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터 드러커(1909~2005)를 말하면 많은 사람들은 그의 경영학 저서들을 떠올린다. 그렇기에 아마도 피터 드러커가 마케팅론이나 재무회계론 같은 것에 정통한 학자였을 거라 생각하기 쉽다. 하지만 드러커의 경영학은 그가 경영학을 만들고자 해서 등장한 것이 아니었다.
마치 라이프니츠와 뉴턴이 각자 자신의 자연 철학과 물리학을 설명할 방법을 찾지 못해 미적분이라는 수학의 영역을 구축한 것처럼, 드러커는 정치경제학자로서, 그리고 사회학자로서 자신의 연구를 시작하면서 인간행동에 관심을 가지고 경영학을 창시하기에 이르렀다. 애덤 스미스가 도덕철학을 연구하며 그 연장선에서 오늘날 근대 경제학의 초석을 만든 것에 비교할 수도 있을 것이다.
3세대에 걸쳐 장수했던 피터 드러커는 사람들의 행동에 깊은 관심을 가졌다. 그러한 계기는 드러커가 독일에서 체험했던 나치와 유대인 박해에 있었다. 이와 관련해서 흥미로운 에피소드가 있다. 청년 드러커는 나치의 한 장교가 거리에서 이렇게 연설하는 것을 들었다고 자신의 서저 <경제인의 종말: 전체주의의 기원>에서 말한다.
“우리는 빵가격이 오르는 것을 원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빵가격이 내려가는 것도 원하지 않습니다. 그렇다고 우리는 빵가격이 제자리인 것도 원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원하는 빵의 가격은 나치가 정하는 그 가격입니다.” 드러커는 나치 장교의 이 말에 많은 사람이 환호했다고 증언했다. 하지만 도저히 이해가 안 되었던 청년 드러커는 옆에 있던 친구에게 “자네, 이게 말이 된다고 생각하나?”라고 물었고, 친구로부터 “자네도 참 딱하네. 말하자면 그렇다는 걸세”라는 대답을 들었다. 그때 드러커는 전체주의의 본질을 깨달았다고 말한다. 즉 사회주의나 자본주의 모두 경제적 합리성에 관한 것인데, 이 경제적 합리성이 사람들 사이에서 사라지면 다름 아닌 전체주의가 도래하게 된다는 것이었다. 드러커는 이러한 전체주의 현상을 '경제성의 종말’이라고 명명했다.
드러커가 제시한 슈탈의 보수주의
피터 드러커는 나치의 파시즘에 자유주의자들의 저항이 실패했다고 말한다. 나치의 탈현실적, 비합리적 선동에 자유주의자들의 합리주의는 설득력이 없었기 때문이다. 이에 드러커는 자신이 멘토로 삼았던 19세기 법철학자 프리드리히 슈탈(Friedrich Julius Stahl)의 보수주의 철학을 소환한다.
'국가는 하나님의 왕국(Kingdom Of God)을 실현하는 존재’로 본 슈탈은 국가와 법은 모두 신의 뜻에 따라야 한다는 기독교 보수주의 철학의 기반을 정립했다. 슈탈은 1840년 베를린 대학 법철학 교수가 되었으며, 19세기 전기에 왕권신수설(王權神授說)을 법철학으로 정립한 보수적 사상가의 대표자이자, 현실 참여 정치인이기도 했다. 그는 나중에 프로이센의 제1보수당 당수가 됐으며 독일 기독교민주당의 토대를 만든 주인공이기도 했다.
왕권신수설은 우리가 아는 것처럼 '왕은 신성하다’는 의미로 국한되는 것이 아니다. 국왕은 세속적 질서를 초월해 역사의 주관자인 신의 뜻에 따라 자비와 선행, 그리고 절대선에 입각한 선정을 베풀어야 한다는 의미다. 그럼으로써 세속의 국가는 하나님의 나라에 근접할 수 있다고 슈탈은 주장했다.
흥미로운 사실은 왕권신수설을 주장한 슈탈이 사회주의의 몰락과 나치즘이라는 광기의 출현을 정확히 예언했다는 점이다. 슈탈은 불완전한 이성에 의한 과도한 설계주의 이념들이 결국 성경의 리바이어던과 같은 괴물을 불러낼 것이며, 그 교만한 이성의 불완전함으로 의해 스스로 멸망할 수밖에 없다고 봤기 때문이다.
