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표만으로 보면 사실상 반론을 제기한다는 게 이상할 정도다. 지난 2월 영화진흥위원회가 발표한 '2019년 한국영화산업 결산 발표’ 보고서에 따르면 지난해 전체 극장관객은 2억 2668만 명으로 전년 대비 4.8% 증가, 역대 최고치를 경신했다. 매출액도 전년 대비 5.5% 증가한 1조 92410억 원으로 역대 최고다.
더 주목해야 할 건 한국의 인구 1인당 연평균 영화관람 횟수다. 무려 4.37회로 집계됐다. 이는 아이슬란드의 4.2회를 넘어서며 세계 1위로 올라선 수치다. '영화의 메카’라 불리는 미국도 1인당 연평균 영화관람 횟수는 4.0~4.2회를 맴도는 수준이다. 진정 세계 최고 영화광들의 나라라고 볼 수밖에 없다.
이 같은 대중의 열성에 힘입어 한국영화시장은 2019년 북미(미국+캐나다), 중국, 일본에 이어 세계 4위 규모 시장에 등극했다. 북미가 114억 달러, 중국이 93억 달러, 일본이 24억 달러, 그리고 한국과 영국, 프랑스, 인도가 지난 수년 간 15~17억 달러 규모로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는 중이다. 그 뒤로 독일, 멕시코, 러시아 등이 늘어서 세계 10대 영화시장을 이룬다. 그리고 그중 가장 인구가 적은 나라가 한국이다. 위 압도적인 1인당 연평균 영화관람 횟수 덕에 적은 인구로도 세계 4위 시장규모까지 이른 셈이다.
그러나 이 같은 '세계 최고 영화광들의 나라’ 한국의 이미지는 이번 코로나19 사태와 함께 그간 좀처럼 드러내지 않았던 '본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하나씩 상황을 살펴보자.
영화 총매출 75% 이상이 '극장’ 매출로 구성돼있는 기이한 시장 환경
코로나19 사태 이후 한국영화산업은 사실상 궤멸 위기다. 밀폐 공간 공포 탓에 극장업이 궤멸해버렸으니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전 세계적으로 다 그렇다. 이에 미국 등 영화시장들에선 넷플릭스나 훌루 등 웹 기반 OTT 중심으로 영화개봉 방향을 틀고 있다. 이미 '트롤: 월드 투어’ 등이 극장 개봉과 동시에 OTT로 공개됐고, 아직 극장에 걸려있던 '인비저블 맨’ 등 히트작들도 재빨리 극장 개봉을 끝내고 OTT로 직행, 수익을 보전하는 추세다.
물론 한국서도 같은 흐름이 나오긴 했다. KT, SK브로드밴드, LG유플러스 등 IPTV 3사와 케이블TV VOD서비스를 담당하는 홈초이스 측에서 코로나19로 극장 개봉이 취소되거나 연기된 신작들을 집에서 감상할 수 있도록 극장 개봉일과 동시에 VOD로 서비스하고 있다. 5월 21일 할리우드 영화 '블러드샷’을 시작으로 29일엔 '국도극장’이, 6월 10일엔 '뷰티풀 데이 인 더 네이버후드’가 IPTV와 디지털 케이블TV로 공개될 예정이다.
그러나 한국영화업계 기대는 절대 미국만큼 크지 않다. 이유는 단순하다. 한국은 극장이 영화산업의 절대중심이기 때문이다. 영화진흥위원회에 따르면 지난해 기준 한국영화산업 전체매출에서 극장매출이 차지하는 비중은 무려 76.3%에 달했다. 한국에서는 극장 비중이 늘 75% 선 정도를 유지하고 있다. 나머지가 홈미디어 2차시장과 해외수출 등으로 채워진다.
그에 반해 미국은 이미 1990년대 초반, VCR 등 영화 2차시장 규모가 1차시장 극장을 앞지르기 시작했고, 이후론 그 격차가 점점 벌어지는 추세다. 다른 나라들도 상황은 크게 다르지 않다. 2차시장 소비여력을 갖춘 1인당 GDP 3만 달러 이상 국가들 중 한국만큼 극장수익이 비대하게 큰 비중을 차지하는 영화산업은 전무하다.
