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도 어느 정도 통용되는 인식이다. 그 시작이 언제부터인지는 조금 복잡한 얘기지만, 국내에서는 대략 1960년대 무렵부터로 여겨진다. 키네마준보 등 각종 일본영화잡지들에 영향을 받은 (때론 사실상 베끼기까지 한) 이런저런 평론들이 국내 신문지상을 통해 게재되면서부터다. 그리고 일본은 문화적으로 유럽 지향적 측면이 본래 강하다.
그런데 이 문제는 그렇게 간단히 해석될 수 있는 건 아니다. 위 고정관념은 사실상 미국 문화계에서조차 아주 오랫동안 보편화되다시피 한 것이었기 때문이다. 동서양 두루 걸친 이 고정관념을 이해하기 위해선 보다 넓은 시야가 필요하다. 또 시대를 꽤 많이 거슬러 올라가야 그 원인점을 발견하게 되기도 한다. 하나씩 살펴보자.
일단 위 인식, 또는 고정관념이 과연 실제와 맞아떨어지는지부터 생각해보자. 과연 유럽영화는 예술성 차원에서 할리우드로 대변되는 미국영화보다 월등한 평가를 받고 있는 게 맞을까. 물론 문화예술 분야에 있어 일률화된 평가 잣대 같은 건 나올 수 없지만, 영화장르의 경우 영화잡지 사운드 앤 사운드가 매 10년마다 집계해 발표하는 역대 영화 베스트 순위를 많이들 참고하곤 한다.
사이트 앤 사운드는 영국에서 1932년 창간된 가장 유서 깊은 영화전문지 중 하나다. 1952년부터 전 세계 저명 영화비평가들과 영화감독들 중 1,000여명 규모의 투표인단을 선정, 역사상 가장 위대한 영화를 꼽는 투표를 실시해왔다. 가장 최근 순위는 2012년 결과다. 동점작 포함 101편, 93위까지 순위가 매겨져있다. 소위 '예술적 차원’에서 사상 가장 뛰어난 영화는 무엇이었는지에 대한 당대 영화전문가들 평가의 집대성이라 볼 수 있다.
2012년 순위에서 1위는 알프레드 히치콕 감독의 1958년 작 '현기증’이 선정됐다. 이어 2위는 오손 웰즈 감독의 1941년 작 '시민 케인’이다. 둘 다 미국영화다. 그 외에도 10위 내 미국영화 '일출’(1927), '2001: 스페이스 오디세이’(1968), '수색자’(1957) 등이 더 있다. 10위 내 절반이 미국영화인 셈이다. 집계된 총 101편을 놓고 봤을 때도 상황은 크게 다르지 않다. 101편 중 37편이 미국영화(미국/영국 합작 2편, 미국/이탈리아 합작 1편 포함)이다. 무려 1/3이 넘는다. 국가 단위로 봤을 땐 단연 미국영화 비중이 가장 높다. 흔히 예술영화 메카처럼 여겨지는 프랑스도 합작영화까지 모두 포함해봐야 28편이었다.
물론 미국영화, 할리우드영화가 대중적이며 상업적이란 이미지가 대표적인 건 사실이다. 그런데 이쯤 되면 좀 다른 시각에서 상황을 바라볼 필요도 있다. 미국에서는 '대중적이고 상업적인 영화도 잘 만든다’는 식으로 말이다. 실제로 대부분 국가의 영화시장 50% 이상은 미국영화가 차지하고 있다. 수없이 트렌드를 바꿔가며, 지금은 슈퍼히어로 영화 중심으로 또 유행을 바꿔 시장을 장악하고 있다. 그렇게 상업적으로 압도적인 위상을 차지하는 만큼이나 예술적 가치가 높은 영화들도 잘 만들고, 또 많이 만들어내는 곳이 미국이란 얘기다. 그야말로 세계영화산업 자체의 메카가 맞다.
결국 영화란 장르에 있어선 '뭐든지 다 잘 하는’ 미국에 비해, 상업적 파급력은 상당히 약한 프랑스 등 유럽영화들은 그보단 차라리 예술적 가치가 높은 작은 영화들 쪽 지명도가 높은 편이니, '개중 돋보이는’ 방향으로 이미지가 굳어져버린 것에 불과하단 것. 미국영화전문지 무비라인 평론가 스티븐 파버 등이 처음 주장했던 논리인데, 그럴싸한 구석이 있다.
