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 장벽을 넘어서는 <블랙 팬서>와 <방탄소년단>

이문원 / 2018-09-05 / 조회: 9,002

잠시 미국 할리우드 상황을 살펴보자. 현재 미국영화계 최대 화제는 영화 <아시아의 갑부들은 당신과 다르다 Crazy Rich Asians>의 대대적 흥행소식이다. 싱가포르에서 호화 결혼식을 준비하는 중국의 세 명문가 사정에 관한 로맨틱 코미디다. 8월 15일 개봉 후 3주 연속 북미 주말흥행 1위를 지킨 뒤, 최종적으로 북미지역에서만 1억 5천만 달러 이상 수익이 예상되고 있다. 제작비 3천만 달러짜리 중급 규모 영화치곤 이례적 흥행성공인 셈이다.


그 자체로도 주목할 만한 일이 맞지만, <아시아의 갑부들은 당신과 다르다> 상황이 온 미디어를 들끓게 할 정도 초미의 관심을 끄는 이유는 따로 있다. 출연진 대부분이 아시아계로 구성된 영화이기 때문이다. 애초 출연진 대부분을 아시아계로 설정한 메이저 스튜디오 영화 자체가 1993년 작 <조이 럭 클럽> 이후로 할리우드에선 처음이다. 이렇듯 사반세기만의 모험이 대대적 흥행성과로 돌아오니 할리우드 전체가 들썩이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이 같은 '모험'과 '이변'은 올해 비단 <아시아의 갑부들은 당신과 다르다> 사례만이 아니다. 8월 17일 넷플릭스에서 공개된 영화 <내가 사랑했던 모든 남자들에게 To All the Boys I've Loved Before>가 또 있다. 아시아계 여고생을 주인공 삼은 청춘 로맨스 영화다. 공개 즉시 대대적 반향을 일으키며 넷플릭스 오리지널 히트작 대열에 올라섰다. 거기다 8월 31일에는 한국계 배우 존 초(한국이름 조요한)가 원 톱 주연을 맡은 스릴러 영화 <서치>가 북미 1200개 이상 스크린에서 개봉됐다. 명실 공히 메인 스트림 배급규모다.


이쯤 되면 그저 어쩌다 일어난 현상 정도가 아니다. 명확한 트렌드다. 지금 미국시장에선 '아시아계 콘텐츠'가 먹히고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 같은 트렌드는 어찌 보면 꽤나 당연한 수순이다. 인종비율 상으로 아시아계는 미국서 4.8%(2010 센서스 기준)에 불과하지만, 아시아계 미국인들은 늘 대중문화 소비 측면에서 눈에 띄게 왕성한 모습을 보여 왔기 때문이다. 영화 장르만 해도 그렇다. 닐슨 리서치에 따르면, 미국영화시장에서 아시아계 관객은 백인 관객들보다 75%가량 티켓을 더 많이 구입한다. 온라인 영화 다운로드 역시 백인층보다 83%가량 구매가 더 많다.


이처럼 애초 왕성한 소비열을 지닌 인종계층이 자신들 인종 중심 영화에 더 관심을 갖는 건 당연한 일이다. 관객분포조사기관 시네마스코어에 따르면 <아시아의 갑부들은 당신과 다르다> 첫 날 관객 중 38%가 아시아계였다. 미국영화의 평균적 아시아계 관객 비중은 6% 정도다. 결국 그동안 저평가돼왔던 미국 내 아시아계 티켓파워가 서서히 인정받고 그에 따른 모험적 시도들이 하나둘 보상을 받고 있는 시점이란 얘기다.


그런데 또 다른 측면도 존재한다. 사실 어찌 보면 훨씬 중요한 측면이다. 아무리 아시아계가 미국서 탄탄한 대중문화 소비층이라 해도 <아시아의 갑부들은 당신과 다르다>처럼 1억 5천만 달러 이상 흥행을 뒷받침해줄 정돈 못 된다. 결국 미국사회 주류인종인 백인층 역시 아시아계 중심 영화를 똑같이 소비해주고 있단 얘기가 된다. 실제로 위 영화 첫날 관객의 51%는 백인층이었다.


