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진국인 청나라를 배우자는 조선의 '국부론'
…북학파 지식인으로 기술혁신과 무역 강조했죠
청나라를 무찌르자?
잘 알려진 대로 박제가는 서자 출신 지식인이었다. 재주는 뛰어났지만 평생을 서자 신분으로 설움을 받으며 살았다고 한다. 사실 북학파에 속한 학자들은 유난히 서자 출신이 많았는데 박제가를 제외하고도 유득공이나 이덕무가 그랬다. 그래서인지 이들은 당대 지식인들이 감히 하지 못했던 파격적인 주장을 많이 했다.
북학이란 북쪽 나라의 학문, 즉 청나라를 배우자는 이야기다. 지금의 시점에서 보면 그 당시 선진국이었던 청나라를 배우자는 말이 뭐가 파격적이냐고 하겠지만 박제가가 살았던 조선 후기 사회에선 꼭 그렇지도 않았다. 정묘년과 병자년의 전란을 겪은 뒤 조선 지식인 사회에선 반청(反淸) 사상이 팽배해 있었기 때문이다.
북학파는 비록 오랑캐라고 할지라도 법과 제도가 우수하면 적극적으로 수용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북학의》에는 “중국을 배우자”는 표현이 스무 번쯤 반복해 나온다. 당시 조선 사대부들을 지배하던 관념이었던 북벌론에 맞서 북학론을 제시한 것이다. 청나라는 우리가 싸워야 할 대상이 아니라 배워야 할 대상이라는 것이다. 이념과 명분에 사로잡혀 나라를 그르칠 게 아니라 실사구시의 정신으로 새로운 시대정신을 찾아내자는 주장이었다.
파격적인 주장
박제가의 생각은 북학파 중에서도 단연 파격적이었다. 그는 동료 사대부들을 두고 ‘우물 안 개구리’ ‘나라의 좀벌레’라며 힐난했다. 관상감(천문대)을 관리하는 기관 수장을 해당 분야의 지식이 있는 서양인으로 하자는 주장도 했다. 지금으로 따지면 기상청장을 외국인으로 쓰자는 격이니 조선 사대부들이 얼마나 어안이 벙벙했을까 싶다.
중국 문명에 뒤처지지 않기 위해 중국어를 써야 한다는 주장도 그랬다. 200여 년 전에 박제가는 중국어 공용화론을 제안한 셈이다. 서자 출신으로 당시 기득권층과 다른 자유로운 사상을 품었던 박제가의 진면목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세계화는 구호로 가능한 게 아니다. 물리적, 거리적 장벽을 뛰어넘는 수송과 통신 기술의 발달만큼이나 언어적 장벽을 뛰어넘으려는 노력이 선행돼야 한다. 『북학의』에서 박제가는 건축에 벽돌을 사용하고 교통에 수레를 도입하는 등 구체적인 기술 혁신을 열거한 뒤 중국이 아닌 다른 나라와의 통상도 필요하다고 설파한다. 박제가의 꿈은 경제발전을 통해 조선을 문화와 예술을 제대로 향유하는 문명사회로 만드는 것이었다.
현대 사회에서 시민과 소비자는 본능적으로 그런 선택을 하고 있다. 자신을 가두려는 잘못된 시스템을 피해 더 나은 곳으로 이주하고, 자식들을 보낸다. 온라인으로 세계 석학의 강의도 듣는다. 어리석은 정치인들이 누군가를 보호한다며 국민의 선택권을 제한하는 규제를 만들 때도 사람들은 더 넓은 세계와 교류를 넓혀간다.
세계와 교류
젊은 사람들은 더 넓은 세상에 나가 도전하는 자세가 필요하다. 개인적으로 세계의 뉴스를 보고 세계 유수한 지식인들이 만든 정보를 실시간으로 얻으며, 정보를 주고받는 일은 열린 세계관을 유지하는 좋은 방법이다. 세계 최고의 지식이 만들어지는 현장에 가서 몸으로 체험적 지식을 익히며 글로벌 경쟁에서 뒤처지지 않아야 할 것이다.
국내에서 자신을 보호하는 제도 속에서 적당히 안주하는 삶을 살겠다고 꿈꾸는 사람이 있다면, 자신들이 누군가를 가두고 그들의 자유를 억압하면서 살아가려는 것은 아닌지 한 번 생각해보길 권하고 싶다. 자신의 이익을 위해 사람들을 가두려는 세력으로부터 자유를 지키고 자신과 사회를 보호하려면 세계와 교류하는 일에 좀 더 적극적이어야 할 것이다.
■ 기억해주세요
박제가의 생각은 북학파 중에서도 단연 파격적이었다. 그는 동료 사대부들을 두고 ‘우물 안 개구리’ ‘나라의 좀벌레’라며 힐난했다. 관상감(천문대)을 관리하는 기관의 수장을 해당 분야 지식이 있는 서양인으로 하자는 주장도 했다.
최승노 자유기업원 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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