오랫동안 유럽에 대한 문화적 열등감에 시달려왔던 미국문화계 사정
그런데 여기서 더 살펴볼 부분이 있다. 위 언급한 또 다른 측면, 즉 오랫동안 미국영화계와 관련 미디어에서조차도 예술영화 메카는 어디까지나 프랑스를 위시로 한 유럽영화계란 고정관념을 키워왔단 점이다.
대략 1970년대 초반까지만 해도 그랬다. 미국영화계의 유럽 숭배는 어마어마했다. 잉그리드 버그먼, 버트 랭캐스터, 로버트 드니로 등 수많은 할리우드스타들이 어떻게든 적은 출연료로도 유럽영화에 출연하고 싶어 했고, 로먼 폴란스키 등처럼 촉망받는 유럽감독들은 언제든지 맘만 내키면 할리우드로 진출할 수 있었다. 프랑소와 트뤼포, 장 뤽 고다르 같은 유럽영화감독이 홍보 차 미국에 들르면 마치 왕족 순방을 맞이한 듯 온 미디어가 떠들썩했다.
이 같은 분위기를 이해하기 위해선, 먼저 20세기 미국역사와 그 문화 분위기부터 짚고 넘어갈 필요가 있다. 이를 대변해줄 가장 적합한 문화예술 콘텐츠가 미국작가 F. 스코트 피츠제럴드의 1925년 소설 '위대한 개츠비’다. 이미 할리우드영화로도 수차례 제작돼 책을 안 읽은 이들이라도 그 내용 정돈 대략이나마 알고 있을 법하다.
'위대한 개츠비’ 내용은 단순하다. 뉴욕주 롱아일랜드에 제이 개츠비란 이름의 백만장자가 이사 와 매주 호화스러운 파티를 연다. 알고 보니 그 바로 근처 부촌에 사는, 이미 다른 남자의 아내가 된 옛 연인 데이지를 만나기 위해 온 것이다. 당시 무일푼이었던 개츠비는 결국 데이지와 결별해야 했고, 주류밀수 등 온갖 방법을 동원해 돈을 벌어 겨우 데이지와 어깨를 나란히 할 위치까지 온 것. 거기서부터 새로운 갈등과 번민이 펼쳐지기 시작한다.
'위대한 개츠비’에서 주인공 제이 개츠비는 1920년대 당시 미국이란 나라 그 자체 입지를 의인화한 인물로 잘 알려진다. 제1차 세계대전 직후 급성장하기 시작한 신흥강국 미국의 세계 속 입지 말이다. 톰 뷰캐넌-데이지 부부가 상징하는 부류, 즉 유럽 상류층이 그대로 미국에 이식된 '올드머니’와 청운의 꿈을 품고 미국에 와 밑바닥서부터 성장한 '뉴머니’ 개츠비 관계는 그 자체로 아직까지 세계 패권을 쥐고 있던 귀족적 유럽사회와 그에 콤플렉스를 느끼며 어떻게든 그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고픈 미국사회 면면을 상징한단 해석이다.
미국이 자유세계 리더로서 초강대국 길을 걷기 시작한 건 엄밀히 1945년 제2차 세계대전 종전 직후부터다. 특히 1953년 6·25전쟁이 휴전되고 본격적 냉전시대로 돌입하면서 미국의 자유세계 리더 입지가 굳어지기 시작했다. 그러니 제이 개츠비가 꿈꾸던 유럽과의 '동등한 위치’를 넘어 그 이상으로 나아가기 시작한 건 엄밀히 1960년대부터라고 봐야한다.
당연히 일반대중이 느끼는 인식은 그보다 더 느리게 움직일 수밖에 없고, 그중에서도 문화적 인식은 더더욱 그랬다. 무조건 유럽문화와 그 상품들이 최고이며, 미국 것은 그와는 비교할 수 없는 단순 엔터테인먼트에 불과하단 인식이 1960년대까지도 지배적이었다. 괜히 미국서 1960년대 비틀즈를 필두로 대중문화계 '브리티쉬 인베이전(British Invasion)’이 벌어진 게 아니다. 그게 선진문화란 인식들을 공유하고 있었기에 대중과 미디어가 일거에 일으킨 붐이다. 이 같은 유럽 콤플렉스는 곧 프랑스, 이탈리아, 스웨덴 등지 콘텐츠로도 이어졌고, 이들은 당시 지금으로선 상상도 못할 흥행수익을 거둬들이며 승승장구했다.