그리고 위 세계 영화시장 규모 순위 역시 실제론 극장을 통한 1차시장 규모만 따진 것이다. 워낙 넓게 미디어가 분포돼 포착이 어려운 2차시장, 나아가 완구 등 관련 상품시장을 지칭하는 3차시장까지 모두 포함하면 위 시장 순위는 완전히 달라질 수 있다. 한국은 4위가 아니라 15위권에도 못 들리란 예상이 지배적이다. GDP 순위보다도 더 떨어진단 얘기다.
그러니 아무리 웹 기반 플랫폼들이 도와주겠다고 나서봤자 영화업계 측에선 별다른 기대를 갖지 않는다는 것. 전체 매출 75% 이상을 차지하는 파이가 한꺼번에 날아가 버렸으니 그를 보상해줄 방도는 어디에도 없는 셈이다. 넷플릭스 등 OTT 공개로도 상당부분 수익을 보전할 수 있는 미국과는 조건이 전혀 다르다. 한국은 그저 '극장에서 영화를 보는 것’을 좋아하는 영화시장일 뿐, 영화란 장르 자체에 애착을 지녀 어느 미디어로건 맹렬히 소비하려 드는 분위기는 절대 아니란 결론이다.
영화 마니아층조차 두텁지 않아 2차시장이 성립되지 못하는 특이한 분위기
예시는 또 있다. 5월1일 영화진흥위원회 집계에 따르면 지난 5월 한 달간 극장 총관객수는 약 152만 명으로 드러났다. 지난해 5월 총관객수는 1806만 명이었고, 결국 지난해의 1/12 토막나버렸단 얘기다. 물론 지금은 코로나19 사태 탓에 될성부른 기대작들이 모두 개봉계획을 중단한 상태여서 소위 '볼 영화가 없기에’ 이렇게 된 탓이 크지만, 아직 쟁쟁한 개봉작들이 즐비했던 2월에도 총관객수는 전년 동기 대비 1/8 정도에 불과했다.
가장 중요한 건 이 같은 결과가 CGV 등 대표 극장체인들이 미국처럼 셧다운을 하지 않은 상태에서 벌어진 일이란 점이다. 영화는 계속 돌리고 있는데 그저 대중이 가질 않은 것뿐이란 얘기다. 그럼 우리보다 1인당 연간 영화관람율이 떨어지는 미국에서 아직 AMC 등 대표 극장체인들이 셧다운하기 직전 상황과 비교해볼 필요가 있다. 미국에서는 전년 동기 대비 50~60% 선, 즉 반 토막 정도에 불과했다. 한국처럼 1/8 토막씩 나진 않았단 얘기다. 이는 곧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화를 보러 극장을 찾는 진성 영화광들이 한국엔 그만큼 적단 것을 의미한다.
돌이켜보면 과연 한국대중이 영화란 장르에 그렇게 애착을 지니고 있는 게 맞는지에 대해선 늘 의문이 존재해왔다. 대표적으로 1980년대 가정용 VCR의 폭발적 보급에 힘입어 1990년대 초반 시도됐던 셀쓰루(sell-through) 비디오, 즉 대여용이 아닌 판매용 비디오의 대대적인 폭망 사례를 들 수 있다. 어느 정도 생활수준이 되는 국가들에선 좋아하는 영화나 애니메이션 등에 소장가치를 느끼는 마니아층이 자연스럽게 형성돼 셀쓰루 비디오시장도 일반 렌털시장만큼이나 활성화되는 게 상례다. 그런데 이상하게 한국에서는 모조리 1회성으로 렌털만 하지 굳이 영화를 소장하려 들진 않더란 것이다.
당시 대우비디오를 중심으로 시작됐던 셀쓰루 비디오는 1990년대 중반도 채 못가서 사업을 접었고, 이 같은 분위기는 1990년대 후반 DVD로 2차시장 미디어가 옮겨간 뒤로도 크게 달라진 게 없었다. 오히려 DVD 셀쓰루 시장은 더더욱 폭망해, 연간 극장흥행 10위 내 들어갔던 영화 DVD가 출시 1년 동안 100장도 채 팔리지 않는 진풍경을 낳기도 했다.
한국엔 그만큼 영화 마니아층이 적고, 마니아까진 아니어도 영화 장르 자체에 애착을 보이는 대중 또한 적단 방증이다. 그런데도 1인당 연간 영화관람 횟수는 세계 1위. 이처럼 기이한 풍경은 대체 어떤 시장 분위기를 드러내는 걸까.
