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동안 정말 귀가 닳도록 많이 들어본 문구다. “가장 한국적인 것이 가장 세계적인 것이다”란 구호. 대략 1990년대 초반, 노태우정권 말엽부터 등장해 김영삼정권 당시 꽃(?)을 피우며 당대 사회문화의 갖가지 풍경들을 바꿔버렸다. 이 같은 개념과 연계돼 CF에 등장한 “우리 것이 좋은 것이여”란 대사가 일대 유행어가 되고, 곧 '신토불이(身土不二)’란 개념과 단어도 유행하기 시작했다.
대중문화 차원으로도 마찬가지다. 사회 전반적으로 “가장 한국적인 것이 가장 세계적인 것”이라 외쳐대니 자연스럽게 영향을 받았다. 더없이 '한국적인 것’에 집착하기 시작했다.
김영삼정권 출범 즉시 개봉한 임권택 감독의 1993년 작 판소리 영화 '서편제’가 역대 한국영화 흥행기록을 경신하는 쾌거를 거뒀다. 위 유행어를 그대로 제목으로 차용한 배일호의 노래 '신토불이’가 트로트 대히트곡으로 거듭나고, 같은 해 노랫말 대상까지 차지한다. 심지어 1020세대 현상적 인기를 누리던 서태지와 아이들까지 초미의 관심을 모은 2집 타이틀곡 '하여가’에서 국악기 태평소 소리를 메탈사운드와 결합해 화제를 모았다. 서태지와 아이들 2집 앨범은 무려 220여만 장 판매고를 올렸다.
정말로 “가장 한국적인 것이 가장 세계적인 것이다”란 구호에 걸 맞는 사회문화현상들이 곳곳에서 작렬했고, 거리엔 개량한복 패션도 늘어나기 시작했다. 대중문화도 그런 구호에 순응해 가장 한국적인 것으로 가장 세계적인 공감을 얻어내기 위해 애썼다.
그런데 정말 그런 방법론이 맞아 떨어졌을까.
한국대중문화는 세계 보편적 정서를 추구해 글로벌 성공에 이른 것
그로부터 40년 가까이 흐른 2020년 현재를 보자. 다행스럽게 그 사이 한국대중문화는 정말로 세계적인 것이 됐다. K-팝은 미국 빌보드차트 1위에 오르고, K-드라마는 1990년대 후반부터 한류(韓流)란 단어를 탄생시키며 곧 아시아 전역을 제패했다. 이젠 한국과 문화정서가 유사한 남미대륙 및 히스패닉 인구가 점차 늘어가는 미국에까지 전달돼 인기를 구가하고 있다. K-무비는 영화 '기생충’의 칸국제영화제 황금종려상과 아카데미 작품상 등 4개 부문 수상으로 그 평판이 대변된다. 정말 “우리 것이 좋은 것”이긴 한 시대가 된 건 맞다.
그런데 저 “가장 한국적인 것이 가장 세계적인 것”이란 구호가 상징하던 흐름과는 전혀 다르다. 이 구호는 근본적으로 민족주의적 입장에서 세워진 모토였다. 우리 '전통문화’의 소중함을 일깨우고, 결국 한국의 각종 문화상품들도 전통문화의 계승 및 연계 차원에서만 세계적으로 인정받을 수 있으리란 주장이었다.
그러나 현 상황은 그와는 거리가 상당히 멀다. 당장 미국 빌보드 핫200 앨범차트 연속 1위를 기록 중인 보이그룹 방탄소년단만 해도 그렇다. 이들이 하는 음악은 힙합과 R&B, 그리고 남미의 라틴뮤직 기반이 대부분이다. 여기서 한국 '전통’ 문화형식과 연계되는 부분은 사실상 찾아볼 수 없다.
비단 방탄소년단만의 상황도 아니고, 지금 세계로 뻗어나가는 K-팝 전반적 경향이 그렇다. 이른바 '월드뮤직’ 차원에서 세계정서 공통분모에 속하는 음악형식들, 댄스 팝, 힙합, R&B, 일렉트로니카, 라틴뮤직 등등의 혼합으로 이뤄진다. 그러니 K-팝 성공도 근본적으로 '월드뮤직’ 경향에 잘 적응해, 이에 아이돌 개념과 특유의 군무 등 형식을 접목시킨 결과지, 전통문화 계승 및 연계와는 아무런 관련도 없단 얘기다. 여기서 아이돌이란 상품개념 역시 근본적으론 1980년대 일본서 완성된 대중음악상품 개념을 그대로 옮겨온 형태다. 민족주의가 그토록 혐오하는 일본문화 일부를 받아들인 결과란 얘기다. 실제적으로 위 모토들의 정반대 위치에서 일궈낸 성공담이다.
