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년, 미국에서 시작된 서브프라임사태에 이어 유럽에 유로화 위기가 전개되자, 지구촌 곳곳에서는 세계화의 종말과 함께 자유주의에 대한 비난이 쏟아져 나왔다. 그 중심에는 '신자유주의’가 있었다. 하지만 무엇이 신자유주의인가에 대해서는 명확한 논의는 생략된 채, 대중들 사이에서는 '시장만능주의’와 같은 오도된 개념들만이 횡행했다.
만일 신자유주의가 정부개입보다는 시장을 통한 문제 해결을 말하며, 기업에 대한 규제완화 정책이라면 우리는 대한민국 역사에서 그러한 신자유주의가 대한민국의 전후 경제를 어떻게 일으켜 세웠는지 한번 돌아볼 필요가 있다. 이 사례는 제도주의적 관점에서 시장과 정부의 협력이라는 정경협력의 중요성을 일깨운다.
1950년 대한민국 경제는 6·25동란으로 산업 인프라의 초토화를 겪었다. 그러나 전후 재건 사업에 착수한 지 3년이 되는 1956년, 한국의 생산력은 전쟁 전인 1949년 수준을 오히려 넘어섰다. 이해 교통·전력·통신 설비는 1949년 수준을 능가했고 섬유공업은 279% 성장을 기록했다.
공업분야의 생산수준은 1949년 대비 183%의 현저한 신장세를 보이고 있었다. 광공업 생산의 증가로 국민총생산액은 1949년에 비해 약 15% 상회하는 규모로 증가했으며 그에 따라 1인당 국민소득도 1949년 수준을 초과하는 것으로 집계되었다. 이에 주한 미 대사관은 한국경제 연례평가에서 1956년을 '재건단계가 완성’되고 '부흥단계가 시작되는 해’라고 평가하게 된다.
그렇다면 이러한 전후 경제복구는 어떻게 가능했던 것일까.
이승만, 자유경제를 주창하다
1948년 대한민국 건국 후 가장 시급한 경제문제는 역시 토지개혁이었다. 당시 좌파는 무상몰수 무상분배를 주장했고, 우파는 유상몰수 유상분배를, 사민주의적 중간파는 유상몰수 무상분배를 주장했다. 이때 이승만과 우파는 중간파에게 유상몰수 무상분배를 하게 되면 국가재정이 파탄날 수 밖에 없음을 설득하는 데 성공하게 된다. 당시 사민주의 중간파의 경제 인식이 얼마나 허술했는지 보여주는 대목이다.
이승만의 경제이념은 1949년 12월 기자회견에서 잘 드러난다. 당시 관료들과 우파 의원들 대부분 공통된 입장은 '자본주의 계획경제’를 경제이념으로 삼았고, 이를 통제경제로 달성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이러한 통념에 대해 이승만은 다음과 같이 기자회견에서 밝힌다.
“정부 안에나 민간 속에 중첩복잡하고 불필요한 기구가 없지 않으므로 이것은 조속히 없애야 할 것이다. 이와 아울러 불요불급한 관리가 있으면 이것을 감원해야 할 것이고, 또 번잡한 공무원의 계위도 철폐하도록 해야 할 것이다. 경제문제만 하더라도 통제경제책을 없애고 수요공급의 원칙에 의거한 자유경제책을 취하자는 것이 나의 본래 의도다.” <1949년 12월 24일 이승만 기자회견, 경향신문>
이승만은 전 세계에 사회주의 경제이념이 만연하고, 대공황으로 인한 뉴딜정책처럼 거대정부가 일반적인 상식이었던 시기에 작은 정부와 시장원리의 중요성을 파악하고 있었다고 볼 수 있다. 이승만의 이러한 생각은 그가 선교사들의 영향으로 프랑스 혁명의 바탕이 된 합리주의적 구성주의보다는 미국독립혁명의 사상적 배경이었던 스코틀랜드 계몽주의 즉, 경험주의적 자유주의에 좀 더 가까웠던 것이 아닌가 추측된다. 이 부분은 앞으로 이승만의 자유주의가 어떤 사조와 근원의 자유주의였던가를 밝혀보는 중요한 단서가 되리라 생각한다.
어쨌든 이승만은 6·25전쟁 중에 백두진 재무부 장관에게 전쟁 인플레이션 대책을 묻자 그가 '수입내 지출’이라는 원리로 대답한 것을 즉각 이해했다. 아울러 수입내 지출의 민생경제 차원에서 미군정으로부터 넘겨받은 일제 적산, 즉 귀속재산을 하루속히 민간불하해서 경공업에 의한 생필품 공급을 늘려야 한다는 공급주의 경제론을 이해하고 시행했다는 점이 중요하다.
동시에 전시물자가 아닌 영역에서는 통제가 아니라 민간기업의 자유로운 경제활동을 보장했다. 그 결과 '삼백(三白)산업(제분·제당·면방직)’이라는 민간 공급 시스템이 육성되었고 이는 전후 민간기업의 활성화로 이어져, 박정희 시대에 본격적인 경제성장을 주도하는 한국 재벌기업의 모태가 된다.