결국 예술적 가치는 유럽영화가 최고이고 미국영화는 재미는 있지만 그저 서커스공연과 같은 눈요깃거리에 불과하단 인식은, 상당히 많은 차원에서, 미국발(發) 고정관념에서 출발했을 가능성이 크단 얘기다. 그리고 미국문화계가 이 같은 콤플렉스에서 온전히 벗어나는 덴 생각보다 훨씬 오랜 시간이 걸렸다. 대략 1980년대 후반~1990년대 초반 즈음 돼서야 미국영화가 지닌 예술적 가치들을 본인들 스스로 이해하고 자찬하는 단계까지 갔다.
흥미로운 점은, 이 같은 가치 전복, 고정관념 파괴를 처음 실행한 건 미국문화계가 아니라 오히려 프랑스문화계였단 점이다. 기존 예술적 가치를 파괴하는 대안적 문화운동인 누벨바그 운동 세대들이 일제히 미국 장르영화들을 칭송하고 나서면서부터다. 웨스턴, 갱스터, 호러, 스릴러 등에 이르기까지, 미국에서는 오히려 단순 엔터테인먼트라 저평가하던 장르영화들을 향해 프랑스 신세대 영화광들이 '작가주의적 가치가 있다’는 식으로 띄워주면서 미국 내에서도 분위기가 조금씩 바뀌어가기 시작한 것이다.
다른 식으로 보자면, 결국 자신들 콤플렉스를 극복하기 위해선 바로 그 콤플렉스 대상으로부터의 인정밖에 다른 해결책이 없었다고도 볼 수 있겠다.
1980년대 성립된 한국의 미국영화 폄훼논리, 그 바탕이 된 사연 둘
그럼 한국 입장은 또 어떨까. 앞서 언급했듯, 일본영화잡지들을 베낀 국내 언론 논조 탓에 유럽=예술, 미국=상업 인식이 굳어져버린 것에 불과할까.
그보단 좀 더 복잡한 문제다. 일단 유럽=예술, 미국=상업 인식이 가속화된 시점은 1980년대란 점에서 그렇다. 1980년대는 한국에서 영화전문미디어 초창기이기도 했다. 최초의 영화전문월간지 스크린이 창간된 게 1984년, 이어 1989년엔 월간 로드쇼가 창간됐다. 물론 이들도 상당부분 일본잡지 논조에 영향을 크게 받긴 했지만 (스크린은 아예 일본잡지 라이선스를 취득해 창간된 경우), 문제는 1980년대 즈음 이르러선 일본영화잡지들도 서서히 논조를 바꾸기 시작했단 점이다.
1960년대 후반에서 1970년대 내내 아메리칸 뉴 시네마 트렌드 등에 힘입어 새롭게 거듭난 미국영화를 인정하기 시작했다. 프랜시스 포드 코폴라, 마틴 스콜세지, 스티븐 스필버그, 브라이언 드 팔머, 우디 앨런 등 1970년대 발굴된 신세대 영화감독들이 붐을 일으키면서 일본영화잡지들도 아메리칸 뉴 시네마를 적극 지지하고 나선 것이다.
그럼 왜 한국선 1980년대에도, 아니 오히려 1980년대에 더 적극적으로 미국영화의 '무가치함’을 주장하며 반대급부로 유럽영화 칭송에 발 벗고 나서게 된 걸까. 크게 두 가지 원인을 들 수 있다. 먼저 1980년대 한국사회의 극단적 반미(反美)감정을 들 수 있다. 당시 상황을 회고하는 국민일보 2016년 7월 6일자 기사 '미국ㆍ소련 맞붙은 농구 준결승전...韓 국민들 소련 열렬히 응원’을 보자.
“1988년 9월 28일 잠실체육관. 88서울올림픽 남자농구 준결승전에서 미국과 소련이 맞붙었다. 1972년 뮌헨올림픽 이후 16년 만에 재격돌하는 빅매치였다.
하지만 승부보다는 한국의 반미감정이 극명하게 드러난 경기로 더욱 주목받았다. 관중들은 소련을 열광적으로 응원했다. 손으로 흔들 수 있는 붉은 소련 국기 수백 개가 나부꼈다. 미국 선수가 자유투를 던질 때는 야유가 쏟아졌다. 소련이 82대76으로 미국을 누르자 경기장은 환호로 뒤덮였다. 한 외신 기자는 “소련의 모스크바 홈경기 같았다”고 표현했다.