K-드라마도 상황은 다르지 않다. 애초 남미식 텔레노벨라, 즉 극단적 감정충돌과 무리한 상황전개로 이뤄진 연속극 개념을 국내 실정에 적응시킨 형태로 출발했다. 그러다 1990년대 초반 '도쿄 러브스토리’ 등 일본 트렌디드라마 영향을 크게 받은 일련의 한국드라마들, 특히 MBC 1994년 작 드라마 '사랑을 그대 품 안에’를 중심으로 대만, 홍콩 등 중화권에서 인기몰이가 시작됐다. 거기서부터가 한류의 시작이다. 강력한 산아제한정책을 시행하던 중국서 일종의 동경 심리로 MBC '사랑이 뭐길래’, KBS2 '목욕탕집 남자들’ 등 대가족드라마에 열광했던 사례 정도를 제외하고 보면, 근본적으로 K-드라마 인기는 현대 트렌디드라마 인기와 같은 선상이라 볼 수 있다.
지금껏 전통문화 관련으로 글로벌 성공을 거둔 드라마는 사실상 MBC 2004년 작 드라마 '대장금’ 한 편뿐이다. '대장금’ 성공으로 이제 한국드라마도 “우리 것이 좋은 것이여”로 가야한단 주장도 등장했지만, 같은 해 홍콩에서 최악의 시청률을 기록한 드라마가 MBC '허준’이었단 점이 드러나면서 이 같은 주장도 사실상 묻혔다. '대장금’의 성공비결은 어디서나 유리한 콘셉트인 음식/요리 관련 소재인데다, 일본만화 식 요리배틀 콘셉트를 결합한 데 따른단 해석이 많다. 실제로 '대장금’ 작가 김영현 본인이 “일본 요리배틀 만화에서 영향 받았다”고 밝힌 바 있는 부분이다. 무작정 '우리 것’이 통한단 논리와는 다르다.
한편, K-무비만큼 전통적인 것과 관계없는 성공담도 또 없다. 처음부터 지금까지 저 전통노선에서 글로벌 성공을 거둔 경우가 거의 없다. 임권택 감독의 2002년 작 '취화선’이 칸국제영화제 감독상을 수상한 적은 있지만, 임권택 감독 커리어 자체에 대한 공로상 격 시상이란 해석이 많았다. 그리고 '취화선’은 현 시점 세계영화계에서 사실상 빠르게 잊힌 상태다.
'올드보이’ '살인의 추억’ '추격자’ '악마를 보았다’ 등 현대 범죄스릴러 영화들이 한국영화를 세계에 알리는 선도주자 역할을 했고, '시’ '박쥐’ '밤의 해변을 걷다’ 등 각종 현대 한국을 그린 드라마들이 그 뒤를 따랐다. 엄밀히 한국영화 글로벌 성공담은, 미국식 장르 개념에 역시 서구적인 중산층 윤리를 그 철학적 기반으로 삼고 있단 데 기인한다. 여기서 일본만화(올드보이) 등에서 차용한 아이디어로 색깔을 냈다.
이쯤에서 쉽게 짐작해볼 수 있는 대목이 있다. K-팝, K-드라마, K-무비 등 한국대중문화 글로벌 성공기 핵심은 “가장 한국적인 것이 가장 세계적인 것” 구호에서 실제적으로 정반대 방법론, 즉 미국, 유럽, 남미, 일본 등 세계 각지 경향들을 그러모은 뒤 거기서 글로벌 보편성을 추출해 팩키징하는 전략이 맞아떨어진 결과란 점이다. 어떤 의미에선 “가장 한국적인 것이 가장 세계적인 것”이라 믿지 않았기에 결국 “가장 세계적인 것”인 얻어낸 흐름이다.
“가장 한국적인 것이 가장 세계적인 것”은 대체 어디서 비롯된 주장일까
그럼 애당초 저 “가장 한국적인 것이 가장 세계적인 것”이란 허랑한 구호는 어쩌다 탄생된 것일까. 살펴보면 1990년대 초반 당시 상당히 복잡한 분위기가 존재했음을 알 수 있다.
일단 그 '원형’부터 보자. 위 구호는 여러 차원에서 대문호 괴테의 명언, “가장 민족적인 것이 가장 세계적인 것이다”가 변형된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괴테의 문장은 사실 “가장 한국적인 것이 가장 세계적인 것”의 뉘앙스와는 정반대라 볼 수 있다.
