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그를 킴기즈칸이라 부를까: 김우중

최승노 / 2014-10-31 / 조회: 12,9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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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우중 대우그룹 회장을 사람들은 '킴기즈칸’이라 불렀다. 무엇이 그를 칭기즈칸처럼 느끼게 만들었을까. 바람처럼 나타나 속전속결로 세계를 휩쓰는 무서운 속도감. 실제로 그랬다. 김우중은 칭기즈칸처럼 세계를 누비며 비즈니스 세상을 바꿔나갔다.

대한민국의 젊은이라면 그의 이름을 자랑스럽게 불렀고, 그의 책 “세계는 넓고 할 일은 많다”는 미래를 준비하는 사람들의 필독서가 되었다. 무려 180만부가 팔렸다. 거칠 것 없는 김우중의 세계경영에 세계도 놀랐고, 경영학의 교과서를 새로 써야 한다는 목소리까지 들려왔다. 하지만 아시아 외환위기가 터지면서 상황은 급반전한다. 일순간에 대우는 붕괴하고 만다. 김우중 회장도 종적을 감췄다. 화려했던 신화와 찬사도 함께 사라져갔다.

돌풍처럼 일어나 세계를 뒤흔들던 글로벌 기업가 김우중은 이미 역사 속으로 묻혔다. 그가 만든 기업들이 아직 건재하지만, 그의 명성은 바람처럼 사라진지 오래다. 오랜 침묵을 깨고 김우중이 입을 열었다. “정부의 기획 해체, 대우는 타살 당했다."는 그의 외마디 외침에 메아리가 작다. 왜일까? 지금 그의 존재는 환영받지 못한다. 정치권, 정부관료, 언론, 학자들 모두 외면하고 싶어 하고 마땅치 않아 하다. 그의 경영방식에서 더는 배울 것이 없다고 느끼는 것일까. 이제는 구시대의 전형이라 치부하고 싶은 것일까.
우리 기업사의 한 획을 그은 그는 분명 영웅이었지만, 지금 그의 뒷모습은 초라하다. 하지만 역사적 평가까지 초라할 이유는 없다. 김우중 회장은 시대를 앞서간 리더였기에 지금도 그의 스토리에는 배울 점이 많다. 다시 그가 창조해 냈던 업적들을 되돌아보는 것은 마치 우리의 역사 유산을 찾는 것처럼 새롭고 신비스런 일이다.


왜 사람들은 그를 칭기즈칸과 비교할까


칭기즈칸은 인류 역사상 가장 넓은 땅을 지배한 인물이다. 뛰어난 영웅들은 자신의 영토를 확장했다. 서양을 대표하는 알렉산더가 그랬고, 나폴레옹이 그랬다. 하지만 칭기즈칸은 알렉산더, 나폴레옹, 히틀러가 정복한 땅을 모두 합친 것보다 더 광활한 면적을 차지했다.
칭기즈칸의 기병은 중국과 동아시아를 점령하고, 중동, 동유럽 까지 순식간에 휩쓸고 지나갔다. 그에게는 고작 15만 명 남짓의 군사가 있었지만, 몰골 초원에서 실크로드를 관통해 중앙아시아 전역을 접수했다. 칭기즈칸이 정복하려는 지역의 지배자들은 선택해야 했다. 칭기즈칸을 환영하고 그의 네트워크에 포함되어 협력하던지 아니면 죽기를 각오하고 싸우던지. 만약 싸움에서 지면 처절한 응징이 기다리고 있었다. 칭기즈칸은 사람은 물론 동물까지 죽이고 그 지역 전체에 풀 한포기 남기지 않을 정도로 모든 것을 파괴했다. 칭기즈칸을 적으로 삼는 다는 것은 당시 엄청난 공포감을 견뎌야 하는 일이었다. 서양 사람들이 칭기즈칸에 대해 가졌던 두려움이 얼마나 컸을 지는 상상하고도 남을 정도다. 서양사회는 자신들을 공포에 떨게 헸던 칭기즈칸을 좀처럼 잊기 어려웠을 것이다. 서양에서 그에 대한 연구는 그래서 활발했는지 모른다. 지난 1999년 말 밀레니엄을 마감하면서 세계적인 시사 주간지 '타임’이 지난 1천 년 동안 세계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친 인물 100명을 발표했는데 1등이 바로 칭기즈칸이었다.
김우중도 이것저것 가리지 않았다. 좌고우면하지도 않았다. 중앙아시아를 넘어 동유럽까지 그의 폭풍 경영에는 거칠 것이 없었다. 30년이라는 짧은 기간에 이룬 대우의 극적인 성장사에는 일반인이 체감하기 어려운 초음속의 스피드가 느껴진다.
칭기즈칸 제국이나 나폴레옹 제국처럼 말이다. 드라마틱한 성장가도에는 영웅전을 읽고 난 후 가슴에 남는 그런 역동적인 에너지 같은 것이 있다. 그 기적을 가능케 한 에너지는 김우중의 영웅본능을 빼고는 설명하기 어렵다.
연간 250일 이상 해외에 머물며 하루 세 시간 이상 비행기를 탔다. 그가 세계경영을 본격적으로 시작한 시점은 1993년이다. 모든 역량을 해외 시장에 집중했다. 미국, 싱가포르, 인도네시아는 물론이고, 우즈베키스탄, 폴란드 까지 그의 세계경영은 끝을 몰랐다. 전 세계에 대우 법인을 설립해 나갔다. 루마니아, 폴란드 등 동유럽과 우즈베키스탄 등에 대한 투자가 결실을 맺으면서 세계경영은 꽃을 피우기 시작했다. 중국, 몽골, 인도, 루마니아, 폴란드로 이어진 자동차 공장 루트도 완성됐다. 사실 킴기즈 칸이라는 별명도 1996년 우즈베키스탄 자동차 공장 준공식 때 우즈베키스탄의 카리모프 대통령이 그를 칭기즈칸에 비유하며 붙여준 것이었다.
세계경영이 최고조에 달했던 1998년 말 대우그룹은 해외법인 396개사, 해외 임직원 21만 9,000명, 국내 계열사 41개, 국내 임직원 10만 5,000명의 글로벌 기업으로 성장했다. 국내에서는 자산 기준으로 삼성, LG를 제치고 현대에 이어 재계 2위를 기록할 정도였다.


