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칼럼] 한류의 다음 단계는 “주도권이 한국에 귀속되지 않는 것”?

이문원 / 2020-09-17 / 조회: 10,708

많은 점에서 한류의 성공비결이라 알려진 논리와는 배치되는 얘기다. 애초 K팝과 K드라마, K무비 등 성공비결은 국내 소비층 취향이 까다롭고 늘 '더 고도의 것’을 요구해왔기에 가능했단 논리가 지배적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런 논리가 상당부분 들어맞는 것도 사실이다. 그런데 중요한 건, 그렇게 해서 한류가 세계무대로 진출하는 데 성공한 게 지난 단계들이라면, 지금부턴 '그 다음 단계’로 넘어가는 상황이란 점이다.


이 같은 상황을 K팝 산업패러다임 변화로서 해석한 대표적 언론보도가 아이돌 전문웹진 아이돌로지에서 지난 6월 12일 게재한 칼럼 '아이돌 세대론 (1) 2020 아이도랍 세대론’이다. 칼럼은 기존 3세대 아이돌과 현재 막 생성됐다고 주장하는 4세대 아이돌을 다음과 같이 구분한다. 먼저 3세대 개요다.


“3세대는 '케이팝의 탈영토화’가 본격화된 세대로 정리해볼 수 있다. 굴지의 소속사들은 대개 국내 활동을 통해 인지도를 높인 뒤 일본에서 '현지화’된 음악으로 외화를 벌어들이던 기존의 전략에서 벗어나 유튜브로 대표되는 초국적 디지털 플랫폼을 주축으로 국내외 동시성장을 꾀하기 시작했다. 본격적으로 국경의 속박에서 벗어난 콘텐츠를 추구한 것이다. (중략)


2016년 한한령 발발로 2, 3세대 아이돌의 주 무대였던 중화권 시장이 봉쇄되며 케이팝 산업은 큰 타격을 입는다. 그 가운데 새로운 활로를 개척해낸 팀들이 바로 방탄소년단과 블랙핑크다. 방탄소년단은 일찍이 트위터와 네이버 V를 비롯한 SNS를 적극적으로 활용해 일상적인 소통을 시도하고 또 그러한 일상성을 작업물에 녹여내며 대륙과 국적을 불문한 다양한 해외 팬들을 끌어모았고, 2017년 빌보드뮤직어워드(BBMA) 수상을 시작으로 북미 시장에서 기록적인 성과를 거둔다. 블랙핑크도 북미에서의 초기 케이팝 인기를 견인했던 YG 엔터테인먼트 소속 그룹답게 유튜브를 중심으로 북미 대중의 호응을 이끌어내는 데 성공한다. 이외에도 카드, 드림캐쳐 등 유튜브와 뉴미디어를 통해 기존 케이팝 진출 경로를 벗어난 곳에서 더 큰 호응을 얻는 사례들이 늘어나기 시작한다.”


그렇다면 4세대는 또 무엇이 달라진 걸까. 아이돌로지는 이렇게 규정한다.


“이러한 격변기를 거쳐 2019년을 전후로 새로운 세대의 조류가 분명하게 감지되기 시작했다. 3세대가 케이팝의 국경을 허무는 '케이팝의 탈영토화’ 시기였다면 4세대는 완전히 평평해진 지대 위에서 다시 새로운 영역을 형성해가는 '케이팝의 재영토화’ 시기로 정리해볼 수 있다. 케이팝은 미대륙 시장의 장벽까지 넘어서며 완연한 탈영토화를 이뤄냈고, 케이팝의 주도권은 더 이상 한국에 귀속되지 않는다. (중략)


몬스타엑스, VAV, NCT, 카드와 같은 3.5세대 그룹들이 국내보다 해외에서 큰 인기를 구가하게 된 점, 2019년 가장 큰 성공을 거둔 신인 그룹으로 지목되는 투모로우바이투게더와 있지도 데뷔와 동시에 북미 데뷔 쇼케이스 투어를 돌며 해외 팬들을 확보하는 데 주력한 점, 스트레이키즈, 에이티즈, 이달의소녀, 에버글로우와 같은 신생 그룹들이 국내보다 오히려 해외 시장을 정조준하고 있다는 점은 그 방증이라 볼 수 있다. SM의 웨이션브이(WayV, 중국), 슈퍼엠(SuperM, 미국), JYP의 보이스토리(중국), 니지 프로젝트(일본), 제니스미디어콘텐츠의 지스타즈(Z-Stars, 범-아시아 공략)와 같이 한국 회사의 주도로 해외에 본거지를 둔 실험적인 케이팝 그룹들이 출범한 것 역시 '케이팝의 재영토화’로 설명할 수 있겠다.”