6·25동란은 한국의 산업 인프라를 초토화시켰으나 삼백회와 같은 민간생산기구가 재건사업에 민생의 중추적 역할을 담당하고 정부는 산업인프라 구축에 노력하는 민관협력 모델을 통해 1956년에는 이미 전쟁 전 수준을 회복하고도 국민소득은 15% 이상 증가하게 된다.
특히 전후 경제복구를 위해 조직된 <재건위원회>는 탁월한 경제관료 백두진의 지휘로 화폐 개혁을 통한 통화 안정과 자유경제제도의 초석을 놓게 된다. 이 시기에 이승만 정권은 경제 발전을 위해 공공 이익에 경도된 헌법 개정이 시급했다. 1954년 백두진 국무총리는 국회에서 개헌의 필요성을 이렇게 연설했다.
“사유와 자유라는 것, 또 국유와 통제라는 것을 비교해 볼 적에, 어떤 것이 더 많은 생산효과를 내며, 어떤 것이 더 빨리 경제부흥, 혹은 산업의 재편성을 가져올 수 있을 것인가……자유진영 민주사회에서는 좀 더 낫게 살아보겠다는 의욕을 국법으로 보장할 적에 생산이 증강되고 산업이 빨리 재편, 발전해 나가리라 하는 것을 여러분도 의심할 바가 없는 것입니다.” <1954년 2월 25일 국무총리 백두진(白斗鎭)의 개헌안 제안 설명>
시장경제로 성공한 전후복구 사업
한국경제의 자유주의 경제시스템의 초석이 다름 아닌 6·25로부터 시작되었다는 점은 역설적이다. 하지만 결국 해방 후 제헌의회가 추동한 사회주의적 국가주도 계획경제가 전쟁으로 인해 불가능해지고 재정이 군비에 몰리는 바람에 민간경제의 활성화가 필연적으로 요청되었다는 점을 생각해 보면 6·25는 어쩌면 대한민국 발전에 자유경제 시스템의 안착이라는 축복은 아니었을까.
백두진을 수장으로 하는 '재건기획팀’은 전쟁이 끝나자 본격적으로 자유주의 경제의 재건 방향을 모색하게 된다. 전쟁 전부터 백두진은 원조를 도입하기 위해서는 미국의 요구에 따라 일본식 통제경제의 잔재를 청산하고, 자유경제로 나아가야 한다고 주장한 바 있었다.
백두진은 모든 계획과 정책은 민영기업의 원리 속에서 구현될 것이며, 귀속재산의 조속한 불하를 통해 원조물자와 국내자본이 가장 능률적으로 결합할 수 있는 경영체제를 확립할 것이라고 천명했다. 당시 원용석 기획처장은 구래의 “관리경제체제를 탈각하고 합리적 경제주의를 관철할 수 있는 자유경제체제를 점차 확립”하도록 할 것이라고 경제정책의 기본과제를 제시했다. 안동혁 상공부 장관도 가격정책에 있어서도 자유경제 원칙으로 가격이 결정되도록 그 장애 요소의 제거에 노력할 것이며 따라서 현재 행하고 있는 물자의 통제도 점차 해결할 예정이라고 밝혔다.
재건위원회를 통해 헌법내 사회주의적 색채들은 지속적으로 사라져갔고 개인의 소유와 자유, 시장경제질서에 대한 원칙들은 보다 강화되어 갔다. 이에는 6·25로 인해 남한 정치권내 좌익세력의 궤멸로 정치적 반대가 없어 추진이 수월했다는 점도 있다.
전후 이승만은 국방원조와 경제원조를 분리해서 미국과 상호방위조약을 맺음으로 군사비 지출문제를 해결하고 경제원조를 통해 중공업 기반의 육성을 꾀하게 된다. 하지만 미국의 생각은 한국의 무리한 중공업 육성은 경제 불안을 야기할 것으로 판단해 일본과 교역을 늘리고 국방에 치중할 것을 요구한다. 일종의 국제적 분업을 요구한 것이다. 하지만 이승만은 그렇게 될 경우 자립경제 기반이 성립되지 않아 자주국가의 꿈이 이뤄질 수 없다고 판단했다.
이승만과 백두진은 미국을 이용해 안보비용을 줄이고 원조경제를 이용해 자립의 기반을 닦은 후 본격적인 자립경제를 추구한다는 전략이었다. 하지만 이러한 전략은 미국의 입장과 갈등을 빚어 약속받은 원조의 집행이 순탄치 않게 되는 어려움을 맞게 되었다. 이승만의 이러한 판단이 옳은 것이었는지는 논란의 여지가 있겠지만 당시 전쟁 후 남북간에 체제경쟁이 본격화된 시점이어서 이승만은 정치적 입장을 우선 고려했다고 볼 수 있다.
결국 이승만 정부는 계획했던 경제부흥을 실현해 보지 못하고 4·19로 몰락하게 된다. 이후 등장한 박정희 정부의 모든 경제개발 계획과 추진의 원리는 이승만 정부에서 기획한 내용을 실천에 옮긴 것이라 볼 수 있다. 다만 박정희 정권의 경제 성공은 이승만 정권의 원조경제를 통한 수입대체가 아니라, 해외시장을 통한 수출전략이었다는 점이 결정적 차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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