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등을 갈망하는 우리들

임성민 / 2024-08-27 / 조회: 212

'평등’ 겉보기에는 참 좋은 말이다. 하지만 나는 요새 평등이라는 단어에 혐오감을 느끼고 있다. 평등이 이 사회를 지탱하고 꼭 필요한 가치라고는 생각한다. 그럼에도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평등의 의미를 오해하고 전가의 보도처럼 휘두르는 데서 혐오감을 느끼는 것이다.


“나는 평등을 향한 열정을 존중하지 않는다. 내 생각에 그것은 질투를 관념화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책에 나오는 홈즈 대법관의 말이다. 한국 사회의 평등에 대한 내 생각을 너무나 명료하게 말해주는 문장이다.


하이에크는 우리가 추구해야 할 평등은 법 앞의 평등이라 한다. 하지만 평등주의자들에게 그 의미는 사뭇 다르다. 그들은 지능, 신체 능력 등 선천적인 다양성은 어쩔 수 없이 인정하지만 사회 시스템에서 만들어진 차이들은 '평등’하게 만들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예시로 누군가는 부유한 가정에서 또 누군가는 그렇지 않은 데서 태어난다. 이들의 불평등을 해소하기 위해 사회의 강제를 통한 분배로 이 차이를 해소해야 함을 주장한다. 여기서 평등은 물질적 평등으로 바뀌어 버린다. 이 요구는 상대적으로 있는 자들에게 분배패턴을 부과하게 된다. 결국 사회는 개인에게 강제하게 되고 개인의 자유를 해쳐버린다. 평등주의자의 이러한 주장은 하이에크의 법 앞의 평등 다시 말해 '엄격한 평등주의적 요구로서의 자유’와는 결합 될 수 없다.


하이에크는 3장에서 복지국가를 경계했다. 복지국가란 소득, 일자리, 노후 등 개인의 광범위한 영역을 국가가 책임지는 것이다. 복지국가에서 국민은 결과적 평등을 바라고 경쟁을 지양하며 결국 하향평준화의 길로 간다. 이 과정에서 시장의 자생적 질서를 해쳐버린다.


안타깝게도 평등주의자들의 관념이 오늘날 대한민국에 나타나고 있다. 그들의 왜곡된 평등이 사회 풍조, 정치 방향, 문화, 제도 등에 암세포처럼 퍼져있다. 그 집약체가 바로 '기본사회’이다. 기본소득, 기본주택, 기본 대출 등 정부가 국민에게 '기본’이라는 것을 자의적으로 정의하여 자원을 분배한다. 이는 곧 국가가 개인을 정의하는 것이며 이를 위해 사적영역에 광범위하게 개입한다. “요람에서 무덤까지“. 한 개인을 국가가 책임지는 것이다. 이런 위험한 사회주의적 발상은 아이러니하게도 대한민국에서 인기가 있다.


이런 배경에는 위의 물질적 평등주의 다른 말로 실질적, 결과적 평등주의가 국민 정서에 깊게 깔려 있다. 이러한 평등주의는 나보다 잘난 사람을 끌어내려야 하는 질투심으로 나타난다. 이 질투심을 정치인들은 표를 위해 교묘하게 이용한다. 그들은 일반 대중에게 모두가 잘사는 사회, 모두가 평등한 사회라는 허상을 심는다. 그런 허상에 사로잡힌 대중은 기업, 재벌 등부터 법적 강제로 부를 분배해야 함을 주장한다. 대중의 이런 여론은 민주주의 정치와 합쳐져 '국민의 명령’이라는 이름으로 정치의 무기가 된다. 본질적으로 인기영합주의인 정치는 경제민주화라는 이름으로 기업의 돈을 징수하고 이를 정의의 이름으로 분배한다. 이 돈은 기본 소득, 각종 지원금, 지역화폐 등으로 무차별하게 지급된다.