한국에서 영화 관람은 가장 싸고 오래 즐길 수 있기에 선택되는 야외여가일 뿐
여러 측면에서 한국인들의 영화 관람이란 실제적으로 '야외에서 가장 싼 값에 가장 오래 즐길 수 있는 여가’이기에 선택되고 있단 분석이다. 그것뿐이다. 그리고 이 같은 측면이 강조되며 영화관람 자체가 급격히 늘기 시작한 건 1997년 IMF 외환위기 즈음부터다. 동시기 대기업 멀티플렉스 체인이 들어서며 영화 관람이 보다 쾌적한 레저로 인식된 부분도 크지만, 특히 1998~2000년의 급격한 관람율 폭증은 아직 멀티플렉스가 본격적으로 퍼져나가기 전 상황이란 점에서 의미가 깊다.
비슷한 맥락에서 만화카페, 즉 옛 만화방의 부활도 생각해볼 수 있다. 영화보단 취향을 더 많이 타는 장르인지라 영화만큼 대표적인 여가로 자리 잡진 못했지만 그래도 경제 불황, 특히 청년실업이 가속화되는 시점이 되면 어김없이 다시금 부활하곤 한다.
“실질소득은 감소했지만 소비를 더 줄여 생기는 불황형 흑자 속에 단돈 1000원이라도 아끼려는 불황형 소비가 나타나고 있다. 대학가 주변엔 한 푼이라도 절감하려는 20대들을 위한 공간이 생겨나고 있는 중이다. 최근엔 칙칙했던 만화방이 커플 남녀가 큰 돈 들이지 않고도 이용할 수 있는 만화 카페로 변신해 화제가 되고 있다. (중략) 1996년 말 전국에 최대 1만2000여곳이 존재할 것으로 추정되던 만화방은 2012년 기준 3638곳에 불과할 만큼 하락세를 거듭하고 있었지만 놀숲을 비롯한 카툰공감, 벌툰, 카페데코믹스 등 프랜차이즈 업체가 늘면서 옛 명성을 회복 중이다.” (아시아경제 2016년 6월 1일자 기사 '불황 속 부활하는 만화방...젊은층 새 여가 트렌드로’ 중)
한편 위 기사에선 흥미로운 대목이 하나 더 등장한다.
“손님 80% 정도는 커플이다. 소셜커머스로 할인을 받으면 2명이서 2시간 넘게 만화 카페에 있어도 1만원이 안 되는 금액으로 만화도 보면서 음료수도 마실 수 있어 발길을 끈다.”
영화=극장관람도 사실상 같은 맥락으로 소비가 이뤄진다. CGV리서치센터에 따르면 2017년 '혼영’, 즉 1인 관람객 비중은 전체의 16.9%에 불과했다. 몇 년 새 크게 뛴 게 고작 그 정도다. 절대다수는 2인 관람, 즉 데이트 무비로서 소화되고 있었다.
결국 한국인의 주류여가란 '혼자’ 즐기는 마니아형 여가가 아니라, 어디까지나 '관계’에 종속되는 여가일 뿐이란 얘기다. 그만큼 한국사회에선 사람과 사람 간 관계가 가장 중요하고, 여가뿐 아니라 사실상 거의 모든 액티비티가 그를 중심으로 돌아간다고도 볼 수 있다.
영화가 딱 그렇다. 사람과 사람 간 '관계’ 속에서 함께 즐기는 여가로서 가장 '만만한’ 야외여가, 가장 싼 값에 가장 오래 즐길 수 있는 야외여가로서 선택된 것에 불과하다. 절대 그 자체로 개개인에 필수불가결한 취미요소로서 자리 잡은 건 아니다. 그러니 극장 매출이 전체의 76.3%를 차지하는 기형적 구조가 나오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보러 가고야 마는 마니아층은 희박한 것이다.
그런 점에서 한국은 절대 '영화광들의 나라’ 같은 게 아니다. 그저 '극장을 많이 찾는 나라’에 더 가깝다. 어떤 의미에선 극장에 가기 위해 영화를 보는 것이지, 영화를 보기 위해 극장을 찾는 건 아니라고까지 할 만하다.