한국식 변형이 한국민족문화 우수성을 강조하는 민족주의적 자긍심 고취 구호였다면, 괴테 원전은 문화다양성에 대한 주장에 가깝다. 세계 각국 다양한 문화가 존재한단 점의 가치를 말하며, 그렇게 다양한 가치들이 곧 세계적 가치가 돼야한단 주장이다. 하나의 우월한 가치가 모든 것을 제패하는 광경이 아니라, 어떻게 보면 다양한 문화 가치들이 우글대는 카오스 현장이 곧 세계적 가치가 돼야 한다는 것. 한국문화가 우수하고, 그래서 비교우위가 존재한단 경쟁적 의미가 절대 아니다.
그런데 저 '다양성’에 대한 문장이 근거 없는 '국뽕’ 불쏘시개가 된 배경이 있다.
1990년대 초반 한국사회 분위기는 미묘했다. 한국경제는 개발도상국에서 선진국으로의 길을 걷고 있었고, 국민들도 대부분 그 사실에 자랑스러워했다. 그러면서 '지난 세월’ 동안의 스트레스가 분출됐다. 늘 한국인들 구태를 비판하며 어서 빨리 선진국 글로벌 스탠더드를 따라잡아야 한단 미디어 논조에 억눌려있었던 스트레스다. 그 자체론 틀린 얘기가 아니었지만, 이른바 민족적 자존심과 자존감에 상처를 입은 데 따른 스트레스가 1988년 서울 올림픽 기점으로 서서히 폭발하기 시작했다. “우린 그렇게 못난 민족이 아니었고, 그러니 우리 것도 사실은 대단한 것”이란 식으로 말이다.
한편, 당시 대학가 좌익운동권 방향성도 달라졌다. 소련을 중심으로 한 공산주의가 무너지고 냉전이 종식되면서 사실상 갈 길을 잃었던 좌익운동권은 곧 민족주의란 코드로 몰려들기 시작했다. 대학가에서 정통 마르크스주의를 신봉하던 민중민주(PD) 계열은 점차 힘을 잃고, 민족주의를 기반으로 한 민족해방(NL) 계열이 전체 패권을 쥐게 됐다. 그러다보니 대학가 중심 젊은 층 전반에서도 민족주의에 기반한 “우리 것이 좋은 것이여” “가장 한국적인 것이 가장 세계적인 것” 따위 슬로건이 횡행했다. 이른바 분위기를 탄 것이다.
거기다 1992년 대선을 통해 들어선 김영삼정권은 사실상 역대 가장 노골적인 민족주의 정권이었다. 일단 광화문 중앙청(구 조선총독부) 건물부터 해체시키고 들어갔고, 쇠말뚝 괴담 같은 반일괴담들에 지자체가 반응해 정책화시키는 흐름까지 나타났다. 이 같은 노선이 김영삼정권이 주창한 '세계화’ 노선과 맞물리면서 벌어진 참사(?)가 바로 “가장 한국적인 것이 가장 세계적인 것”이란 구호, 괴테 문장을 의도적으로 변질시킨 슬로건이라 볼 수 있다.
끝으로, 우르과이 라운드 문제도 있었다. 1986년 협상이 시작돼 1994년 합의문이 채택된 다자간 무역협정이다. 이에 가장 큰 변화를 겪을 측은 농산물 개방을 앞둔 농민 측이었고, 결국 1990년 이에 대응하기 위해 전국농민회총연맹(전농)이 투쟁단체로서 발족되기에 이른다. 그 과정에서 떠오른 슬로건이 또 “우리 것이 좋은 것이여” “신토불이”다. 우리에겐 우리 농산물이 몸에 맞으니 자급자족 중심 농업생산을 포기해선 안 된단 선동구호로 작동했다. 그 과정에서 “가장 한국적인 것이 가장 세계적인 것”이란 문화논리도 탄력을 받았다. 결국 선동이란 그 자체로 문화적 접근이라 볼 수 있기 때문이다.
흥미로운 점은, 사실 신토불이도 실제적으론 거짓 개념이란 사실이다. 민족주의적 근거를 대기 위해 동의보감의 '약식동원론’에서 유래된 문구라 설명은 됐는데, 아무리 찾아봐도 그에 합당하는 문구는 동의보감에 존재하질 않는다. 동의보감엔 그저 “사람의 살은 땅의 흙과 같다”는 대목 정도만 있을 뿐이다.