경영학의 한 페이지를 새롭게 쓰다


칭기즈칸의 강점은 스피드와 네트워크다. 유연함 속에 숨어있는 강인함과 적응력이 경쟁력의 핵심 요인이다. 800년 전 칭기즈칸은 현대 리더십이 요구하는 속도와 네트워크의 선구자적 인물이다. 이미 칭기즈칸에게 전쟁은 속도전이었다. 기병들은 말 위에서 모든 일을 할 수 있을 정도로 능숙했다. 한 명이 말을 보통 3마리 이상 데리고 다녔고 타던 말이 지치면 순식간에 옮겨 탔다. 또 역참제라 해서 말로 달려 하루에 갈 수 있는 거리 마다 숙박 시설과 말을 제공하는 네트워크를 갖췄다. 정보의 소통이 순식간에 이루어질 수 있는 인프라였다. 오늘날 인터넷이라는 실시간 네트워크가 세계를 동일 시간 내 의사결정이 가능한 구조로 만들었다면, 당시 칭기즈칸의 지리적 네트워크는 원거리 세계정복을 가능케 하는 놀라운 정보 네트워크였다.
김우중의 속도경영이 빛난 이유도 실시간에 높은 수준의 고급 정보를 현장에 반영하는 데서 나왔다. 한국에는 '빨리 빨리’라는 특유의 기질이 있다고 한다. 이를 부정적으로 보는 이들도 있지만, 경영 현장에서 속도는 그 무엇보다도 사업의 성패를 결정하는 핵심 요인이다. 그 '빨리 빨리’의 정점에 김우중이 있었다. 시간을 철저히 관리하고 아낄 수 있었기에 전 세계에 펼쳐진 수많은 사업을 동시에 추진할 수 있었다. 그에게 시간은 절대적으로 부족한 자원이었다. 그에게는 비행기를 기다리는 시간도 아까웠으며, 운동하는 시간도 허락되지 않았다. 심지어 식사시간도 예외가 아니었다.
사람들이 그에게 건강 비결이 무엇이냐고 물었다. 그는 그런 것 없다고 잘라 말한다. 그런데 신경 쓸 여유가 없다는 것이다. 그에게는 오직 열심히 일하는 것뿐이었다.
일을 하면 활력이 솟았고 일이 즐겁기 때문에 따로 헬스에서 땀을 흘릴 이유가 없었다. 취미처럼 일했다. “일하는 것이 나의 취미다.”라고 아무렇지도 않게 말하곤 했다.
대부분의 기업인들이 24시간 일한다고 말하듯이, 그의 모든 시간이 일하는 시간이었다. 일이 즐거운 사람에게 피곤과 짜증이 올 리 없다는 것이 김우중의 철학이었다. 시간에 쫓기다 보면 음식도 빨리 먹어야 하고, 세계 사람들과 친하게 지내려면 그들의 음식을 같이 맛있게 먹어야 하고 그래서 음식을 가려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나폴레옹이 저녁식사를 12분 이상 끌지 않았으며, 점심은 8분을 넘기지 않았다는 일화처럼, 김우중처럼 할 일이 많은 사람에게는 식사 시간조차 아까운 것이었다. 대우는 김우중이 뛰면서 이룩한 경영혁신의 성과물인 셈이다.
그가 세계 경영이라는 새로운 기업세계를 구축해 나가는 모습은 찬사를 받기에 충분하다. 칭기즈칸을 연상시킬 정도로 세계 시장을 점령해 가는 새로운 방식의 성공 신화는 경영학 교과서에 담아야 하는 새로운 경영 성공 사례가 될 정도였다. 하지만 세상에는 성공을 격려하고 축하하는 긍정적인 모습만 있는 것은 아니다. 세계가 놀란 만큼 그들에게는 자신들의 시장이 잠식당하고 있다는 인상을 줄 수 있다. 한국의 대기업에 대한 경계심이 일어나고, 점차 우려와 불안한 시각이 자리 잡는다. 대우가 눈 깜짝 할 사이에 루마니아, 체코, 폴란드의 자동차 회사들을 이수하는 걸 보고서는, “이게 뭐지?”하는 경계심을 보이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호기심으로 지켜봤으나 자신들의 시장을 잠식할지 모른다는 경계심이 커졌고 점차 견제 심리가 작동한 것이다. 동유럽 시장을 장악하는 것을 보고 국제적으로 형성된 이런 비우호적인 인상은 훗날 외환위기를 거치면서 국내의 반기업정서와 함께 한국의 그룹 경영을 해체해야 한다는 정치적 압력에 힘을 보태게 된다. 해외와 국내 모두 대우에 우호적이지 않은 시각이 점차 커지고 있었다. 칭기즈칸이 동유럽을 위협했던 것처럼 대우의 세계경영은 서구에 '대우공포증’을 주었다. 국내적으로는 신라 시대의 장보고처럼 해외 사업이 워낙 크다보니, 국내 정치 세력에게 기업이 통제에서 벗어나 자신들의 정치권력을 위협할지 모른다는 생각을 하게 했다. 더구나 대권후보로 나와 정치권을 위협할지 모른다는 소문도 떠돌았다.

비록 그의 세계경영이 완성을 목전에 두고 멈춰야 했지만 그의 선구자적 시도의 의미는 이대로 사장시키기 아까운 게 사실이다. 김우중의 세계경영은 이후 국내 기업들이 해외에 진출할 때마다 연구하는 최고의 경영지침서가 됐다. 학계에선 지금도 김우중의 세계경영 사례를 연구하고 있다. 세계경영 와중에 양성된 대우의 글로벌 인재들은 그룹 붕괴 이후에도 다른 기업에 중용되면서 그간 쌓은 경험과 역량을 발휘했다.
어찌 보면 대우는 10년 뒤 국내 기업들이 지불해야 했을 해외경영의 값비싼 수업료를 대신 지불해 준 셈이다. 너무나 시대를 앞서간 게 세계경영이 실패한 이유라고 한다면 지나친 평가일까?


그에게는 목표가 있었고 그 방법을 찾았다


김우중은 우리나라 산업화의 성공을 이끈 영웅 가운데 하나다. 그 시기는 가난을 벗어나겠다는 꿈을 이룬 시기다. 목적이 분명했고, 그 수단을 적극적이면서 효과적으로 찾았다. 그런 성공의 습관과 태도를 가진 사람에게는 그 시대는 행복한 시기였다. 그런 기질을 어려서부터 갖고 있던 김우중은 그런 면에서 늘 행복했다.
그의 나이 열다섯, 1951년의 일이다.
아버지는 북한에 납치되어 소식이 없었고, 동생들은 아직 어렸다. 그는 신문을 팔아서라도 네 식구를 먹여 살려야 했다. 하루 먹을 쌀을 사려면 1천원이 필요했다. 신문 한부에 10원씩 남았다. 하루 1백부를 팔지 않으면 식구들이 굶을 수밖에 없었다.
목표는 분명했다. 이 피할 수 없는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그는 남과 차별화된 방식을 택했다. 중학교 2년생이었던 당시 그가 세운 전략은 빨리 달리는 것이었다. 신문사에서 신문을 받아 4Km쯤 떨어져 있는 대구 방천시장까지 달렸다. 중간에 신문을 달래는 사람이 있어도 주지 않고 방천시장까지 1등으로 도착하는 것이었다. 이유는 분명했다. 신문을 기다리는 사람들이 많았기 때문이다. 배달 없이 거의 신문을 사서 보던 시절이었기 때문이다. 시장 상인들은 신문을 기다리고들 있었다. 수요가 밀집된 지역에 먼저 가서 시장을 선점하는 것은 그에게 큰 성공을 안겨 주었다. 30부 정도는 쉽게 팔 수 있었다.
하지만 그가 신문을 팔고 있는 동안에 2등 3등으로 달려온 애들이 시장에 들어와 신문을 팔았다. 주어진 시장 수요를 눈앞에서 놓치고 있는 것이었다. 여기에서 그칠 김우중이 아니었다. 그래서 그가 택한 두 번째 전략이 나온다. 당시 신문 한부에 50원씩이었다. 상인들은 보통 1백원을 냈고 잔돈 50원을 거슬러 주는 데 시간이 걸렸다. 그런 시간 때문에 뒤쫓아 온 아이들에게 손님을 뺏긴 것이었다. 그래서 김우중은 거스름돈을 50원씩 묶어서 여러 개 준비했다. 그걸 가지고 신문을 주면서 100원과 거스름돈 뭉치를 재빨리 교환할 수 있었다. 이것도 성공적이었다. 그래서 60부를 팔 수 있었다.
하지만 그가 달성해야 할 목표는 1백부였다. 세 번째 전략이 나왔다. 그냥 신문을 먼저 주면서 팔아 놓고 돈은 나중에 회수하는 것이었다. 돈을 받지 않고 신문 1백부를 모두 상인들에게 먼저 주다 보면, 2등이 도착할 때쯤 김우중 손에는 신문이 남아 있지 않았다. 이젠 돈을 받는 일만 하면 되었다. 2등, 3등으로 도착한 아이들이 신문을 팔 사람을 구하지 못하고 시장을 빙빙 돌 때 그는 자신이 준 신문을 읽는 사람들한테 신문 값을 받았다. 물론 떼이는 일도 있었지만, 그는 개의치 않았다. 그런 손실보다 시장을 선점하는 것이 훨씬 중요하다는 것을 본능적으로 이해하고 있었다. 이런 일이 이어지자 다른 애들이 방천시장을 포기하게 되었다. 이제 방천시장은 그가 선점한 시장이 되었고, 경쟁자는 사라졌다. 힘들이지 않고 매일 신문 1백부를 팔게 되었다.