'영화광들의 나라’가 아니라 그저 '극장나들이를 즐기는 나라’
끝으로, 단순히 싼 값에 오래 즐길 수 있는 야외여가, 그러면서도 '관계’ 속에서 진행될 수 있는 여가는 비단 극장 관람뿐이 아닌데 왜 영화가 두드러져 1인당 연간 관람율 세계 1위까지 차지하게 됐느냐는 부분을 생각해보자. 이에 대해선 의외로 교육계에서 의견을 제시한 적이 있다. 오창석 교육평론가가 쓴 월간 교육저널 2004년 7월호 칼럼 내용을 보자.
“한국 젊은이들 데이트코스는 10대나 20대나 30대나 모두 마찬가지다. 밥, 커피, 영화. 요즘은 노래방 하나 더 낄까. 그리고 그 코스가 순서만 바뀌어 반복된다. 왜 이렇게 '노는 일’에 서투르고 천편일률적인 걸까. 그것밖에 해본 게 없어서다. 학교성적에 모든 것이 집중된 10대, 20대를 겪다보니 제대로 된 취미를 가질 수가 없었다. 집에서 공작기계라도 만들면 불호령이 떨어지고, 하다못해 소설책을 읽고 있어도 하라는 공부는 안 하고 쓸데없는 짓한다며 핀잔 듣기 일쑤다. 요즘은 수영도 자전거도 못한다는 아이들이 태반이다.
그러니 다 커서도 가만 앉아서 멀뚱멀뚱 쳐다보기만 하면 되는 영화, 드라마만 보고, TV음악프로그램에서 보고들은 노래들을 노래방 가서 따라 부르는 것만 하게 된다. 다양한 취미들이 없다. 다양한 취미들이 없으니 그 취미 기반으로 사람을 만나는 일도 드물다. 결국 밥, 커피, 영화만 반복된다.”
한편 홍승구 문화평론가는 자신의 프랑스 유학경험에 비춰 더 흥미로운 시각을 제시한다.
“한국선 극장업과 요식업이 지나치게 잘 된다. 그를 지탱해주는 건 2030 미혼남녀들이다. 상당부분 데이트코스로서 소비가 이뤄진다. 요식업 같은 경우 주점까지 포함하면 동성끼리도 자주 간다. 그런데 최소한 미국이나 유럽 등지는 분위기가 다르다. 일단 남녀가 데이트를 시작하면 '인도어’ 데이트가 부쩍 는다. 둘 중 한 명이 사는 집을 찾아가 노는 것이다. 이런 얘길 꺼내면 한국선 '라면 먹고 갈래?’ 따위 성적(性的)인 발상만 떠올리지만, 사실 집에서 할 수 있는 놀이거리는 많다. 영화도 집에서 보고, 밥도 집에서 만들어 먹는다.
반면 한국은 여전히 결혼 전까진 부모가 자식을 데리고 사는 문화다. 학교나 직장이 집에서 다닐 수 있는 거리라면 절대 부모 집을 떠나지 않는다. 미국이나 유럽 등지는 다르다. 대부분 성인이 되면 가능한 빨리 독립해 나간다. 한국선 그게 안 되니 집에서 데이트도 못하고, 집으로 친구들을 불러 놀기에도 불편하다. 한국서 극장업과 요식업이 그토록 비대하게 팽창한 이유가 거기에 있다. 사람을 만나 놀려면 무조건 밖으로 나가야 한다. 그런데 막상 밖에 나가면 또 할 게 없다. 획일적 문화에서 자라 할 줄 아는 것도 없기 때문이다. 그러니 만만한 극장이나 가고, 밥이나 먹는다. 그것들에 딱히 관심 있어 하지도 않으면서.”
1인당 연간 영화관람 횟수 세계 1위, 그러면서도 영화마니아층은 두텁지 않고 영화소비 3/4 이상이 극장으로 '올인’되다시피 한 이 희한한 풍경의 실체는 이처럼 다양하고 복합적인 요인들이 만나 이뤄지고 있는 셈이다. 별다른 취미를 키우지 못하며 성장한 사람들이 가장 싸고 오래 즐길 수 있는 야외여가로서 선택되고, 그를 뒷받침해주는 사회문화적 환경이 또 따로 존재한다. 분명한 건, 어찌됐건 한국은 '영화광들의 나라’ 같은 건 절대 아니란 점이다. 누군가 물어본다면, 그저 '극장나들이를 즐기는 나라’ 정도로 설명해줄 필요가 있다. 어쩐지 “책은 안 팔려도 대형서점은 늘 붐비는 나라”란 우스개와 맞물리는 듯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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