한국 정부와 정치권이 나서서 국민들의 자제를 호소할 정도였다. 미국 언론들은 6·25전쟁 당시 북한을 도왔던 소련을 응원하고 남한을 위해 싸웠던 미국에 야유를 퍼붓는 이해할 수 없는 현상이 한국에서 빚어지고 있다고 보도했다. 88올림픽 안전 개최를 위해 노력했던 미국 정부는 한국 정부에 불만을 전달했다.
당시 반미감정은 여러 요인이 복합적으로 맞물린 결과였다. 5·18민주화운동에 대한 미국의 책임론과 당시 미국의 한국 시장 개방 압력은 반미감정이 불붙을 수 있는 환경을 제공했다. 여기에다 미국이 한국을 얕본다는 느낌을 주는 사건·사고가 불씨 역할을 하면서 반미감정은 폭발했다.”
이 같은 전반적 반미감정에 더해 영화장르와 직결되는 갈등도 더 발생했다. 이른바 'UIP 영화직배’ 사건이다. 다음은 강준만 전북대학교 교수 저서 '미국사 산책 12-미국 '1극 체제’의 탄생’에 묘사된 당시 상황이다.
“미국의 거센 영화시장 개방 압력 때문에 1986년 말에 영화법이 개정된 결과, 1988년 1월 UIP와 20세기폭스사의 국내 영업이 허가되었다. 특히 미국 직배영화사 UIP의 활동은 영화계에 큰 논란을 불러일으켰다. (중략) 1988년 9월 2일 서울의 32개 영화관은 조기를 내걸고 하루 동안 휴관했다. 다음날인 8월 24일 드디어 '위험한 정사’가 코리아극장, 신영극장 등 전국 9개 극장에서 개봉되었다. 영화감독, 제작자를 중심으로 한 영화인들은 명동의 코리아극장과 신영극장 앞에서 상영저지 시위를 벌였으며, 이 시위는 10월 7일까지 계속되었다. 9월 30일엔 농성 영화인들이 신영극장의 스크린을 페인트로 훼손하는 사건까지 일어났다.”
이러니 당시 한국영화산업과 밀접한 이해관계를 지녔던 관련 미디어들도 일목요연한 미국영화 폄훼에 들어갈 수밖에 없었다. 기존 반미감정 무드에 소위 '밥그릇’ 차원 문제까지 겹친 특이한 반(反)미국영화 풍조였던 셈이다. 그러니 이미 다른 국가들에선 사실상 사멸단계에 들어간 유럽=예술, 미국=상업 논리가 '가장 늦게까지’생명력을 유지하게 됐던 셈이다.
결국은 '모든 걸 다 가진 강자’에게서 '권위’만큼은 뺏고 싶은 대중심리
언급했듯, 1990년대 초반에 이르면 미국문화계도 미국영화 우수성을 스스로 인정하기 시작한다. 1993년 재밌는 사건이 있었다. 할리우드영화 '쥬라기공원’이 프랑스영화계에서 야심차게 내놓은 영화 '제르미날’ 흥행을 위협하자 프랑스미디어 전체가 할리우드를 비난하고 나섰을 때, 뉴스위크와 인터뷰한 미국 유니버설영화사 간부는 이렇게 답했다.
“우린 눈만 뜨면 오늘은 또 유럽을 어떻게 엿 먹일까 고민하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우린 우리 일하느라 바쁜 사람들이에요. 그쪽도 열심히 해서 아무도 관심 안 갖는 칸영화제 같은 데 내보내 서로서로 칭찬하며 상 나눠 타가면 되잖아요.”
그런데 한국선 유난히 이 같은 고정관념이 잘 깨지지 않고 있다. 인식의 관성이 그만큼 심하다기보다, 무조건 '크고 강하고 잘 나가는 것’을 경계하고 폄훼하려는 정서, 대략 '반(反)대기업 정서’와 유사한 맥락에서 벌어지는 일이라 볼 수 있다. 뭐든지 다 잘 나가는 할리우드에 '권위’까지 더 얹어주며 존경을 보내주긴 또 싫단 것이다. 그렇게 잘난 만큼 예술성 같은 고상한 차원에선 인정해주지 않는 게 나름의 '균형감각’이란 식 발상이다.
물론 기괴한 얘기지만, 우리 사는 세상에 이와 유사한 차원 기괴한 일들은 한두 가지가 아니다. 어찌됐건 그렇게, 실제 유럽영화는 1년에 한두 편도 제대로 안 보면서 그 예술성만큼은 늘 칭송하는 현상은 지금도 태연하게 이어지고 있다. 어쩌면, 적어도 한국에선, 영원히 바뀌지 않을 인식일 수도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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