김우중은 타고난 세일즈맨으로 불린다. 세일즈맨은 설득력이 최대무기다. 그것도 제한된 시간에 최대의 효과를 내야하는 냉엄한 무대다. 사람들은 대우가 창업보다 인수합병으로 덩치를 키웠다고 폄하하지만, 세계경영에서 인수합병은 불가피한 선택이며, 그 노하우는 최고의 경쟁력이 된다. 김우중은 해외 공장을 인수하는 과정에서 남을 설득하는 탁월함을 보이며 세계적으로 인정받았다. 대우 맨들은 김우중 회장의 의사결정을 이끌어내기 위해서는 10분 안에 납득시켜야 한다고 말한다. 분초를 다투어야 하는 세일즈맨의 세계에서 시간을 아끼는 것은 기본일 것이다.


승패는 병가지상사


어려움은 극복하면 자산이 된다. 그 어려움이 있었기에 이겨낼 힘이 생겼고, 그래서 생긴 성공은 다음의 도전을 위한 발판이 된다. 작은 성공이 쌓이다 보면 큰 성공을 이루는 이치가 여기에 있다. 누구에게나 어렵다고 느끼는 고난이 있게 마련이다. 그 어려움에 감사하고 자신을 단련시키는 사람에게는 승리의 길이 열린다. 어렵기 때문에 실패하고 불행해 지는 것이 아니다. 포기하지 않았다면 진짜 실패한 것이 아니다. 계속 넘어지고 새로운 장벽에 가록 막히더라도 좌절하지 말고 싸워 이기는 삶을 살아야 하는 것이다.
사람은 성공의 경험에서 자유롭지 않다. 성공의 공식을 다른 문제에도 적용한다. 김우중은 시간을 단축시키는 타고난 장사꾼이었다. 처음부터 기업을 키우는 것보다는 다른 기업을 인수해서 시간을 단축했다. 그룹내 계열사의 협력 체제를 구축해 시너지 효과를 창출했으며, 기존의 생산설비와 노하우를 새로운 지역으로 확산시켰다. 발 빠르게 시장을 선점하는 데 누구보다도 뛰어났다. 소련이 붕괴하면서 투자 문호가 열리기 시작한 동유럽 국가들에 대한 신속한 투자는 타의 추종을 불허했다.
대우는 중공업 분야에 비해 가전시장에 뒤늦게 진출했다. 1983년 대한전선 가전사업부를 인수해 본격적으로 사업을 전개한다. 하지만 선점이 늘 성공의 방정식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시장의 흐름보다 앞서 너무 빠른 진출은 실패를 부르기도 한다. 봄이 온 줄 착각하고 동면에서 깨어난 개구리가 추위에 얼어 죽듯이 말이다. 세상에 땅 짚고 헤엄치기 사업은 없다
대우전자의 김치냉장고가 그랬다. 사람들은 보통 만도가 1994년 내놓은 딤채가 최초의 김치냉장고라고 알고 있지만, 사실은 그 보다 10년 이상 앞서 대우와 LG전자(당시 금성사)가 김치냉장고를 내놨다. 하지만 소비자들은 김치를 장독대에 담아 땅속에 보관하는 것에 익숙했다. 그래서 굳이 냉장고 외에 김치냉장고에 관심을 갖거나 구매하는 소비자가 없었다. 하지만 위니아 만도는 1990년대 중반, 수도권을 중심으로 아파트가 보편화되고 대형할인마트가 한창 일어나기 시작한 때에 중산층 중년 주부들을 대상으로 김치냉장고를 새롭게 출시하였다. 당시 빌라나 아파트에 살았던 중산층 주부들은 이전보다 넓은 주거공간을 갖게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김장을 담가도 마땅히 보관할 장소가 없어 어려움이 많았다. 더구나 마트에 가면 장을 한꺼번에 보게 되는 일이 많아, 냉장고만으로는 김치와 식재료를 보관할 공간이 부족하게 되었다. 바로 이러한 시기에 위니아 만도가 김치냉장고 '딤채’를 출시함으로써 시장에서 커다란 호응을 일으킬 수 있었던 것이다.
이후 대기업 3사도 '딤채’의 성공에 자극받아 김치냉장고 시장에 적극 뛰어들었고, 오늘날 김치냉장고는 엄청난 보급률을 자랑하며 중년주부는 물론, 신혼부부나 독신자들에게까지 빼놓을 수 없는 '잇 아이템’으로 자리 잡게 되었다. 그리고 위니아 만도의 '딤채’는 여전히 김치냉장고의 대명사로 인정받으며 건재를 과시하고 있다. 기존에 있던 냉장고시장에 뛰어드는 대신, 소비자들의 필요에 맞게 가장 절묘한 타이밍을 찾아 틈새시장을 개척함으로써, 소비자들에게 선택의 폭을 넓혀준 결과다.
실패는 사업에서 늘 일어날 수 있는 일이다. 학자들이나 관료들은 사업이 실패할 수 있다는 점을 납득하지 못한다. 주자학의 전통을 이어받은 사농공상의 사고로는 사업을 이해하기 어렵다. 승패는 병가지상사라고 했다. 전쟁에서 지지 않고 이길 수만 없듯이 사업도 늘 성공만 할 수 없으며 예측이 어긋나서 실패하는 경우도 허다하다. 실제로 새로운 사업이라는 것은 성공할 확률이 대단히 낮다. 성공 확률이 높았다면 이미 다른 사업가가 달려들어 성공시켰을 것이고, 아직 아무도 시도하지 않았다는 것은 그만큼 위험성이 높고 쉽게 발견해 내기 어려운 가치창출의 기회라는 뜻이다.
대우전자는 탱크주의로 급부상한다. 탱크주의는 소비자의 뇌리에 강한 인상을 주었다. LG와 삼성을 뒤쫓는 대우의 추격세는 힘이 넘쳤다.
제품의 질이 높아지면서 이미지에 대한 평가가 좋아진다. 그럴 때 광고는 효과가 크다. 시장을 공략하는 초기 시점에 광고가 집중되고, 이머징 마켓이나 신상품 출시에 광고가 집중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기업가의 기업가정신은 모험주의와는 다르다. 모험을 즐기고 그 자체로 의미가 있는 것이 아니다. 새롭게 찾아낸 사업 기회를 선점해 가치창출에 성공해야 한다. 새로운 가치를 창출해 내는 기업가의 모습은 그래서 아름답기도 하지만 본질적으로 찬란하다. 그런 세계를 찾아나서는 일은 위험을 무릅쓴 도전이며, 사회를 진보로 이끄는 기업인의 미덕이다.