문화적 측면에서 '인종의 용광로'가 아니라 '인종의 샐러드'에 불과하다는 미국사회 분위기가 서서히 바뀌고 있는 걸까? 적어도 지표상으로만 보면 그렇다. 올 초 개봉한 마블 수피히어로 영화 <블랙 팬서>만 봐도 그렇다. 그간 <블랙 팬서>처럼 초대형 블록버스터 규모 영화에서 흑인을 주인공으로 삼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 수퍼히어로 영화는 더더욱 그렇다. 그럼에도 <블랙 팬서>는 개봉 즉시 선풍적 인기를 구가하며 북미시장에서만 무려 7억 달러가 넘는 흥행수익을 거둬들였다. 미국 내 12.6%에 불과한 흑인층만으론 당연히 이런 성적이 안 나온다. 결국 전체 63.7%를 차지하는 주류인종, 비()히스패닉계 백인층(유럽계 백인층)에서도 '흑인 수퍼히어로'란 낯선 콘셉트를 달갑게 받아들였단 얘기다.


확실히 미국사회 분위기는 달라지고 있다. 적어도 문화적 포용력과 융통성 차원에선 그렇다. 타()인종 문화 및 자신들 인종문화로 침투한 타()인종 경우도 점차 더 쉽게 받아들이고 있다. 그리고 그 원인으론 역시 인터넷의 등장이 꼽힌다. 여러 인종들이 필연적으로 맞부딪히는 대도시를 제외하고 보면, 미국사회는 사실상 각 인종들끼리 조닝(zoning)을 통해 딱히 마주칠 일 없는 생활권을 형성하며 살아왔다. 타() 인종문화를 접해보는 것조차 만만치 않았고 그만큼 이질감과 거리감도 심했다. 그러나 인터넷 등장 후 다양한 문화에 쉽게 접근할 수 있게 되면서 각 인종들 간 문화적 장벽도 그만큼 크게 낮아졌단 분석이다.


이렇게 놓고 보면 현 시점 한류의 첨병, 보이그룹 방탄소년단의 빌보드 연이은 앨범차트 1위 성과도 쉽게 이해가 간다. 인기도 인기지만, 현재 방탄소년단 미국 팬들은 방탄소년단이 굳이 영어가사 노래를 따로 만들어 불러야할 필요조차 없다고 주장한다. 가사내용은 구글 번역기를 통해 쉽게 이해할 수 있고, 무엇보다 아티스트가 모국어로 부른 노래야말로 진정 호소력이 있을 수밖에 없다는 걸 이해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자신들은 얼마든지 그런 해외문화를 받아들일 준비가 돼있다는 것이다.


이쯤 되면 분명 한류산업의 전반적 방향성도 다시 생각해볼 때가 됐다. 근래 한류는 고전했다. 캐시카우 시장 중국이 정책적으로 내건 한한령(限韓令) 탓이다. 같은 인종 베이스란 이유 하나만으로 막연히 더 쉽고 원활하리라 여기며 도전해온 중국시장이지만, 이젠 국가 간 정치외교적 갈등만으로 문화교류 자체를 막아버릴 수 있는 황당한 전체주의국가가 바로 중국이란 걸 모두가 알게 됐다. 그렇게 3년여가 흘렀다. 중국에 깊숙이 담가놨던 양발 중 적어도 한 발은 떼고 새롭게 걸쳐야 할 다른 캐시카우 시장이 필요한 시점이다.


의외로 미국이 그런 시장이 될 수 있으리란 예상이다. 그간 인종적 동질성이란 어림짐작 도그마에 빠져있느라 오히려 그 가능성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던 시장이다. 철학자 한나 아렌트의 지적처럼, "민족국가들은 본질적으로 미국이란 나라를 좀처럼 이해할 수 없는" 딜레마에 빠져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 미국은 지금 변화하고 있다. <아시아의 갑부들은 당신과 다르다> 성공이, 방탄소년단 쾌거가 이를 방증한다.


결국 모든 시장은, 심지어 감성적 소통이 절대적인 문화시장마저도, 인종적 동질성과 같은 허랑한 도그마보다 훨씬 중요한 바탕이 바로 이데올로기적 성격과 그에 기반한 시장구조 체질인 셈이다. 그리고 이제 한류는 그간 겹겹이 쌓여온 무의미한 도그마들을 벗어던질 때가 됐다. 그 시발점이 미국 진출의 원대한 목표라면, 얼핏 상당히 멀어 보이지만 생각보다 훨씬 가까운 결과가 나올 수도 있다. '멀지만 가까운 나라'의 본질이다.


이문원 / 문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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