신춘호 회장의 능력을 보여주는 일화이다.
이와 비슷한 맥락의 농심 일화도 있다. 롯데공업(주)는 짜장면의 인스턴트화에 성공한 후 소고기 국의 깊은 맛을 라면에 재현하는 제품을 개발하였다. 당시 소고기를 구경하기조차 어려웠던 1960년대 시절 이 제품은 회사의 새로운 도약을 가져다 줄 수 있는 역작이었다. 당시 이름 후보로 '소고기라면’과 '쇠고기라면’으로 압축되었는데, 대다수 직원들은 쇠고기가 표준말이어서 '쇠고기라면’으로 해야 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신춘호 회장은 '소고기라면’으로 해야 한다고 판단했다. 소비자들에게 친숙한 단어가 '소’이고 '쇠’라는 접두어는 제품에 적절하지 않은 이미지를 연상시킬 수 있다는 것이었다. 당시가 50여년 전, 경영학이 미지의 학문이었던 이 시기에도 신춘호 회장은 제품이름을 개발하는데도 고객지향적 사고를 하고 있었음을 보여주고 있다.
정직함이 경쟁력(“정직이 제일 좋은 광고이다”): 농심의 핵심가치는 '순박하고 정직한 농부의 마음’이다. 신춘호 회장은 제품에서 이러한 가치가 반영되어야 하고 그런 제품을 개발해야 한다고 믿고 있다. 그런 제품을 개발하면 이를 정직하게 있는 그대로 보여주면 된다(광고의 핵심개념을 찾아내는 방식 중 가장 효과적인 방식에 'inherent drama’ 또는 'common touch’가 있는데 신춘호 회장의 철학은 이에 해당됨). 신춘호 회장은 제품 개념과 표현 아이디어를 개발함에 있어 화려한 미사여구나 과장된 표현을 절제한다. 그러한 표현이 농부의 마음을 훼손시킬 수 있고 궁극적으로 회사의 신뢰도에 부정적으로 영향을 미치게 되기 때문이다. 신춘호 회장은 지금도 제품이름과 광고컨셉 개발에 직접 참여하고 있는데, 대표적인 히트 상품은 '소고기라면’ '새우깡’ '너구리’ '신라면’ 등이 있다. 제품이름에서도 회장의 철학을 엿볼 수 있다.
한 발 앞선 투자가 성장의 동력(“돈은 써야 벌린다”): 농심은 자금 사정이 여유롭지 않았던 회사설립시절부터 기술개발연구소에 과감하게 투자해 품질을 통한 차별화를 통해 선도 기업으로 도약할 수 있었다. 선도 기업으로 도약한 후에도 품질 수준 제고를 위해 사무자동화와 정보시스템 구축에 경쟁사보다 앞서 투자해 왔고 미래 시장개척을 위해 네크워크 시스템도 먼저 구축해 왔다. 이러한 경쟁사보다 한 발 앞선 투자가 현재의 압도적인 시장선도자의 비결이라고 볼 수 있다. 또한 글로벌 시장 개척도 경쟁사보다 앞서 왔고 그에 따른 실패도 성공하는 길을 찾는 지혜로 발전시키고 있다.
장기적인 안목의 투자를 아끼지 않는 재미있는 일화가 있다. 1988년 서울 올림픽에 농심이 공식 라면공급업체로 선정되었고 이 행사를 위해 담당부서가 준비하고 있었다. 이와 관련된 보고서에 따르면 담당 직원들은 상의 티셔츠를 입고 행사를 치르기로 했는데 그 이유는 비용절감이었다고 한다. 이 보고서를 접하고 신춘호 회장은 담당자에서 모든 행사 참여자들이 상하 한 벌을 맞추고 세계적인 행사에 어울리는 디자인과 옷감에도 신경을 쓰라고 지시했다. 온 세계의 스포츠인, 보도진, 글로벌 회사 등이 참여하는 행사에서 회사의 이미지를 전해 주고 국가의 품격을 높일 수 있는 기회를 본 것이다. 아마 신춘호 회장은 이 시기부터 농심의 글로벌 경영을 생각하고 있었던 것 같다.
담당자가 책임지는 사업(“납득해야 실천할 수 있다”): 농심을 새로운 사업을 전개할 때마다 담당자에게 모든 권한을 준다. 그리고 실패할 수 있는 자유도 준다. 그러나 담당자에게는 “그 사업을 완벽하게 이해해야 한다”는 무거운 책임감도 준다. 왜냐하면 담당자가 이해해야 실천할 수 있고 그래야 그 사업에서 실패하더라도 다음에 성공할 수 있는 지혜를 얻기 때문이다.
부산의 허심청을 개발할 때 이와 관련된 재미있는 일화가 있다. 당시 이 사업은 개발 계획을 일본 사람들에게 맡겨졌는데, 수차례 회의를 통해서도 만족할 만한 안이 나오지 않았다. 그 원인은 농심의 담당자가 직접 관여하지 않고 일본 전문가에게 일을 맡겼기 때문이었다. 그 결과 일본 담당자가 계획을 수정할 때마다 안이 더 복잡하게 얽혀져 어떤 사업을 하는지 이해하기 어려워졌다. 그래서 농심 임원들이 모여 마라톤 회의가 진행되었고, 임원들은 '이것저것 자질구레한 것들은 다 없애고 동양 최대의 목욕탕을 만들자’로 결론을 내렸다. 그래서 지금의 허심청이 탄생했다. 사업을 담당할 책임자가 사업을 충분히 이해해야 실행에 옮길 수 있고 관리할 수 있게 됨을 보여주는 일화이다.
농심에는 이 외에도 '철학을 가진 쟁이는 행복하다,’ '사원을 보면 회사를 알 수 있다,’ '음식은 생명이다’ 등과 같은 타사에서 보기 어려운 경영 철학 또는 경영 방침이 있다. 그리고 중요한 점은 이러한 철학이 종업원들의 몸에 배어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철학은 거의 모두 신춘호 회장이 회사의 성장과 시대적 상황에 맞춰 종업원들에게 제시한 것들이다. 현대 경영학은 리더의 가장 중요한 역할로 회사의 경영 비전, 경영철학을 제시하는 것이라고 강조한다. 신춘호 회장은 이미 과거 50여년 간 이러한 리더십을 발휘해 왔던 것으로 평가될 수 있을 것이다.
유창조 (동국대 경영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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