시대적 환경이 요구하는 영웅


시대마다 해야 할 일이 있고 그 시대에 걸 맞는 영웅이 태어난다. 시대적 환경이 요구하는 영웅이 있다. 우리나라는 산업혁명을 거치면서 대기업이 태어날 수 있었다. 자연히 그룹 총수도 여러 명 나왔다. 먼저 제조업 분야에서 이병철, 정주영, 구인회 등 뛰어난 기업가들의 활력이 컸다. 삼성, 현대, LG는 세계로 뻗어 나가는 대한민국의 상징적 기업이었다. 그 뒤를 김우중이 이끄는 대우가 뒤따랐다. 처음에는 뒤쫓았지만, 점차 추월해 나갔다.
무역을 통한 경제성장은 개발시대의 시대정신이자, 국가적 합의였다. 그 시대를 이끌던 지도자인 박정희와 기업 총수 사이의 공감대가 있었다. 사업보국이었다. 그 큰 그림 속에 정치와 경제는 하나가 되어 힘을 발휘했다. 우리나라가 빠르게 성장할 수 있었던 요인 가운데 하나는 정경유착이 올바른 방향으로 전개되었기 때문이다. 정경유착이 자신들의 이권을 얻기 위해 다른 경쟁자를 억압하는 것으로 이루어진다면 이는 실패의 길이다. 하지만 정치와 경제가 경쟁의 폭을 넓히고 더 치열한 경쟁이 이루어지도록 함께 노력하는 정경유착은 바람직하고 좋은 것으로 모두를 이롭게 만드는 결과를 가져온다. 지금 우리나라는 정경유착을 무조건 나쁜 것으로만 생각해 정치인들은 기업인들을 무조건 멀리하려고 하고 심지어 적대시하는 우를 범하고 있다. 하지만 선진국 정치인들은 기업가들과 함께 자국 기업의 사업기회를 넓히기 위한 외교전을 함께 펼치는 성숙한 정치를 펴고 있다.
박정희가 성공적인 정치인이 될 수 있었던 것은 올바른 경쟁을 기본으로 하는 기업정책을 펼쳤기 때문이다. 기업을 보호의 대상이 아니라 경쟁하는 단위로 간주하고 세계 시장에서 더 경쟁해서 승리하라고 요구한 것이다. 대우는 거기에 충실했다. 세계시장을 개척하고 치열하게 싸워 승리했다. 심지어 한국기업과 세계시장을 놓고 경쟁하는 모습을 보일 정도였다. 국내의 학자들과 동종 업계에서는 대우가 국내기업과 경합하는 것을 너무한 거 아니냐며 대우의 경쟁 의욕을 폄하 할 정도였다. 하지만 세계시장과 국내시장을 구분할 이유는 없다. 기업은 경쟁하는 조직이며 경쟁에 충실해야 한다. 해외에서는 국내 기업끼리 담합을 해도 좋은 것은 아니다. 국내시장에서 경쟁해야 하는 것처럼 세계 시장에서도 경쟁은 불가피하다. 기업은 오직 소비자의 이익을 위한 경쟁에 충실해야 하며, 업체끼리 시장을 나누며 적당히 담합하는 것은 바람직한 일이 아니다.
김우중은 국가의 부름을 기꺼이 받아들였다. 모든 것을 껴안았다. 부실기업을 인수하라고 하면 인수했다. 국가가 필요로 하는 일을 거절하지 않았다. 정부가 맡긴 부실기업들이 그의 손을 거쳐 우량기업으로 다시 태어났다. 그는 '부실기업 해결 청부사’라는 별명도 얻게 된다.
김우중의 말이다. “우리가 정부와 가까웠던 건 맞는 얘기예요. 그런데 그게 정부가 골치 아파 하는 일들을 해줬으니까 그런 거지 우리가 로비해서 그런 게 아닙니다. 내가 중화학산업을 했으면 좋겠다고 얘기해본 적이 한 번도 없어요. 정부에서 나한테 떠맡기다 보니까 수의계약이 된 거지요. 그리고 경제발전을 하려면 정부와 기업이 합심해서 잘해야 돼요. 합심해서 노력하는 걸 놓고 정경유착이라고 매도하면 안 됩니다. 그런 얘기들이 다 "장사꾼이면 그렇게 안 할 텐데..."라고 생각하니까 나오는 거예요. 장사꾼이 돈만 바라보고 일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의 수준에서는 전혀 이해할 수 없는 일이지요.”
봉제품 수출로 일어선 대우는 1976년 한국기계(대우중공업) 인수 이후 새한자동차(대우자동차), 옥포조선(대우조선)을 차례로 인수한다.
그는 최고 지도자와의 독대에 강했다. 박정희와도 수없이 독대했다. "우중아!"라고 부를 정도로 가까웠다. 물론 김우중이 대구사범학교 스승(김용하)의 아들이라는 요인도 있었지만,
그보다는 김우중의 탁월한 추진력과 경영능력 그리고 국가에 대한 헌신적인 태도가 박정희와 김우중을 끈끈하게 연결한 공감대였다. 최고 지도자와 바로 독대하면서 문제를 단 시간에 해결하는 경영 방식은 세계경영에서도 빛이 났다. 특히 중진국이나 후진국에서 효과가 컸다.
시대가 영웅을 만든다고 했다. 고도성장을 꿈꿨던 우리 사회는 김우중이라는 뛰어난 기업가를 원했다. 그는 화려한 시기를 보냈다. 거칠 것 없이 시장을 개척해 나가는 김우중의 리더십은 우리 사회가 가장 필요로 했던 경제성장을 가능하게 하는 핵심 에너지였다.
영웅은 다시 패러다임을 바꾼다. 혁신을 통해 시대의 흐름을 바꾼다. 박정희와 함께 산업혁명을 이룬 기업가들은 서로의 힘을 나누고 보태주며 역사를 진보시키는 선순환의 고리를 만들었다.


세계는 넓고 할 일은 많다


김우중은 자신은 돈 버는 것을 장기로 한다고 밝힌다. 누구보다 장사에 자신 있다는 얘기다. 다른 기업총수들과 달리 대학을 나오고 샐러리맨으로 시작한 그였지만, 누구보다는 장사꾼의 논리에 강했다. 국제 무역에 탁월했으며, 기업을 사고파는 인수합병(M&A)에도 능했다.

장사꾼의 기본은 신뢰다. 자본주의가 성숙한 사회는 장사꾼이 마음껏 활개치는 사회다. 당장의 약속뿐만 아니라 오랜 시간이 지난 약속도 꼭 지킨다는 믿음이 장사꾼들로 하여금 더 큰 장사를 꿈꾸게 하고 자신있게 추진하도록 한다. 그런 믿음이 실제로 지켜지는 사회가 자본주의 인프라를 갖춘 사회다.
성공한 사업가가 대부분 사람을 중시했듯이, 김우중도 인간관계를 중시했다. 가장 뛰어난 장사꾼이었던 김우중도 사업을 하면서 인간관계의 중요성을 새삼 깨닫게 된다고 말한다.
사업을 한참 일으키던 초창기의 일이다. 대우는 인도네시아의 '떼(The)’라는 무역상과 거래를 하고 있었다. 당시 돈으로 원단 한 마에 20센트씩 하던 때였다. 그런데 인도네시아 당국이 수입을 철저히 규제하는 바람에 갑자기 원단 시세가 반 이하로 뚝 떨어져 버렸다.
그렇지만 장기 계약을 한 상태여서 무역상 '떼’로서는 손해가 나더라도 어쩔 도리가 없이 계속 물건을 가져갈 수밖에 없었다. 그걸 알고서 김우중은 상대방이 손해를 적게 보게 하려고 물건을 덜 실어 보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떼’는 부도를 낼 수밖에 없는 처지에 몰린다. 당장 30만 달러가 없으면 은행에서 차압이 들어올 지경에 이르렀고, 김우중은 30만 달러를 직접 쫓아가 도와준다. 당시 대우의 자본금이 1만 달러 정도였으니 엄청나게 큰돈이었고, 또 대단한 결단이었다.
그런데 1년이 지나면서 갑자기 판도가 바뀐다. 인도네시아 시장이 완전히 회복되면서 원단 값이 다시 한 마에 36센트까지 뛰어 오른다. 그 전에 17센트에 공급하기로 장기계약을 해 놓았음에도, '떼’는 35센트씩 주면서 가져갔다. 35센트에 사 가도 시세보다 2센트가 싸니까 충분하다는 것이었다. 17센트짜리를 35센트에 팔게 됨으로써 대우는 그 당시 100만 달러 정도를 벌게 된다.
비즈니스에서 이타심과 이기심의 경계는 애매하다. 거래는 본질적으로 서로 윈윈이라서 서로를 돕는 행위다. 거래 자체가 상생이며 협력이다. 거래를 많이 하는 것이 바로 남을 많이 돕는 일이다. 이런 이타적 행위는 이기심의 범위 내에서 일어난다. 더구나 김우중은 거래의 과정에서 남을 돕는 장기적 거래로 더 큰 이익을 얻게 된다. 배려에 감사할 줄 아는 비즈니스 세계의 믿음이야말로 자본주의의 미덕이다.
김우중은 사람의 마음을 먼저 사라고 말한다.
보통 세일즈맨은 자기 물건을 먼저 팔려고만 든다. 하지만 상대방의 입장에서 보면 다 식상한 얘기다. 반대로 상대방의 입장에서 그들이 고민하고 있는 것이 무엇인가를 살펴 해결책을 제시해 보라. 상대방의 눈이 번쩍 뜨일 것이다. 사회주의 국가와의 교역에서 먼저 사주는 것이 비즈니스의 요령이다. 대우가 가장 먼저 진출한 나라가 헝가리다. 리비아 공사 등에서 필요한 것이 고기였다. 오랫동안 헝가리에서 쇠고기를 사주었고 그 인연을 디딤돌로 해서 호텔, 은행 등 사업을 벌일 수 있었다.
김우중에게 일은 성취감을 주는 고마운 존재였다.
일을 성취시킨 당사자가 느끼는 감정을 감격이라 한다면 그 결과를 바라보는 제3자가 느끼는 감정은 감동이라고 할 수 있다. 그는 감동적인 성취를 이루고자 했다.