이미 해외 K팝 팬들 '입김’이 국내시장까지 좌우하고 있는 K팝 업계 상황


아이돌로지 분석에서 2019년경 시작된 흐름이라 주장된 K팝 '4세대’ 상황은, 이제 단순히 국내에서 인기 있다고 해서 해당아티스트가 시장 주류로 올라설 수 없게 된 현실을 말해준다. 해외에서 유난히 반응이 오는 아티스트들이 따로 있고, 상황에 따라 그런 아티스트들 수익이 국내 인기 아티스트들을 압도하는 경우도 많다.


더 나아가, 이들 해외 팬들 '입김’이 해당 아티스트의 국내 입지를 재정립하는 계기도 마련해준다.


가장 대표적인 부분이 CD 등 기존 피지컬음반 판매량이다. 2020년 현 시점 음악 자체는 대부분 디지털 음원으로 듣지만, 여전히 CD도 살아남아있다. 해당 아티스트 관련 의류나 팬시상품 같은 '굿즈(goods)’로서 기능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만큼 수요도 특별히 많을 리가 없는데, 2019년경부터 특히 중국 측 K팝 팬들이 국내 K팝 아티스트 CD를 어마어마한 규모로 사들이면서 분위기가 크게 바뀌었다.


중국 팬들의 의도는 단순했다. 이런저런 한국 내 음악방송프로그램 순위에서 CD 판매량이 여전히 중점적 지표 중 하나란 사실을 깨닫고, 자신들이 지지하는 아티스트의 '한국 내 성적’을 끌어올리려 각종 공동구매나 판매 사이트 등을 통해 국내 CD를 어마어마한 규모로 사들이기 시작한 것이다.


그래서 언젠가부터 국내 K팝 팬들 사이에선 '음반은 해외인기 척도, 음원은 국내인기 척도’란 인식까지 들어서기 시작했지만, 그마저도 얼마 가질 않았다. 해외 K팝 팬들이 유튜브나 글로벌 음원사이트 스포티파이 등에서 디지털 음원을 소비하지 않고, 직접 멜론이나 지니 등 국내 음원사이트에 가입해 스트리밍함으로써 국내 음원사이트 순위를 올리고 있기 때문이다.


이런 식이면 사실상 무엇이 국내인기 지표이고 무엇이 해외인기 지표인지 자체를 구분하기 어려워진다. 그리고 바로 그렇게 해외 팬들의 막강한 입김이 더해진 수치가 국내 각종 음원사이트 및 음악방송프로그램 순위를 만들어내고 있다. 더 중요한 건, 트렌드성에 크게 치우치는 국내 대중문화계 흐름상 이 같은 각종 순위지표들은 국내시장 흐름에 큰 영향을 끼치게 된단 점이다.


단적으로, '멜론 톱100족’, 즉 단순히 요즘 유행하는 음악을 알고 싶어 최대 음원사이트 멜론 1위부터 100위까지 플레이리스트에 걸어놓는 청취자들이 음원사이트 주 소비층인 상황이다. 그리고 각종 미디어들은 음악방송프로그램 순위를 상당히 중요하게 여기며, 그를 기반으로 지금 인기 있는 아티스트 또는 화제성 높은 아티스트를 가려 보도량을 조절한다.


결국 이런저런 미디어 등을 통해 지금 한국에서 인기 있다고 알려지는 음악 또는 아티스트들은 상당부분 '해외 취향에 맞는’ 그것일 가능성이 점점 더 높아지고 있단 얘기다. 국내와 해외 반응을 엄밀히 구분할 방도가 점점 더 사라져간다. 그러면서 해외 팬들 취향을 고려한, 나아가 해외 취향에 '더 잘 맞는’ 음악과 퍼포먼스 방향으로 국내 K팝 산업 흐름이 움직여가는 분위기도 연출되는 실정이다.