슈탈은 이성을 초월한 영성의 질서 안에서 신이 인간에게 부여한 개인의 자유와 책임을 사회의 원리로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러한 슈탈의 사상은 당시 훔볼트와 함께 유럽전역과 프로이센에 막대한 영향을 끼쳤고 아주 오랫동안 유럽의 근본주의적 보수주의 사상이 됐다. 아울러 그의 사상은 피터 드러커에 이어져서 드러커는 자본주의 기업을 하나님의 질서를 구현하는 수단으로 해석했고 CEO를 그러한 초월적 도덕의 실현자로 보았다. 현대 경영학은 드러커에 의해 그렇게 탄생한 것이다.
드러커가 <경제인의 종말>에서 소환해 낸 율리우스 슈탈의 초월적 보수주의가 나치의 파시즘과 투쟁할 수 있는 유일한 사상이었다고 말하는 이유는 정치적 투쟁이 그 본질에 있어 선과 악의 투쟁이며, 이러한 투쟁에 가치 상대주의를 토대로 삼는 이성적 자유주의는 저항력이 없었다고 본 것이다. 실제로 나치 집권기에 독일 자유주의자 그룹인 백장미회는 노자의 <도덕경>을 팸플릿으로 만들어 돌리기도 했다. 좌와 우를 넘어선 비이성적 파시즘에 합리주의적 자유주의는 대중적 설득력을 잃었던 것이다.
대한민국과 바이마르 공화국의 유사성
나치가 집권하던 1930년대의 독일 상황은 대한민국이 걸어온 역사적 경로와 유사한 점이 많다. 후진국 독일이 보불전쟁에 승리한 전쟁 배상금으로 산업화에 성공해 중산층이 등장했던 것처럼 대한민국은 6·25 폐허를 딛고 산업화로 중산층이 등장했다. 이때 독일과 한국 모두 '민족주의’가 큰 통합의 역할을 했다.
독일에서 민주주의 혁명으로 빌헬름 카이저의 라이히 제국이 헌정 공화국으로 바뀌었듯, 대한민국도 권위주의 시대를 끝내고 민주화를 겪었다. 독일에서 사회주의는 몰락했고, 한국에서는 구소련과 동독의 몰락, 그리고 남북체제 경쟁에서 남한이 승리하면서 자본주의에 대한 믿음은 확실해졌다.
문제는 이후였다. 20세기 초반에 독일은 심대한 공황을, 한국은 그보다 70년 후인 20세기 말에 IMF 사태라는 트라우마를 겪게 된다. 자본주의도 결국 대안이 아니라는 생각은 독일과 한국에서 같은 경험을 했던 것이다. 여기에 70년 전 독일은 주변국들의 위협에 놓였고, 한국도 일본 군사대국화와 중국의 노골적인 내정간섭, 그리고 북핵 위기에 놓이게 됐다.
출구가 보이지 않는 상황, 구질서는 무너지고 신질서는 등장하지 못한 70년 전, 독일은 유태인에 대한 마녀사냥에 나섰고, 한국은 대기업과 보수를 '적폐청산’의 대상으로 내세웠다. 70년 전 히틀러의 반자유주의적, 반자본주의적 파시즘과 오늘 대한민국이 같은 궤도를 달리고 있다는 평가를 지나치다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피터 드러커는 '경제인의 종말’에서 자본주의와 사회주의 모두 맞든 틀리든 '경제적 합리성’을 추구하려는 이념인 반면, 파시즘은 비경제적 논리에 입각하기에 '경제인의 종말’로부터 시작된다고 했다. '부자와 재벌들 때문에 우리가 못 산다’는 주장이나, '재벌들이 사내유보금을 쌓아 놓고 투자를 하지 않고 있다’거나, '재벌기업의 경제 집중도가 높아 위험하다’거나 '재벌기업들이 납품단가를 후려쳐 중소기업이 어렵다’는 주장들은 사실이 아니다. 그러한 주장들은 나치가 집권을 위해 동원한 '유태인 악마론’과 본질적으로 그 궤를 같이하는 면이 있다.
합리적이고 신중하기로 둘째라면 서러운 독일인들이 파시즘의 광기에 빠져들었다면, 오늘 그와 유사하게 출구가 없는 한국인들이 가까운 장래에 집단 광기에 빠지지 않으리라는 보장은 없다. 집단 히스테리가 작동하는 상황에서는 비정상이 정상으로 보이기 마련이다. 우리는 보고 싶은 대로 보는 불완전한 인간이기 때문이다. 그러한 광기에 맞설 수 있는 이념은 합리적이고 이성적인 자유주의를 넘어 선과 악의 가치투쟁을 결단할 수 있는 초월적 믿음이 필요하게 된다.
자유주의의 오디세이에서 만나는 파시즘이라는 괴물에 자유주의자들이 들어야 할 무기가 바로 그런 것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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