글로벌 시장에서 기업가 정신 빛나다


무에서 유를 창조하는 행위는 아름답다. 기업가들이 세운 건물, 다리, 수많은 문명의 창작물들은 예술품과 다를 바 없다. 세기적 창조물 가운데 우리 기업인들이 일구어낸 것들이 많다. 리비아 대수로공사는 그 백미다. 리비아 남부 사막 지역에 매장되어 있는 풍부한 지하수를 개발하여 송수관을 통하여 북부 지중해 연안 지대까지 끌어들여 광대한 사막과 황무지를 농경지로 바꾸는 사업이다. 동아건설이 시공을 맡았고, 총 4단계로 나누어 진행한 대수로공사는 1단계 공사만 1,895㎞를 1984년 착공하여 1991년에 완공하였다. 세계가 놀라고 찬사를 보냈다.
새로운 문명을 창조하는 현장에 우리 기업인들이 있었다. 대우는 해외 건설 사업의 후발주자였다. 김우중 회장은 리비아 남단 국경지대의 사막 한복판에 비행장을 건설하기로 계약했다.
이탈리아 건설업체도 시공을 포기한 이 공사는 무모한 계약이라는 비판이 쏟아졌다. 하지만 김우중은 밀어붙였다. 1979년 12월 22일 대우 선발대 50여 명이 리비아의 황량한 사막에 도착했다. 이들의 눈에 보이는 것은 물 한 방울 나지 않는 죽음의 땅인 황량한 사막뿐이었다. 그러나 선발대는 후퇴라는 것은 생각할 수 없었다. 첫날부터 모래바람과 싸워야 했던 그들은 말 그대로 무에서 유를 창조한다는 각오로 도전했다.
우선 3백 명이 숙식할 수 있는 캠프를 설치하고 건설본부와 현장을 잇는 2천 킬로미터의 도로공사부터 진행했다. 그리고 4백 킬로미터 떨어진 곳에서 물을 실어다 날랐다. 한낮의 더위는 트럭의 보닛에 계란을 깨면 바로 익을 정도였다. 공사가 이루어질 때까지 1년간 이들의 야영생활은 상상할 수 없는 역경과 괴로움을 극복한 인간승리의 사례였다.
리비아 사람들은 대우의 건설작업을 보고 혀를 내두르며 감탄했다. 그러나 처음 사막에서 우물을 개발하겠다는 건설본부의 계획을 듣고 모두가 고개를 휘저으며 황당한 계획이라며 반대했다고 한다.
2주간의 광범위한 조사가 끝나고 땅을 파 들어가기 시작했다. 한 달 후 지하 60미터에서 수맥을 발견하고, 드디어 지하 233미터를 파내려 가자 물이 솟아올랐다. 사막의 오아시스를 대우의 힘으로 만든 작업팀의 기쁨과 사기는 하늘을 찌르며 곧바로 비행장 건설작업으로 이어졌다.
벽에 걸린 온도계는 더 올라갈 눈금이 없었지만 작업반의 투지는 계속 상승했다. 이렇게 신화가 계속되자 리비아의 지도자 무아마르 카다피는 지휘관과 정부요인을 대동하고 예고 없이 현장을 방문해 10여 일간 야영생활을 함께하며 독려했다.
카다피는 심야에도 대낮같이 불을 밝히고 불철주야 작업에 몰두하는 대우인의 도전정신에 감복했다. 리비아의 우조비행장은 불퇴전의 용기와 개척정신으로 최단 기일 내에 건설한 리비아 최대의 자랑거리가 되었다.
대우는 그 이후 20년 동안 리비아 도로의 1/3을 건설한다.
주택 1만 5천 세대를 짓는다. 학교도 270개 지었다. 대우에는 김우중과 함께 역사를 만들었던 사람들이 많았다. 그들에게는 역사를 이룬 성취감과 자부심 그리고 뿌듯함이 있었다. 대우가 해체된 지도 한참 지났지만 지금도 그들은 모여 과거를 이야기하고 그 영광의 순간을 나눈다.
지금도 김우중의 유산이 살아 숨 쉬는 우즈베키스탄에선 전설 같은 얘기가 많다. 1990년대 중반 대우의 한 임원이 우즈베키스탄의 고위 공무원을 만나 얘기를 나눴다. 임원의 비행기 출국 시간이 됐다. 그 임원이 '비행기 출국 때문에 일어서야 한다.’고 하니, 고위 공무원은 공항에 전화를 걸어 '비행기 이륙 시간을 늦추라’고 했다. 상상하기 어려운 일이어서 놀랐지만 대우의 위상이 그 정도로 높다는 생각에 뿌듯해했다.


장사꾼의 우직함에는 사람에 대한 애정이 담겨있다.