보다시피 기본사회는 재원 마련을 위해 필연적으로 증세를 하며 정부는 모두에게 자원을 똑같이 분배해야 한다. 그 과정에서 국가는 상이한 개인을 임의로 정의하고, 통제해야 하기에 결국 정부의 규모를 늘리게 된다. 우린 이것을 불과 몇 년 전에 경험했다. 코로나19 방역을 이유로 국민의 일상을 제약하고 백신을 강제하였다. 더불어 '재난지원금’이라는 아무런 효과도 없는 푼돈을 뿌렸다. 이런 과정에서 정부 기관이 얼마나 비대해졌는지도 봤다. 정부가 주는 십만 원을 받기 위해 우리는 백만 원의 세금을 내야 한다는 것을 명심해야 한다. 가마우지 사냥을 들어봤을 것이다. 가마우지가 물고기를 잡아 오면 어부는 가마우지 입의 큰 물고기를 가져가고 작은 물고기를 던져준다. 가마우지는 작은 물고기를 받아먹으며 좋아하면서 다시 사냥을 나선다. 백만 원을 세금으로 내고 십만 원을 받았다고 좋아하는 모습과 똑같다. 모두가 평등한 기본사회는 우리의 삶을 책임져 주는 동시에 우리의 삶을 기꺼이 국가에 내놓는 것이다.


모두가 평등한 사회에서 우리는 그 평등에 만족할 수 있는가? “어떤 동물들은 다른 동물보다 더욱 평등하다“. 모두가 평등한 사회의 결말이다. 남보다 더 잘 살고자 하는 욕구는 인간의 자연스러운 본능이다. 모두가 잘사는 세상을 표방하며 개인의 욕망을 통제하려 했던 사회주의는 모두 패망했다. 아르헨티나의 페로니즘, 동유럽 사회주의 등이 이를 증명한다. 한국은 마치 가파른 구덩이에 갇힌 꽃게 떼를 연상케 한다. 한 마리가 구덩이를 나가려 하면 다른 꽃게들이 뒷발을 잡고 밑으로 떨어진다. 결국 단 한 마리도 나가지 못하게 되고 구덩이의 게들은 결국 서로를 잡아먹다 굶어 죽게 된다.


한국 사람들은 나의 기준을 자꾸만 남에게 둔다. 이런 의식은 개인에게 결과적 평등을 갈망시키고 이를 정치가 받아 기본사회라는 허상을 만들어 냈다. 이 허상은 우리를 서서히 중독시키고 있다. 결국 이를 막기 위해서는 개인단위의 인식 변화가 필요하다. 우리는 평등의 의미를 다시 짚어봐야 한다. 사람들은 저마다 다른 개성, 배경 등을 가지고 태어난다. 사회시스템 내에서도 각자 다른 성취를 이룬다. 국가는 이런 차이들을 평등하게 만들어서는 안된다. 다만 국가는 서로 다른 사람들이 공정하게 경쟁할 수 있도록 룰을 만들고 선택할 자유를 보장하고 불공정을 교정하기 위한 최소한의 개입만을 해야 한다. 그럴 때 기업은 발전했고, 개인은 자신의 삶을 의지대로 살며 선택에 대한 책임을 졌다. 결국 평등은 법 앞에서의 평등일 때 가장 참된 의미를 가진다. 우리가 평등의 참된 의미를 깨닫고 나의 기준으로 세상을 살아간다면 잘못된 길로 기울어져 가는 대한민국을 바꿀 수 있으리라 믿는다.


하이에크는 자유 헌정론에서 진정한 자유란 무엇인지 알려주며 복지국가에 대해서 예리한 통찰력을 우리에게 준다. 그때와 시대는 다를지언정 관통하는 공통점이 있다. 우리는 국가를 항상 주시해야 하며 동시에 우리의 생각도 항상 성찰해야 한다.


'eternal vigilance is the price of liberty’. 이 문장과 함께 글을 끝마치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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