사연을 알고 보면 더 기가 차다. '신토불이’는 사실 일본 농업학자 하스미 다케요시가 쓴 '협동조합 지역사회로의 길’이 1989년 번역 출간되면서 처음 국내 소개된 개념이다. 본래 1910년대 이시즈카 사켄 등을 위시로 한 조직 '식양회’에서 처음 개념을 등장시켰다. 이를 당시 전농을 추진하던 민족해방(NL) 계열 운동권에서 뽑아낸 뒤, 그 출처를 '민족주의적’으로 위조해 내놓은 개념이 바로 '신토불이’란 얘기. 가장 신토불이적이지 않은 경로로 탄생된 민족주의 구호였던 셈이다. 그리고 그렇게 가장 한국적이지 않은 개념이 “가장 한국적인 것이 가장 세계적인 것”이란 문화적 구호까지 낳았다.
허랑한 민족주의 구호에서 벗어나 '개인의 발견’으로 전환돼가는 현재 흐름
그럼 지금은 어떨까. 지금도 저 “가장 한국적인 것이 가장 세계적인 것” 따위를 부르짖는 사람들이 있을까.
대략 2012~2013년 정도까지만 해도 분명 있었다. 당시 싸이의 '강남스타일’이 미국 빌보드차트 2위 등 세계적 유행을 타자, '강남스타일’ 역시 한국전통 마당놀이 문화와 자진모리 등 전통장단을 계승한 것이란 식 논리를 내놓는 학자들이 등장했다. K-팝 업계에서 들으면 기절초풍할 얘기지만, 어찌됐건 이것도 다 우리 전통문화가 워낙 우수하다보니 벌어진 일이란 막무가내 논리가 딱 이때까진 살아남아 있었다.
이후론 점차 사라졌다. 그런 민족주의 몰입을 조롱하는 '두유노’ 인터넷 밈 등이 유행하면서부터다. 2010년대 문화 흐름은 전반적으로 탈민족주의 경향이 강했다. 그러면서 “가장 한국적인 것이 가장 세계적인 것”도 또 다른 구호로 바뀌어가고 있다. 다음은 방송기자클럽 회보 2015년 2월호에 실린 신세대 판소리꾼 이자람 인터뷰 내용이다.
“가장 한국적인 게 가장 세계적이라는 말, 어떻게 생각하냐고요? 전 이렇게 말해요. “가장 나다운 것이 가장 세계적인 것이다. 한국적인 것은 우리 모두 잃어버렸다”라고. 한국적인 게 뭐냐고 사람들 붙잡고 물어보면 답이 다 다를 거예요. 가장 '나다운 것’이 가장 동시대적인 것이고, 가장 동시대적인 것은 그 사회를 담고 있는 '나’고, 그게 외국에서도 통하더라, 이게 제가 생각하는 세계적인 것이에요.”
다른 장르도 아니라 가장 신토불이에 속하는 판소리꾼 입에서 나온 얘기다. 그러고 보면 지난 3월 봉준호 감독이 '기생충’으로 미국 아카데미상 감독상을 수상하면서 던진 수상소감, 거장 마틴 스콜세지 감독 코멘트를 옮겼단 소감도 비슷한 맥락이다. “가장 개인적인 것이 가장 창의적인 것이다.” 새로운 세대 문화예술인들은 이제 허랑한 민족주의 구호에서 벗어나 서서히 '개인의 발견’으로 그 모토를 이동시켜 나가고 있단 방증이다.
물론 여전히 “가장 한국적인 것이 가장 세계적인 것” 개념은 이런저런 공적개념 행사 차원에서 존재하긴 한다. 지난해 11월 제7회 행사까지 마친 한국식문화세계화대축제가 한 예다. 대한민국한식포럼에서 주최하고 문화체육관광부, 농림축산식품부, 서울특별시 등에서 후원하는 행사다. “한식을 문화로, 세계로, 경제로”란 슬로건을 내걸었다.
과연 전통한식 중심으로 행사가 짜였지만, 실제 요식업자들 사이 반응을 시큰둥하다. 이미 세계인들이 열광하는 건 삼겹살, 양념치킨, 치즈닭갈비 등이란 걸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중 상당수는 우리가 한식이라 인식도 못할 정도지만, 어찌됐건 해외에선 그렇게들 받아들이는 것들이다. 결국 “가장 한국적인 것이 가장 세계적인 것”은 이제 공적개념 특유의 허랑한 행사구호로만 남아있단 얘기다. 생명력 자체는 민족주의 그 자체만큼이나 참 끈질기지만, 실제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과는 별 관계가 없다. 늘 그랬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다만 그렇지 않다고 우기던 시절이 일시적으로 존재했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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