장사꾼 김우중에게는 사람을 위하는 마음이 깔려 있었다. 그런 우직함이 있었기에 큰 장사를 할 수 있었다. 대우가 해외 건설 공사를 본격적으로 시작할 무렵의 일이다.
날씨가 몹시 무더운 여름 한낮 회사 건물 앞에 사람들이 길게 줄을 서 있었다. 보기 좋은 모습이 아니었다. 대부분 여자인 그들 중에는 어린아이를 업고 있는 이도 있었다. 그늘도 없는 뙤약볕에서 그들은 땀을 뻘뻘 흘리며 서 있었다. 당장 그게 무슨 줄인지를 알아보았다. 그들은 우리 회사에서 파견한 해외 근로자의 가족들이었다.
그들은 그늘 한 점 없는 불볕더위 속에 땀을 흘리며, 칭얼거리는 아이까지 들쳐 업고 서 있는데, 그들을 상대하는 직원들이 앉아 있는 사무실 안은 냉방이 잘 되어 있어서 서늘하게 느껴질 지경이었다. 김우중은 그 때 뙤약볕에 서서 고생하고 있는 가족들이 측은해지면서 몹시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동시에 사무실에 앉아 시원하게 사무를 보고 있는 직원들에게 좀 화가 났다. 김우중은 그 사무실의 책임자를 호되게 야단쳤다.
“자네가 저 뙤약볕에 나가서 서 있어 보게. 어디 5분만 나가 있어 봐......”
그 책임자는 공간이 모자라서 어쩔 수 없노라고 변명했지만, 김우중은 그와 같은 변명을 용납하지 않았다. 변명이나 늘어놓으라고 주어진 직책이 아닌 것이다. 적어도 자기 회사라는 생각이 들었다면, 그리고 뙤약볕에 서서 땀을 훔치고 있는 이들이 자기 회사의 가족들이라는 생각이 들었다면, 무슨 수를 쓰든 방법을 강구했을 것이다. 최소한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긴 시간 동안 그렇게 지독한 불볕더위의 한복판에 보기 흉하게 세워 놓지는 않았을 것이라는 게 그의 판단이었다.
진정한 장사꾼은 사람을 본다. 위대한 사업가 이병철도 그랬지만, 이병철을 가장 존경한다
는 김우중도 사람에 대한 애정, 국가에 대한 헌신을 사업의 바탕으로 삼았다. 이런 생각은 산업화의 창업1세대들의 공통점인지도 모른다.
김우중은 도사론(道士論)을 주창했다.
우리 사회에 각 분야를 이끌 인물들이 빈약하다는 것이다. 사람들을 일회용으로 쓰고 버리는 경우가 허다한 탓이다. 인재를 키우는 것보다 더 값진 일은 없다고 말한다. 무언가 탁월하게 잘 할 수 있고 세상을 보는 안목을 갖추기 위해 연구하고 도전하면서 열심히 노력하다 보면 어느 날 갑자기 그런 경지에 오르고 도통했다는 말을 듣게 된다고 말한다.
김우중은 샐러리맨의 우상이었다. 장사꾼들의 롤 모델이기도 했다. 해방 후 한글로 교육 받았고 대학교육까지 받은 첫 세대의 선두 주자이기도 했다. 평범한 회사원이던 그는 1967년 대우실업을 창업했다. 그의 나이 31세, 자본금 500만원, 5명의 직원으로 시작했다. 30년 동안 이어진 그의 신화적인 성공스토리는 새로운 가치를 창출했다.
칭기즈칸과 김우중은 유사한 전략을 구사했지만, 그들이 활동하는 영역인 정치와 경제는 본질적으로 다르다. 정치와 경제는 원리가 다르고 전략도 다르다. 칭기즈칸은 정치 가운데 가장 극단적인 형태인 전쟁을 통해 영토를 확장한 영웅이었다. 반면 김우중은 경제적 거래를 통해 경제적 부를 늘리며 글로벌화를 앞당긴 기업인이었다. 전쟁은 한 쪽에 그 비용과 책임을 몰아주고 승리자는 전리품을 챙긴다. 문제는 진 쪽이 큰 피해를 보거나 문명이 완전히 파괴되다시피 한다는 점이다. 하지만 경제전쟁은 다르다. 문명을 파괴하는 것이 아니라 모두에게 더 나은 생활을 제공한다. 모두에게 이익을 가져다주는 더 나은 세상을 만드는 것이다.
김우중은 이 나라 저 나라를 옮겨 다니면서 세계경영을 펼쳤다. 정치 지도자와 비즈니스를 만들어 가는 친화력이 돋보였다. 하지만, 자신을 적대시하는 정치세력이 정치권력을 갖는다는 것이 어떤 결과로 이어질지 예측하지 못했다.


정치 리스크를 외면한 대가는 컸다


당대 최고의 전략가였던 칭기즈칸은 전술에 능수능란했다. 이길 것 같지 않으면 얼른 후퇴했다. 바람처럼 쳐들어가고 불리하면 순식간에 도망쳤다. 야구에서 투수는 늘 직구로만 승부하지 않는다. 정면 승부보다 헛스윙을 유도하기도 한다.
김우중은 성공을 눈앞에 두고 후퇴해야 하는 상황을 맞는다. 쉽지 않은 결정의 순간이다. 더구나 역사에 유래가 없는 세계경영이 완성되어 가는 상황이었다. 현실이 답답하고 밀어붙이고 싶었을 것이다. 너무 억울한 일이지만 참아야 했다. 참고 다음 기회를 다시 찾아야 했다. 하지만 그는 그렇게 하지 못했다. 설마 그렇게 하리라고 생각하지 못했다. 그가 알고 있던 정치인들과는 너무도 달랐다. 경제와는 달리 정치의 세계에서 그것도 자신을 적대시하는 세력에 대해 우직함을 드러내는 것은 그렇게 좋은 선택이 아니었다.
1997년 외환위기 때 대우가 직격탄을 맞은 건 역설적으로 그의 세계경영이 너무 성공적이었기 때문이다. 환율이 폭등하자 국내 대기업 중 외화 자산이 유난히 많았던 대우는 1997년 한 해 동안에만 무려 8조 5천억 원의 환차손을 입었다. 국가신용등급이 여섯 단계나 떨어지면서 세계 곳곳에 가장 많은 사업장을 갖고 있던 대우는 해외 채권자로부터 상환 압력도 가장 심하게 받았다.
1997년 아시아 국가들은 외환위기를 겪는다. 우리나라도 정부의 외환금융정책의 실패로 국가부도위기에 몰린다. 또 정권교체가 이루어진다. 이 험난한 파도를 넘어야 하는 절대 절명의 순간에 김우중은 내부 보다는 외부 리스크에 몰입해 있었다. 그의 해법은 더 올바른 선택이었고, 뛰어났다. 하지만 정부는 그의 의견을 외면했다. 지금 뒤돌아봐도, 외환위기를 초래했던 정부가 우왕좌왕하며 우리 경쟁력을 스스로 무장해체시킨 점이 드러난다. 역사가 늘 진보의 길을 선택하는 것은 아니다. 정치인들은 자신의 명분에 고착되어 있었고, 관료들은 자신들의 이익에 몰두해 있었다.
대우를 붕괴시키겠다는 정부의 속내가 1998년 7월 22일 발표된 회사채 발생 제한조치로 드러났다. 정부의 의중을 간파한 노무라 증권은 '대우그룹에 비상벨이 울리고 있다'는 보고서를 발표한다. 그렇게 시작된 금융시장의 압박은 대우의 자금난을 불렀고 결국 김우중은 1999년 봄에 백기를 듣다. 전 재산을 담보로 내놓고 유동성 자금을 요청한다. 하지만 대우는 결국 1999년 10월 워크아웃에 들어가 그룹 해체를 맞았다.
당시 필자는 30대 그룹의 재무제표를 분석해 '한국의 대규모기업집단' 보고서를 매년 출판하고 있었다. 노무라 보고서는 필자의 책에 들어있는 자금사용 내용에 관련한 표를 인용하며 대우 부실의 증거로 삼았다. 하지만 그 표를 그렇게 해석하는 것은 지나친 추측이었다. 결국 필자는 대우그룹 자금난 관련 기자회견장에 나가 의견을 진술하기도 했다. 지금 생각해도 참 당혹스런 일이었다.
IMF 외환위기 최대 희생양은 대우였다. 왜 정부는 대우를 해체했을까. 김우중은 자신의 장기였던 국가 지도자와의 교류에 문제가 없었다. 김대중과 여러 차례 독대할 정도로 친분을 유지하고 있었다. 하지만 거기까지였다.
김대중 정부를 뒷받침하는 세력은 생각이 달랐다. 김우중의 독대도 그들에게는 화나는 일이었다. 해체해도 시원치 않을 재벌의 오너가 자신들을 제치고 대통령과 독대하는 것에 못마땅해 했다.
공권력을 이용한 재벌해체는 그렇게 어려운 일이 아니다. 더구나 IMF라는 특수 상황에서 재벌을 사회의 공적으로 몰아 해체하는 일은 쉬운 일이었다. 쌓기는 어렵지만 허무는 일은 순식간이다. 김대중은 1998년 5월 11일 '국민과의 대화’에서 “죽일 기업은 죽이고 살릴 기업은 살리겠다.”고 선언했다.
김대중 정부에는 김태동처럼 재벌해체를 획책했던 세력이 득세했다. 그들은 재벌해체에 열을 올렸다. 동물의 세계에서 볼 수 있듯이 한 번 생채기가 나면 순식간에 먹잇감으로 전락한다. 대우는 공격적인 경영으로 자금순환이 빡빡한 상태였다. 당시 30대 그룹을 재벌의 범주로 봤지만 가장 상징적인 존재는 역시 5대그룹이었다. 그 가운데 대우가 재벌해체의 함정에 걸려들었다.
그들에게는 우리 삶의 터전에 대한 애정이 없었다. 내 것도 아니고 새로 만들면 그만이라는 무지가 자리했다. 기업은 계획하고 명령하면 언제든지 다시 만들 수 있는 것이라고 착각했다. 치열한 삶에 충실했던 사람들을 업신여기고 산업화를 깔봤다. 민주화만이 모든 것이라는 환상 속에서 살았다. 산업화 없는 민주화는 불가능하고 모래성임을 그들은 이해하지 못했다.
기업은 지식의 유기적 복합체다. 역사가 있고 노하우가 녹아있다. 대우라는 한국이 낳은 세계적 유산을 파괴하는 일은 인류의 문명을 파괴하는 것처럼 무지한 일이었다. 자학이 지나쳐 스스로 날개를 꺾어 버리는 우를 다시는 반복하지 말아야 할 것이다.