이것이 바로 아이돌로지에서 짚고 있는 “케이팝의 주도권은 더 이상 한국에 귀속되지 않는” 상황, “K팝의 재영토화” 상황이라 볼 수 있다. 이제 더 이상 K팝은 '한국만의 것’이 아니게 됐단 얘기다. 전 세계 음악팬들의 취향이 한 데 모여 방향성이 정해지고, 때론 국내 음악팬들의 취향 여부가 저평가되는 상황까지 충분히 나올 수 있다.


한류는 정확히 '제2의 할리우드’ 방향을 택해 전진하고 있는 것


언뜻 뭔가 크게 잘못돼가는 현실이라 생각될 수 있지만, 그렇지가 않다. 이런 식의 글로벌 산업 방향은 기존 모델이 정확히 존재하는 것이기에 그렇다. 바로 세계대중문화의 메카로 불리는 할리우드, 미국 대중문화산업이 딱 이런 식으로 구성돼있다.


특히 영화산업이 그렇다. 예컨대, 미국 시사주간지 타임의 전속 영화평론가 리처드 콜리스가 1993년 주장한 얘기가 있다.


“지금의 미국영화는 역사상 가장 미국적이지 않다.”


실제로 그랬다. 1993년이면 스티븐 스필버그 감독의 <쥬라기공원>이 나온 해다. 한국에서는 김영삼 정권 당시 <쥬라기공원> 한 편이 벌어들인 수익이 현대자동차 150만대를 판매한 수익과 맞먹는다며 대중문화산업 육성을 주장하던 정책 흐름으로 잘 알려져 있다. 그런데 이 <쥬라기공원>은 당연히 혼자 불쑥 튀어나온 성과가 아니었다. 1980년대 내내 할리우드에선 스티븐 스필버그, 조지 루카스 등 전 세계에 통용될 만한 판타지-SF 영화제작자들 중심으로 철저히 해외시장 취향에 '올인’하는 전략을 펼쳐나갔다. 그렇게 쌓인 역량과 노하우가 비로소 결실을 맺은 게 바로 <쥬라기공원>이었다고 볼 수 있다.


<쥬라기공원> 등 1990년대 이후 할리우드 블록버스터들은 북미시장이란 좁은 범위에서 사고하지 않고, 어떻게 하면 세계시장에 고르게 어필할 수 있을지 고민한 결과물들을 계속해서 내놓고 있다. 국지색은 점점 엷어졌고, 굳이 미국무대가 아닌 영화 또는 아예 판타지세계가 배경인 영화들이 점차 늘어났다.


물론 그렇다고 미국 국지색을 띠는 영화가 아예 사라진 건 아니다. 다만, 어디까지나 상대적으로 적은 예산을 들여 북미수익만으로도 충분히 손익분기를 넘길 수 있는 드라마영화들 몫으로 돌아갔다. 블록버스터 규모로 가면 일단은 세계무대 목적이므로 미국색은 엷어지지만, 그렇다고 북미대중이 자신들 얘길 아예 보고 싶어 하지 않는 건 아니니 딱 그 규모로만 중저예산 드라마를 찍어냈다.


한국의 K팝 산업도 사실상 같은 논리다. 연습생제도 등 탓에 제작비가 많이 들어가는 '대중음악계 블록버스터’ 아이돌상품만이 글로벌 팬들을 향한 콘셉트를 취한다. 음원만으로 충분히 수익을 얻어낼 수 있는 저예산 아티스트들, 주로 발라드 계통 솔로가수들은 오히려 철저히 '한국색’을 유지하며 한국정서와 현실을 더 진하게 표출하려 애쓴다. 그렇게 대중음악시장은 타깃에 따라 뚜렷이 양분화 되는 추세다.


흥미로운 점은, 미국에서는 이 같은 산업 글로벌화가 영화 분야에 치우친 반면 한국에선 정반대로 음악 분야에 치우쳐있단 점이다. 미국 대중음악은 1990년대 이후 오히려 글로벌 체질로의 전환에 실패, 1980년대 같은 글로벌 파급력은 더 이상 얻어내지 못하고 있다. 이 상황을 잘 짚은 게 무크지 브레이크 2018년 2호 홍승구 문화평론가 칼럼 '미국이 대중음악 황제자리에서 내려온 날’이다.