너무 의욕적이고 기업이 큰 것이 죄가 되는 세상이 열리다


프로크루스테스라는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인물이 있다. 그는 아테네 교외의 케피소스 강가에 살면서 지나가는 나그네를 집에 초대한다고 데려와 쇠침대에 눕히고는 침대 길이보다 짧으면 다리를 잡아 늘이고 길면 잘라 버렸다.

기업이 너무 크다며 규제를 하고 심지어 해체하는 것은 우매한 일이다. 자본주의와 물질적 풍요에 대한 미움이 이성을 마비시키고 경제의 원리를 파괴하는 일이다. 경제를 이해하지 못한 반기업 실험주의의 상징적 규제가 그 당시 강제 실행됐다. 바로 부채비율 200%다. 1999년 말까지 부채비율을 200% 이내로 낮추라는 것이다. 우리경제의 성장 동력을 식게 만든 최악의 규제였다. 이런 흉측한 규제가 어떻게 나올 수 있었을까. 재벌 증오에서 나온 산물이다.

장사는 본질적으로 남의 돈으로 하는 것이다. 주식이나 채권을 통해 타인자본을 활용한다. 의욕이 왕성한 기업가는 자기 돈만으로 사업하지 않는다. 회계에서 부채는 자기자본과 함께 총자산에 포함한다. 부채를 두려워해서는 기업가라고 할 수 없다. 우리나라는 외채를 빌려와 투자했다. 남의 나라 돈으로 산업화를 이룬 것이다. 부채비율이 높은 것은 해당 기업이 리스크를 감수할 일이지 정부가 통제할 일이 아니다. 하지만 정부는 기업이 위험을 무릅쓰고 투자를 늘리는 의욕을 가지지 못하도록 그 싹을 잘라 버렸다. 대기업들은 그렇게 해서 성장의 의지를 상실하게 되었다. 성장 패러다임은 그렇게 막을 내렸다.
4대 그룹의 부채비율은 삼성이 1998년 말 275.7%에서 1999년 말에는 166.5%로, 현대그룹은 449.3%에서 190.1%로, LG그룹은 341.0%에서 182.6%로, SK그룹은 354.9%에서 167.3%로 각각 줄었다. 대우그룹은 부채비율 축소에 실패했고, 1999년 그룹 전체가 붕괴되는 비운을 맞았다. 대우는 부채가 너무 많아서 망한 것이 아니다. 부채를 억지로 줄이라며 금융권이 자금을 회수하도록 한 정부의 잘못된 반성장 정책에 의해 무너졌다.
우리 경제는 IMF 외환위기 이전과 그 이후가 확연히 다르다. 저성장이 고착화되었고, 이제 고도성장은 역사 속의 전설이 되었다. 대마불사의 시대가 갔다고 말하지만 사실은 고도성장이 불가능한 시대가 되었다고 봐야 할 것이다. 재벌해체기를 맞은 후 우리 경제는 급속히 힘을 잃었다. 경제를 이끌던 기관차를 스스로 해체했으니 당연한 결과였다. 당시 관료들은 시장을 핑계대면서 사실은 시장을 통제해 나갔다. 관료들은 대우같은 글로벌 기업이 우리 경제에 있고 없고 큰 상관이 없을 것으로 계산했을 것이다.
그런 기업을 만들기 위해 선배들이 얼마나 큰 공을 들이고 노심초사했는지 알바 아니었다.
여러 그룹이 문을 닫고 기업들은 과잉투자라며 몰매를 맞았다. 그러면서 우리 경제는 활기를 잃었다. 활기를 죽이기는 쉽지만, 다시 살리기는 어렵다. 요즘 정치인들과 관료들이 계속 지시하고 있다. 투자하고 성장하라고. 과거 피눈물을 흘리며 온 몸을 던져 만들었던 것을 요즘 정치인들은 앉아서 남의 얘기하듯 한 번 만들어 보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기업들의 부채비율은 계속 떨어졌고 사내유보금은 늘었다. 기업은 투자 의욕을 상실했고 더 이상 리스크를 감수하면서 정치적 공격의 대상이 되고 싶어 하지 않았다. 정치인들은 이번에는 투자하지 않고 돈을 갖고 있으면 세금으로 뺏겠다며 기업을 위협하고 있다. 프로크루스테스의 침대에 눕혀 강제로 성장판을 잘라 저성장을 체질화시켜 놓고 이제 와서 왜 투자하지 않느냐고 괴롭히고 있다.
만약 우리 기업이 공격적인 경영을 하지 않고 소극적인 경영을 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몇몇 군소업체, 외국의 하청업체 정도의 중소·중견 기업이 우리 경제의 중심 역할을 하고 있었을 것이다. 또 우리 경제가 지금처럼 성장하지는 못했을 것이다.
경제에는 연습이 없다. 정부의 간섭은 가급적 작을수록 좋다. 정부개입보다는 시장이 자유롭게 돌아가도록 하는 것이 최선이다. 잘못된 정책을 너무 쉽게 실험하는 수준이어서는 곤란하다. 그 결과가 실로 치명적이기 때문이다.


김우중을 위한 변명


김우중은 1999년 10월 중국의 대우자동차 공장 준공식에 참석하기 위해 해외로 나간 지 5년 8개월 만인 2005년 6월 유랑생활을 끝내고 귀국한다. 그의 명성은 땅에 떨어진 채 7개월의 옥고를 치른다.
한참의 시간이 흐르고 나서야 2014년 9월 그가 다시 입을 열었다. 얼마나 억울했으면 그의 입에서 “대우, 정부 기획 해체”라는 말이 나왔을까. 회한이 컸을 것이다. 성공한 기업인에게서 좀처럼 듣기 어려운 말이 있다. 부정적인 말과 남을 핑계로 삼는 말이다. 김우중으로부터 그런 핑계의 말을 듣는 것은 뼈아프다. 얼마나 회한이 컸으면 그런 소리가 나왔을까.
김우중은 “당시 내가 국내 사정을 잘 몰랐다. 1년에 240일씩 해외로 나돌아 다니는 사람이 국내 상황을 어떻게 알았겠는가”라고 말했다.
이 말은 2002년 해외도피 생활 과정에서 “나의 최대 실수는 전경련 회장을 맡은 것"이라고 한 말과 크게 다르지 않다.
기업이 성공했는가 실패했는가의 최종 기준점은 살아남았는가에서 갈린다. 1998년 여름 그 위험한 순간에 정주영 회장은 소 1001마리를 직접 몰고 북한을 방문한다. 장사꾼의 상징적 존재인 김우중보다 한발 앞선 유연한 태도로 현대를 살렸다. 장기적으로 현대그룹을 어렵게 만들고, 그룹을 계승한 아들의 죽음까지 이어진 최악의 투자였지만 말이다.
그렇게 현대는 위기를 넘겼고 대우는 해체되었다. 현대와 대우가 달라서라기보다 정부는 현대와 대우를 다르게 처리했다.
기업에게 생존(survival)은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성공의 필요조건이다. 김우중에게는 변명의 여지가 없다. 소나기는 피해야 했고, 기업을 일단 살려 놨어야 했다.
프랑스 혁명은 질풍노도의 시기였다. 질서는 무너지고 사회는 혼란에 빠졌다. 공포정치가 이어졌고 수 만 명이 단두대에서 처형되었다. 구국위원회의 역할이 무엇이냐며 당신은 이 격동의 혁명기에 한 일이 무엇이냐고 묻자, 정치인 이에예스는 이렇게 답했다. "나는 살아남았소."
기업은 살아남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그러려면 사업도 잘 해야 하고, 정치리스크도 잘 관리해야 한다. 우리 기업사에는 정치의 폭력 앞에 무참히 희생된 기업들이 많다. 전두환은 당시 7대그룹 규모의 국제그룹을 공중 분해시켰다. 정치후진국에서 일어나는 일이 다시 이러나지 않아야겠지만, 기업을 정치의 희생양으로 삼는 일은 책임있는 정치의 모습이 아니다. 당시 국제그룹 양정모 회장도 정치 리스크를 과소평가했고, 정치의 폭력성을 이해하지 못했다.
김우중은 왜 정치리스크를 보지 못했을까. 그의 말대로 해외 사업에 모든 역량을 집중하다 보니 그랬을까. 큰 지도자는 크게 보고 큰 그림을 그려야 한다. 그것이 큰 지도자의 역할이다. 그러기에는 김우중은 너무 바빴다. 좀 더 위임하고 자신의 시간을 아껴야 했다. 생각할 시간이 있어야 했다.
일에 파묻히다 보면, 보지 못하는 것이 많다. "나는 일을 벌이기를 좋아한다. 도대체 가만히 있지를 못하는 편이다. 세상에서 가장 어려운 일이 아무 일도 하지 않고 가만히 있는 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어떤 사람은 그 상태를 '휴식'이라고 말하지 모르지만 나는 그런 식의 휴식보다는 차라리 힘든 일을 택하겠다. 움직여야 한다. 무슨 일이든 해야 한다. 그러다 보니 자연히 자꾸만 일을 만들어 내게 된다."
그랬다. 그는 탁월한 일꾼이었지만, 일 속에 묻혀 세상을 보는데 소홀했다.
김우중은 인수한 기업을 정상화하데 집중하고 다시 다른 사업에 집중하곤 했다. "너무 할 일이 많아요. 분명히 말하지만 21세기에 들어 대우에 저는 없을 겁니다. 자동차만 3년 내 잘되고 나면 제 자신 충전의 기회를 가지려 해요. 대우에서의 내 일은 끝나고 대우를 떠나 새 것을 시작하려 합니다." 그의 일 욕심은 끝이 없었지만, 그가 펼친 사업이 마무리 될 수 있는 시간적 여유를 세상은 허락하지 않았다.


누구에게나 또 다른 삶은 있다


과거를 아쉬워하고 회한 속에서 사는 삶은 불행하다. 김우중은 역시 김우중답게 제2의 삶을 꾸준히 추진하고 있다. 자신의 경험을 나누고 젊은이들을 가르치고 경제발전이 늦은 나라가 성장의 길로 갈 수 있도록 돕고 싶어 한다.
그에게는 아직도 시장은 무한하다. 비록 무장해제 당했지만 그의 꿈은 여전히 크다. 그가 바라보는 것은 역시 사람이다. 더 많은 인재를 길러내는 것이 핵심이라는 점을 놓치지 않는다. 그 스스로 좌절하지 않고 새로운 인생을 살듯이 사람들에게 낙심하지 말고 새로운 길을 찾으라고 말한다.
그에게는 아직 열정이라는 핵심 자원이 있다. 아직 할 일이 너무 많다. 국가가 나갈 방향을 여전히 생각하고 있다.
"그러니까 나이 들어도 일할 수 있는 기회를 제도적으로 많이 만들어줘야 해요. 지금은 건강이 좋아져서 70세 이후까지도 아무 문제없이 일할 수 있는 사람들이 많아요. 그 사람들의 경험과 능력이 기업이나 국가경제에 굉장히 중요한 자산이에요. 기업들이 생각을 바꿔야 합니다. 그전보다 월급을 적게 주더라도 그 사람들을 오래 써야 해요. 인건비 줄이겠다면서 사람들을 너무 빨리 나가라고 하면 안 돼요.
대기업에서 일하던 사람들이 중소기업에서 일할 수 있는 기회도 더 많아져야 합니다. 이 사람들이 잘하면 소기업을 중기업으로 키우고, 중기업을 대기업으로 키울 수 있어요. 그 사람들 입장에서는 이렇게 성공하면 직장을 옮긴 다음에도 10년 이상을 일할 수 있게 되는 거지요. 지금 중소기업을 키우겠다는 정책이 여러 가지가 있는데, 기업을 키워본 경험이 있는 사람들의 노하우를 활용할 수 있는 대책이 나와야 해요.
50대, 60대의 사람들도 정부에 의지하지 말고 독립하겠다는 용기를 가지면 길이 있어요. 국내에서도 기대수준을 낮춰서 오래할 수 있는 일들을 찾을 수 있어요. 해외에서도 적극적으로 찾아봐야 돼요. 선진국에는 자리가 없겠지만 후진국에는 기대수준을 낮추면 할 수 있는 일이 많이 있어요. 50대, 60대는 한국의 개발연대를 살아서 후진국에 가면 앞으로 뭘 어떻게 해야 하는지 잘 보인단 말이에요. 한국 사람들이 물건이나 생산과정을 조금씩 개선하는 데에는 천재적인 감각을 갖고 있어요. 그런 능력을 후진국이 굉장히 많이 필요로 합니다. 가서 조금 고생하겠다고 생각하면 기회가 많이 있어요. 그 사람들 머리에 들어있는 것을 계속 써야만 자산으로 남아 있어요. 10년만 안 쓰면 다 없어져요. 국가적으로도 귀중한 자산이 없어지는 거지요. 젊은 사람들도 해외에 나가고, 나이 든 사람들도 해외에 나가서 스스로 일자리를 만들어야 해요. 그러면 자신들도 떳떳하고 정부의 부담도 줄일 수 있어요."
대우를 빼앗기고, 엄청난 추징금까지 징벌적으로 부과받은 김우중. 그의 나이 78세, 하지만 그에게 나이는 숫자에 불과하다. 여전히 일을 쫓는다. 김우중은 2014년 9월 아주대를 방문해 “저는 30대에 대우를 창업했으나 여러분은 40~50대에 시작해도 늦지 않다. 그러니 서두르지 말고 충실히 실력을 쌓아나가길 바란다.”며 “저는 이미 미련이나 욕심을 가지면 안 되는 나이가 됐다. 봉사로 여기고 교육에 도움을 주고 싶다.”고 말했다.
대우세계경영연구회가 운영하는 글로벌청년사업가 양성사업(GYBM)이 올해로 3년째를 맞는다. 수료생 전원이 베트남 현지에서 취업에 성공했다. 현지밀착형 인재를 키우는 것이 목표다. '김우중 사관학교'라 불리는 이 사업은 대우그룹 임직원의 뜻을 모아 시작됐다.
우리 사회에 김우중 같은 불세출의 기업가는 앞으로 나올 수 없을 지도 모른다. 우리 경제는 작은 기업이 환영받고, 약한 기업 흉내를 내야 지원과 보호를 받는 경영환경으로 굳어 가고 있다. 필자는 이글을 통해 김우중이라는 존재가 우리 사회에 어떤 의미인지를 말하고자 하였다. 그의 메시지는 분명하다. 여전히 세계는 넓고 할 일은 많다. 도전하고자 하는 이들에게 필요한 것은 자유다.


최승노 자유경제원 부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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