“전 세계 동시배급이 가능해진 영화산업과 달리 콘서트 투어가 전체수익 절반 이상을 차지하던 음악산업은 콘서트 투어에 수월한 북미지역 대중 취향에 맞추는 방향으로 나아갔다. 이것이 패착이었다. 1990년대 미국대중 정서에 천착한 너바나, 펄잼 등 얼터너티브 록밴드 유행은 글로벌한 공감대를 얻어내는 데 실패했다. 한 번 모멘텀을 놓치니 이후로도 미국 대중음악은 세계무대에서 큰 힘을 발휘하지 못했다. 틈새를 치고 각국 대중음악계는 자국시장에서 기존 미국음악이 차지하던 파이를 탈환해내는 데 성공한다. 한국만 해도, 서태지와 아이들이 모든 대중음악 판도를 바꿔놓은 때가 바로 1990년대 초중반이었다.”


한국은 K팝은 물론이고, 영화 역시 2010년대 들어 <부산행> <신과 함께> 등 국지색을 가능한 지운 블록버스터들이 아시아 전역에서 대히트를 기록하면서 점차 글로벌 기반 사고를 막 진지하게 도입하려는 와중이다. 어떤 의미에선 '할리우드보다도 더 할리우드적인’ 산업 흐름으로 나아간다고 볼 수 있다.


한류 최종목표는 결국 “양질의 콘텐츠”란 확고부동 이미지 그 자체


물론 이렇듯 산업의 '주도권’ 개념이 뒤바뀌는 와중에도 상황에 적응하지 못해 시대착오적 불만을 터뜨리는 이들은 적지 앉다. 심지어 업계 내에까지 존재한다. 데일리안 2020년 8월 28일자 기사에서 인터뷰한 23년차 중견작곡가 UCKU(본명 현재욱)의 다음과 같은 발언 역시 상당부분 그렇게 들린다.


“케이팝은 우리나라 스태프들이 만든 곡으로 명성을 얻었는데, 지금은 외국 작곡가들을 많이 기용해 아쉬워요. 케이팝은 우리나라 음악이잖아요. 지금 이렇게 된 풍토가 아쉽습니다. 대형 소속사 아이돌 그룹의 타이틀곡 크레딧에서는 우리나라 작곡진들을 찾아보기 어려워요. 케이팝이 말 그대로 케이팝이었으면 좋겠는데 말이죠.”


K팝은 여전히 정의가 어려운 개념이다. 그러나 어느 시점이건 '반드시 한국 스태프들 중심으로 이뤄져야 하는 음악’이란 원칙(?)이 존재하던 땐 없었다. 어언 20년 전부터도 그랬다. 국내 작곡진 풀의 한계를 인식하고 풀을 유럽 등지로 넓힌 게 시작이었지만, 해외 작곡진 특유의 감각을 통해 해외진출이 더 수월하진 측면도 없지 않다. 그렇게 서로 상호작용을 일으켜가며 글로벌시장에 어필해왔고, 이제 아이돌로지처럼 “K팝은 주도권은 더 이상 한국에 귀속되지 않는다”고 주장되는 상황에까지 이르고 있다.


그런 점에서, K팝, K무비, K드라마 등을 아우르는 '한류’의 미래비전 역시 어렵지 않게 짚어볼 수 있다. 모든 분야가 실제적으로 '할리우드처럼’ 가는 상황이다. 전 세계에서 인력을 불러들여 전 세계에 어필할 만한 상품을 만들어내는 흐름. 그런 방식으로도 할리우드는 여전히 잘 돌아가고, 가장 글로벌화 된 영화 분야 경우 오히려 점점 더 많은 돈을 벌어들이며 더 강한 영향력을 떨치고 있는 상황이다.


이런 식 발상이 등장할 때마다 단골처럼 떠오르는 비판이 있다. “결국 '무국적 문화콘텐츠를 만드는 게 한류의 미래방향이냐”는 힐난이다. 그럼 다시 미국 할리우드를 떠올려볼 필요가 있다. 할리우드 하면 떠오르는 콘텐츠 이미지는 무엇이냐는 것이다. '최고 양질의 콘텐츠’. 그 뿐이다. 그리고 글로벌 콘텐츠산업에서 그 이상 가는 이미지란 존재하질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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